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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들]
초고대문명은 존재했는가?
4500년 전의 대피라미드 건축이,석기와 간단한 청동기 도구로 석회암을 채굴하고,통나무와 지렛대, 그리고 윤활유를 사용해서 돌을 운반했으며,완만한 경사로를 피라미드 상부까지 건설해서 돌을 쌓아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언뜻 생각하기에 가능할 것 같아도 건축의 규모를 헤아려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사용된 돌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피라미드를 한변의 길이가 30cm인 정육면체 블록으로 쪼개면 지구둘레의 3분의2까지 늘어놓을 수 있다. 무게로 따지면 총 6백만t이 넘는다.
이정도 규모의 토목건축사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시에 충분한 사회적구조가 뒷받침됐음을 의미한다. 토목건축사업은 여러 기술과 산업들이 총집결돼 이루어지는 것으로 건축당시 과학기술력의 전체적인 수준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축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초첨단 장비를 동원하지 않고 대피라미드를 건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대피라미드 건축에 적용된 오차의 범위가 오눌날의 건축물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이다.
현대기술 뺨치는 정밀성
예를들어 오늘날 가장 정밀한 건축물의 대표격인 파리천문대와 그리니치천문대는 각각 정확히 자오선(어떤 지점에서 정북과 정남을 따라 천구에 상상으로 그은 선)과 일치하도록 설계됐다. 하지만 실제로 측정한 결과 각 천문대는 자오선방향에 대해 6호분과 9호분씩 틀어져 있었다. 이에 비해 대피라미드는 3호분 남짓 어긋나 있을 뿐이다.
또 오늘날 레이저빔을 이용한 초정밀 수준기(평면의 수평 정도를 측정하는 기계)로 건설되는 건물의 수준 오차는 전체 규격의 0.2% 남짓인데 비해, 대피라미드는 전체 밑면적에서 겨우 0.03% 정도의 오차를 보여준다. 즉 대피라미드건설에 적용된 기술과 기능이 오늘날보다 월등히 우수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일부 고고학자들은 당시 이집트인들의 기능적인 능력을 극찬하면서 그들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건축의 정밀도가 전적으로 기능에만 의존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보다 당시에 매우 발달한 기술수준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즉 그들의 초인적인 기능을 인정하더라도 최소한 대피라미드가 건설될 때 오늘날의 정밀측정기에 버금가는 기기가 사용됐음에 틀림없다.
이런 증거는 초고대에 구현된 다른 기술적 업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까마득한 옛날에 현재와 같은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음을 확인시켜준다.
선왕조시대에 제작된 돌항아리의 신비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3천8백년 전에 건설되기 시작됐다고 한다. 즉 상·하 이집트가 통일돼 왕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대피라미드와 같은 초거대·초정밀 건축을 할 수 있는 문명이 이집트땅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 이집트 통일왕국은 씨족사회와 부족사회, 그리고 다음 단계인 부족국가 형태를 거치면서 더욱 발달한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찬란한 수준의 고도산업사회 붕괴 후에 다시 시작한 문명이었음이 명백하다.
이런 설명을 지지해주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대피라미드 건설수준에 어울리는 정밀가공기술이 그것이다. 정밀가공 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증거물은 기원전 4천년경 선왕조시대에 발견되는 돌항아리다.
주류 고고학자들은 왕조 형성기 이전이 부족국가의 신석기시대였으므로 당시 신석기 항아리가 만들어진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항아리에 적용된 기술측면에서 바라보면 항아리가 미개문명의 뉘앙스를 풍기는 신석기시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왕조시대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돌항아리들은 현무암, 화강암, 섬록암과 같이 쇠보다 강한 암석을 깎아서 만든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돌항아리들이 제례의식을 위해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특별히 제작한 수공업제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항아리의 수는 3만여개가 넘는다. 즉 그 옛날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것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항아리가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고성능모터가 동원돼야
돌항아리 안팎 표면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 항아리를 회전시키며 가공한 것이 틀림없음을 증명해주는 미세한 동심원모양의 가공흔적이 발견됐다. 항아리 제작에 선반이 사용됐음을 알려주는 증거다.
