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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와 빨간 사과
레베카 피펏 지음/김성웅 옮김
사랑플러스/2003년 4월/317쪽/10,000원
▣ 저 자 레베카 피펏
일리노이 주립대와 바르셀로나 대학, 리전트 칼리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국제적인 강연자이자 저술가로, 여러 학교와 목회자 훈련 세미나에서 영적 갱신, 전도, 성품 훈련 등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2004년 현재 IVF 전도 자문위원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전도』등이 있다.
▣ 역 자 김성웅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멘토링』『생테크』『내 마음에 쏙 드는 직업』『사람을 생각하는 기업』 등 경영관련 서적을 많이 옮겨낸 전문 번역가이며 현재는 낮은울타리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Short Summary
“껍데기 영성은 가라.”라는 부제에서 보듯 이 책은 한마디로 크리스천의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드러내는 책이다. 세상의 온갖 선한 것들을 모두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크리스천, 하지만 선한 것을 지향한다고 해서, 당신은 선한가? 좋은 말을 한다고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 이 책은 단호히 "아니다."라고 말한다. 말과 행위의 차이, 지성과 인격 사이, 이상과 현실의 간격에서 우리는 매번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인간, 즉 죄인임을 고백할 뿐이다.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며, 신이 될 수도 없다. 저자는 어떤 노력으로도, 행위로도 이룰 수 없는 '인간 구원'의 지점을 '십자가'로 귀결하며,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 차 례
Part 1. 빨간 사과 껍질을 벗다
1. 세상이 이 지경인 건 내 탓이다
2. ‘이만하면 됐어!’라는 거짓말
3.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거짓말
4. 헛된 것에 예배하다
5. 무엇이 잘못됐는지 누가 말해줄 것인가?
Part 2. 토마토 되기
6. 십자가
7. 부활
8.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9. 십자가의 삶
10. 부활의 삶
토마토와 빨간 사과
레베카 피펏 지음/김성웅 옮김
사랑플러스/2003년 4월/317쪽/10,000원
Part 1. 빨간 사과 껍질을 벗다
이 세상이 이 지경인 건 내 탓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행복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왜 그렇게 힘든 문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행복을 추구하며 찾아 나선 그 길이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큰 허전함과 외로움이 몰려온다. 우리의 갈증을 해결해 줄 더 깊은 무엇을 안타깝게 찾아다닌다. 무언가 잃어버린 느낌, 아니 우리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모른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바라는 이상과 실제의 삶, 지식과 행동, 지성과 인격 사이에 언제나 틈이 존재한다. 이 시대가 특별한 것은 그런 틈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틈을 인식조차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성장과 성숙에 이르면 말하는 바와 실행하는 바의 틈을 인정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사정이 다르다. 틈을 인정하는 것은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영웅시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면, 우리는 충격을 받고 배신감을 느낀다. 그들 역시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니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이 가진 역설은, 선과 악, 관용과 자기 중심성, 정직과 사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설은 우리가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그러면서도 중요하게 만든다. 우리 인간에게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만한 놀라운 면이 있다. 사랑할 수 있고, 아름다움과 진실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다. 한 정신과 의사는, “인간의 문제는 모두가 죄나 악과 개인적이며 지속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데, 정작 그 갈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가 인간 본성에 관해 어이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당황스럽다. 역사상 가장 피 흘리기 좋아하는 한 세기를 살아왔으면서도, 인간은 자신들이 기본적으로 선하지만 가끔씩 악한 행동을 저지른다는 식의 자기 위안을 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문제가 쉽게 바뀌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쉽게 망각하는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가진단 능력 상실의 치매 증상으로 고생하고 있다.
G. K. 체스터톤은 ‘우주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런던 타임즈」에 연속 기고 요청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우주의 문제는 바로 나다. 내 탓이다.”
이만하면 됐어! 라는 거짓말
우리는 삶의 껍질 밑을 들춰보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다 마침내 무엇인가가 우리의 소망을 앗아가 버리면 그제서야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묻기 시작한다. 우리는 행복, 소망, 사랑을 찾아 헤매나 이런 소박한 바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듯하다. 혼신을 다해 추구하지만 찾을 수 없도록 우리를 붙잡아 매는 것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알베르 카뮈는 그의 소설 『전락』의 주인공 클레망스를 통해서 이것을 고민했다. 클레망스는 처음에는 외적인 것들로 만족하던 사람이었지만, 이내 그의 삶에 무엇인가가 빠져 있고, 무엇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의 불안한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내면적 순례에 진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앞으로 인간의 곤경에 관한 깊은 질문을 던지려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대학 1학년 때 이 책을 읽고 그 후로 내 인생이 바뀌었다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나의 인간성을 깊이 있고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게 해주었으니까.
클레망스는 존경받는 파리의 변호사다. 그는 상류층을 주고객으로 삼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그는 치밀하면서도 관대하며 정의롭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다. 여성 편력이 있지만 악의는 없다. “남자의 허리 아래를 믿지 말라.”는 신념에 동조할 뿐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그는 전형적인 현대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변한다. 그는 한 젊은 여자가 센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도 자신이 구출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순간, 그는 자신의 진실한 자아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의 자기 벗기기 작업은 자신의 사소한 행동에까지 이어진다. 누가 자기 말을 가로막았을 때 나는 짜증,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화, 사귀는 여자에게 충실치 못한 마음까지 들여다본다. 자신을 탐색하면 할수록 그는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에 빠진다. 인간 본성에 숨어 있는 거짓을 서서히 인식하게 된 그는 마침내 고백한다. “나는 순수하지 않았다. 점잖은 척 우쭐거렸고, 겸손한 척 지배했으며, 미덕을 가장하고 군림했다.”
