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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日本基督教団 甲陽園教会 원문보기 글쓴이: doota
<福音と世界> 2010年 10月.
「韓国からの声――日韓併合から100年の年に日本人に伝えたいこと」- (10)
제 3의 눈으로 본 1910년
洪伊杓 (延世大學大學院, 基督敎大韓監理會牧師)
지난 호에서 ‘1910년’의 또 다른 이름들을 소개하면서 자기 입장만이 아닌 상대방의 눈으로도 1910년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이번에는 ‘제 3의 눈’, 즉 3인칭 시점의 화자(話者) 입장에서 1910년을 생각해 보고 싶다. 즉 1910년 당시 한국과 일본에 체류하였던 이방인들의 눈에는 100년 전의 풍경이 어떻게 비춰졌는지 보자는 것이다.
한일병합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1909년 9월 16일,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서울 종로의 YMCA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선포(布)하며 바라건데 여러분이 더욱더 용기(勇氣)를 떨쳐(振) 우리 교회(我敎會)를 성대하게 하여 내가 믿고 사랑하는(信愛) 곳인 한국이 지극히 완전한(純然) 독립국(獨立國)이라는 것을 항상(常) 마음에 두기로(留意) 결심(決)하고 결코 한 순간(時)도 망각(忘却)하지 말고 기대하는(望) 마음으로써(云) 살기 바랍니다.” (『統監府文書』(34) 警秘第238號, 1909年9月17日)
대한제국의 국권이 점점 일본에 의해 강탈되어가던 당시, 언더우드가 행한 전도 강연을 통감부 소속 경찰이 은밀히 기록한 것이다. 이 문건을 상부에 보고한 경시총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는 “언더우드의 연설은 청중에 대(對)하여 비상한 감동(感動)을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하였다.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활동한 언더우드는 그 이듬해 체결된 한일병합을 좀처럼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발행하던『예수교신문』에 강제 병합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고 갓 출범한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를 비판하였다. 이 일로 1910년 11월 29일자 신문이 모두 압수당한 뒤, ‘치안방해죄’를 이유로 폐간조치 되었다. 곧 이은 1910년 12월에는 민족 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총독부가 조작했던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그의 아들 元漢慶(H.H.Underwood)은 아버지에 대해 “反日(Anti-Japanese)적이며, 정부의 권력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1910년 조선반도에서 활동한 파란 눈의 한 이방인, 언더우드는 제국주의 일본에게 껄끄러운 ‘제 3자’였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제 3의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한국인들로부터 그가 지극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나는 파란 눈의 미국인이지만 내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말한 그의 장손자 元一漢(H.G. Underwood II)의 말처럼 언더우드는 그렇게 한국인과 하나가 된 이방인이었다.
반면 일본에는 해리스(M. C. Harris)라는 선교사가 있다. 그는 일생 중 50년 정도를 일본에서 살았으며 자연스럽게 일본과 일본인을 형제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늘 “나는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을 제2의 고향으로 삼기도 했다. 1873년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은 그는 홋카이도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 때 그는 札幌農學校의 1-2기생들을 직접 지도하고 세례까지 주었다. 그 안에는 우치무라 간조, 니토베 이나조 등 훗날 근대 일본의 지도자가 되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우치무라는 자신의 회고록 How I Become a Christian에서 “해리스 목사는 좋은 사람이므로 그의 교회도 당연히 좋을 것이라고 믿었다”라며 그를 강하게 신뢰했다. 해리스는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3등 서옥장(瑞玉章)을 받기도 했으며 지금도 수많은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한 해리스는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마감되고 동시에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던 1904년에 미감리회의 일본 및 한국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그 때부터 해리스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병합에 대해 본격적으로 두둔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본인들이 공사(公私)의 구분 없이 정의와 사랑으로 한국인들을 대하고 소위 병합된 태도로서 한국인들을 계도(啓導)해 주기를 바란다. 일본제국이 뒤에서 한국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그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기뻐해야 할 일이다.” (“ハリス監督談片”, <護敎>, 1906년 6월 30일자.)
1905년에 강제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헐버트, 언더우드 등 내한 선교사들이 노력하고 있을 때, 같은 미국인인 해리스는 병합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하늘의 섭리’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병합이 ‘하나님의 뜻’인양 일본의 침략을 합리화하였다.