이는 우리 인류기술사에 일대 지각변동을 초래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발견이다. 선반작업은 물체를 고속으로 회전시키면서 절삭공구로 안팎을 깎아내는 공정이다. 하지만 현무암같이 쇠보다 단단한 돌을 절삭하는 일은 오늘날 특수공구로도 불가능하다.
설령 그런 용도의 절삭공구가 개발된다고 해도 공구와 물체 사이에 높은 압력을 걸어줘야 한다. 또 물체가 초고속으로 회전해야 한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이집트학 학자 플린더스 피트리는 이런 가공에 최소한 2t 이상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고 추정했다. 오늘날 석재가공 전문가들은 이보다 훨씬 큰 압력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압력을 공구로부터 받는 돌덩어리를 과연 초고속으로 회전시킬수 있을까.
이런 조건에 절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오늘날 기계가공에 사용되는 고성능모터 같은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터는 오늘날처럼 전기에 의해 구동됐을까.
만일 그 옛날 이 모든 조건이 구비됐다면, 당시는 신석기시대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모든 것이 존재한 고도의 산업사회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고도의 산업사회를 가정하면, 6백만t의 돌을 채석하고 운반하고 쌓아올린 기술의 수수께끼도 쉽게 풀린다.
맹성렬 /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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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게 금을 입힌 장식물 - 전기 사용 가능성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뜨는 이집트 기자대피라미드 근처에서 금도금 장식물을 발견했다.
고대 세계에서 제작된 금도금 제품은 자주 발견된다. 대부분 도금은 두텁고 불균일해 형편없는 수준을 보인다. 중세 연금술사들이 개발한 대표적인 금도금방법은 아말감을 이용한 것이다. 금을 수은에 녹여 아말감을 만든 후 이를 주물표면에 입히고 열로 수은을 증발시켜 금만 남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경우 아무래도 금박의 두께가 두껍고 균일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된 금도금장식물은 전기도금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얇은 두께와 광택을 지닌 것으로 판명됐다. 이집트 구왕국시대에 이미 전기도금이 이루어졌다는 말인가?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이 대피라미드 환기창 안에서 발견된 철제판에서도 확인됐다. 이 철제판 역시 얇은 금도금이 돼있다.
사실 인류가 전기를 처음 사용한 것은 1800년 무렵 이탈리아 과학자 볼타가 전지를 발명하기 훨씬 이전부터였다.
이보다 2천년전 이라크에서는 연금술사들이 진흙항아리와 구리편, 철심, 아스팔트 등으로 구성된 간단한 형태의 전지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에 전기가 사용됐다면, 이보다 더 이전에 전기가 사용되지 않았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실제로 기원전 2천5백년경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만들어진 식기는 오늘날 전기도금한 것보다 더 얇고 윤기가 나는 금도금이 돼있다. 즉 인류는 문명이 시작되던 초기부터 이미 전기를 사용해 금도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이런 기술은 이들 두 문명에 영향을 끼치고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초고대문명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축전지 기술 고대에 존재 - 아이디어 수준에서 그쳐
금도금 장식물의 예를 들어 대피라미드를 건설할 당시 피라미드 안에서 전기가 사용됐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가능한 일이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컴컴한 대피라미드 안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횃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피라미드 안에 횃불에 의한 그을림이 발견되지 않았다. 횃불이 아니라면 전기가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벽에 새겨진 그림 중 전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발견됐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경우 유적지에서 발견된 항아리에 물을 넣고 전구를 접촉시켰더니 불이 들어왔다는 보고도 있다. 현대의 축전지 기술이 고대에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예는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유럽이 개화되지 않은 시기에,이미 중국에서는 화약과 종이, 그리고 나침반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 초문명이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중국인들은 자신이 발명한 제품의 효용도를 한차원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느 문명의 수준을 특정한 물품으로 평가하려면, 적어도 그것이 보편적으로, 그리고 시대를 이어가며 자리를 잡아가는 징후를 보여야 한다.
