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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통일교제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와 통일부의 검토보고서 전문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 2 검토 보고서...
국사편찬위원회 검토 보고서
Ⅰ. 검토 배경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2002년도 3월에 편찬한 도서로 제목에서 표방한 것처럼 현 국정 교과서의 대안 교과서로 간행하였다. 물론 이 책은 5명의 필자에 의해 집필되었지만 집필 과정에서는 10여 명의 현장 교사와 연구자들에게 검토를 받았고, 여러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역사교사모임 교사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특히, 일부의 교사들은 이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 대신 가르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책의 구성은 1권과 2권으로 나누어, 1권은 전근대까지의 역사를 민족의 형성과 민족문화를 중심으로 구성하였고, 2권은 근현대사를 근대민족국가 성립과 발전 과정을 다루었다.
이 책은 필자인 양정현 교사(구일고)의 말대로 『「전국역사교사모임」의 대안교과서 개발작업은 국정 국사교과서가 안고 있는 한계들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국정 국사교과서는 재미없고, 외울 것 많고, 학생들에게 의미 부여되지 않는 내용들을 나열하고 있는, 한국사 개설서 요약판에 가까운 체제이다. 7차교육과정 국정 국사교과서가 컬러 인쇄에 읽기 자료와 탐구 과정 등을 편성하여 이전에 비해서는 변화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변화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한계를 안고 있는 국정 국사교과서의 대안적 형태의 교과서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 현장 교사들의 요구였다』라고 하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은 국정 국사교과서가 안고 있는 문제점, 즉 획일성, 무미건조함 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작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 양정현 교사는 이 책의 서술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고 한다.
①통일 후에도 사용될 수 있는 교과서-민족적 시각 ②국제적 시각을 갖출 수 있는 교과서-세계사적 시각 ③역사 발전을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보편적 역사 발전적 시각 ④민중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민중 주체적 시각 ⑤우리 민족 문화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문화상대주의적 시각 ⑥학생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역사를 이해, 해석할 수 있는 교과서-인간 중심적 시각
이러한 서술관점에서 편찬된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는 일선 학교에서 많은 호응을 받아 많은 부수가 팔렸다고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이 책이 교과서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법적으로 이 책이 교과서로 사용되느냐 그렇지 않는가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할 필요 없다. 또한 이 책 국사 교과서의 보조 내지 참고자료로 활용되느냐 아니냐에 대한 논의도 필요 없다. 이것은 교육인적자원부나 교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단지 여기서는 이 책이 교육현장에서 가르칠 수 있는 교과서로서의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검토만 하고자 한다.
검정교과서의 경우 교육부에서 이것을 심사할 때 많은 기준이 따른다. 이를테면 교과서로서 갖춰야할 기본적인 시각에 대한 검증을 한다. 여기서 제일 우선되는 것은
①우리나라 헌법 정신과의 일치하느냐, ②대한민국의 국가체제를 부정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이 있는가, ③특정 국가, 종교, 단체, 계층 등에 대해 부당한 선전, 우대하거나 왜곡 비방한 내용이 있는가, ④교육기본법, 교육과정과의 일치하는가, ⑤내용의 보편 타당성-학문상의 오류나 정설화 되지 않은 저작자의 개인적 편견이 포함되어 있는가-곧 학계에서 수렴된 보편 타당한 학설을 기록하고 있는가-가 평가의 주된 내용이다. 여기서 이 모든 것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책이 교과서로서 가르칠 수 있는가에 대한 학문적 검토만 할 뿐이다.
이 책의 분석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우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의 오류이다. 사실의 오류가 많으면 교과서로서의 가치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거짓 잘못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는 없지 않은가. 둘째, 사관의 문제이다. 학생들이 역사가가 아닌 이상 사관은 공정하여야 한다. 어느 편중된 사관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끝으로 문장 서술에 있어 교과서로서의 자질 문제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학생들의 언어사용이 매우 저속하다고 한다. 교과서는 역사적 지식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올바른 단어와 언어를 사용하도록 지도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교과서로서의 생명을 갖는 것이다.
끝으로 2년여에 걸쳐 나온 이 책을 2주일 안에 검토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책의 성격이 다른 것과 달랐고, 이에 따른 사실의 확인이 우선되었기에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이 분석, 검토가 이 책의 장점을 오도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잘못 지적하는 것이 있다면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Ⅱ. 검토 내용
□ 1장~4장 선사, 고대
쪽 |
행 |
원문 |
보완 사항 및 문제점 |
8 |
- |
칩입 |
침입(오자) |
9 |
- |
겨례 |
겨레(오자) |
17 |
3 |
이야기기라는 |
이야기라는 |
26 |
4 |
암사동 신석기 집터 |
암사동 선사유적지(정확한 표현) |
28 |
사진 |
낚시바늘과 그물추 |
낚시바늘과 그물추, 갈판, 방추차(갈판, 방추차가 있음) |
29 |
사진 |
암사동 신석기 집터 |
암사동 선사유적지(정확한 표현) |
30 |
5 |
미사리 |
현재는 하남시 미사동 |
31 |
24 |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뿌리 깊게 내려오는 가부장 제도이다. |
가부장 제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음. 즉 여성들이 조선중기까지 가족 내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요즈음의 일반적인 학설임. |
32 |
1 |
반달 돌칼과 농경 |
반달돌칼은 수확도구이다. 제목이 적절하지 않다. |
34 |
7 |
고인돌은 대체로 청동기시대 족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묘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크기에 따라 피장자의 신분이 다르다. |
37 |
- |
운곡리 고인돌 |
확인 요망(아닌 것 같음) |
38 |
그림 |
단군릉에서 나왔다는 뼈 |
북한의 단군릉 출토에 대해서는 우리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학생들에게 사실로서 보여질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북한이 국가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발굴한 것이므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
54 |
그림 |
백제 서산 마애삼존불 |
백제 서산 마애삼존불상(정확한 표현) |
56 |
10~15 |
왕과 평민의 직접적인 만남…나라 경영을 돕게 하였다. |