모든 인간이 자기로부터 도망쳐 숨어 산다. 이것이 카뮈가 인간 본성에 관해 얻은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였다. 자신의 내면 상태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은 감정인 질투, 증오, 분노, 경쟁의식, 무력감 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이 자신의 바람직한 이미지를 위협하기 때문에 이 감정들을 필사적으로 억제해 보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 주변에서 지내기란 무척 힘들다.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감정을 숨겨도 그것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억제하면 할수록 여러 변장한 모습으로 불쑥 불쑥 나타난다. 억제의 마지막은 은폐된 형태의 행동, 즉 우울, 격노, 불안, 집착과 강박, 혹은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자기 억제는 다른 어떤 경우보다도 복잡하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와 같은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이 동의하듯이, 종교는 그 자체로서 억제의 최고봉이다. 마르크스에게 종교는 ‘아편’이었고, 프로이드에게는 ‘환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비판은 성경 옆에 놓이면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우리의 마음을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카뮈가 두 번째로 깨달은 것은, 우리가 억제하며 살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마치 흠이 없는 듯 가장하며 산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생각은 자신의 결백이다. 여기에 관해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우리의 결백을 주장한다.” 그렇다. 우리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달려가고 누구에게라도 책임을 전가시킬 수 있다. 게다가 현대 문화는 ‘알리바이 산업’을 최첨단으로 올려놓았다. 우리는 가끔 움찔하기도 하지만, 우리 본성은 착하다는 가정 아래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이야.’하는 거짓말이 행복과 사랑을 찾아 나서는 길을 얼마나 가로막는가. 이 거짓말은 관계를 방해한다. 그것이 이성 간이든, 가족 간이든, 우리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시치미 떼는 한, 혹은 내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는 한, 깊은 인격적 관계 혹은 진정한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허물을 인정해도 관계가 어려워질 수 있긴 하나, 책임을 회피하고 허물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친밀하고 사랑하는 관계란 영원히 불가능해진다. 어떤 면에서는 고통스러운 진실이 다른 한 면에서는 우리를 해방시키는 진실임을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라는 거짓말
토마스 하디는 말했다.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과 자유에 이르려면 먼저 죄악을 응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해답이다. 먼저 죄악을 응시해야 한다.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인정할 때 진정한 해결책을 찾아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클레망스의 흥미로운 내면 여행은 자기 이해에 이르는 세 가지 단계를 보여준다. 처음 단계에서 그는 자신의 껍질 때문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실패한 사람들, 약점 있는 사람들을 내심 경멸하며 니체의 ‘초인’에 전적으로 공감했을 수도 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자신에 대한 깊은 진실을 직시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된다. 단순히 의지만으로 자신의 본성 자체를 변화시키기는 실로 역부족이었다. 세 번째 단계로 클레망스의 자각은 좀더 깊은 인간 본성의 심층에 가 닿는다. 무시해 보려고 애썼지만 그에게는 근원적인 불안이 붙어 다녔다. 우쭐거리며 잘나가던 시절에도 희미한 ‘연약의 그림자’가 자기를 따라다녔다.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쫓기듯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클레망스의 여로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그가 쉴 새 없이 부, 직업적인 성취 그리고 성적 정복을 추구한 이면을 바라보게 된다. 클레망스는 안전하지 못하다는 희미한 자의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안정감을 느꼈다면, 왜 실제보다 자신을 크게 보이고 싶었겠는가. 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느꼈겠는가. 왜 항상 자신이 더 크고 더 나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겠는가. 특히 가장 주된 욕망으로 나타나는 권력과 명예욕도 한꺼풀 벗기고 들어가면 우리의 불안과 밀접하게 붙어 있다. 하지만 불안을 엄폐하려는 이러한 전략은 도리어 몽상과 현실 왜곡의 거미줄로 얽혀, 마침내는 더 심한 불안으로 끝나고 만다. 환상일 뿐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기막힌 것은, 마음속으로 거짓말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하는 정력, 에너지이다.
이 문제의 핵심에서 작용하는 가장 심각한 거짓말은, 우리가 사람에 불과하면서도 하나님처럼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가엾게도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 무한하고 영존하는 듯 자신을 꾸민다. 인간의 비극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닌 그 무엇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데서 비롯된다. 수천 년 전 에스겔 선지자는 이것을 꼬집듯 말했다. “네가 마음속으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댄다마는,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주의 운전석에 앉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 모른다.
오늘날처럼 ‘신(神) 콤플렉스’가 활개를 친 적은 없다. 한 친구가 뉴에이지 세미나에 다녀왔다면서 흥분해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안에는 결점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 나는 선한 일을 할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내가 선하니까. 신은 모든 것 안에 내재하거든. 내가 신이고 신이 나인 셈이지. 나는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어떤 부정적인 생각도 내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내기만 하면 되지. 이제는 더 이상 ‘그건 틀렸어요!’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그건 틀린 게 아니라 나랑 안 맞는 것이거든.” 친구의 말을 듣고 내가 말했다. “너희 애들 지금 십대지? 아이들을 키우는 데도 그 생각이 적용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새벽녘에야 몽롱한 얼굴로 들어와서 한마디하려 하면, ‘엄마, 그만 하세요. 그건 나랑 안 맞아요.’하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이 사람의 ‘새로운’ 철학은 신과 피조물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오래된 범신론에 지나지 않았다. 뉴에이지라는 옷을 입힌 것은 산뜻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별 수 없이 과거의 환영이 어른거릴 뿐이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환상은 동일하다. 신처럼 되고 싶은 욕망, 이것이 미국에 뉴에이지 선풍이 일어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뉴에이지, 이것이 미국인들의 꿈의 신조이다. “틀렸다고 교육받아 온 모든 것들이 사실은 맞다.”, “너는 실패할 수 없다. 네가 신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행하라, 움켜쥐라, 거기에 불을 붙여라, 그걸 위해 살아라.”, “네가 하기 나름이다.”, “다른 사람 걱정은 네 몫이 아니다. 그건 그들의 운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개선을 위장한 자기 함몰이다.
카뮈의 클레망스는 현실을 냉혹하게 직시했다. 자신이 신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부푼 가슴으로 살기에는 너무 흠이 많았고 제한된 존재였으며 불안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원하는 것이 있다. 자신이 이 망망한 우주에서 아무 의미 없는 존재라는 느낌, 그 왜소함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 실수를 잊고 싶었다. 죄의식을 해결하고 멀리 묻어버리고자 했다. 그는 난생 처음 자기 자신이 못마땅했다.