다빈치가 헬리콥터나 잠수함의 원리를 구상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를 놓고 중세시대가 현대와 같은 문명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현대인들이 볼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개발품과 역작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어떤 기술도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됐다면 그것은 당시의 한 아이디어에 그칠 뿐이다.
이종호 / 한국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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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영혼의 메시지
기자,멘카우레왕(제3피라밋),카프레왕(제2피라밋,216*136m),쿠푸왕(제1,大피라밋,230*146.5m)
이집트 문화유산인 96개 피라미드 중에서도 기자지방의 `대 피라미드'는 유난히 신비스러운 비밀을 지니고 있다. 수천년 세월동안 사람들 손을 타지 않았던 이 피라미드 내부가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서기 820년 아랍인 캘립이 이끄는 탐사대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단단한 석회암에 터널을 뚫고 들어가던 중 1주일만에 어둠속에서 지하실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기대가 큰 탓이었는지 실망스럽게도 방 3개로 이뤄진 지하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단지 왕의 방이라 불리는 곳에서 뚜껑 열린 화강암 석관만이 유일하게 남아있었다.
놀랍게도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제고원에서 약 1,300년 동안 누워있었던투탄카문의 지하 묘가 도굴당했던 9세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피라미드에 대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과는 달리 기원전 400년부터 서기 700년까지 이집트를점령했던 그리스와 로마사람들은 이집트유적들에 관심을 보였다.
기원전 5세기쯤 이집트를 가끔 드나들면서 공부하던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가 피라미드의 진실된 의미는 무엇이며 그와 같은 건축물을 세운 목적이 무엇인지를 문헌을 통해 발표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알고있는 피라미드에 대한 최초의 연구 기록인 것이다.
기자지구의 피라미드는 많은 탐험가들에게 유혹을 불러 일으켰고,역사속의어떤 다른 건축물 보다도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1993년 3월 22일, 높이 147@의 `대 피라미드'는 우리들에게 심오한 비밀 한가지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무명의 독일 사람이 로봇을 통해 모든 통로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여왕의 방과연결된 하나의 바람구멍 같은 환풍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환풍구는 바깥과 완전히 뚫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로봇에 의해 발견된 여왕의 방에서 남쪽으로 연결돼 있는 이 환풍구가 뜻하는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고고학과 과학을 통해 연구한 결과 그 환풍구는 오리온별자리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오리온은 바로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별자리였다.
이처럼 피라미드의 여러 구조들은 천문학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별자리를 통해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탐사 결과는 당시 영국 언론에 의해 알려져 전유럽에서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피라미드가 파라오(왕)의 사후세계와 영혼불멸을 기원하기 위해서만 세워진 것이 아니라 고대 이집트인들의 종교와 신앙심이 바탕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시켜주었다.
지금도 고고학계에선 별을 숭배하는 종교의식과 피라미드를 세운 목적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미국 할리우드에서도 피라미드와 우주인 별을 테마로 한 `스타 게이트'같은 SF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기자지구에 있는 피라미드를 세우던 시기에 그 환풍구 방향과 연결돼 있던 오리온별자리가 서기 2005년이면 처음 자리로 되돌아와서 여왕의 환풍구와 일직선 상에 놓이는 천문학적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이집트인은 2005년에 어떤 의미를 갖고 이런 비밀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오리온별자리의 빛이 여왕무덤을 비추는 2005년에 대이변 조짐이 지구상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기자지역 피라미드의 항공사진 (좌측)
그림1: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그림2:멕시코 테오테칸 피라미드
그림4: 피라미드의 오리온자리 배치 그림3: 오리온 별자리
그림4: 피라미드의 오리온자리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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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속에 감추어진 숫자들
50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이집트 피라미드는 그 크기나 정확성에서 지금도 대단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피라미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숫자이다.