『왕과 평민과의 직접적인 만남. 이것이 삼국의 새로운 모습이다. 연맹 왕국 단계에서 왕은 서로 연맹한 여러 부족 중 조금 더 센 부족의 대표일 뿐이었다. 따라서 다른 부족원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왕은 여러 제도를 통해 직접적으로 백성들을 다스렸고, 부족장들은 독립성을 잃고 관리가 되어 왕의 나라 경영을 돕게 되었다』 - 연맹왕국에서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밑줄 친 부분은 단언하기 어렵다. 좀더 신중을 기하는 것이 바람직. |
57 |
9~10 |
이제 왕은 5부의 이름을 빼앗아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로 고쳐 부를 정도로 각 부를 틀어쥐게 되었다. |
-단순한 명칭상의 변화가 아닌 성격의 변화(부족적 성격ㆍ행정적 성격)가 수반된 것임을 설명해 주는 것이 바람직. -「빼앗아」, 「틀어쥐고」 등의 표현은 교육상 적절치 않음. |
58 |
그림 |
이차돈 순교비 |
이차돈 순교 석주(돌기둥) 정확한 표현 |
58 |
4 |
귀족, 평민, 노예 |
『귀족, 평민, 노예』를 삼국시대의 신분 구분으로 설정하였으나 삼국시대에 새로 성립된, 혹은 삼국시대만의 신분 특징이라고 보기 어려움. 보편적인 신분 개념 |
59 |
2~3 |
삼국끼리 맞서 싸우다 정복된 나라의 평민들이 노비가 되었으나 |
정복당한 사람들은 평민 뿐 아니라 귀족들도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음. |
62 |
그림 |
청동 냄비 |
청동 자루 솥. 청동초두임. |
66 |
사진 |
호우총 그릇 |
호우명 그릇.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임. |
66 |
1~5 |
누구보다도…기회를 잃고 말았다. |
가야제국이 삼국과 더불어 사국시대에 이르지 못한 원인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벌로 인한 가야제국의 약화에 있었던 듯이 서술함으로써(66쪽), 가야 제국의 단결을 저해한 내부의 요인은 상대적으로 간과하고 있음. |
67 |
사진 |
중원 고구려비 설명. 동이인 신라왕에게 의복을 내려 주었다. |
『고구려 국토내의 대위(大位)ㆍ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를 궤영에서 내렸다』임. 신라왕에게만 의복을 내린 것이 아님. |
74 |
사진 |
미륵보살반가사유상 |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이 정확한 표현 |
76 |
지도 |
득리사산성 |
득리영성 |
76 |
20 |
작전에 함께 참여하려는 의지를 가진 민들이 있어야만… |
「민」은「백성」 혹은 그 밖의 표현으로 고칠 필요 |
78 |
8~13 |
연개소문으로 대표되는 강경파는…주장하였고, 영류왕으로 대표되는 온건파는…주장하였다. |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그렇게 짐작하는 견해가 있을 뿐, 그들의 주장이나 대립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는 없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단정적인 표현임. |
78 |
15 |
틀어쥐었다. |
비교육적인 표현. 잡았다가 어떤지 |
81 |
전체 |
설씨녀와 가실 |
이 사료들이 구체적으로 당시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이용될 수 있을지 궁금. 이 사료들은 당시 백성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일반적으로 이용되고 있음. |
82 |
1~6 |
임신년…행할 것을 다짐하나이다. |
원문과 내용의 순서가 다름. 사실 오류 |
88 |
사진 |
황룡사 9층 목탑. …이 탑을 만들면서 주변 여러 나라를 정복하기를 소망하였다. |
-게재된 사진의 것은 모형임을 밝혀 주어야 함. -이 탑은 주변 여러 나라를 정복하기보다는 주변 여러 나라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보호하려는 염원이 담긴 것임. |
89 |
12~16 |
백제, 백강에 지다.(89쪽) |
『정부가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허둥대는 가운데 백제군은 황산벌을 빼앗기고 백강을 붉은 피로 물들인 채 죽어 갔다. 수도 사비성도 함락되었다. 660년 7월13일, 보름달이 높이 걸린 가운데 일찍이 보름달 같은 국력을 자랑하던 백제의 도읍 사비성에서는 신라와 당이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백강 전투(663)가 660년 백제 멸망 이전의 일로 오해될 수 있음. -붉은 피로 물들인 채라는 표현은 비교육적임. |
89 |
17 |
주류성(충남 한산) |
주류성의 비정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확정짓기가 곤란 |
95 |
- |
정효공주무덤 벽화 |
최근 문왕의 두 딸,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의 무덤이 잇달아 발굴되었다. 문왕은 4딸이 있었고, 둘째가 정혜, 넷째가 정효이다. 그리고 이 무덤은 1980년과 1981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다. 최근은 아니다. 20여년이 지난 일이다. |
97 |
지도 |
발해 지도 경계선 |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발해의 강역은 요동반도를 포함한다. |
105 |
사진 |
로마의 유리잔 |
봉수형 유리병. 잔과 병은 다르다. 로마도 확정적인 것은 아니고 동북 지중해 연안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106 |
11~12 |
장보고는 이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청해진은 폐허가 되었다. |
장보고는 귀족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왕이 보낸 자객 염장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살해된 후에도 몇 년간 청해진은 존속하였다. |
106 |
설명 |
완도 청해진 유적:…장보고는 단순한 무역 활동에 그치지 않고 당의 도자기 기술을 국내에 도입, 직접 생산함으로써 중국에 역수출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
장보고 시기 그가 청자를 제작하여 판매하였다는 설은 舊說로서, 최근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어 수록하기가 어렵다. |
108 |
2 |
지방 농민들의 피눈물이 배어 있었다. |
비교육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이다. |
108 |
4 |
노비를 3천이나 거느린 귀족이 출현한 반면… |
원 사료의 3천을 모두 그대로 노비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임. |
113 |
전체 |
- |
〈효녀 지은〉의 이야기는 뒷부분까지 소개되어야 한다. | 〈1장~4장의 종합적 검토〉
1. 장점
○자칫 어렵고 지루할 수 있는 역사를 쉬운 어투로, 논리적이고 인과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흥미를 제공 ○쟁점이 되고 있는 사항들을 적절히 배합하여 어렵지 않게 서술하고 관심을 이끌어 냄으로써 다양한 역사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음. 예) 민족의식의 형성 시기, 사국시대, 연개소문과 김춘추에 대한 평가, 삼국통일의 의미 등. ○사료에 대한 해석과 이에 대한 물음의 제기, 그리고 적절한 비교 설명이 돋보이는 부분이 있음. 역사적 상상력을 키우고 다양한 사료 해석 능력을 키우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됨.
2. 문제점
○사실의 오류, 지나친 단정, 그리고 부적절한 언어 사용 등의 예가 있음. ○다양한 학설 중 어느 한 쪽의 견해에 입각한 서술, 혹은 설명상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사실이 오도될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음. ○논리의 억측이 보여지는 부분이 있음.
〈총평〉
○전반적으로 정치사적인 시각에 입각한 서술 경향을 띠고 있음. 각 장의 구분과 제목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줌. 그 결과 사회경제사적인 분야의 설명이 취약하여 사회 발전 단계에 대한 인식이 미흡한 면을 보이고 있음. 궁극적으로 전체 역사를 보는 관점의 제시라는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임. ○그러나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정치사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요소 요소에 사회상이나 문화 등을 알려 주는 주요 자료들을 배치해 놓아 서술의 묘를 살리고 있음. ○해당 연표를 각 장의 맨 앞에 배치하여 구체적 사건의 연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과 그 시기 등에 대한 정보 제공에 인색한 본문의 문제점을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임.
