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고, 상상력은 변화의 힘을 불러온다. 말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시에는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며 휴식과 위로로 이끌고, 실제로 통증을 줄여주고,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초월적 힘이 있다. 우리 존재를 눈에 보이지 않게 조정하고 만드는 것의 한 측면은 무의식이다. 그 무의식을 이해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내고 그 안에서 좋은 에너지를 끌어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품어왔다. 어떤 시들은 분명히 物 자체를 넘어서서 그 이면들, 혹은 무의식을 비춰준다. 무의식은 감추어진 우리의 생기발랄한 본질이다. 시인들은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존재들이다. 좋은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지개를 바라보는 것, 감동적인 음악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쁨을 준다. 그 기쁨은 그냥 기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것들이 우리 안에 남긴 상처와 부정적인 기운들로부터 우리 존재를 감싸고 보호한다. 나는 자주 시를 읽으며 고통스런 감정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경험을 한다. 아프고 괴로울 때 시를 읽으며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찾고 병에서 벗어난 적도 있다. 「시의 정원에서 찾은 마음 치유법」은 그런 내 경험에서 착상된 것이다. 1)좋은 시에는 치유의 잠재력이 있다는 것과, 2)그런 전제 아래 시와 마음, 혹은 시와 감정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3)좋은 시를 통한 치유의 가능한 매뉴얼을 만드는 것, 4)나아가서 시 치유법(poetry therapy)의 초석을 세우는 것 따위를 목적으로 한다.
시와 치유
1.시는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
좋은 시는 마음의 기쁨을 일으키고 위로를 주며 때로는 아주 강력한 치유의 효과를 갖고 있다. 시 치료(Poetry Therapy)는 시를 읽고 향유하는 자의 인성과 시 작품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과정에 바탕을 둔 읽기-치료의 한 방법이다. 우리는 누구나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며, 날마다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의 결과는 감정으로 나타난다. 마음은 상처를 받으면 유리와 같이 그 흔적을 남긴다. 분노, 질투심, 화, 슬픔, 절망, 환멸....... 이런 것들이 중첩되면 마음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는 느낌, 실직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불행감과 무력감들은 그 도피처로서 술이나 마약, 도박, 일, 섹스 중독들을 불러온다. 갖가지 중독들을 불러오는 내면 심리의 무의식적 기원들을 방치할 때 정신 질병으로 차츰 악화할 수 있다. 이미 정신 질병으로 고착된 상태에서는 시 치료보다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시 치료는 그 전단계에서 유용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시 치료는 곧 자아 치료다. 자기를 아는 것, 제 감정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자기 무의식에 대한 이해가 치료의 전제 조건이다. 시는 크게 은유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시인 자신의 체험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은유는 집약적이다. 반면에 이야기는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은유들은 내 안의 무의식을 비추는 번개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마법의 양탄자, 도피수단, 정신적 여행”이다. 시를 읽어나가는 동안에 피치료자는 시가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환기를 통해 자신만의 느낌들을 갖게 될 것이고, 제 안에 상존하는 불안과 고통, 애증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깨닫고 진단할 수가 있다. 독자-반응(reder-response)이라는 이론에 따르자면 하나의 텍스트는 “하나의 코드, 대기 중인 메시지, 잠재적인 경험”이다. 독자는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경험과 언어를 가동”시킨다. 