[특별 연재-24]
종로구 지방자치 30년사
“종로 지방자치 권력의 변천”
이 병기(정치학 박사)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실시
- 종로 토착 자치세력의 등장과 확산 -
2002년 6월13일 전국에서 실시된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김대중 정부 임기 말 극심한 정부 불신으로 국민적 지지율이 크게 하락한 가운데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이 지방선거 불과 한 달을 앞두고 구속됐으며, 국민의 정부 ‘햇볕정책’이 보수주의자들의 거부감으로 국민적 반발 심리를 부추켰고 정부 여당은 이런저런 악재로 심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전국지방자치선거가 중앙정부 및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띄면서 중앙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역현상을 보였다.
그동안 중앙정치가 지방선거에 영향을 미치며 지역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을 감안하면 이때부터 지방자치에서의 풀뿌리 정치가 중앙정치를 심판하는 모습으로 발전하는 양상이 나타난 것이다.
선거 결과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되고 손학규 후보가 경기지사에 당선되는 등 한나라당 압승으로 이어졌다. 이는 지역에서의 선거도 기존의 토호세력 즉 과거 전통적 지역 주도세력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는 형국을 이뤘다. 이때부터 “지방선거가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대두됐다.(강경태. 2012).
1) 선거맥락 - 자치세력에 반격하는 토호세력
종로구 지역사회 지배구조는 이미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인해 기존 토호들의 기득권적 지배세력이 패퇴하고 신흥 자치세력들에 의해서 급격히 변모된 상태였다. 동네 유지들의 지역 헤게모니도 나이가 들고 신진인사들에게 밀려나는 추세였는데 이는 주민들의 풀뿌리 정치 참여가 늘면서 상대적으로 권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남권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패권이 호남권으로 바뀌면서 호남향우회를 정점으로 한 신진들이 대거 약진하는 형세를 보인 것이다. 더구나 김대중 정부의 중앙집권적 정치풍토에 영향을 받은 정치1번지 종로의 호남권 인사는 중앙정치권 정치인들과 직접 상관관계를 맺으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종로의 호남권 인사들은 그만큼 국민의 정부 및 여당 정치인들과 깊숙한 인연들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배경은 구청장 이하 시. 구의원들 모두를 종로 지역정치 실세로 만들었고 권세 또한 대단한 기세였다. 한마디로 종로는 구청과 구의회 그리고 각 동네별 주민자치위원회까지 그들이 장악하면서 마치 호남공화국을 연상케 했다. 실로 지난 4년간 종로는 과연 여기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도심지 동네가 맞는지를 의심케 했으며 과거 수백 년의 전통적 분위기는 그 자취마저 찾아 볼 수 없게 했다.
더구나 호남권과 연합한 충청권 인사들까지 가세하여 종로의 주도세력은 완전 뒤 바뀐 형태였다. 이를 단순히 지방자치의 지역 민주주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만 지역의 풀뿌리 정치 패턴의 다양화에서도 볼 수 있다. 그동안 지역 정치는 중앙집권적 정치풍토에 물들은 토호 세력 그들만의 전유물이었다가 이제는 지역정치에 보다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면서 배양된 새로운 풀뿌리 정치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마치 호남공화국을 연상시키며 주도세력이 변천된 것은 또 다른 지역 갈등과 모순을 낳으면서 비호남 출신 종로주민들의 와신상담 기회를 엿보게 하면서 절치부심,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의 종로자치 선거를 노렸다. 영남인들이 중심이 됐던 기존의 토호세력들은 다시금 조직 및 인물을 재정비하면서 단결심으로 똘똘 뭉치는 분위기를 보였다. 호남인과 거기에 가세한 충청권 인사들을 배제한 채 나머지 지방 사람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결집했고 호남정치화 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결의로 철저한 지역색 대결 양상을 벌였다.