□ 제5~6장(고려)
쪽 |
행 |
원문 |
보완 사항 및 문제점 |
118 |
1 |
열린 서울, 개경 |
開城郡에서 유래. 고려의 건국 이후 수도는 신라 이래의 송악군과 개성군을 포함하여 開州라고 명하였음. 이후 王京開城府로 편성되었음. |
120 |
12 |
궁예 또한 신라 왕족 출신으로 승려가 되었다가 호족으로 커 나갔다. |
왕건이나 견훤은 호족 출신으로 보지만 궁예는 호족출신이 아닌 것으로 봄. 궁예가 신라의 왕자 출신인지 왕자 출신으로 가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나뉨. 하지만 그가 승려 출신이며, 기훤이나 양길 세력에 의탁하면서부터 세력을 키웠음은 분명함. 그 뒤, 그는 지금의 강릉지역인 명주나 송악을 중심으로 하는 패서 호족, 청주 호족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음. 따라서 그를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으로 보기는 어려움. |
121 |
12~14 |
왕위에 오른 왕건은 호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주었으며, 호족들과 형제 관계를 맺거나 왕씨 성을 주는 방법으로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
왕건이 호족과 형제관계를 맺은 경우는 보지 못하였음. 당시 동맹관계를 공고히 하는 방법으로 의사가족관계를 맺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나, 호족들은 왕씨 성을 하사받거나, 혼인을 통해 왕건과 관계를 맺는 것이 일반적이었음. |
123 |
사진 |
개태사의 미륵삼존불 부처님의 모습이 마치 태권도 선수 같은 느낌을 준다. |
개태사 석불입상 부처님의 모습이 마치 태권도 선수 같은 느낌을 준다.(삭제, 부처님을 희화화) |
126 |
지도 |
도는 일반적인 행정 구역이며, 계는 군사적인 행정 구역이다. 북쪽에는 여진과 거란을, 동쪽에는 왜를 경계하기 위해 군사를 두었다. |
동계는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여진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됨. 고려 전기에는 왜구의 활동보다는 여진의 해적활동이 활발하였음. 한때 울릉도민을 내륙으로 사민하였던 것도 여진 때문이었음. |
129 |
지도 |
왜 |
일본으로(당시는 일본이 일반적임) |
130 |
12~14 |
고려는 외국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거래하여 나라 살림을 늘리는 데도 관심을 가졌다. 송 나라와 문화ㆍ경제적 교류가 가장 활발하였으며, 거란, 여진, 일본과의 교류도 끊이지 않았다. |
고려시대에는 거란이나 여진과의 관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과의 교류가 드물었음. 일본과의 교류 기사는 간헐적이고 특정 시기에만 보이기 때문에 위의 서술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음. |
134 |
사진 |
윤관의 9성(함흥성) |
윤관의 동북9성의 위치에 대하여는 공험진 비정과 관련하여 여러 설이 있음. |
137 |
가계도 |
이영의 딸 |
이호의 딸 |
138 |
7~9 |
그러나 문벌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민중들은 한번 잡은 칼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이들과 맞서서 일년 동안을 더 싸웠다. |
묘청의 죽음 이후 반란을 이끈 세력을 민중이라고 보기 어려움. 개경의 문벌귀족에 대항하는 서경의 토착 귀족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
139 |
21~22 |
이처럼 고려시대의 여성들은 조선시대 여성보다는 나은 처지에서 생활하였다. |
상속이나 재산분배의 관행이 장자 위주, 부계 위주로 바뀌어 여성에게 불리해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임. 위의 서술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여성의 지위가 크게 변화하였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음. |
151 |
1~3 |
민중들의 항쟁을 앞장서서 이끌고, 이를 더욱 확대시킨 것은 천민들의 투쟁이었다. 서북 지방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무렵, 공주의 명학소에서 봉기가 일어났다.(1176) |
민중과 천민의 개념 구분 필요, 혼용되어 서술하고 있음. 봉기가 일어났다.→봉기했다. |
153 |
도형 |
고려의 신분제도 |
향ㆍ소ㆍ부곡민이 일반 군현민보다 차별받기는 하였지만, 넓은 의미의 양인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함. 이에 따라 7차 교과서에도 이 설을 따름. |
156 |
지도 |
내성, 외성 |
내성, 외성 삭제. 3성체제라는 설이 있음. |
161 |
1 |
틀어쥐고 |
비교육적 표현 |
161 |
16~23 |
홍다구처럼…이들은 자기들끼리 혼인관계를 맺거나 이전부터 권세를 누려 왔던 문무 관리 집안과 혼인을 맺음으로써 고려 후기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권문세족이라 한다. |
권문세족의 계통은 무인정권 이전의 귀족 출신. 무인집권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가문. 무장 출신으로 전공을 세워 가문을 일으킨 경우, 원과의 관계를 통해 세력을 얻은 경우 등 다양하므로, 권문세족을 오직 원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음. |
165 |
- |
개성에 있는 궁궐터 공민왕의 개혁정치…결국 멸망으로 이어졌다. |
공민왕의 개혁정치 실패가 고려멸망의 주 요인은 아니다. 고려 멸망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
167 |
5~7 |
타락한 사원도 마찬가지였다. 승려들은 도를 닦기보다는 땅을 늘리는데 열을 올렸고, 장사에 이자놀이까지 손을 대었다. |
불교에 대해 너무 지나친 표현을 쓰고 있다. |
167 |
통도사 장생표 |
…차츰 돈맛을 알게 된 승려들은 서로 절을 차지하려고 다투었고… |
불교에 대해 너무 지나치고 저속한 표현을 쓰고 있다. | 〈5장~6장(고려)의 종합적 검토〉
1. 전체 구성 검토
초등학교는 인물사/생활사, 중학교는 사건사, 고등학교는 분류사라는 교육과정을 감안할 때, 중학교 교과서 체제를 따른다는 전제로 보면 전체 목차는 별 무리가 없어 보임.
2. 문제성
민중을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통시대적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피지배층의 구성은 계속 변화하여 왔고, 피지배층 안에서도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처지를 달리는 여러 계층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자의식, 계급의식, 변혁의지 또한 시대적으로 계급적으로 차이가 많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역사를 서술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벌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민중들은 한번 잡은 칼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이들과 맞서서 일년 동안을 더 싸웠다」(묘청의 난에 대한 설명) 「비로소 민중들에게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타나는가 싶은 순간이었다」(최충헌에 대한 설명)
-「그로 말미암은 고통을 짊어진 민중들에게 무신 정변은 개혁을 이룰 하나의 기회였다. …고통으로 얼룩진 민중들의 목소리를 이 무렵 군인들이 대신했다고나 할까?」(무인정권 성립에 대한 설명)
-「조위총이 죽고 봉기가 진압된 이후에도, 서경의 민중들은 흩어지지 않고 곳곳에서 정부군을 괴롭히며 싸움을 계속하였다」(조위총의 반란에 대한 설명)
-「전쟁 막판에 벌어진 삼별초의 항쟁도 많은 민중들이 참여함으로써 빛이 날 수 있었다」(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한 설명)
-「결국 외적에 맞서려는 민중들의 의지와 최영과 이성계 같은 훌륭한 장수가 힘을 합쳐 외적의 침략을 막을 수는 있었다」(최영과 이성계의 홍건적/왜구 격퇴에 대한 설명)
물론 과거 역사에서 소외되어 보이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현재의 역사 서술에서 고려한다는 취지는 바람직하지만, 위에서 든 예와 같은 것들은 그들을 드러내기보다는 다양한 상황에서 나름의 역할을 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민중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함으로써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부작용을 불러왔다고 보인다. 게다가 현대의 용어와 사관을 과거에 무비판적으로 투영하여 당시와 현재의 역사적 원근법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였다는 비평도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 제7장~10장(조선)
쪽 |
행 |
원문 |
보완 사항 및 문제점 |
174 |
1 |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 전체 내용 |
조선 건국의 주최자는 이성계가 아닌 혁명가인 정도전으로 오해할 수 있다. |
179 |
도표 |
3사 표시가 잘못 되었음. |
3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임. |
184 |
3~4 |
다른 무엇보다 세종이 뭇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을 위하여 새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
훈민정음 창제설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음. 집현전학자, 세종대왕 등 |
196 |
설명 |
최초의 한글 소설「홍길동전」의 |