사람들은 시나 소설을 읽을 때 기존의 읽기 방식과는 달리 자기만의 방식으로 읽는다는 뜻이다. 텍스트는 그 안에 고정불변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지닌 텍스트로 태어난다. 하나의 텍스트는 천 명의 독자를 만남으로써 천 개의 의미를 가진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유서가 깊은 옛 의학책에는 “사람의 몸을 살펴보건대, 안으로는 오장육부가 있고, 밖으로는 근과 골, 기와 육, 혈과 맥, 그리고 피부가 있어서 그 형체를 이룬다.”고 말한다(『東醫寶鑑』, 허준 엮음, 동의과학연구소 옮김, 휴머니스트, 2002). 사람은 무엇보다도 몸을 가진 존재다. 같은 책에서는 그 몸과 더불어 “精氣神이 또한 장부와 百體의 주가 되니, 그렇기 때문에 道家의 三要와 불교의 四大가 모두 이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도가에서 말하는 ‘삼요’는 精, 氣, 神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는 몸의 내재적 요소다. 사람은 그 삼요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람인 것이다. 혹은 煉精, 調食, 養心, 이 세 가지를 일컬어 삼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세 가지는 陰氣, 陽氣, 沖氣와 상응하는데, 이는 우주 만물을 이루는 세 요소다. 노자는 『도덕경』제 4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짊어지고 양을 품으며, 충기로써 조화를 이룬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불교에서 말하는 ‘사대’는 色과 法을 이루는 네 가지의 바탕들, 즉 地, 水, 火, 風을 말한다. ‘사대’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을 작동하는 것은 바로 이 ‘삼요’다. 아프다는 것은 몸 안의 運氣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몸과 마음이 아프면 氣가 쇠진하여 수족에서 기운이 빠져나가 거동이 힘들고 움직임이 크게 줄어 미미해진다. 아픈 사람이 한의사에게 가면 진맥을 짚어보고 기가 허하다, 고 말한다. 물질과 비물질을 함께 아우르는 기는 꺾이기도 하고(기가 꺾인다), 막히기도 하며(기가 막힌다), 탕진하여 밖으로 흩어지기도 한다(기진맥진하다). 섭생과 양생을 제대로 하지 못해 기가 빠져나가면 몸이 조화를 잃고 기필코 병에 든다. 옛 의학책에서는 “기가 한번 흩어져 六氣가 조화롭지 못하게 되면 여러 가지 불구의 병이 들고 돌림병이 돌아 백성이 재해를 입”는다고 말한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生의 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生에의 집착과 未練은 없어도 이 生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地獄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人生을 얘기해 보세그려
趙芝熏, 「병에게」, 『사상계』 1968년 1월호
질병은 신체 기관들의 전횡적인 권력에 침묵하고 있던 질료적 흐름이 특화하며 탈주선을 만드는 것이다. 신체 내부의 질료적 흐름에 포섭된, 즉 신체 기관들의 기능 체계에 장악되어 있는 질료적 흐름은 문제가 안 된다. 인간, 동물, 박테리아, 바이러스, 분자, 미생물 들은 독립적으로 분화된 계통 속에서 각각의 질료적 흐름을 갖는다. 신체와, 신체 내부에서 외부화하는 두 개의 질료적 흐름들은 우열 관계, 즉 위계의 계통적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다. 두 개의 질료적 흐름은 균형, 관여, 배제, 공생의 관계에서 상호 동등하다. 그러나 질료적 흐름이 속도 계수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탈코드화될 때 질병이 나타난다. 이때 질병은 감염, 침입, 팽창, 해체이며, 질료적 흐름의 계통과 형질의 변환이다. 질병은 질료적 흐름의 밀도성으로 그것을 퍼뜨리거나 증식하거나 변형하거나 고갈에 이르게 한다. 신체 내부의 질서에로 환원되지 않는 속도 계수를 올린 질료적 흐름은 속도와 강밀도의 차이로 신체 내부의 질료적 흐름에 포섭되지 않고 미끄러져 나간다. 그것은 미끄러지며 특화되고 새로운 내적 환경을 조성한다. 이를테면 암은 교화되지 않은 야만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징후적 기호다. 암의 공포는 무차별적으로 흩뿌려지는 것의 공포이며, 통제할 수 없는 이상증식으로 너무나 크게 확장되는 것의 공포다. 암은 신체의 권력에 포섭되지 않는 질료적 흐름이며 달아나는 늑대다. 그것은 야생이고 야만이다. 야만이란 문명의 훈육적 질서에 의해 길들지 않는 속성이다. 야만이 길들여지면 야만은 비위생 상태에서 위생 상태로 변환된다. 늑대는 넘치고 끓어오르며 거품을 일으키고 번지며 문턱과 가장자리를 넘어서 개로 변신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늑대가 된다. 늑대의 야만성은 개라는 질료적 흐름 속으로 잠복한다. 개는 늑대의 탈영토화이며 늑대라는 계통에서 발생한 질료적 흐름의 변이체다. 개는 주체의 명령에 복종하지만 늑대는 그 명령을 전혀 듣지 않는다.