피라미드는 사각뿔 모양으로 생겼다. 밑면의 네변 길이를 모두 더해서 높이의 2배로 나누면 3.1416 이 된다. 이는 원주율 파이와 같다. 또한 한변의 길이를 1년의 정확한 날 수 365.2422로 나누면, 그 크기는 지구의 1000만분의 1이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피라미드의 높이 148.208m는 지구와 태양까지 거리의 10억분의 1이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거리를 알아낸 것도 최근 일인데 고대 이집트사람들이 알았다는 것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또한 하늘에서 보면 피라미드는 바둑판의 모양이 된다고 한다. 이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가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피라미드가 가진 숫자와 비밀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생활속의 수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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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피라미드도 우리가 전해준 비법이라면...?
현대 과학물질문명 시대에 단군신화 / 곰자손 운운은 얼마나 자신이 정보 무지상태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기원전 2700년대에 단군왕검보다 400여년 앞선 동이선조 치우천자가 실존하였음은 기록과 유물유적을 통하여 알고있지요. 과연 이시대에 서양에는 무슨일이 있었는가 ?
한가지만 예를들면바로 기원전 2600 ~ 2100년대에 건설된 이집트 피라미드입니다
아래사진을 참고바랍니다
우리나라는 "환국" → "구리(배달, 한웅)" →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약 9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역사중 적어도 치우천자의 구리국시대는 세계문명과 견줄수 있는 대제국 시대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기존학계에서는 우리 상고사에 대한 근거가 없다며, 단군은 실존인물 아닌 신화라 하며,일본인들과 똑같은 신화설 운운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병도도 죽기전에 참회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하여,단군은 신화 아닌 실존역사였으며, 일제시대때 단군제사가 끊겼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병도의 손자뻘되는 나이 40도 안된 송OO이라는 사람이, 국내 고대사 박사 1호라 선전하며 단군신화 운운, 곰새끼 운운하고 있으니, 3대 제자가 자기 스승의 턱수염을 뽑는 것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닌지요?
단순비교로 아래에 올리는 이집트 피라미드 자료를 보시고, 더 이상 기원전 2700년대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기록을 부정하는 비상식적인 분들이 되지 말기를 기원합니다.
만주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없이 많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100개 이상이다. 평균 25~100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이집트 최대 피라미드보다 더 큰 것도 있고. 제작시기도 이집트보다 한 2천년은 앞섭니다.
참고사진 (만주 피라미드들의 일부-독일인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가 찍은 것)
이런 것들을 축조하기 위해서는(고대의 기술로)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큰 것은 이집트 최대 피라미드보다 더 크다죠.
최초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 알게 되었고.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죠.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천년 앞서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죠. (대체로 지금으로부터 약 5,6천년 전으로 밝혀짐. 황하문명보다 한 천년정도 빠름)
현재, 이 유적들은 중국 공안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구요. 학술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답니다.
(중국당국은 1960,70년 대에 이미 위 피라미드들을 발굴하다가 동이(東夷)족 즉 한민족(배달민족)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므로 발굴 중단했다. 그후 중국 당국은 위 피라미드에 접근을 금지시키고 고조선과 고구려를 중국역사라 우기는 작업을 시작하였음.)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 크랴샤 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 시 관광부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구역으로 묶여있던 북중국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답니다.
그후 중국 공안당국은 촬영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촬영 직후 곧바로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 서방세계에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을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렵의 수많은 서구 고고학자들이 중국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죠.
처음에는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이라고 발뺌하였습니다.
하지만 야만민족이나 기마민족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웅장하여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 발표와 함께 10년전부터 고구려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 가르치고 전 세계에 고구려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북중국 피라미드들은 위로 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지요.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의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답니다.
그러면 5천년전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였을까? 중국인이였을까? 아니다. 중국인은 황하유역에서 농사짓고 있었다. 몽골인이였을까? 아니다.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서, 정착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 이들도 유목민이죠.