누군가는 “그러면 자신을 바꾸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불평일랑 그만두고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이게 말하자면 미국식이다. 미국인들은 일련의 방법론 적용하기, 문제를 명확히 파악해 더 나은 결과 도출하기에 익숙하다. 이들은 클레망스에게 다가가서 말할 것이다. “여보세요. 기분이 울적한 듯하군요. 내가 자기 개선을 위한 10가지 지침을 가르쳐 드리죠. 아주 쉬운 공식이니까 따라하기만 하면 곧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클레망스는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말할 것이다. “자기 개선에 관한 책이요?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 갑판에 있는 의자들을 똑바로 놓는다고 뭐 나아질 게 있나요?” 도무지 기가 꺾일 줄 모르는 미국인은 지지 않고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당신의 문제가 뭔지나 압니까? 당신은 우선 콜레스테롤을 낮춰야 해요. 조깅부터 시작하세요. 식습관을 바꾸고요. 그러면 이런 비참하고 우울한 생각이 떠나갈 겁니다.” 클레망스가 대답한다. “친구여, 당신의 처방은 습관을 바꿀 뿐임을 모르시는군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마음을 바꾸는 방법이랍니다.”
헛된 것에 예배하다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 때문에 언제까지나 신인 척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대체물, 곧 다른 신을 직접 만들어낸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렇게 우리는 한평생 불가능한 일(신인 척 하는 일)과 부적절한 일(신이 아닌데 신이라 믿고 의지하는 일)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신처럼 의지하는 고수입,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좋은 배우자는 애초부터 우리가 위기에 닥쳤을 때 올라설 수 있는 든든한 기초가 아니다. 액세서리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놀랄만한 일은, 이런 안전책들이 무너지고 우리 인생이 산산조각날 때조차, ‘그럼 내 인생을 올려놓아도 될 만큼 확고한 기초는 무엇인가?’라고 멈춰 서서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그것 봐, 역시 신은 없어.’라든지 아니면 ‘더 이상 나빠지진 않겠지.’하고 비껴간다.
클레망스는 인간의 본성과 열망이 그 이상의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우리보다 큰 무엇인가를 향해 고상한 자기 포기를 하라고 아우성친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사랑, 의미 그리고 안정을 얻는 길임을 아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예배하려는 본성이 있다. 그리고 이 헌신을 받아주기에 합당한 인격 혹은 대상을 찾을 때까지는 뭔가가 결여된 존재로 남게 된다.
카뮈 외에도 이 점을 인정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피터 쉐퍼가 남긴 명 연극 〈에쿠스〉 역시 예배라는 주제를 파헤치고 있다. 말을 신이라고 믿는 소년이 자기의 치료를 맡은 정신과 의사 마르텡 다이사트와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줄거리인데, 여기서 다이사트를 당혹케 한 것은 소년의 착란 증세가 아니라, 의사인 자신의 삶에도 말 숭배는 아닐지라도 소년의 말 숭배와 같은 형태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클레망스에 의하면 사람이 공허함을 피하기 위해 먼저 찾는 두 장소가 있다. 하나는 로맨스고 또 하나는 그것이 실패했을 경우 찾는 성적 만족이다. 신을 믿지 않는 현대인은 주로 여기서 출발한다. 클레망스는 사랑을 갈구하는 데서 나타난 그의 예배 본능을 발견했다. 그는 사랑에 눈멀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쳐 사랑에 빠지면 그런 희열이 오기는 했다. 하나 됨과 탈아(脫我)라는 신비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만남이 아무리 짜릿했다 할지라도, 그가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는 것 때문에 사랑은 곧 무색해진다. 로맨스가 몰락하자 클레망스는 성애에 눈을 돌림으로써 내면의 공허를 메우기 위한 몸부림을 계속한다. 그러나 로맨스나 섹스를 통한 클레망스의 행복 추구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것들은 문제를 더 자각하게 할 뿐이요, 혼자라는 의식을 깊게 할 뿐이었다.
클레망스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다음 발걸음을 취한다. 심리학적인 자기 검증에 도움을 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본질에 관해 약간의 빛을 던져줄 뿐 그의 양심의 굴레를 벗겨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심리학 덕택에 ‘거짓된 죄책감’을 구별해낼 수 있게 되었지만, 합당한 죄책감일 경우 심리학은 우리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이것은 자기 스승 프로이드처럼 종교적인 신앙을 꺼렸던 그의 제자 어니스트 베커가 심리학의 광야에서 외친 소리와 같다. “죄책감은 유아적인 환상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의식이 있는 성인의 현실이다. 어떤 신이 힘을 빌려준다면 몰라도 죄책감을 이길 힘은 어디에도 없다.”
클레망스는 그 다음으로 취할 수 있는 전략, 즉 자기 개혁을 택한다. 이를 악물고 노력한다는 식의 접근법으로 선회한 그는 심지어 눈 깜짝할 사이에 금욕과 절제를 시도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육체를 정복하려는 절제된 노력은 외적인 습관만 개선할 뿐임을 알게 된다. 문제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데에 있었다. 그것은 우리 됨됨이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어떻게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치료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식적인 동기를 버릴 수 있을까? 이기심을 버리기 위해서 어떤 공식을 따라야 하는가? 그저 열심히 노력하면 될까? 클레망스는 그 어떤 노력도 이타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게 해주진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훈련을 받고 치료를 받는다 해도, 자기 중심성과 고집스러운 자만을 고치지 못한다.