조지훈의 「병에게」라는 시는 병을 의인화하고 그것이 주는 전언을 수신하는 형식을 취한다. 병은 우울한 방문객, 오랜 친구다. 친구라면 병과 싸울 까닭이 없다. 시인은 병을 “휴식을 권하고 生의 畏敬을 가르치는” 유익한 벗이라고 한다. 병은 내가 몸을 혹사하며 일을 한 뒤 쉬려고 할 때 찾아온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이런 구절에는 병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과 같은 어떤 부정적인 의식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질병은 일종의 혼돈이며 불확정적인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병을 마치 반가운 친구라도 되는 듯 맞이한다. 거기에 일말의 두려움도, 불안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虛無 /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시인은 어느덧 달관과 체념의 편안함 속에 있다. 그리하여 병이 “나즈막하고 무거운 음성”으로 속삭이는 전언을 삶이 주는 하나의 의미로 흐뭇하게 받아들인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병을 품을 때 병은 내게 다정한 도움의 손길을 베푼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감정은 몸에 영향을 미친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 의학에서는 몸과 마음을 따로 떼어보지만 동양 의학에서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본다. 어떤 생각을 품고 감정을 갖느냐는 몸의 생리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파 죽겠어, 죽을까봐 무서워,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몸의 면역력을 떨어뜨린다. 괜찮아, 병을 통해서 삶에 대해서 배울 것이 있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거야, 라는 긍정적인 마음과 태도, 말은 치유의 효과를 가져오는 희망의 씨앗들이 될 수 있다. 건강이 현실의 예측불가능성에 대응하는 몸의 잉여라면 병은 그것에 대응할 수 없는 몸의 결핍이다. 활력의 잉여 속에 있다면 몸은 휴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몸의 부림이 활발한 가운데에는 고즈넉하게 생의 외경을 받아들일 틈조차 생기지 않을 것이다. 덜컥 병에 걸리면 그 모든 잉여의 활력들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눈에 띄게 움직임은 줄고 행동반경이 위축될 것이 뻔하다. 휴식은 흩어진 기를 모으고 잃어버린 조화를 찾으려는 자기회복의 시간이다. 시인은 병이 불러오는 휴식의 강제 속에서 삶을 그윽하게 성찰하며 맛본 삶의 다감함에 고마움을 표한다.
어두운 방 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 「성탄제」
음은 거둬들이고(斂) 저장하며(藏) 沈潛하는 성질을 갖는다. 땅, 달, 여자, 작은 것, 찬 것, 부드러움, 정적이고 어두운 것 따위를 말한다. 양은 발산하고 드러내며 생장(生長)하는 氣를 뜻한다. 하늘, 해, 남자, 큰 것, 더운 것, 강함 활동적이고 밝은 것 따위를 말한다. 「성탄제」는 아마도 시인 자신의 어린 시절에 겪은 일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시다. 시의 화자는 병에 걸린 어린애다.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다. 어린애가 위중한 병색을 드러내자 젊은 아버지는 눈 속을 헤치고 붉은 산수유 열매를 구해온다. 떨며 병상에 누워 있는 어린애는 스스로를 “한 마리 어린 짐승”이라고 느낀다. 짐승은 무지몽매하며 동시에 순결한 존재다. 이 상황을 감싸고 있는 시간은 밤이고, 계절은 눈이 내려 쌓인 한 겨울이다. 어린아이, 겨울, 밤, 이 모두를 감싸고 있는 어둠과 대기의 차가움 따위는 음의 기운을 띤다. 바알간 숯불, 아버지, 산수유 열매 따위는 양의 기운을 띤다. 이 시에서 평온한 기운을 느끼고 치유의 효과가 기대되는 음과 양이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병의 유발과 치유의 단계에서 마음과 감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사람들이 앓는 병의 대부분은 심신 상관적 psychosomatic 질병이다. 마음과 면역 체계 사이에는 아주 긴밀하고 섬세한 양방향 소통체계가 있다고 말한다. 마음의 상태는 몸의 면역 체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부정적 사고, 해로운 감정 패턴, 우울증, 불면 따위는 몸의 면역 기능을 떨어뜨리고 몸이라는 물질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이다. 긍정적인 사고, 사랑과 신뢰에 대한 확신, 밝은 웃음, 편안한 숙면 따위는 몸의 면역력을 높이고 치유 효과를 극대화한다. 다시 시로 돌아가보자. 어린애는 바알간 숯불이 피어 있는 아늑한 집안에서 편안하게 누운 채 할머니와 젊은 아버지의 지극한 간병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아파 누워 있는 어린애는 제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는 양육자이자 보호자인 두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좋은 소통이 그침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린애는 병중에 있으면서도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차가운 기운, 즉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서 사랑의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다. 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픈 어린애는 필경 병을 떨치고 일어났을 게 분명하다.