“일본과 한국 양국이 잘 접근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특히 일본이 한국의 지도자임은 하늘의 섭리(天の攝理)라고 해야겠다. 일본의 도움을 배척하는 것은 한국을 위하여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는 복음의 입장에서 지난 양국의 정폐(情弊)를 타파하고 정신적으로 합동함으로써 아마 이 정강(政綱)을 두고는 한국 지도의 양책(良策)이 없다.” (“ハリス監督対韓意見”, <護敎>, 1910년 1월 15일자.)
또한 해리스는 병합 이후에도 “일본의 지배 아래에 놓인 한국인들이 행복하게 되었고 보다 나아졌다”고 말하였다. 10년 뒤인 1919년 3.1독립운동의 목격하고서도 해리스는 변함없이 한일병합으로 인해 한국인들이 행복해졌다고 믿었다. 이러한 해리스와 자주 마찰을 빚던 내한 선교사 스크랜튼(W. B. Scranton)은 해리스에 대해서 “지나치게 일본편(pro and ultra Japanese)”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제국의 입장에서만 한국을 바라보았던 해리스의 시각은 한국의 크리스찬들에게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결국 1921년 5월 8일 도쿄에서 해리스가 별세하던 순간, 한국의 반응은 냉소적이기만 했다.
“해리스 감독은 늘 자기 해골은 일본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그것만 보아도 그의 친일심(親日心)이 얼마나 두터운 것이었는지 대략 짐작할 바이다. 일본인들 특히 일본 정부에서 감독의 별세를 대단히 아연(啞然)히 여길 지로다.” (“해리스 감독 별세”, <신한민보>, 1921년 5월 12일)
언더우드와 해리스, 한국과 일본에서 1910년을 동시에 살았던 이 두 선교사의 시선은 이처럼 상극(相剋)을 치닫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그들이 몸담고 있던 곳의 한국인, 일본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지금도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1910년을 바라보았던 ‘제 3의 눈’마저도 자기중심적인 ‘1인칭 시점’에 함몰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제 3자에게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언더우드와 헐버트, 일본에서는 해리스와 같이 자신들의 입장만을 지지하고 변호해 준 이들에 대해서만 맹목적인 신뢰를 보냈던 우리가 아니었을까? 그들 모두가 한 분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것은 잊은 채 말이다.
여기서 필자는 미국 남감리교회의 램버스(W. R. Lambuth) 선교사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그는 북감리회의 해리스 감독과 더불어 남감리교회의 일본 및 한국연회를 담당한 감독이었다. 공교롭게도 램버스는 해리스와 같은 해인 1921년 9월 26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지만 연 이은 그의 죽음을 대하는 한국인의 반응은 얼마 전 해리스에 대한 것과 사뭇 달랐다. “한국의 좋은 친구를 잃었다”는 제호의 다음 기사를 보자.
“램버스 감독은 다른 감독과 같이 수단을 위주치 아니하는 진실한 교인의 신앙을 받은 이더라. 불쌍한 중에 있는 한인(韓人)들의 예수교 신심이 풍부함에 대하여 무한히 동정하여 일인(日人)의 세력을 거리끼지 아니하고 빈익(貧益)한 한국 청년 교육을 극력 협조하던 이라. 그러므로 일제(一齊) 한국 교인들은 감독의 별세에 대하여 슬퍼함을 마지 아니 한다.” (“한국의 좋은 친구 잃어, 램버스 감독의 별세”, <신한민보>, 1921년 10월 27일자.)
한국 남감리회를 대표하던 梁柱三 목사는 <基督申報> 10월 12일자에서 “오호(嗚呼) 통재(痛哉)라! 특별히 죠션남감리교회는 일대 친우와 일대 은인을 일엇다. 그 손실과 그 불행을 무엇을 가지로써 형용하며 우리의 애통함을 무엇으로써 발표할가. … 슬프다! 하나님께셔 그러한 인격을 주셧다가 하나님께셔 다려가시니 … 그 갓흔 인물을 우리의게 다시 주시옵소서 하고 긔도할 뿐이로다”라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네 달 전 해리스의 별세 직후 나타난 한국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아마도 한국과 일본을 함께 아우르며 어느 한 쪽에 기울어진 편애적 사랑이 아닌 보다 초월적 차원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램버스는 유명한 관서학원대학(關西學院大學) 설립자이기에 일본에선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낯선 인물이다. 아마 일본에서의 큰 족적으로 인해 한국인들은 그저 일본 선교사라고만 치부했던 탓이리라..