최초의 한글 소설은 「설공찬」전이라는 설이 강함. |
199 |
그림 |
조광조추모비 |
조광조정려유허추모비가 정식 명칭인데, 약간 성격이 다름. 유배지 추모비임. |
203 |
9 |
탓이었까? |
탓이었을까? |
204~205 |
전체 |
임진왜란 설명 |
임진왜란 원인은 일본의 책임이고, 전쟁의 승리자는 결국 조선이었다는 설명이 없이 단지, 임진왜란의 원인을 왕과 조정에만 그 탓을 돌리고 있다. |
206 |
19~24 |
그러나 전주에도 왜군이…이를 없는 유생이었던 안의와 손홍록 두 사람이었다. |
<전주사고는 불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에 소실될 위험이 있어 전주사고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겼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유신, 수직 유생 안의와 손홍록의 공로가 컸다. |
209 |
사진 |
〈삼전도비〉이 비문을 써야 했던 당시 한성 판윤 오준은 오른손을 돌로 찍어 병신을 만들어 두 번 다시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
이 내용은 근거가 확실하지 않고, 오준은 1639년 이후에도 많은 글씨를 썼다. |
213 |
23 |
헤치는 것 |
해치는 것(오자) |
216 |
연표 |
정약용 거중기 발명 |
정약용의 거중기 발명은 이설이 있다. |
224 |
- |
〈신분제의 붕괴〉내용 전체 |
김홍도의 그린 자리짜기는 몰락양반이 아니라는 설이 강하다. 그래프는 울산호적의 내용인 듯한데 일부 지역에서의 신분 변동임. 이를 밝혀주어야 한다. |
227 |
그림 |
시장 |
이 그림은 1922년도에 그려진 것으로 사실성의 여부에 문제가 있음. |
240 |
15~16 |
탈굿 양반과의 대결에서 이미 민중들이 승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
탈춤이 정확한 표현임. 조선후기 탈춤의 발생에 대하여는 그 주체가 향리층이 주도하였다는 학설이 매우 유망함. 또한 연회자는 민중들이 아닌 천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음. |
247 |
하단 |
〈홍경래 격문〉 그 분은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척결할 뜻을 가지셨다. |
이 내용은 홍경래가 중국에 들어가서 행한 내용이므로 그 다음의 내용으로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어리석게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천으로) 바꾸어야 한다. |
249 |
사진 |
순무영진도 |
이 사진은 신미정주성공위도가 정식 명칭이고, 사진이 뒤집혀있다. |
249 |
1~6 |
성을 점령한 정부군은 잔인하게 보복하였다.…진짜 살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
-비교육적인 표현 -홍경래 난에 대해 너무 극찬하고 반정부적 표현이다. |
256 |
1 |
알콩달콩 |
사전에도 없는 표기 |
257 |
3 |
상스러운 |
상서로운 |
266 |
13 |
이씨조선 |
「조선」으로 이씨조선은 정식명칭이 아님. |
267 |
5~6 |
고조선을 세운 단군의 무덤도 여기에 있지요. |
단군 무덤은 현재 남한학계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음. 학생들은 사실로 받아들일 위험성이 있음. |
272 |
- |
〈나도 역사가〉 |
직지심체요절 누락 | 〈제7장~제10장(조선) 종합 검토〉
1. 전체 구성
1) 내용구성은 정치사와 저항운동사 위주(외교, 경제, 사회, 문화사의 생략) -조선 500년을 크게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눔. *15세기: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며 *16세기:대의와 명분이 중시된 사회 *17~18세기:나라 다시 세우기 *19세기:일어서는 농민들
-목차에서 보듯이 15세기는 조선건국과정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 위주, 16세기도 대의와 명분을 중시한 사람의 등장과정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 위주로서 임란이전의 200년은 중앙정치세력의 정치사 중심의 서술임. -이에 비해 17~18세기는 耕者有田이라는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중농주의실학자들의 논의를 중심으로 서술되었으며, 19세기는 농민운동을 중심으로 서술되었음. -따라서 『살아있는 한국사교과서』의 조선시대 서술은 조선전기는 개국과 관련된 정치사 위주, 조선후기는 조선왕조를 개혁 또는 극복하려는 저항운동사 위주의 내용이라 할 수 있음.
용어 사용
2. 문제점
1) 조선전기 정치사위주의 내용검토:왕과 양반관료위주의 중앙정치사변화과정 서술 -15세기는 이성계와 정도전에 의한 조선의 건국과정을 중심으로 16세기는 훈구파를 대신한 사림파의 등장과정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따라서 조선건국이 갖는 역사적 의미, 맥락 및 조선이 추구한 각종 외교정책, 사회정책 등이 모두 생략되었으며, 조선사회의 특징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형편이다.
2) 조선후기 저항운동사 위주의 내용검토:민중위주의 서술 -「나라 다시 세우기」에서 다룬 17~18세기와 「일어서는 농민들」에서 다룬 19세기의 소목차는 다음과 같다. *나라 다시 세우기-대동법을 확대하라, 토지를 농민에게,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화성을 쌓다 *일어서는 농민들-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중들,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 전국적으로 일어서는 민중들 -17~18세기는 농민 또는 민중의 입장에서 조선왕조를 개혁하려던 실학자들의 논의를 중심으로 소개하고, 19세기는 농민들이 직접 왕조에 저항하는 항쟁사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300년은 운동사적인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지배층의 동향과 사상적 흐름, 문화 아울러 국가단위에서 시행된 각종 시책이나 정책은 완전하게 배제되었다. 3) 저항 인물들의 지나친 부각-홍길동, 임꺽정, 홍경래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의 조선시대 관련내용에서, 소목차까지 포함하여 목차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은 정도전, 이성계, 세종대왕, 홍길동, 임꺽정, 김성일, 이순신, 소현세자, 봉림대군, 사도세자의 아들(정조), 홍경래 등 11명이다. 특히 홍경래는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라는 중목차에서 다루고 그 외는 소목차에서 다루어짐으로써, 500년 왕조사의 인물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4) 김성일에 대한 지나친 편중논리 임란직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보고했던 김성일에 대하여 「김성일을 위한 변병」이라는 소목차까지 마련하여 편중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김성일의 반전논리를 현재의 반전논리에다 비약적으로 해석하여 견강부회한 느낌이며, 황윤길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무시하였다.
3. 종합
살아있는 한국사교과서는 국정교과서가 역사의 모든 면을 다루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약점, 즉 지루한 제도사 나열, 사건사 나열, 인물들 나열을 지양하고, 보다 재미있는 정치사와 저항사 위주의 내용으로 서술하여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아울러 각 단락마다 「여성과 사회」, 「문화재를 찾아서」, 「청소년의 삶과 꿈」이라는 항목을 설치하여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한국사교과서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내용이 편중되어 있으며, 그 내용도 운동사적인 시각에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로 보인다. 교과서라는 특성상, 한국사의 종합적인 이해, 그것도 한국사의 긍정적인 이해를 위하여는 시각의 다양화와 내용의 종합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권2]
□ 제1장~제3장(개항기)
쪽 |
행 |
원문 |
보완 사항 및 문제점 |
15 |
사진 |
처형당하는 의병들 |
의병인지 확인 요망 |
30 |
그림 |
군인에 쫓겨 달아나는 일본인들 |
이 사진은 일본 군대에 의해 쫓겨나는 것임. |
31 |
사진 |
최초의 태극기 |
최초의 태극기인지는 논란이 많음. 마치 사절단이 가지고 간 듯한 느낌을 받을 우려가 있다. |
36 |
사진 |
민란은 주동자들이 마을마다… |
동학농민운동을 민란으로 규정짓고 있다. 현재 교과서에는 동학농민운동으로 서술하고 있는 바 민란으로 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
50 |
1 |
최초의 일본, 미국 유학생 유길준 |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변수라는 설이 있다. 검증이 필요함. |
72 |
사진 |
명성황후 |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설이 있다. | 〈제1장~제3장(개항기) 종합 검토〉
1. 장점
중학생의 수준에 맞추어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서술하려한 점은 크게 돋보임. 그 외 각종의 사진이나 삽화를 많이 활용하고, 이야기 형식을 빌려 중요한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 점도 그러함. 아울러 서민의 일상에 친근한 내용에 비중을 둔 것은 내용 자체만으로는 특징이자 장점임. 흔히 선동적, 웅변조의 종래 민중사 관련 책들에 비하면 훨씬 정제되고 진일보함 책임.