시 치료는 피치료자의 감정적·신체적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피치료자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피고 그에 맞는 시를 선택해야 한다. 시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치료자는 피치료자와 많은 대화를 통해 그의 억압과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문제를 찾아내는 것은 그것을 해결하는 첫 번째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 적절한 시를 골라내야 한다. 피치료자의 감정 상태에 맞는 시를 선택해야 하고, 그 시를 피치료자와 함께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감정을 투사하고 감정의 전이와 역전을 통해 문제의 핵심을 짚어보고 혼란과 고통에서 서서히 벗어나도록 유도해야 한다. 너무 어려운 시를 선택한다면 피치료자가 그 시를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치료 효과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피치료자의 이해 수준에 맞는 시를 고르고 그 시에 관한 공감 여부에 관해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 자, 여기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라는 시가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안과 밖은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그것은 태극 안에 음과 양이 그러하듯 하나 안의 둘이다. 천지에 음양이 있고 사람에게는 남녀가 있다. 천지가 봄·여름·가을·겨울로 변화하며 순환하듯 사람과 식물은 생장·소멸하며 순환한다. 하늘에 오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하늘에 육률이 있고 사람에게는 육부가 있다. 땅에 12경수가 있고, 사람에게는 12경맥이 있다. 사람의 몸은 우주의 축약이다. 산다는 것은 약동하는 천지 만물이 살아 있는 그대로 몸의 생리적 구조에 조응하는 것이다. 천지의 몸과 나의 몸은 기를 하나로 소통하며 조화에 이를 때 온전하다. 기의 소통이 막히고 조화가 깨질 때 몸 안의 간, 심, 비, 폐, 신에 있는 風·寒·熱·濕·燥·火의 평형이 무너지며 스스로 조절 능력을 잃는다. 그래서 병이라고 부르는 사태가 생긴다. 치유는 기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잃어버린 조화를 찾게 해주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파동이다. 「알 수 없어요」는 천지의 약동을 다 품고 있는 시다. 오동잎은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만들며 “떨어지고”, 서풍에 검은 구름은 어디론가 “몰려가고”, 푸른 이끼가 돋은 큰 나무가 뿜어내는 수액의 향취는 고요한 하늘을 “스쳐가고”, 작은 시내는 돌틈 사이를 “흘러가고”, 저녁놀은 저 하늘 위에 “퍼져간다”. 천지 만물은 저 스스로 움직이고, 이것들은 눈과 코와 귀에 고스란히 포착된다. 이 시에는 우주를 이루는 五行의 요소가 다 있다. 음양오행학설은 한방의학의 중요한 기초이론이다. 한방의학의 自然觀과 인체의 生理·病理에 대한 원리 ·진단 ·치료 ·약물 등에 대한 이론은 이 음양오행의 기초 위에서 설명된다. 이는 한방의학의 발상지인 중국의 고대 의학자들이 음양오행학설을 응용하였기 때문이다. 음양을 사람의 몸에 적용시켜 보면 외(外)는 양이고 내(內)는 음이며, 장(臟)은 음에 속하고 부(腑)는 양에 속한다. 인체의 생리기능으로 볼 때 혈압상승, 분비액의 증가 등은 양적(陽的) 현상이며, 혈압강하 ·분비액의 저하 등은 음적(陰的) 현상이다. 사람의 몸에서 이 음양의 조화가 깨어지면 병이 생긴다. 한방의학에서 병의 치료는 양과 음의 과다(過多)와 부족을 조화시켜 무너진 음양의 균형을 되찾도록 해주는 것이다. 한방의학에서는 오행의 생극(生剋)의 이치를 운용하여 사람의 몸에 있는 내장(內臟)의 상호자생(相互資生) ·상호제약(相互制約)의 관계를 설명하며, 오행의 귀납법(歸納法)으로 인체의 각 부위간(部位間)의 상호연관을 설명한다. 한대(漢代)의 오행학자인 동중서(董仲舒)는 오행을 자연 질서나 자연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첫째, 자연 현상으로 본 오행
목(木)은 봄이다. 줄기와 잎이 돋아나므로 생성을 품는다. 숫자는 3, 8이다.