클레망스는 자가 치료의 불가능함을 직시한다. 만약 변화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밖으로부터, “저 너머에서” 와야 한다. 베커는 다시 말한다. “세계에서 행해지는 모든 분석은 한 개인에게 그 자신이 누구이며, 그가 왜 존재하는지 발견하게 해줄 수 없다. 왜 죽어야 하는지, 어떻게 자기 생애를 승리로 장식할 수 있는지도 발견하게 해주지 못한다. 심리학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양 가정할 때, 불행의 원인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듯 꾸밀 때, 심리학은 인간이 빠져나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을 만드는 사기극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로 기울어진다. 전 역사를 통해서 인간은 변화와 행복의 으뜸 되는 원천으로 무엇보다도 종교를 손꼽아왔다. 아마도 종교가 클레망스의, 그리고 우리의 탐색에 답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서둘지 말라! 종교란 가장 교묘한 형태의 자기 억제일 수 있으므로, 동일한 주의가 필요하다.
전형적인 현대인이라 할 수 있는 클레망스는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에게 자신을 내맡길 경우 그의 인간성이 파괴되지나 않을까, 또 자신의 정체성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두려워한다. 음주, 마약 중독처럼, 자신을 어떤 것에 내맡긴다는 것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려 노예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내던지는데도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모순 아닌가? 우리의 중심, 정체성을 더 높은 힘에 인계하고도 인간성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을 것인가?
신에게 귀의한 후에 그 전보다 생기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유가 있다. 자유라는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도 쉽게 종교에 기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건강하지 않은 신앙’의 최악의 형태가 된다. 신이 우리의 자유를 저당잡는 대신에, 마치 자동항법 장치로 날아가는 유체처럼 전 생애를 통해 완벽한 약진을 허락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자신의 책임을 고스란히 접어버린다. 이런 행태는 너무나 흔하다. 회심은 주체적으로 살기에는 너무 악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일반적일 정도니까.
클레망스도 종교를 고려하나 더 뒤틀릴 것을 우려해 종교를 거부한다. 죄책의 사면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고백임을 알았기에 하긴 했지만 사실 그의 고백은 우리 인간 모두의 죄책을 폭로하면서 그 자신의 죄책은 교묘하게 돌려버리는 도구였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클레망스를 가리켜 “뉘우침으로 재판장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거만 때문이었다.
이로써 카뮈는 인간이 곤경 속에 빠져 있는 최후의 전장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우리는 바로 거기서 우리의 궁극적인 곤경을 대면한다. 해결책이 우리보다 더 높은 근원에서 나와야 함을 마침내 인정하게 되는 순간에도 우리 안에는 순복을 거부하는 맹렬한 자존심이 꿈틀거리며 남아 있다. 클레망스는 결국 행복을 찾는 것에 실패한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의 자존심은 꺾이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글쎄, 내가 불행한 사람일 수도 있지. 하지만 최소한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어. 똑바로 눈뜨고 내 죄를 바라봐야 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은혜를 받아들일 만큼 약해지는 일은 없을걸.”
무엇이 잘못됐는지 누가 말해줄 것인가?
왜 위기에 닥친 인간이 본능적으로 행하는 첫 번째 행동이 기도일까? 아기의 탄생처럼 생애에서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나 고난이 닥친 최악의 순간에는 왜 영적인 실체에 맞닥뜨린 느낌이 들까? 도대체 왜일까? 삶과 죽음, 신비와 경외 혹은 공포와 상실 앞에 나오는 이 반응들은 다 무엇인가? 이미 삶에서 신과 영적 영역을 제외해 버렸으면서도 마음속에서 여전히 들려오는 소리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한다.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지금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진단하기 위해 외부로 눈을 돌려야 할 때이다. 나는 인간에 대한 성경의 진단에 눈길을 돌려보려고 한다. 본래 나는 동양 종교에 심취했었지만, 결국은 성경이 인간 본성에 대한 유일한 진술이라는 것을 깨닫고 성경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성경은 인간의 양면성의 신비를 풀어주고 있었다.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불가지론자였던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이 고대 문서가 어쩌면 그렇게 오늘 우리의 문제에 잘 맞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서양 문명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문학 작품으로 분류된다. 인간에 대한 성경의 진단을 꺼릴 이유가 없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지,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어쩌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창조와 타락, 이 두 이야기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필수적인 코스이다. 파스칼이 말했듯이, “이 교리, 즉 ‘원죄’만큼 야비하게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신비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 의하면, 인간은 선한 신에 의해 그 신의 형상대로 창조됐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게 지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알고 신뢰하는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와 성취에 이르는 길은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삼을 때가 아니라 모든 삶의 중심이신 하나님과 조화롭게 살 때 오게 돼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간은 반역의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피조물이라는 자신들의 조건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하나님 자리에 자기를 둠으로써 그들 자신의 본질에 모순을 일으켰다. 성경은 이 문제를 죄라고 부르며, 그것을 우리의 인성의 중심에 놓는다.
죄란 본질적으로 정교한 자기 주장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길 거부하는 정교한 거부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 자아를 삶의 중심에 놓았다. 진실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심리적인 방어망을 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잘라 말한다. 우리 존재 자체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문제를 이리로 돌리면, 창조주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도덕의 문제요, 우리의 범죄이다.
지금 우리는 뒤죽박죽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고난, 슬픔, 질병, 전쟁 그리고 죽음이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악은 비정상이다.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었을 당시 계획에 없었다. 죄가 무대에 등장하자 죄의 비정상성이 쏘는 독침처럼 죽음을 가져다 준 것이다. 세상과 만물은 무서우리만치 잘못되었다. 인간의 반역은 세상의 구조를 뒤틀어 바꾸어 버렸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에서 쫓겨나 저만치 서서 사람들이 자연과 나라를,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모습을 수백, 수천 년 동안 지켜보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전 지구가 전쟁 상황에 돌입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사용하도록 받은 지성과 상상력을 서로를 파괴하는 도구들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다. 당신의 이름으로 십자군이라는 것이 일어나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죽이고 있다. 인간들이 다른 인간의 아이들을 가스실로 밀어 넣고 아기들을 임상 실험 대상으로 삼는 홀로코스트를 보고 있다. 똑똑하고 예민해야 할 젊은이들이 마약에 빠져 해롱거리고 있다. 지구는 점점 파괴되고 있다. 그런데 이 지경에 이른 세상은 무릎 꿇고 울며 용서를 구하고 있는가? 그 반대다. 우리는 이 모든 게 하나님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한 남자의 머리에서 나온 단 하나의 사상 때문에 무참히 처형됐듯이, 악은 한 번 선택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저절로 굴러가게 마련이다. 생명과 마찬가지로 악 역시 활력이라는 실체 속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카뮈는 악의 전염성을 잘 파악했다. 『페스트』에서 그는 악을 박테리아, 즉 살아 있어 새끼를 치는 질병, 항상 번식하려는 질병으로 묘사했다. 죄가 둔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나 죄는 현실의 구조를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을 만큼 세다. 죄는 우리를 묶어버리고, 판단을 마비시키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분리시킨다고 성경은 말한다.