2. 문제점
-가끔 불필요한 부분에서도 여전히 민중을 내세워 서술한 점. 여성과 역사만을 따로 대외관계 부분이 미흡하다. -대원군 외에는 집권자측의 입장과 고민이 그다지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여타의 정부측은 비아냥의 대상으로 비쳐지고 있다. 학생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이해가 가지만, 역사적 용어의 사용이 빈약한 점은 도리어 단점임. -현행 교과서와의 역사용어가 너무 다르다. 농민봉기, 농민운동 등을 민란 등으로 서술하고 있다. -사진이나 삽화가 중복 등장한 경우:장지연(3회), 최익현(3회), 김옥균(3회), 대원군(3회), 신돌석(영정과 복원한 생가), 기타 의병 등 좁은 지면에 너무 자주 등장한다. -동학농민군의 큰 삽화, 의병들의 큰 사진 혹은 삽화, 신돌석의 여정 사진 등을 넣은 것은 이해되나 신돌석의 생가(복원한), 최익현의 사당 사진까지 들어가 있는 것은 의아함. -중요한 시기에 등장할 만한 사진이 없는 것은 재고를 요한다. ①독립협회 관계 인물(윤치호), ②을사조약관계 인물(민영환 및 민영환의 유서 등), ③군대해산과 시위대의 항전 관계 인물(박승환), ④잘했든 잘못했던 43년간 국가를 운영한 군주의 사진은 너무 빈약, ⑤대한제국에 관한 유물 유적:환(원)구단 등의 사진도 빈약하다.
-을사오적의 사진을 크게 부각시키고(66쪽) 그들의 행위를 그렇게 한 것도 의아함. 한국은 매국노가 각광받는 나라인가, 매국적 인물의 행위는 밉지만, 그들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기보다는 애국적 인물의 절실한 주장이나 요구를 넣는 것이 바람직 -용어의 띄어쓰기 원칙은 무엇인가. 다른 교과서도 그러하지만 어색(붙인 경우:병인양요, 신미양요, 을미사변, 갑오개혁, 광무개혁 등등/띄어 쓴 경우:아관 파천, 독립 협회, 독립 신문, 대한 제국 등등) -자주, 근대, 주권 등이 구호처럼 너무 자주 등장(예:목차 참조)
-①재미를 더하기 위한 점은 이해되나 소설이나 만화 같은 형식의 표현은 줄이는 것이 바람직할 듯, ②민족의 시련의 역사를 승화시키려는 자세가 중요함, ③국가의 역사를 형편없게 인식시키는 것은 문제(가령 정부에는 매국노 일색이고, 군주와 정부관료는 탐학이나 일삼고, 착취나 일삼는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과도 거리가 있고, 역사교육의 취지에도 어긋남), ④민중을 좀 더 조망한 것은 좋으나 「민중은 절대선, 정부는 타도의 대상」, 「투쟁과 혁명은 그 수단」처럼 자칫 오해될 소지는 없는지
3. 종합 의견
-「한국근대민중사」 혹은 「한국근대의병사」라면 몰라도, 국가의 역사에서는 집단별로 안배되어야 하고 역사적 사건과 용어를 수고스럽더라도 어느 정도는 가르쳐주어야 함. 가령 격동기 국제상황이 반영되지 않으면 열강의 역할이 빠지게 되고, 정부측의 고민이 드러나지 않게 됨. 그 경우 민중의 고충은 절절히 드러난다 해도, 왜 정부는 역할을 제대로 못했는가가 해명되지 못한다. 이 경우 정부는 악의 축이자 민중의 비아냥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외세의 침략은 그러한 못된 정부를 제거해준 찬양받아야 할 행위로 인식되어 식민사학의 아류가 될 수 있다. -결국 외세, 정부, 개화파, 보수유생, 민중 등의 역할이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적절한 안배가 필요하다.
□ 제4장~제6장(일제강점기)
쪽 |
행 |
원문 |
보완 사항 및 문제점 |
82 |
연표 |
연표 한국 최초의 장면들 1917 여성잡지(여성계) 창간 |
〈여자계〉는 1917년 도쿄재일본여자유학생친목회가 발간한 유학생잡지인데 마치 한국 최초의 여성잡지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음. 한국 최초의 여성잡지는 1906년 창간된〈가정잡지〉임. |
86 |
2 |
민족적 저항 속에 강행된…무단 통치였다. |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제ㆍ병합된 사실의 경우 대부분의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도 「강제병합」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본 교과서에서는 국가간의 대등한 「합병」으로 서술하고 있다. |
87 |
9, 15 |
문화통치 |
문화정치 |
91 |
16 |
극 속에 |
소설 속에 |
94 |
4 |
다니던 |
다니는 |
100 |
6 |
전기불 |
전기 |
111 |
5 |
그러고는 평화적인 시위대를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
그리고… |
124 |
사진 |
〈개벽〉의 설명 전체 |
920년 6월에 창간되어 1926년 8월에 폐간되기까지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민족독립의식을 고취시킨 잡지 〈개벽〉을 왜곡 묘사하고 있음.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것은 1922년이고, 최린은 1933년말 이후에야 친일활동을 시작함. |
127 |
사진 |
광주고보 2년 박춘해 |
광부고보 2년 박준채 |
128~129 |
- |
전체 |
원 자료는 매킨지의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인용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나 원문(제14장 3ㆍ1운동)하고 전혀 일치 않음. 자의적으로 인용하였음. |
136 |
- |
전체 |
친일파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로, 현재 개념조차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박흥식 등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것에는 신중해야 되지 않을까. 그들의 전 생애의 활동을 시기적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
139 |
사진(상우) |
- |
비교육적인 사진. 중학생용 교과서라는 점을 생각해 군대위안부 관련 사진은 신중히 수록해야 한다. |
144 |
1 |
내릴 수 없는 투쟁의 깃발 |
비교육적인 표현 |
146 |
사진 |
박헌영 |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사진을 게재해 그가 1940년대 민족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 〈제4장~제6장(일제강점기) 종합 검토〉
-종래 국정교과서에서는 일제의 침략과 관련하여 수탈, 약탈 등의 표현이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어 일제시기의 역사를 단순화시켜 이해하게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본 교과서에서는 이 시기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 모든 책임을 일제의 탓으로 돌리지는 못하더라도 마치 우리 민족이 잘못했거나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가 많았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일본 군경에게 피살당한 사람이 7,500여 명, 부상자가 1만 6,000여 명, 체포된 사람이 4만 7,000여 명(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이었던 탄압 사실을 서술하지 않는 것은 3ㆍ1운동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안되며, 학생들에게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일제의 식민지하에서의 우리 민족의 상황,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균형있게 서술하려고 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사회주의자의 운동이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 7~11단원
쪽 |
행 |
원문 |
보완 사항 및 문제점 |
169 |
3 |
임시정부 수립에 중점이 두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시급하다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로 입장을 바꾸었다. |
신탁통치에 대한 설명 가운데 현행 국가의 경우 『소련의 지령에 따라 태도를 바꾸어 신탁통치안을 지지하였다』라고 한 서술 내용과 다름. |
173 |
|
4ㆍ3항쟁 |
「제주도 4ㆍ3사건」을 항쟁으로 표현. 이 사건은 양민이 많이 희생되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
177 |
14~17 |
미 군정은 좀더 수월하게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경험이 있는 친일파를 불러들였고,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정책으로 나아갔다.…불만은 전국적인 항쟁으로 폭발하였다. 1946년 9월, 미 군정의 잘못된 식량, 노동 정책에 항의하여 전국의 노동자 약 50여만 명이 파업에 나섰다. 전 민중적 항쟁으로 번진 것이다. |
문장의 내용상 반미적 성향이 강함. 9월 총파업의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곧 식량문제에 조선공산당 조종설이 있음을 적지 않고 있다. |
179 |
3~5 |
이러한 북한의 토지 개혁에 접한 남한의 농민들은 남한에서도 토지 개혁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으며, 반면 남한의 지주나 자본가들은 북한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더욱 강하게 갖게 하였다. |