하지만 그는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지극한 사랑과 동정심을 품은 사람이었다. 미국 남감리회가 처음으로 한국 선교를 시작할 때, 그는 해외선교부의 총무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고, 윤치호, 양주삼 등의 지도자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도왔다. 특히 1910년 한일병합 직후 터진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 등이 투옥되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일제 당국의 탄압과 감옥 수감으로 고통 받던 교역자와 교인들을 돕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였다. “어디에서든 고통 중에 있더라도 늘 진리와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복역 중인 동포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신한민보>, 1920년 7월 29일)던 그의 설교 메시지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램버스는 한일 양국 교회가 함께 존경하고 기념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인물이다.
“저는 계속 지켜 볼 것입니다! (I shall be constantly watching!)”
램버스가 요코하마의 한 병실에서 눈을 감던 순간 우리를 향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다. 램버스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서 만나야만 했던 동아시아의 두 나라, 일본과 한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고통 받던 한국을 한없이 동정하면서 일본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했다. 그는 냉정히 ‘제 3의 시선’을 지켜내려 애썼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가 남긴 유언은 마치 한일 양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참회와 용서’를 통해 ‘화해와 공생’의 길을 열어 갈지 하늘 위에서도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가 언더우드나 해리스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내는 동안 간과하고 있던 램버스의 마지막 음성을 깊이 생각해 볼 때이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새로운 100년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觀照者의 시선, 제 3의 눈이 우리에게 필요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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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音と世界> 2010年 10月.
「韓国からの声――日韓併合から100年の年に日本人に伝えたいこと」- (10)
「1910年」- 第三の視線から
洪伊杓 (延世大學大學院、基督教大韓監理会牧師)
前月号では「1910年-その呼び名」と題して自分の立場からだけではなく相手の立場から見た「1910年」の意味を考えてみた。今回は「第 3の視線」すなわち3人称の立場から「1910年」を考えてみたい。今から100年前、韓国と日本に滞在していた外国人の目に映った光景はどのようなものだったのだろうか。
日韓併合直前の1909年9月16日、初めて朝鮮半島の地を踏んだプロテスタント教会の宣教師アンダーウッド(韓国名:元杜尤(ウォンドゥウ)、H.G.Underwood)はソウル鐘路(ヂョンロ)にあるYMCA会館で次のような演説をした。