죄가 목표하는 것은 우리의 파멸이다. 그런데 그렇게 치명적인 죄를 탐지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 성경의 대답은 간단하다. 죄는 우리를 눈멀게 하고 기만한다. 많은 사상가들이 자기 기만으로 기울어지는 이러한 인간의 편향성을 인식한 바 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중심에서 몰아낸 반역의 결과로 죄의 노예가 됐을 뿐더러, 그런 상태를 인식하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대학살에 참여한 나치 의사들이 둘러댄 “무고한 죄책” 아닌가? 우리는 종종 말한다. “어쩔 수 없는 삶의 무게가 나를 눌러댔고, 나 역시 그 삶의 희생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다른 누군가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경우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심각한 기만이라 하더라도, 사실 어느 정도는 진실을 알고 있음을 말해준다.
죄는 악을 선으로,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킨다. 죄는 우리에게 “죄를 지어도 아무 해도 없을 것이다. 아니, 모르고 있던 유익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이 과정이 때로 에이즈 바이러스가 우리 몸 안에 침투할 때와 똑같다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는 처음에는 건강한 세포로 위장하기 때문에 우리 몸은 이 파괴자를 친구로 속을 정도다. 하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놈은 즉시 건강한 세포를 감염시키고 모든 세포의 기계적 기능을 장악해 바이러스 공장으로 만든 후 건강한 세포들을 그리로 보내 감염 바이러스의 복제물로 만들어 버린다.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금방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지만 아주 조금씩 죽음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재촉되다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이 과정이 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과 죄’ 이야기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오싹 끼친다.
죄에 관한 한 우리는 영적인 질병에 걸렸다고 할 수 있다. 메이요 클리닉의 처방처럼 “일단 체중을 5킬로그램 정도 줄이시고 매일 조깅을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한번 믿어 보세요.”하는 식으로 간단히 말할 수 없다. C. S. 루이스가 말한 대로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계발 프로그램이 아니다.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야 할 반역 수괴들이다. 우리의 불순종이 전 지구를 감염시켰다.”
회의론자라면 한결 부드럽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죠? 이 상황을 고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말해 줘요. 그러면 그대로 할 테니까.” 그러나 성경의 반응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클레망스도 이 점을 깨달았다. 자신의 이기주의는 중단하기엔 너무도 깊이 참호를 파고 기어들어가 있었다. 그는 자기 집착을 떨쳐 버릴 수 없음을 알았다. 우리도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뒤틀린 자아에 다가갈 수도, 그걸 곧게 펼 수도 없다.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 본래 지어진 의도대로 복구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위해 우리 밖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중독 증상을 치료하는 첫 걸음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중독 증세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외부로부터 도움이 와야 함을 안다. 그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이다. 다른 누구도 그들을 위해서 선택해 주지 않는다. 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놓여 있는 상황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이 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이 우리에겐 없다. 우리 밖으로부터 오는 도움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이다. 그러나 이 해결책을 구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이제 현대 문화와 단호하게 이별을 선언할 때이다. 현대 문화는 자신을 의심하지 말고 긍정적인 생각만을 하라고 일러 준다. 하지만 나는 정반대로 말하겠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의심에 주목하라. 투덜거리는 불만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어 보라. 건강한 자아상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건강에 이르는 가장 탄탄한 길은 ‘병약함’이라는 현실의 길목을 통해야 한다는 게 역설이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바라보려면, ‘자아’의 껍질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역설에는 아주 특별한 근거가 있다. 그것은 모든 역설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십자가다. 2부에서는 십자가를 향해 갈 것이다.
Part 2. 토마토 되기
십자가
하나님은 죄악을 심판할 수밖에 없는 그분의 정의와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분의 사랑이라는 이 패러독스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문학 작품에서도 이 긴장은 흔히 나타나지만 이에 대한 해결책은 인간에게는 없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자베르 경관과 장발장은 정의와 자비, 둘 사이의 융화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더없이 좋은 예이다. 실제 우리의 삶에서도 정의와 자비의 충돌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어떤 사람의 형을 언도하는 법정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 재판은 『레 미제라블』을 방불케 했다. 법을 위반한 사람은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랑의 법도 있었다. 미미하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판사가 형을 언도하는 순간, 중년의 한 남자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피고의 아버지였던 것 같다. 판사도 순간 멈칫 했다. 나는 그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가 대신 어떤 값이라도 치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바로 이랬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대신 아프셨다. 그분은 우리 자리에 대신 섰고, 판결은 그에게 내려졌다. 우리 죄와 교만에 의한 최종적인 희생자는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희생을 자원했다. 그분이 대신 그 자리에 서 주신 것은 가장 숭고한 사랑이며, 그래서 우리 구원의 핵심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이해하게 된다. 인생이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을 자신의 심장 안에서 극복하신 분, 그분은 죄에 대한 판결을 조금도 완화하지 않았다. 심판이 자기 아들 위에 떨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게 바로 ‘대속’이라는 말의 의미다.