계급간의 갈등을 부각함으로써 계급투쟁설을 뒷받침할 가능성이 높다. |
186 |
11 |
농지 개혁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
요즈음 학설은 남한에서의 농지 개혁도 일정의 성과가 있었다고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
186 |
그래프 |
63만3000ha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61만3000ha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90 |
전체 |
친일파 문제 |
특별히 반민족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일제하에서 관리를 역임했거나 교단에 섰다면, 넓은 의미에서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에 직ㆍ간접적으로 협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리 중에서도 고위직을 역임했던 사람들은 명백히 친일파라고 규정할 수 있겠지만, 중하급 관리들까지 모두 친일파로 규정할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런 사람 모두 친일파라고 규정한다면, 그 논리를 약간 과장, 확대하면 일제하에서 독립운동 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친일파라고 할 수도 있다. 친일파 문제는 단순히 누가 친일했는지, 친일행위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폭로하는 차원에서 전개되어서는 안된다. 이제는 좀더 객관적인 잣대도 마련되어야 하고, 개념규정도 이루어져야 한다. 거기에는 물론 가치판단의 문제도 포함된다. 최남선, 최린, 이광수 등의 공과를 함께 수록해야 할 듯. |
192 |
1 |
갈갈이 찢기는 금수강산 |
비교육적인 표현이다. |
194 |
1 |
중국군의 개입 |
당시 우리는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행 교과서에서도 중국공산군의 약자인 공산군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의 역사적 사항을 고려하여 당시의 명칭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호칭은 한국전참전용사회 등 반공단체로부터 많은 민원을 부를 소지가 있다. |
194 |
8~9 |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남한군과 미군은 우세한 세력을 앞세워 다시 인민군을 몰아붙였고, |
상식적으로 어긋난 표현이다. 북한군이 인민군이면 남한군은 국군이어야 한다. 북한측의 서술 같다. 『몰아붙였다』라는 단어 사용도 어색하다. |
196 |
- |
통계 |
<통계는 일본 『통일조선신문』의 통계로 의용군, 강제징집자, 경찰관 등에 대한 통계가 누락되어 있다. 특히, 한국전쟁에 관한 통계는 북한측, 우리측, 미국측 등 차이가 심하므로 이 통계는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설령 넣으려면 우리측 군방부의 통계를 넣어야 한다. 국가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199 |
4 |
미국은 자기 나라에 남아도는 농산물과 무기를 남한에 제공하면서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
지나친 표현이다. 원조물자를 남아도는 이라는 표현, 자기나라라는 표현 등도 적절치 않다. |
200 |
16 |
북한은 남한에 비해 전쟁의 피해가 훨씬 컸다. |
구체적인 자료 제시가 있어야 함. 전의 통계는 남한의 군인이 더욱 많이 희생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전쟁의 책임은 전쟁을 시작한 북한측에 있는 것임. |
200 |
사진 |
〈사진설명〉일사분란한 인민 동원 체제를 구축했다. |
북한체제의 설명에서 「일사분란」이란 용어가 많이 나온다. 왜 북한이 일사분란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저항을 할 수 없다. |
207 |
연표 |
5ㆍ18광주 민중항쟁 |
법으로「5ㆍ18 민주화 운동」으로 되어 있다. 유달리 항쟁이란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
209 |
2 |
자유당 표가 전체 유권자 수보다 많이 나올 정도여서… |
전체 유권자가 아닌 일부 지역에서의 상황이다. 투표결과 최종집계는 총투표자 1000여만 명 중 이승만 960여만 명으로 88.7% 득표, 이기붕 830여만 명으로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
210 |
5 |
민중의 힘으로 무너뜨린 이 「거대한 움직임」… |
혁명적인 표현이다. 비교육적이다. |
211 |
1~4 |
선거를 통해 수립된 장면 정권도 보수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정치인은 4ㆍ19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면서, 혁명의 열매를 차지한 사람들이었다. 혁명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보다 내부 권력 다툼이 심하여 제대로 나라를 끌어가지 못하였다. |
장면 정권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긍정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
215 |
8~9 |
10여 년 동안 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인 4만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
베트남 양민 학살이 4만여 명으로 인식할 수 있다. 월맹군을 사살한 것인지, 아니면 양민을 학삵한 것인지, 굉장히 위험한 표현이다. |
216 |
16~19 |
전태일의 분신은 1970년대 전후의 경제성장이 훌륭한 경제 정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ㆍ농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음을 잘 보여준다. |
다분히 선정적인 표현이다. 전태일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그의 분신이 마치 70년대 전후의 노동운동의 화신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더욱이 학생들에게 분신이란 용어는 비교육적이다. |
219 |
5 |
최근까지도… |
삭제 최근까지가 아니다. |
220 |
사진 |
국회에서 밤새 농성을… |
국회에서 밤샘 농성을 |
227 |
1 |
광주 민중 항쟁 |
광주 민주화 운동 |
228 |
1 |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
『자유의 나무는 항상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 싱싱해져야 한다. 그것은 자유의 나무의 자연적인 비료이다』(토마스 제퍼슨)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과격하고 선동적인 표현이다. |
244 |
사진 |
〈사진설명〉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역시 3ㆍ1운동과 제너럴 셔면호 사건 때 앞장서서 항일, 항미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
완전 날조된 북한의 역사 서술이다. 이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면 학생들이 믿을 소지가 있으므로 생략하는 것이 마땅하다. |
250 |
지도 |
- |
행정구역이 틀리다. 자강도 등이 빠짐. |
260 |
10~11 |
친일파는 살아 남고 독립운동가는 힘들게 살게 되는 역사의 왜곡을 겪었다. |
모두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사실을 마치 모든 사회에서 그러했다는 등의 역사 서술은 곤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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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임수경씨의 북한방문은… |
임수경은 당시 밀북한 것이다. | 〈제7장~제11장(일제강점기) 종합 검토〉
-전체적으로 현대사의 비중을 너무 높여 놓아 고등학교 11, 12학년에 선택과목으로 지정되는 『한국현대사』와 계열성의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를 자본주의로 공산주의를 사회주의로 표기하여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는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 반공을 강조하라는 것은 아니나 어떻든 현재 우리는 남북이 대치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공산주의에 대한 서술이 있어야 한다. -민중이란 용어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고 있다. 민중사관이 들어 있다. -단어사용이 거칠다. 「난폭하게」 진압하는, 싹이 「잘렸다」 등등, 용어의 순화가 필요하다. -전체적인 우리의 현대사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 전쟁과 군사 독재만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서술은 북한체제의 한계점, 모순 등에 대한 서술이 없다. -민주화를 위한 노력에서 항쟁만이 강조되고 있다. 항쟁은 그 수단에 불과하다. 그만큼 성숙된 시민들의 민주의식을 강조하여야 바람직한 교과서이다. -시위 사진 등이 너무 많다. 한국현대사는 시위로 점철된 느낌이다.
