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령칙하다 [명사] 기억이나 형상따위가 긴가민가하여 또렷하지 아니하다.
확실한것이 좋았을때가 있었다.
애매함은 혼란을 안겨주지만 확실함은 안정감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학교다닐때도 "국어"보다는 "수학"을 "영어"보다는 "과학"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세상에 확실한것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불확실한것은 여전히 불확실했고, 확실하다고 생각했던것들은 애매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내삶마저 아령칙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세상은 아령칙하기에 살수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봄,
거리 곳곳에 "선영아 사랑해" 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거리에 도배한듯 붙어있었다.
수많은 선영이들을 설레게 한 이 종이들은 한 인터넷 사이트의 광고였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그 사이트는 회원들을 "선영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선영"이는 회원들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였던 것이다.
"선영"이를 고유명사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 광고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 제목『사랑이라니, 선영아』는 분명 광고 "선영아 사랑해"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광고를 비틀어 소설의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책 서두에 있는 작가의 말이 재미있다.
KBS <6시 내고향>을 보고 있던중 문득 "사랑 따위는 하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단다.
엉뚱한 소리같았지만 어인 일인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사랑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사랑은 가족에서 나타나든, 성적관계에서 나타나든, 세상에서 나타나든 일종의 존중이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이라고 정의해볼 수도 있겠다. 누가 우리한테 사랑을 보여주면 우리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존재에 주목하고,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우리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고, 약점이 있어도 관대하게 받아주고, 요구가 있으면 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런식으로 관심을 가져주면 우리는 번창한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中
보통은 불안의 원인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 따위는 하지 않고 살수 있다면 불안의 원인이 제거되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래서인지 『사랑이라니, 선영아』에서 진우는 사랑을 "18세기 자본가들의 발명품"인 "공산품"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말은 최근에 나온것만 같다.
우리 할머니도 할머니의 아버지 어머니 말씀에 사진한장 들고 일본에서 건너와 할아버지와 결혼해서 자식 넷낳고 평생을 사셨다.
할머니에겐 "사랑해서 결혼"한것이 아니라 "결혼하고 살다"보니 "정(情)"이 들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그냥 정이라고 하면 너무 짧으니까 "연정"이라고 하자.
연정의 사전적 의미는 "이성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이다.
확실히 사랑은 아령칙하다.
"진눈깨비는 눈이 되고 있는 비라고도, 비가 되고 있는 눈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우산을 펼친 사람들에게는 그게 비였고 우산을 접은 사람들에게는 그게 눈이었는데, 그 비율은 거의 반반이었다."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손바닥만한 크기에 175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의 책이기에 금새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읽고 난 뒤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80년대 끝자락에 대학에 입학해서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김연수의 이야기는
90년대 끝자락에 대학에 입학해서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에게 묘한 공감을 안겨줬다.
이 책은 확실히 재미있다.
읽는 내내 킥킥거리며 웃을 수 있었다.
어느순간에서 부터인가 주인공간의 대화를 소리내 읽기 시작했는데, 소리내 읽으니 더 재미있었다.
'사랑'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를 읽고 싶은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첫댓글 오우~ 유령님 글 잘쓰시는데욤...!! 읽고싶은 생각이 마구 드네요~~~ 저의 독서리스트에 올려두겠습니당...!! 좋은추천에 감사.....~~ 사실 저도 유령님과 비슷했습니다...확실한걸 좋아해서 수학 좋아하고 과학 좋아하고...딱 떨어지는 것들을 좋아했었는데....살다보니 딱 떨어지는게 과연 맞는건가 하는 의구심은 수시로 들더이다..-.-
이 책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글을 읽으니까 얼른 사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제게는 또 어떤 울림을 줄 지 궁금하네요^^*
어머머!!!유령님의 글솜씨 장난 아닌데요...이 책 꼭 읽고 싶어졌어요~~
헛, 변변찮은 글 잘썼다 칭찬해 주시다니 고맙습니다 ^^
우아, 멋쪄욤~ 유령님의 글에 매료되겠는데요~!?^^
사랑, 나한텐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
저도 김연수 작가님 좋아하는데 유령님 글이 마음에 와닿아요. 사랑이라니 선영아 아직 안봤는데 봐야겠어요. 가을에 왠지 딱일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작가. 그의 소설이 좋은 이유를 100가지는 나열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나는 그의 팬. 다른 소설들도 더 멋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