이 대속은 반드시 죄가 없는 온전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이 죄에서 자유로워야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쓸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 자리에 서신 이가 온전한 하나님이며 또한 온전한 사람인 예수라고 말한다. 예수는 우리가 경험한 삶의 경험, 우리의 역경, 우리의 슬픔을 나누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흠이 없었다. 어쩌면 죄가 들어오기 전 우리가 어떤 존재로 지어졌는지를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흠이 없는 그가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뒤집어썼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했지만, 우리에게 임해야 할 심판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우리를 향한 그의 깊은 사랑을 확증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정의와 자비, 이 풀릴 수 없어 보이던 딜레마의 해법이 보인다. 자베르 경관과 주교, 이 두 쪽 모두에게 유효한 해답이 단박에 주어진다. 성경 시편의 시인만큼 이 이야기를 아름답게 노래한 사람은 없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 우리 자리에 대신 서신 그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 그대로 우리를 되살리신 희생을 본다.
인간이 고안한 모든 종교의 핵심은 도덕주의와 율법주의다. “좀더 노력해야 해.”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우리의 자존심과 자기 통제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우리를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치며, 우리는 이런 종교에 높은 점수를 준다. 그러나 주교는 장발장에게 종교적 의무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통제를 포기하고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내맡기라는 요구를 한다. 그리고 장발장은 구원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손길에 반응함으로써, 악이 아니라 선을 위해 사는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매우 위험하다. 그것은 자기 방어라는 높은 벽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은혜의 파괴력은 은혜 안에 들어있는 사랑의 깊이에서 찾을 수 있다. 은혜에는 사랑의 얼굴이 나타난다. 오직 사랑의 얼굴만이 떠오른다. 그분은 우리에게 은촛대들까지도 주려 한다. 장발장이 아무리 낮은 곳으로 내려가도, 하나님의 은혜는 더 막강하다.
위고는 주저하지 않고 결론에 이른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는 없다. 자베르와 함께 ‘고집스런’ 길로 갈 수 있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가는 거야!” 그의 자존심은 은혜나 용서를 싫어한다. 그러나 이 길은 끝내 자살로 막을 내렸다. 반면 우리는 장발장과 함께 ‘자발성’이라는 삶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 나는 죄인이야. 그렇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들이겠어. 이 은혜를 얻을 자격은 없지만, 은혜라는 걸 받아본 적은 없지만 받아들이겠어. 그리고 그가 기뻐하는 일을 할 거야.” 이 길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누구도 이 선택을 우리 대신 해주지 않는다. 장발장은 생명을 선택했다.
부활
예수가 이 지구에 가져온 수많은 변화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예수가 탄생한 순간을 기점으로 연대를 ‘B.C.’와 ‘A.D.’로 나눈다. 그의 삶으로부터 문학과 미술 그리고 음악이 싹터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솟구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 예수가 이 땅에 존재하고 부활한 사실에 기인한 변화들보다 더 높을지 의심스럽다. 예수를 따르든 그렇지 않든, 그의 오심은 여기저기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런데 역사에 이렇듯 숨막힐 만한 영향을 끼친 인물치고, 예수는 부활 후 이상하리만큼 단순하고 밋밋하게 첫 출현을 한다.
부활한 주님은 이 영광스럽고 초자연적인 시대의 첫 아침에 밤새 고기를 잡고 지쳐있던 베드로를 위해 갈릴리 해변에서 아침을 차렸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무서워 문을 걸어 잠그고 어두컴컴한 방에 모여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갑자기 그들 가운데 나타나 말한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기를.” 그는 제자들에게 상처를 보여주고, 해야 할 일을 위임하며, 그가 보냄을 받았듯이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가도록 능력을 부여했다. 이 행동들은 서로 연결돼 있고, 그 각각은 부활의 의미를 더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면서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낫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우리는 망가진 세상에 살고 있고 우리 모두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며,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부모들 역시 상처 많은 배우자를 만났거나 상처를 주는 부모들 손에 자랐을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억제든 허세든 상처를 숨기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래도 남는 것이 상처다. 상처의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놓지 않는, 일종의 방향감각 상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하나님과의 연결고리에서 끊어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의 상처를 회복시키기 위한 예수의 희생을 받으셨다는 증표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예수 오시기 700년 전쯤 기록한 이사야서에는 고난당하는 예수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어떻게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죄인을 용서하며, 고통으로 신음하는 자들을 낫게 할 수 있는지, 이것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신비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여주신 상처는, 우리 삶에도 아픔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킨다. 악과 혼돈이 득세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은 한 줄기 소망의 빛도 볼 수 없는 그런 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상처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은 때에도 우리를 향해 인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권면한다. 그는 우리를 도울 것이다. 그가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로 들어오실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십자가는 고통을 바라보는 시야를 열어 준다. 고통에 겨우면 겨울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임을 안다. 우리를 넉넉히 붙드시는 사랑의 하나님, 고통을 견뎌낼 힘을 주시고 그로 인해 전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 가실 그분이 계신다. 또한 십자가는 난세를 대비하게 한다. 부활은 하나님이 악보다 더 크심을 증명한다. 그래서 암흑기에도 확신과 소망을 준다. 이제 우리는 전에 없었던 것을 부여받았다.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성령이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하나님 안에서 하루하루 성장하도록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신다.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진리를 깨닫는 순간을 향해 순례를 해 왔다. 최종 목적지에 이른 지금, 고백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또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 회개란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요, 또한 그것을 풀기 위해 할 일이 전혀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도움을 받기 위해 마음을 열고 고백하는 그곳이다.
