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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마음과 달리 늘 엄했죠”직장인치고 ‘겔포스’로 쓰린 속을 달래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젖꼭지 ‘누크(NUK)’를 모르는 아기 엄마는?또 ‘이 소리도 아닙니다…’라는 카피로 유명한 ‘용각산’은 어떤가.
이런 히트상품들로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보령그룹’을 이끄는 이는 김승호(71) 회장. 신혼집을 팔아 마련한 3평짜리 약국에서 출발해 지금은 보령제약과 보령메디앙스,보령산업 등 6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서울 원남동 사옥에서 만난 김 회장은 지난 1일 창업기념일을 기해 46년을 하루같이 매달려온 회사업무에서 한발짝 물러나 대부분의 권한을 큰 딸 김은선(45) 보령제약 부회장에게 물려주었노라 말했다.
보령은 대개의 기업과는 달리 딸들이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은선씨 외에도 막내딸 은정(34)씨가 보령메디앙스 상무를 맡고 있는 것. 일부에서는 딸만 넷을 둔 김 회장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애써 깎아내리지만 보령그룹의 여직원 비율이 40%에 달할 만큼 그에게는 진작부터 여성인력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게다가 은선씨가 IMF 때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노사 간의 의견조율을 성공적으로 해냈고,지난 2001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이후 보여준 강한 추진력은 그가 딸들을 아들 이상가는 재목으로 키웠냈음을 보여준다.
“아들이 없으면 사위까지 끌어대는 경우도 있던데,이제 딸들이 주역이 되어야 할 시대가 다가오고 있어요. 큰 딸은 내가 첫번째 공장을 연지동 집에 차렸을 때 매일 공장식구들과 부대끼며 자란 아이입니다. 보령에 들인 나의 땀과 애정을 그 애 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도 없지요.”
은선씨가 태어난 것이 김 회장이 서울 종로5가에 ‘보령약국’을 개업한 바로 다음 해. 이후 사업을 확장시키느라 그는 딸에게 많은 사랑을 쏟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당시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직원들로부터 신뢰받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딸에게 할 수 있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이라고 믿었단다.
하지만 사랑을 주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한 법. 애정 표현에 익숙하지 못한 그는 속마음과는 달리 자상한 면보다 항상 원리원칙대로 움직이는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만 보여주게 됐다고 한다.
“딸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항상 통금이 오후 9시였어요. 심지어 큰 딸은 결혼한 후에도 9시 통금은 지키라고 고집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좀 심했다 싶고,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김 회장의 아버지로서의 고집은 네 딸을 모두 같은 고등학교,같은 대학에 진학시켰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딸들의 모교는 모두 가톨릭 계열인 성심여고와 지금의 가톨릭대학교인 옛 성심여대. 김 회장은 딸들이 수녀들로부터 여성다운 정결함과 예를 배우고,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통제력을 기를 수 있기를 바랬다고 한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딸들도 대학문제 만큼은 의견을 굽히지 않아 몇 달 동안 논쟁을 거듭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딸들에게 ‘외유내강(外柔內剛)’을 체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설득하는 한편 학문의 습득은 수도자와 같이 깨끗한 마음자세를 배운 후에도 늦지 않다는 논리를 폈다고 한다.
“딸들이 그저 아버지가 엄하니까 제 뜻을 따랐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비의 뜻을 이해하고 믿어준 것이 고맙지요. 사회생활을 하는 두 딸이나,가정을 잘 꾸리고 있는 나머지 두 딸 모두 자기 영역에서 훌륭하게 살고 있어 흡족합니다.”
김 회장은 또 딸들을 모두 예지원에 보내 전통예절과 다도를 배우게 했다. 어찌보면 딸들에게 경영인보다 여성으로서의 덕목을 갖추기를 바랬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가 김은선 부회장에게 한 유일한 경영수업이 ‘정도경영을 실천하라’는 것이었다는 점을 보면,결국에는 무엇보다 사람다운 바른 품성을 기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집안에 변치않는 규율과 기준이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을 얘기했지요. 언니로서,동생으로서,학생으로서,딸로서 항상 사람답게 올바르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잊지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기업을 물려받을 큰 딸에게도 정글의 법칙을 가르치기보다 부정과 부실을 용납하지 말고 원칙에 충실한 경영을 하라는 의미로 ‘정도(正道)경영’을 강조했다. 정도경영은 또한 ‘세밀하다’는 뜻의 ‘정도(精道)경영’을 상징한다. 주위상황의 작은 변화도 놓치지 말고 미래를 준비하는 경영을 펼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김 회장은 집에서 은선씨에게 회사 일로 훈수를 두는 일도 없지만 회사에서는 철저히 딸이 아닌 부회장으로 대한다고 한다. 기왕 회사 일을 맡고 나선 이상 더 이상 자신의 딸로만 머물 수도 없고,머물러서도 안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 종종 딸의 사명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너는 내가 보령그룹으로 시집 보낸 출가외인”이라는 말로 독려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딸 아이가 마흔이 넘도록 따뜻한 말 한 마디 변변히 못한 것 같습디다. 이 인터뷰가 내 딸을 이만한 여장부로 키웠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아버지로서의 정이 전해지는 자리였으면 합니다.”
권혜숙기자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Detail.asp?newsClusterNo=01100201.2003101600000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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