Ⅲ. 결론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검토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성 및 흐름
1) 제목의 문제:교과서라는 표현을 과연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 책은 교과서의 참고자료라고 말하고 있으나 표지에서는 분명히 「21대안교과서」를 표명하고 있다. 또한 「살아있는」이라는 표현도 문제이다. 이 책에서는 그 동안의 국사교과서나 연구에서 도움받고 참고한 것은 없었는가, 다른 역사교과서를 「죽은 역사」로 인식시키기보다는 그 동안의 교과서를 참고하여, 우리는 이러한 면을 강조하고 부각시키고자 했다는 자세가 좋을 듯하다.
2) 구성상 역사의 현장은 그런 대로 이해되나, 여성과 역사라는 항목은 어색하다. 억지로 여성사를 넣은 듯한 느낌이 든다.
3) 역사 용어의 통일:역사 용어가 현행 교과서와 통일되어 있지 않아 혼란을 가중시킨다.
4) 전거 부재:사진이나 그래프, 읽기 자료 등에 대한 전거가 없어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또한 적절치 않은 전거가 많다.
5) 근현대사가 중요하지만 너무 많이 할애되어 있다.
6) 교과서라고 표방한다면 기본적인 국민의 소양 교육을 위한 역사적 지식 전달이 미흡하다. 최소한의 역사 지식을 알아야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제도사도 약간은 다루어야 한다.
7) 적절하지 않은 비교육적 표현이 매우 많다. 저자들은 이를 문학적 표현이라 하고, 요즈음 학생들에게 적절한 단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교과서의 문장 사용은 신중해야 한다. 만약 학생들의 단어에 맞춘다면 교과서라고 할 수 없다. 8) 유적의 소재지가 없다. 삽도, 그림 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2. 민중사관
이 책의 가장 특징은 처음에서도 밝혔듯이 『①역사 발전을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보편적 역사 발전적 시각 ②민중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민중 주체적 시각에서』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민중사관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적 시각이 민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나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민중사학이 지향하는 목표는 그들은 역사 변혁의 주체는 민중이며 민중사학은 이와 같은 민중에 의한 사회변혁에 동참하고 봉사하는 역사학이라고 주장한다. 민중이 역사발전의 주체임을 한국 사회의 발전 과정 속에서 이론화하고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한국 사회의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조국의 자주통일이라는 실천적 과제에 기여할 수 있는 과학적 한국사 인식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책에서 민중의 개념을 계급론적 의미에서의 민중보다는 고대부터 전근대까지의 피지배층을 민중으로 통칭하고 있는 듯하다. -국가를 민중에 대한 착취기구로 보는 기본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다. 민본정치는 허위식으로 간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계급투쟁론에 입각하여 지배계층과 생산 대중, 곧 민중세계가 유리된 채 반목 대립 현상만 노출했다. -전통시대에 저항하는 민중(농민)이야말로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견지에서 집권층에 대한 항쟁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농민의 일상생활에서의 창조성은 무시되고 있다. -국가를 민중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일삼던 기구로 간주하고 있다. 한국사의 전개 과정을 생산 대중에 대한 착취와 생산 대중의 저항으로만 파악하려는 역사인식은 편파적이다. -19세기 민중항쟁을 계급투쟁의 차원에서 너무 부각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만연되어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경제, 사회의 근대적 실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여 근대화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1920년대의 민족개량주의가 패배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사실 계몽운동, 문화운동을 통해서 착실하게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일이 민족운동의 일차과제일 수도 있다. 이것은 민족운동의 방략에 관한 문제이지 어느 쪽 더 효과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현대 1960년대 정부 당국의 경제개발 정책에 의해서 초래된 사회 경제상의 변화가 엄청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점 특히, 한국 경제의 대외 의존성 및 권력과 부의 독점화 현상만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산업화의 출발과정에서 이를 지도한 것은 소수의 지배계급이었다. -1960년대 공업화 정책으로 한국경제의 대외예속이 가속화되었으며 민중의 수탈이 구조화되는 등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만 컸다고 비판하고 있으나 이는 과장된 것이다. 공업화는 어떻든 근대화의 초석인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계획은 어느 정도 한국의 선진화에 이바지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노동자들의 희생이 따랐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의 역할이 증대되어 독재권력으로 강화되어 나아갔다는 점도 서술해야 한다. -민중의 변혁운동에 대한 연구는 정치, 경제 이외에도 종교 및 사상의 변화 등 심층적으로 연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책에는 이와 같은 인식이 다소 부족한 듯하다. ※ 책의 편찬은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대안교과서를 표방하고 있고 현장의 교사들이 이용하고 학생들에게 권하는 데 문제가 있다. 누구나 자유로운 역사적 사실을 표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학교의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강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단지 참고 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교과서 개발에 있어서 반드시 교육과정을 준수하도록 하고 있음. 이는 국가 수준에서 교육내용과 학습활동을 체계적으로 편성ㆍ조직한 교육과정을 준수하도록 함으로써, 각 학년 또는 과목별로 달성해야 할 교육목표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함임.