성경은 회개에 대해 “제 정신이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이 말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풀려고 했던 광기를 넌지시 비꼰다. 그러나 회개는 억제를 역전시킨다. 이 대목이 가장 기쁜 부분이다. 우리는 더 이상 진실로부터 숨지 않아도 된다. 진실을 피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진실이 우리를 풀어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억제는 그 교묘하게 위장된 모습으로 보아, 지독한 죄의 다른 쪽 얼굴이다.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하기 전의 우리는 가장 좋은 면을 부각하고 치부는 가렸다. 그러나 회개할 때, 일대 역전이 일어난다. 우리는 하나님께 최악을 드러냈다. 따라서 타인이 나의 치부를 보게 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용서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제 우리는 ‘가장 좋은 면’을 가린다. 하나님만을 향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할 뿐,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것을 할 이유가 더 이상 없다. 이것이 비밀스럽게 선행을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
회개는,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에게는 생명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하지만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죄와 자아는 우리 삶에서 그렇게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회개는 우리를 먼저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간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를 그곳으로 되돌려 놓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승승장구, 복된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희열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대면해야 할 죄가 있는 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뵈올 그날까지는 죄와 부딪힘으로써만 이 희열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죄에 대해 점점 더 민감해진다. 이 민감성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가까워지고 있다는 지표이다. 물론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첫 번째 규칙은 그것이 생각이든, 말이나 행동이든 간에 곧바로,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심장의 감찰자’라고 말한다. 그분 앞에 감추어진 것은 없다. 우리는 이미 그분이 아시는 것을 그저 인정하면 된다.
회개의 두 번째 규칙은 저질러 놓은 짓에 대해 진정으로 슬퍼하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존하심에 훨씬 못 미치는 거짓된 것들에 우리를 내어주고 하나님을 내쫓아버림으로써 불순종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바로 우리의 이런 선택과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생명을 내놓았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묵상의 진정한 가치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에 이르게 하고, 생각하게 하며 떨게 한다. 너무 완악해서 떨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분명 떨어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 당신의 돌처럼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해달라고 간구하라.
회개의 세 번째 규칙은 먼저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에 심긴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우선으로 죄를 고백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다음 우리가 죄를 저지른 그 사람에게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용서를 받아야 하고 또한 용서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으로부터 고백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중재를 기다려야 한다.
회개의 네 번째 규칙은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감추지 않고 고백함으로써 우리 죄에서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 생각, 습관 혹은 행동 등 잘못된 것이 무엇이든 간에, 회개는 언제나 깊은, 전면적인 그리고 지속되는 변화를 이끄는데, 그것은 전적인 방향 전환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를 실제 기적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먼저 그분은 우리 죄의 기록을 깨끗하게 지워버리심으로 우리를 용서한다. 그러나 용서는 시작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다. 그분의 영인 성령을 우리 안에 두고 살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재생시킨다. 너무나 혁명적이기 때문에, 예수도 “다시 태어난다.”라는 난해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제 새로운 창조물이 된 우리 안에는 옛 본성뿐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임한 하나님의 본성도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우리 각 사람은 다양한 이유,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하나님을 찾았다. 회심하게 된 스토리는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극적인가 하면, 조용한 회심기도 있다. 어떤 사람은 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안정된 시기에 만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든 회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하나님이 도움을 요청하는 인간의 외침에 응답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초청할 때,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신다.
클레망스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 그의 정체성이 사라질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30년 이상 복음을 믿은 나는 분명히 증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한도를 넘어서 그분은 우리가 좀 더 우리답도록 놓아두신다. 클레망스는 자유를 잃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모험을 무릅썼고, 언제나 넘치게 주시는 자비에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다.
십자가의 삶
우리 자신을 직면하고 상황을 파악하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십자가다. 그러나 십자가의 교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우리가 더 나아가면 갈수록 더 커지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겸손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보여 주는 영원한 거울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 때에야 비로소 온갖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담담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만심이다.
다음으로, 십자가는 우리에게 감사의 삶을 가르친다. 크리스천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맙습니다.’의 삶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면 늘 감사가 나온다. 십자가는 단 한 번이 아니라 거듭거듭 거듭해서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어떻게 이런 측량 못할, 관대한 사랑을 되갚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다. 감사로 가득 찬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진리와 우리 삶이 갈등을 빚을 때는, 즉 자아가 하나님의 뜻과 반목할 때는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시기심, 비방, 악의, 질투, 분노, 이기심, 부정과 우상숭배와 같은 죄에 대해 “No.”라고 해야 한다. 이기적인 마음이 앞서려 할 때, 사랑으로 무장하고 자아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 십자가의 삶의 방식은 십자가를 진 그분에게서 잘 나타난다. “나의 아버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 26:39).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추호의 타협도 없이 말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
이런 자아 부인은 ‘억제’의 한 형태가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둘은 같지 않다. 자아 부인은, 우리의 욕구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아가 하나님과 충돌을 일으킬 때 하게 되는 자아 부인은 우리의 인간성을 구출하고 보호한다. 우리는 거짓과 기만 그리고 허물 같은, 우리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들에 대해 “No.”라고 선언한다. 자아가 죄를 지으려고 할 때는 자아를 부인함으로써만 자기 기만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음을 결국에는 똑바로 알게 된다. 하나님의 뜻과 자아가 모순을 일으킬 때, 그 자아는 거짓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이시다. 허물을 깨닫게 하실 때조차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를 들추시는 것은 우리를 용서하여 자유 속에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일 뿐이다.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작업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그 고통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난관과 시련을 사용하기도 하신다. 야고보 사도는 시련을 친구처럼 환영하고, 인격을 다듬어 줄 선생으로 맞으라고 말한다.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힘들여 맞춘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고대인들은 삶의 목적이 인격과 미덕을 갖추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렌즈는 크게 달라졌다. 우리는 목적 없는 진보나 방향성 없는 추진력을 말한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은 어떡해서든 피하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고통의 목적과 고통 중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를 그분처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면 고통은 그 결과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우리가 죄를 정복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자원은 무엇인가? 첫째, 십자가에 드러난 능력이다. 십자가가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악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시켰다. 두 번째 교훈은, 악을 과대평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기에 그와 하나가 됐다. 십자가는 우리가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출을 위해 대가가 지불됐음을 드러낸다. 십자가의 중심에는 이 우주에서 가장 막강한 에너지가 있다. 그것은 죄의 지배를 종식하고, 우리 위에 군림한 죄의 억압을 풀고, 죄의 압제에서 해방시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받아들임으로써, 생애 처음으로 죄짓지 않겠다고 진심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의 몫은 우리의 의지를 그분에게 붙들어 매는 것이다. 자기 중심성은 습관이다. 다른 어떤 중독보다도 끊기 힘들다. 죄를 피하기 위한,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첫 걸음은 아주 작은 부분까지 습관을 바꾸는 것이다. 습관은 훈련된 ‘제2의 천성’이다. 새로운 본성은 새로운 습관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심성을 바꿀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그 순간부터,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영원한 제자도를 요구받는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출 20:3). 그렇다면 우상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절대적인 헌신을 받는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 또는 하나님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안전을 확보해 주는 것이라 믿는 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좋은 것은 가장 좋은 것의 최대의 적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좋은 것으로 떠받드는 우상들의 밑바닥은 거짓과 기만의 허구들로서, 여기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우리 대부분은 권력과 사람들의 인정, 안락, 통제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우상을 주조한다. 그러나 권력 우상에는 “승승장구하고 권좌에 오르지 않으면 삶에 의미가 없을 것이다.”라는 거짓이 따라다니므로 상실의 두려움이 있다. 인정받기 우상이 퍼뜨리는 거짓말은 “누군가가 우리를 인정하는 한에서만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하는 말이며, 상응하는 두려움은 거절이다. 안락과 안전의 우상이 즐겨 하는 거짓말은, 안전하고 고통 없는 삶이 아니면 결코 안식이란 없다는 것이다. 이 우상이 주는 두려움은 고통이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통제 우상의 거짓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삶에 만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이 우상은 실패를 두려워한다. 이러한 우상들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죄를 가지 쳐버리기는 쉬워도, 뿌리는 그 밑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뿌리를 다시 북돋아주기만 하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교묘한 형태로 위장할 것이 틀림없다. 십자가가 없이는 그 위장을 벗겨낼 수 없다.