반면 자기 세상을 만난 듯 기세 등등힌 호남인들은 급기야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고향을 떠난 타향에서 종로의 주도권을 잡고 일종에 우월감에 빠진 그들은 스스로 내부적 분열 조짐을 일으켰다. 이른바 지역의 권력을 놓고 자기들끼리 주도권 다툼을 하면서 반목과 대립의 이합집산을 한 것이다.
<종로구 민선 정흥진 재선 구청장의 항명?>
우선, 정흥진 종로 구청장은 두 번에 걸친 구청장 당선으로 종로를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판단, 이른바 항명을 일으켰다. 다가오는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정흥진 구청장은 그 당시 종로구 국민회의 지구당 위원장이던 이종찬 씨를 제치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설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이종찬 씨는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장을 맡아 약 2년간 근무하다가 국회의원 선거를 맞아 다시 종로에 컴백해서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정흥진 종로구청장은 같은 국민회의 당원으로서 이종찬 씨를 누르고 국회로 나갈려는 의도였다. 종로구청장의 종로 지방자치 권력으로 종로의 맹주였던 이종찬씨 자리를 넘보는 일종의 하극상을 보인 셈이다.
정흥진 씨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김대중 평민당 총재 시절 경호원을 지냈던 인물로서 소위 동교동 세력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동교동측에서 자신에게 종로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구청장직을 사퇴하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것이라는 강력한 움직임마저 보였다.
이러한 정흥진 씨의 계획 추진은 종로구 국민회의 세력들을 양분하는 잡음을 일으켰으며 당원들 간에 심한 대립양상으로 분열됐다. 그만큼 지방자치 종로 구청장의 권력은 대단했으며 구청장 7년간의 지지세력 결집은 지역의 오랜 맹주 자리마저 넘보는 위세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현직 구청장의 프리미엄과 호남인이라는 특징은 신흥 종로 자치세력들로부터 호응을 받기까지 했다.
이에 종로구 4선 국회의원이던 이종찬 씨는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이명박 당시 신한국당 후보에게 패한 뒤 와신상담하다가 국회의원 5선 고지를 달성한 다음에는 대권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흥진이라는 암초에 걸려 크게 당황을 했다. 이종찬 씨는 그러나 국가정보원과 중앙당 등 여러 권세를 힘입어 정흥진 씨를 눌러 앉히는 데에는 성공하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으나 정인봉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를 했다. 이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 시민단체에서 과거 전두환 군부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보위위원회’출신들의 낙선운동으로 큰 타격을 받은 측면도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정흥진 세력들의 비협조적 관망 태도에도 큰 요인이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말하자면 호남권이 중심이 된 정흥진 구청장 측의 자치세력은 이종찬씨 국회의원 선거에 비교적 냉담했다고 볼 수 있으며 민선 구청장이 닦아놓은 종로지역 자치세력들이 일체 움직이지 않고 소극적 태도를 취한 것이 국민회의 종로구 세력의 분열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2002년 종로 지방선거는 6월13일 열렸지만 그해 10월 종로구 국회의원 당선자 정인봉씨가 선거법위반혐의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함에 따라 보궐선거가 열릴 예정이어서 정흥진 종로구청장은 3선 출마를 포기하고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대비. 구청장직을 사퇴했으며 동시에 구청장 대타로 전직 종로구 부구청장 출신을 지원하여 국민회의 구청장 후보가 된 이성호 서울시 의원과 대립하는 상황을 연출시켰다.
이는 결국 국민회의 자치세력의 분열과 혼란을 일으킨 것인데, 이 여파로 서울시 의원과 종로구 의원선거 후보자마저 난립하는 현상을 일으켰다. 다시말해 국민회의측은 이종찬계와 정흥진계로 양분된 것이다. 종로 패권을 거머쥔 국민회의측 후보들이 후보자 내천을 놓고 두 계파가 심한 갈등을 벌였고 내천에서 낙오한 인사들이 정흥진 전 구청장 쪽으로 가세하여 국민회의 종로구 당원협의회 입장에서는 후보자 난립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일종의 신흥 자치세력 간 충돌로 적전분열의 난잡한 혼란이 생겨난 것이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