希くは 諸君一層の勇気を振ひ 我教会をして益々盛大ならしめ 余か信愛する處の韓国をして 純然たる独立国たらしむることに常に留意し 決して寸時も忘却させらんことを望む (『統監府文書』(34) 警秘第238号、 1909年9月17日)
当時大韓帝国の国権が日本によって徐々に奪われていく中、アンダーウッドのこの演説を統監府所属の警察が密かに記録していたのだ。これを上層部に報告した若林警視総監は「アンダーウッドの演説は聴衆に対し非常の感動を與へたる」と評価した。韓国内で30年近く活動してきたアンダーウッドは、その翌年に締結された日韓併合条約をなかなか認め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結局自らが発行した『イエス教新聞』において日本による強制併合の不当性を訴え、朝鮮総督府の武断統治を批判した。1910年11月29日に発行されたこの新聞はすべて押収され、その後「治安妨害罪」の嫌疑で廃刊処分に追い込まれた。これに続き、同年12月には民族活動家を弾圧するために総督府が捏造した「105人事件(寺内総督暗殺未遂事件)」に関わったという理由で受難を被った。彼の息子である元漢慶(ウォンハンギョン)(H.H.Underwood)は父について「反日的で(Anti-Japanese)政府の権力者たちには有り難くない人」だったと記している。このように1910年当時、朝鮮半島で活動した青い目の宣教師アンダーウッドは帝国主義を打ち立てた日本に対して喜ばしくない「第3者」であり、何とも面倒な「第3の視線」を持っていた。同時にこれは韓国人が彼に対してこの上ない尊敬の念を抱いていたことを意味している。「私は青い目のアメリカ人だが、私の体内には韓国人の血が流れている」とまで言った彼の孫、元一漢(ウォンイルハン)(H.G.Underwood II)の言葉のようにアンダーウッドは韓国人と一体になった外国人だった。
一方、その当時日本にはハリス(M.C.Harris)という宣教師がいた。彼は約50年間日本で暮らし、自然と日本人を兄弟のように愛するようになっていた。彼は「私はアメリカで生まれた日本人である」と言い、日本を第二の故郷と考えていた。1873年に初めて日本の地を踏んだ彼は北海道で宣教活動を始め、札幌農学校の1、2期生を直接指導し洗礼を授けた。その中には内村鑑三や新渡戸稲造など後日近代日本のリーダーとなっていった人物が多数含まれていた。内村は自身の回顧録“How I Became a Christian”に「われわれはただH氏(ハリス)が善い人であることだけを知っていた。だから氏の属する教会もまた善い教会のはずだと思ったのである。」(1878年12月1日)と記し、ハリスを強く信頼していたことがうかがえる。ハリスは明治天皇から瑞玉章を三度受けるなど今でも多くの日本人から尊敬されている。
彼は日露戦争が日本の勝利で終わり、同時に韓国への侵略が本格化し始めた1904年、米メソジスト教会から日本及び韓国地域の監督に選出された。その頃から彼は日本の韓国侵略と併合に関して擁護する姿勢を見せていた。
日本の人々公私の別なく、正義と愛とを以て彼等に対し、所謂恩威併せ至ると云ふ態度で、彼等韓民を開導して貰ひたいものである。日本帝国が後楯となりて韓国の政治に干渉するてふことは、彼等韓民殊に青年輩に非常なる刺激を与へたやうだ、之れは彼の国の将来にとりて甚喜ぶべきことであらうと思ふ。 (「ハリス監督談片」『護敎』、 1906年6月30日)
1905年に強制された乙巳(ウルサ)条約(第二次日韓協約)の不当性を世に知らせるためハルバート、アンダーウッドなど韓国に滞在する宣教師たちが奮闘している時、同じアメリカ人のハリスは併合の当為性を主張していた。さらには「天の摂理」という表現まで用い併合があたかも「神の御旨」であるかのように日本の侵略を合理化していった。
余が韓国にありて人民に告ぐる所は、宜しく日韓両国と接近し茲に新国を建設すべしとの事なり、殊に日本が韓国の指導者たるは天の摂理と謂ふべし、日本の助力を排斥するは韓国のために決して策の得たるものにあらず、余は福音の立場より旧来両国疎隔の情幣を打破し精神的に合同するを以て韓国の利益なりと思ふなり…余の信ずる所にては是れ神意にして恐らく此政網を措て韓国指導の良策あるべからず (「ハリス監督の対韓意見」『護敎』、1910年1月15日)
またハリスは併合後も「日本の支配下に置かれた韓国人が幸せになり、より良くなった」と述べている。それから10年後に起きた1919年、3.1独立運動を目の当たりにしてもハリスは相変わらず日韓併合によって韓国人が幸せになったと信じていた。このようなハリスとしばしば摩擦を引き起こした来韓宣教師スクラントン(W.B.Scranton)は、ハリスに対して「過度の日本寄り(pro and ultra Japanese)」と批判したことがある。このように日本帝国主義の立場から韓国を見ていたハリスについて韓国のキリスト者たちは失望せざるを得なかった。結局1921年5月8日、東京でハリスが召された時の韓国内での反応は冷ややかなものだった。