그러나 대안 교과서의 경우, 당초부터 교과서로서 개발되지 않았으므로 내용 구성이나 학습활동 등의 체계면에서 볼 때, 교육과정에 의거하지 않고 있음. 따라서 이러한 교재를 상시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결국 이를 통해 학습한 학생들의 경우 국가가 규정한 기준에 따라 학업을 이수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심각한 경우 해당 과정의 이수를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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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통일교육교재 검토결과 및 조치계획
통일부 검토 보고서
1. 교재 개요
가. 교재명 ○『이 겨레 살리는 통일』(전교조 통일교육위원회, 2001년 6월) 나. 교재특성
(1) 구성 ○교재는 ①교사와 학생을 위한 강좌(1부) ②주제교육(2부) ③통일교육실천사례와 교안(3부) ④보론(4부)으로 구성 - 〈제1부〉는 대북지원, 안보교육, 한국전쟁, 미국 등에 대한 전교조의 시각을, 〈제2부 및 제3부〉는 통일교육실천사례 등 통일교육방법에 대한 기술로 구성
(2) 성격 ○초ㆍ중등학교 교사용 통일교육교재로 활용할 목적으로 발간되었으며, 현재 시중 대형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교재 ○통일교육에 공식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학교는 없으나, 전교조 교사를 통하여 학교통일교육에 영향을 줄 가능성 잠재
2. 내용검토결과
가. 개관 ○북한 중심 및 반외세적 시각에 바탕한 내용 등 정부의 통일교육방향과 배치되는 객관성과 균형성이 부족한 기술 다수 존재 나. 세부검토내용
(1) 『통일국가의 미래상』 문제 《교재내용》 ○현행 초ㆍ중등교과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에 바탕한 국가로의 통일을 체제대결, 이데올로기적 대결교육으로 비판
◇「이런 교과서 구절들은 (중략)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지향하며 (중략)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보다 체제대결, 이데올로기 대결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33쪽)
《정부의 통일교육방향》 ○통일교육은 헌법이 추구하는 가치체계속에서 추진되어야 하며, 통일교육지침서는 전문, 제4조 등 헌법규정을 고려하여 「자유민주주의에 바탕한 국가」를 통일국가의 미래상으로 제시 - 단순한 절충형 통일이 아닌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인류 보편적 이념인 자유와 평등, 인권, 자유민주주의 등에 바탕한 통일국가 건설이 중요 * 통일교육기본지침서는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 경제적으로 시?弱姸┚셉┯? 바탕으로 한 선진민주사회 구축」을 통일국가의 미래상으로 제시(105쪽) * 제7차 교육과정의 현행 교과서는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통일국가의 미래상으로 기술(중학교 도덕2 214쪽, 고등학교 도덕 180쪽)
(2) 『미국 등 주변국가에 대한 시각』 문제 《교재내용》 ○미국 등 외세를 한반도 분단과 전쟁의 원인 제공자 및 냉전체제를 유지하고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으로 기술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에 키를 쥐고 있는 미국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소극적이다」(36쪽) ◇「자신의 세계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한반도의 운명은 고려치 않고 전쟁까지 감행하려는 미국과 (중략) 북은 미국의 경제봉쇄 속에 20만명 이상이 아사하였다는 최악의 식량난 (중략) 겪었다」(223쪽) ◇「우리주변의 전쟁과 분단의 피해자」를 조사하는 기초안내자료로 미군 양민학살사건, 주한미군 범죄 및 군사훈련, 미국의 고엽제 살포 등을 제시(49ㆍ51ㆍ52쪽) ◇특별활동 교육자료로 제시된 통일놀이 중 「38선 놀이」는 「외세」를 통일의 방해세력으로 설정(175쪽)
《정부의 통일교육방향》 ○통일은 「남북당사자가 해결해야 할 사안이면서 국제적 성격을 띤 문제」이기 때문에 통일교육에서 미국 등 주변국에 대한 배타적 의식 고취보다는 지지와 협조를 유도할 수 있는 자세 육성이 중요 ○한반도 평화정착 및 통일에 대한 미국 등 주변국의 역할 이해를 위해서는 미군범죄ㆍ환경문제 등 통일논의에서 부차적인 문제를 부각하는 접근보다는 세계질서속에서 민족이익과 주변국의 이해관계를 조화하는 지혜의 배양이 필요 * 우리의 주변국들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유지를 바라고 있으며, 주변국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를 이끌어 내는 노력이 필요(통일교육기본지침서 70쪽, 고등학교 도덕 137쪽)
(3) 『6ㆍ25전쟁 등 역사적 사실을 보는 시각』 문제 《교재내용》 ○분단과 6ㆍ25전쟁에 대한 북한정권의 책임보다는 민족내부의 분열 및 미국, 일본 중심 외세의 책임을 강조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등 우파세력은 (중략) 분단단독정부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우파세력과 미군정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중략) 한국전쟁, 세계 체제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30쪽) ◇「한국전쟁은 외세에 의한 민족의 분단, 그 분단을 극복하려는 민족의 투쟁 (중략)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 (중략) 전쟁이 발전되어 갔으며」(27쪽) ◇「한반도 전쟁의 씨앗은 한반도 점령군에게 있으며, 그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28쪽) ◇「이런 전쟁결과 우리에겐 (중략) 온통 폐허만 남았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엄청난 수혜를 받은 자들이 (중략) 미국과 일본의 자본이었다」(31쪽) ○북방한계선(NLL)을 군사분계선으로 불인정하고 무력화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 ◇「99년 서해교전이 발발한 백령도 부근은 북측과 유엔군측이 인정한 「한국의 영해」가 아니다」(23쪽) ◇「북방한계선(NLL)은 (중략)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정권의 위험한 도박을 제어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군사활동의 북쪽한계선을 내적으로 정해놓은 선이라고 한다」(24쪽)
《정부의 통일교육방향》 ○역사적 사실에 대한 책임을 민족 외부요인으로 돌리거나 북한정권의 책임을 불문하는 것은 남북관계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곤란하게 하며 새로운 갈등을 유발 * 6ㆍ25전쟁은 북한정권의 한반도 공산화 의지에 따른 남침으로 발발하였으며, 그 결과 심리적ㆍ문화적 민족분단으로 발전(통일교육기본지침서 15쪽) * 북방한계선(NLL)은 1992년 발효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ㆍ협력에 관한 합의서』 제11조에 의해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으로 북한도 이미 승인
(4) 『북한 실상』 문제 《교재내용》 ○북한의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북한의 시각 및 형식적인 제도적 관점에서 북한을 미화하는 내용 존재
◇「북의 그러한 경제난의 근본원인이 분단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 분단이 없었다면 그러한 난민들이 발생할 까닭이 없다」(54쪽) ◇「북은 미국의 경제봉쇄 속에 20만명 이상이 아사하였다는 최악의 식량난」(223쪽) ◇「북의 경우 사회보장의 수준은 그들의 사회여건을 기준으로 남쪽을 훨씬 능가한다. 11년 의무교육 교육비와 대학 교육비, 국민의 의료비, 탁아비 등이 국가에 의해 지불되고 있기 때문이다」(14쪽) ◇「꽃제비라 일컫는 (중략) 참상도 보았겠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의 우리는 그보다 더 끔찍한 상황을 겪을 수 있습니다. 북한이 식량난을 겪고 있지만 식량자급율은 70%에 이르고 남한은 23%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41쪽)
《정부의 통일교육방향》 ○남북 평화정착 및 통일을 위하여 북한과 협상하고 함께 발전을 모색하기 위하여서는 현재의 북한이 처한 대내외적 환경과 북한의 구체적인 실상에 기초한 객관적인 북한 이해 필요 * 1980년 중반부터 나타난 북한의 식량난은 내수중심의 경제구조로 인한 식량조달 외화 부족 및 자연재해가 근본원인(통일교육기본지침서 34쪽) * 사회보장수준 및 식량자급율이 상대적으로 높을지라도 북한의 실제 생활은 식량난, 열악한 생활수준 등 현실적으로 차이(통일교육기본지침서 26쪽) - 북한의 의무교육기간을 거치는 동안 교과서, 학용품, 교복 등은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하고 농번기 등에는 노동력을 제공(통일기본지침서 41쪽)
3. 조치계획
○교육인적자원부 및 시ㆍ도교육청과 협조하여 각급 학교에서 통일교육교재로 활용되지 않도록 조치(2002. 3) ○학교교육과정의 1ㆍ2종 교과서를 제외한 통일교육교재, 민간단체의 통일교육교재의 내용을 분석ㆍ평가(2002. 3~8) - 분석결과는 통일교육기본지침서 개발시 활용하고 해당기관에 통보하여 상호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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