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을 양육하는 행복한 권사
제5장 교인들 돌보는 피스메이커가 되라
소주제: 환상의 콤비일지라도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환상의 콤비인 바나바와 바울에게도 관계가 깨어지는 위기가 찾아왔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39-41).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바울과 바나바는 불편한 관계가 된다. 그 중심에는 마가 요한이 서 있었다. 1차 전도여행 때 마가 요한은 중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자 바울은 화가 났다. 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자를 데려갈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과업 지향적인 스타일인 바울로서는 마가 요한의 무책임한 행동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관계 지향적인 바나바는 마가 요한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결국 다른 생각을 가진 바울과 바나바는 심하게 싸웠다. 서로 다른 생각을 조율하지 못하고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가자고 결론을 내렸다. 환상의 콤비도 별 수 없었다. 환상의 콤비라고 안심하지 마라. 왜냐하면 사탄은 바로 환상의 콤비를 갈라놓는 데 명수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우같이 환상의 콤비들을 갈라놓는 교활한 비책을 갖고 있다.
빌립보교회 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유력한 여성도였다. 서로 협력해서 주의 일을 하면 엄청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환상의 콤비가 되지 못했다. 그들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서로를 향한 질투심과 시기심이 생겼다. 서서히 갈들의 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갈등은 빌립보교회에 또 다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4:22). 그들이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함으로 교회 안에 많은 교인들에게 물의를 빚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같은 마음을 품고 화합하라고 당부했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색깔이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음식은 없다. 동일한 사람들을 보면서 서로 다르게 느낀다. 동일한 사건을 보면서도 각기 다르게 해석한다. 같은 음식을 먹고도 평가는 다르다. 세상에 있는 70억 인구는 서로 각기 다르다. 다양해서 좋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함은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겨준다. 서로가 가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이들은 갈등 구조를 낳게 된다.
어느 교회에 주방 일을 잘하는 권사님이 몇 분 계셨다. 그분들은 교회의 큰 행사를 잘 치르는 은사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적으로 얼마나 유익한지 모른다. 그런데 이분들이 함께 모이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서로 경계하고 시기했다. 이들이 반목하는 모습이 주변 교인들에게도 보였다. 그래서 교회 안에 부작용이 일어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이 “권사님, 서로 좀 끌어안고 일해 주십시오”라고 당부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에게 소중한 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맡기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는 일보다 관계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권사에게는 바다와 같은 포용력이 필요하다.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꾼들이 스펀지와 같이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혼자 사역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2% 부족하다. 더불어 사역을 잘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에 덕이 되고 목회에 도움이 된다. 팀 사역을 잘하는 권사가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선기는 모든 일꾼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다. “온전히 합하라!” 여기서 온전히 합한다는 말을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뜻이다. 때때로 그물을 수선하거나(마 4:21). 신앙의 부족함을 채운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살전 3:10). 여기서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하나로 온전하게 통일된 몸을 이루라는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온전한 몸으로 연합라라고 요청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매우 엄숙하고 진지하다. 그는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해서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하는 엄한 간청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친밀한 일체감으로 연합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파를 이루면서 서로 반목하고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온전히 화합할 수 있는가? 그 비결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뜻’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같은 말을 해야 한다. 교회는 정치집단이 아니다. 사교모임이나 친목모임도 아니다. 취미활동을 하기 위해 모인 동이라도 아니다. 교회는 거룩한 성이다. 서로 다른 말을 품게 되면 교회가 분열하게 된다. 교회가 일체감을 갖기 위해서는 같은 말을 해야 한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마음을 합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분열된 마음을 가지면 정신분열증 환자가 된다. 교회가 서로 마음이 분열되면 영적분열증 환자가 된다. 교회는 같은 뜻을 품어야 한다. 목회자의 비정이 중직자들의 비전이 되어야 하고 온 교회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중직자들이 다른 뜻을 품고 다른 비전을 가지면 그 교회는 나아갈 미래가 없어진다.
건강한 교회는 분쟁을 일삼지 않는다. 분쟁은 갈라진 틈, 옷이 찢어짐(마 9:16), 의견의 ㅊ이로 일어나는 분쟁(요 7:43, 9:16), 몸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고전 12:25)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교인들이 각기 다른 지도자를 따름으로 인해 일어나는 분열을 가리킨다.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데 서로 신학이 다르고, 지지하는 사람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상태로서는 에너지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사용할 수 없다.
말썽꾸러기 권사 한 사람이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 수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불평불만을 일삼는 권사가 되지 말아야 한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목회자를 비난하고 교회에서 하는 사역에 대해 불평하는 권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비판하고 남을 판단하여 비난하는 일을 즐기는 권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매사를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동일한 사물을 바라보더라도 어떤 안경을 끼고 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권사는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권사는 식당에 내려가 밥을 먹으면서 주변에 있는 다른 권사들에게 설교를 양념 삼아 점심을 먹는다. 문제는 설교아 아니고 설교를 듣는 권사의 안경 색깔이다.
권사는 교회 안에서 분열을 일삼는 자가 아니라 화합과 화목을 도모해야 한다. 사람들이 평화를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힘으로 평화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 힘으로 눌러서 항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항구적인 평화는 아니다. 또 다른 방법은 무저항으로 평화를 만드는 방법이다.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싸웠다. 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평화는 맞서 싸울 힘이 없는 사람들이 취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주님이 취하신 방법은 사랑으로 평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다. 양보하고 사랑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평화이다. 권사는 바로 예수님과 같은 사랑으로 교인들을 감동시켜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손해를 봐야 하고 모함을 당해야 하며 억울한 일을 겪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자존심을 다 챙기고서는 결코 피스메이커가 될 수 없다.
평화는 저절로, 순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화를 심는 지속적이고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평화를 심어야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평화를 심으려면 수고해야 하고 소망을 갖고 작은 행동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실 누구나 환상의 콤비로 사역하고 싶어 한다.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관용하고 포용하면서 사역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평화를 만드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어떤 면에서 인간적인 노력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하나님이 도우실 때 우리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수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