무죄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오랜 욕심 또한 폭로돼야 할 우상 중 하나이다.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에게 잘못이 없는 척하는 자세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억제하려는 경향, 그리고 언제나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려는 성향이 강하지만, 십자가는 우리의 가면을 찢는다. 아무리 순결한 양 웃어도, 이미지 컨트롤에 아무리 신경써도 시간 낭비일 뿐이다.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와 맞선다. 십자가는 그 어떤 거짓도 견딜 수 없는 실제 역사의 중심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가 ‘척’하지 않고 열린 마음과 정직한 정신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해준다.
더럽고 녹슨 못들과 흐르는 피, 십자가 밑은 또한 모든 인생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다. 사물을 보되 진실하게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죽였다!”라고 비난하는 악행을 정당화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집단 교리는 집단적인 악에 불과하다. 가장 소중한 상징인 십자가를 의식적으로 들먹이고 내세움으로써 그 안에 숨어있는 악을 교묘히 위장하려는 의도다.
십자가는 우리가 모든 부류의 사람과 더불어 살도록 높은 수준에서 풀어내 준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신앙의 지녔는지의 여부는 상관없다. 물론 우리의 신앙을 양보하는 게 우정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과 똑같아지라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해 우리의 다른 정체를 폭로하라고 부름받았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다르게 보이든 간에 따뜻하게 포옹할 수 있도록 해방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똑같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도 십자가로 향하신 분이다. 성경의 말씀을 들어보라. “주께서는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
부활의 삶
어거스틴은 위대한 고전 『신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두 종류의 시민권을 가진 인생, 즉 사람의 도시와 하나님의 도시 시민으로 묘사했다. 인간 도시의 유혹은 하나님 도시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게 막는다. 지상의 도시는 가시적이고 유형적이며 우리의 오감을 자극한다. 또한 언제나 매력적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도시는 숨겨진 듯 불확실하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시는 실제이고 본질적이며 영원하다. 반면 인간의 도시는 손안의 모래처럼 스러져가고 헛되다.
무엇보다 부활은 우리가 영적 존재임을 말해 준다.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오직 하나님과 긴밀함을 유지하며 살 때 발견되고 성취된다. 우리는 부활을 사는 법을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 앞에 열린 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것, 즉 그분의 능력, 성품, 도우심과 은사들을 어떻게 받을까 고민해야 한다.
부활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분은 무에서 존재를 이끌어 내신다. 성경은 그분을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즐겨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지금 여기에 움직이듯이 현존하신다는 뜻이다. 또한 그분은 특성을 지닌 인격이시다. 그래서 사랑하고 진노하며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분을 무시하고 미워하며, 말로 다투고 거부하며, 알아갈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분이 살아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히 4:12).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 은혜로 말미암은 복을 누리게 하는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펴시는 능력이다. 그리스도는 죽고 만 것이 아니다. 그는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일으킬 때 사용하신 바로 그 능력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제공하시며 우리도 그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게 하신다. 영생이란, 시간 안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삶을 말한다. 부활을 사는 것은 옛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옮기는 에너지로 말미암아 사는 삶이다.
하나님을 한순간에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황홀경과 신비한 경험이 아니라 공부, 탐구, 묵상 그리고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미친 듯 바쁜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지켜야 한다. 21세기의 벽두를 사는 우리에게 이 일은 쉽지 않다.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바쁘게 뛰어다니고, 한 가지 일을 잘하기보다는 서너 가지 일을 다 하라고 재촉 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하루 중 조용한 시간을 내서 성경 읽기와 기도에 할애해야 한다. 바쁘거나 쫓기지 않고 사고하고 고요히 경청하고 묵상할 수 있도록 속도를 늦춰야 한다.
우리는 삶을 더 소중하게, 용기와 기쁨을 가지고 살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부활의 소망으로 살기 때문이다. 삶이 아무리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요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마침내 승리의 개가를 부를 날을 맞는다. 그때 모든 싸움은 끝나고, 믿음의 행적이 모두에게 드러나며, 소망이 성취될뿐더러, 우리의 전존재가 사랑하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날을 맞는다. 지극한 기쁨, 갈급한 소원,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것들이 모두 우리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약속과 성취 사이의 간격이 우리의 믿음에 여전히 긴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은 이 세상을 사는 우리를 위해 준비된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다. 그렇다. 소망에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