ハリス監督は常に自分の骨を日本に埋めるよう願うと言っていた。それを聞いただけでも彼の親日心がいかに篤かったかおおよそ見当がつく。日本人、特に日本政府は 監督の死を唖然と受け止めている (「ハリス監督死亡」『新韓民報』1921年5月12日)
アンダーウッドとハリス、韓国と日本という異なる地で同じ1910年を生きたこの二人の宣教師の視線が相克する。彼らの視線は自らが従事していた場に生きる韓国人あるいは日本人のそれと特別変わらなかった。つまりアンダーウッドは韓国人の視線で、ハリスは日本人の視線で物事を見ていたのである。それゆえ彼らは今でも韓国と日本というそれぞれの地で人々に愛されている。そう考えると私たちは1910年を眺める「第 3の視線」をも自己中心的な「1人称」の立場から見てきたのではないか。私たちは「第3者」から自分たちが見たいものだけを見て、聞きたいことだけを聞いてきたのではないか。韓国ではアンダーウッドとハルバート、日本ではハリスのように、自分たちの立場を支持し弁護した「第3者」に盲目的な信頼を寄せていたのではないか。彼らは皆、唯一なる神の子でありキリストの弟子であったことを忘れたまま。
ここでもう一人、上海で生まれ1886年に来日したアメリカ人宣教師ランバス(W.R.Lambuth) を紹介しよう。彼は北メソジスト教会のハリス監督と同時期に日本及び韓国の南メソジスト教会年会を担当する監督だった。あいにくランバスはハリスが天に召された年、1921年9月26日に神のもとへと帰った。しかしランバスの死に対する韓国人の反応はハリスに対するものとは全く異なっていた。それは当時の新聞に「韓国の良い友を失った」という見出しで載せられた記事を見ても明らかだ。
ランバス監督は他の監督のように手段に頼らない真実の信仰者だった。不憫な韓人たちの耶蘇教に対する豊かな信心に同情し、日人の勢力に気を遣うことなく貧益な韓国青年の教育に極力協助する方だった。それゆえ一斉に韓国のキリスト者たちは監督の訃報に接し極めて悲しんでいる。 (「ランバス監督の逝去-韓国の良い友を失った」『新韓民報』1921年10月27日)
当時、韓国の南メソジスト教会を代表する梁柱三(ヤンジュサム)牧師は10月12日付の「基督申報」において「嗚呼痛哉!…朝鮮の南監理教会は一大の親友と一大の恩人を失った。…その損失とその不幸をどのように形容し、私たちの悲しみと痛みをいかに表現すればよいのか。… 悲しい!神があのような人格をお与えになり、また神が連れて行かれるのだから…ランバス博士のような人物を私たちに再び与えたまえ、と祈るだけだ。」と彼の死を悲しんだ。
同じ年の4ヶ月前にハリスが召された直後の雰囲気とは全く異なっていた。おそらくこれは一方を偏愛することなく日韓両国を包み込むような超越したキリストの愛を彼が実践したからではないだろうか。ランバスは関西学院大学の設立者であるため日本ではよく知られているが、韓国ではそれほど知られていない。おそらく日本で功績を残した人物だけに韓国人にしてみれば日本で活躍した一宣教師に過ぎないと考えてしまうのだろう。しかし実際彼は日本のみならず韓国に対しても深い愛情と同情心を持っていた。米南メソジスト教会が初めて韓国宣教を始めた時、彼は海外宣教部の総務として中心的な役割を果たし、尹致昊(ユンチホ)や梁柱三(ヤンジュサム)など韓国キリスト教のリーダーたちと友情を交わし協力した。1910年の日韓併合直後に起こった「105人事件」で尹致昊(ユンチホ)などが投獄されると釈放を願う祈祷会を開いた。また、1919年の3.1運動直後には日帝政府の弾圧と収監で苦しむ牧会者や信徒を助けるために協力した。「どこにいても、たとえ苦難の中にあっても、常に真理と愛のために、また服役中の同胞たちのために祈りなさい 」(『新韓民報』、1920年7月29日)との彼のメッセージは、韓国のキリスト者にとって生涯忘れることのできない慰めと力を与えた。それゆえランバスは日韓両国の教会が共に尊敬し記念することのできる稀な人物であると言える。
「私はずっと見守っている! (I shall be constantly watching!)」
この言葉はランバスが横浜のある病室で召される時、 最後に私たちに遺した言葉だ。ランバスは支配者と被支配者として出会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東アジアの両国、日本と韓国にキリストの福音を伝えた。彼は苦難を味わう韓国人に同情しながら日本人に対してもキリストの愛で接した。彼は冷静に「第3の視線」を守り抜こうと努力した人ではなかっただろうか。彼の遺言は、まるで日韓両国のキリスト者が「懺悔と赦し」を通して「和解と共生」の道を切り拓いていくかどうか天から見守っていると言っているかのようだ。過去一世紀の間、私たちがアンダーウッドやハリスに過度な関心を寄せる中、見過ごしてきたランバスの最後の言葉の意味を深く考えてみたい。日韓強制併合100年を迎えた今、これから始まる新しい100年をしっかりと歩んでいくために私たちを見つめる「観照者としての目」すなわち「第3の視線」が必要ではなかろう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