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서 속에서 고구려 도읍과 관련한 기록들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아 후세의 연구자들이 관련 연구에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런 혼란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수세기 전 조선시대 후기 ‘실학시대’에도 나타났다. ‘실학시대’의 고구려 도읍 관련 논쟁은 박지원, 최덕중, 김경선 등이 주장하는 ‘만주 중심설’과 안정복, 한진서, 정약용 등이 주장하는 ‘한반도 중심설’로 나뉘었다. 이 중 후자의 주장들은 일본학자들에 의해 이어졌고, 오늘날 고구려 도읍지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래는 고구려 도읍지에 대한 간략한 연구사이다.
고구려의 첫 도읍에 대한 기록들은 주로 일본학자들에 의해 비정되기 시작 했다.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이마니시 류(今西 龍), 시라토리 쿠라키치(百鳥 庫吉) 등의 일본학자에 의해 고구려 첫 도읍지는 졸본(卒本), 즉 오늘날 중국 요동성(遼寧省) 본계시(本系市) 환인현(桓仁縣)으로 확정되었다. 이들이 고구 려 도성을 연구하면서 기본 사료로 참고한 사서는 요사(遼史)와 위서(魏書) , 삼국사기(三國史記), 가탐(賈耽)의 도리기(道理記) 등이다. 또한 고고학 자료로는 1905년 집안현 지현(知縣) 오광국(吳光國)이 통구 서북쪽 90리에 위 치한 판석령(板石嶺)에서 수습한 비(碑) 조각을 증거로 내세웠다. 이 비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전승비’라고 고증되었고, 이 비를 근거로 동천왕이 평양 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도읍인 환도성을 집안(集安)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 다. 시라토리는 위와 자료들과 도리이 류조, 이마니시 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의 연구내용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도읍을 비정하였고, 고구려의 첫 도읍 지인 추모왕의 졸본을 오늘날의 환인으로, 두 번째 도읍지인 유리왕의 국내성을 오늘날 길림성 집안시로 비정하였다. 이와 같은 시라토리의 학설은 현재까지도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 견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라토리의 주장 이래로 고구려의 도읍지에 대한 견해는 거의 재검토되지 않았고 계속된 연구는 그의 주장을 공고히 해주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재검토는 이루어지지 않고, 일부 지역에 대해서만 의문을 갖는 것이 전부였다.
또한, 한국학계에서 고구려의 첫 도읍이 확정된 데에는 이병도의 연구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북한학계에서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는 손영종이 대표적이나 그의 주장도 일본학자들이 주장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고구려의 ‘부수도(副首都)’라는 개념을 적용하였다. 즉, A.D. 247년 이후 지금 북한의 평양을 고구려의 부수도로 삼았다가, 장수왕 대에 와서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중국에서는 위존성(魏存成)이 비교적 전문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위존성은 일본학자들의 견해를 탈피해 각종 사서와 중국 고고학계의 조사결과를 활용하고 있다. 그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토대로 천도과정을 추적했지만 결론은 과거 일본학자들이 연구한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위존성의 연구 이후 대다수 중국학자들의 견해 역시 위존성의 연구 틀 안에서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기존 연구들의 사서 인용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오늘날 중국 요녕성 요양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제기 하였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고구려 도읍 관련 연구사를 정리해 보았다. 일본인 학자 들과 그 이후의 학자들은 졸본을 환인으로, 국내성과 환도성을 집안으로, 평양 성을 오늘날 평양으로 귀결시켜 고구려의 도읍을 3곳으로 비정한 것이다. 평 양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지만, 오늘날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시라토리부터 이병도, 위존성을 거쳐 현재까지 내려오는 정설이다.
그러나 그간의 연구를 살펴 보면 몇 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평양에 천도하였다는 기록을 모두 오늘날 북한지역의 평양으로만 비정한다면 집안과 평양으로 반복해서 천도를 하는 것이다. 둘째, 평양 연구를 위한 새로운 기록들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 은 이를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에서 출판된 자료는 최근에 발 견된 자료는 물론, 1400여년 전에 확인된 것들도 있다. 최근에 발표된 자료로는 연남생의 묘지명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학자들과 중국학자들은 이를 활용하지 않았다. 해당 자료를 활용했다면 평양이 비정된 위치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셋째, 조선에서 명‧청나라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남겨 놓은 기록들을 활용하 지 않았다. 위의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각 나라의 고구려 평양성에 관련한 기록을 확인 해보면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평양의 위치와는 다른 결과들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한‧중‧일의 관련 기록들을 모두 소개하기에는 자료의 양이 방대 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중국문헌의 기록에 남아 있는 평양의 위치를 정리‧ 분석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