화(火)는 여름이다. 만물이 생장하며 날은 더워지고 나무는 무성해진다. 숫자는 2, 7 이다.
토(土)는 사계절 모두에게 해당한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을 낳고 기른다. 숫자는 5, 10이다.
금(金)은 가을이다. 무르익은 오곡을 거두어들인다. 숫자는 4와 9이다.
수(水)는 겨울이다. 수확한 것을 저장하고 휴식을 취한다. 숫자는 1, 6이다.
둘째, 성질로 본 오행
목(木)은 생기발흥작용(生機發興作用), 화(火)는 활동작용, 토(土)는 잉육배식작용(孕育培植作用), 금(金)은 금제작용(禁制作用), 수(水)는 장복작용(藏伏作用)을 나타낸다고 본다.
셋째, 색과 방향으로 본 오행
목(木)은 잎이 푸른색을 나타냄으로 청색이고, 절기는 봄이고 방위는 동쪽이다.
화(火)는 불꽃이 빨갛기 때문에 적색이며, 절기는 여름이고 방위는 남쪽이다.
토(土)는 땅의 색을 나타냄으로 황색이며, 임금을 뜻함으로 평민은 이 색을 사용할 수 없었다. 방위는 동서남북의 중앙을 뜻하며 사방을 관장한다.
금(金)은 칼을 나타냄으로 백색이다. 쇠는 검은색이나 숫돌에 갈면 흰색이 나타난다. 절기는 가을이고 방위는 서쪽이다.
수(水)는 물을 나타냄으로 보통은 흰색이나 파란색이다. 약을 달인 물이나 고여 썩은 웅덩이 물은 검은색이다. 아울러 모든 색을 섞으면 흑색이 된다. 절기는 겨울이고 방위는 북쪽이다.
수(물)는 아래로 흐르면서 만물을 적시고, 화(불)은 타오르며 위를 향하고, 목(나무)은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로 가지를 뻗고, 금은 쇠는 바위와 같은 것을 나타냄으로 단단하고 마른 성질을 갖고, 토(흙)은 들과 산, 때로는 마당을 뜻하며 만물이 생장하는 터전이다. 곽말약(郭沫若)은 일찍이 “물에서 아래로 젖어드는 이치를 뽑아냈고, 불에서 위로 타오르는 이치를 뽑아냈으며, 나무에서 휘어지거나 곧다는 관념이 나왔고, 쇠에서 마음대로 구부릴 수 있다는 생각이 나왔고, 땅에서 곡식을 생산한다는 생각이 나왔다. 또 오미(五味)에서는 아래로 젖어드는 것이 짜다는 것은 바닷물에서 나온 관념이고, 위로 타오르는 것이 쓰다는 것은 물건을 태우면 쓴맛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행의 상생 상극의 순서도 생활의 경험에서 연원한다.”라고 말했다. 『주역』의 「繫辭傳」에 따르면 “우주에서 삼라만상이 무궁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陰과 陽이라는 이질적인 두 기운이 지닌 바의 작용으로 인하여 모순과 대립이 나타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을 변화라고 한다.”고 했다. 「알 수 없어요」는 오행을 이루는 물, 불, 흙, 쇠, 나무와 같은 요소들이 음과 양이 적절하게 조화된 가운데 배치되어 있으며, 이 안에는 생명 기운이 충만해 있다. 그 기운을 받아들이면 요동치는 몸과 마음이 진정되고, 몸과 마음이 쇠잔해 있다면 생기를 북돋운다. 가만히 읊조리면 저절로 몸과 마음이 두루 평안해지는데, 이 평안 속에서 안과 밖의 기가 고요하게 소통하며 몸은 저 스스로 필요한 조화와 안정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