(이집트 피라미드 자료)
(피라미드 위치) 기원전 2686년 ~ 2181년에 건립된 피라미드 들이다.
(피라미드 3기) 쿠프왕146.5(137m)미터, 카프레왕(136미터), 멘카우레왕
(이형 피라미드) 기원전 2560년경 건설 : 스네푸르왕시 건설
매 모습을 한 수호신 호르스의 날개로 보호받고 있는 기원전 2500년대의 카프레왕 모습
(인면사자상) 높이 22미터, 길이 73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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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미스테리
아래사진은 중국 장안지역 피라미드를 하늘에서 본것이다. 이와같은 배치는 오리온좌의 별자리를 보고 배치하였다고 추정한다. 아직 정설은 아니지만 그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또한 대표적인 피라미드 유적지인 이집트 피라미드와 남미 마야유적지의 피라미드 축조방식이 거의 같은 기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두 문명권의 주체세력이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즉, 지식이 한곳에서 전파되었다는 가설이 성립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이러한 문명은 인류발달사 에서 말하는 보편적 지식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세부사항이 너무 밀접하여 같은 틀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장안지역 피라미드 이집트 피라미드 마야문명 미라미드 오리온 별자리
이 사진은 중국 서안지방에 있는 피라미드를 하늘에서 본 것이다. 세 지역에서 피라미드 형태의 유사성은 고사하고 똑같은 배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적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좀더 세부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추정이지만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중국에 있는 피라미드들이 축조연대가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 피라미드와 이집트, 멕시코 피라미드들이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여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벨탑과 피라미드를 연계시키면 도대체 어떤 결과가 도출되는 것일까??
남미,멕시코,테오티와칸,태양피라밋 높이63m*224m 중국 서안지역, 함양피라미드 저변길이 234m
위 2장의 피라미드를 보면 거의 외형이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서안지역과 남미 피라미드 축조방식이 같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두 문명권은 같은 것일까?
마야인의 석관 뚜껑.
석관의 뚜껑에는 지금껏 단정히 깎은 머리에 꽉끼는 커프스를 손발목에 달고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레버와 조종장치를 조작하고 있는 남자가 나타난다. 의자옆의 판자에 대갈 못과 튜브, 기계부품처럼 보이는 것이 있어 기계장치처럼 보인다. 석관 속에서 발견한 작은 비취 조각상은 긴 외투를 걸치고 턱수염을 기른 늙은 백인상이다.
위 사진은 이상한 자료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러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마야인들이다. 그런데 이런 양식이 왜 수메르 유물로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수천년전에 수천킬로나 떨어져있던 두 문명권이 교류라도 있었던 것일까?
마야문명과 수메르문명은 다른 문명이라고 알고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다. 위의 자료는 얼마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보관해온 자료다. 하나는 마야문명 관뚜껑에 조각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메르 유물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사한 형태를 넘어 같은 문화를 소유한 사람들의 같은 유물로 볼 수 있다. 물론 아직은 시작하는 단계이고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위의 단서들은 상당히 중요한 단서이고 커다란 줄기가 가설적 단계로 자리잡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세계의 문명은 한곳에서 발전되어 세계 여러곳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중국 서안지역에서 수메르를 거쳐 이집트로 다른 한줄기는 바다를 건너 마야지역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역사적 유물과 근거는 충분하다. 지금도 남미의 일부 원주민들은 중국인
이라고 한다. 그만큼 유전자의 흐름이 쉽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다.
중국 서안지방 피라미드들, 수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자 그러면 우리민족에게 이런 사실들이 왜 중요한가? 라는 측면을 말해보자.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들은 수백개가 넘는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국은 여러 이유를 들어 공개하지 않는다. 이에대한 내용들은 사진자료와 함께 인터넷에 많이 떠돌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서는 중국에서 1970년대에 그 피라미드들을 일부 발굴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발굴이 중단되었고, 지금껏 외부에 개방조차 하지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중국내부에서도 많은 연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피라미드들이 이집트와 마야 피라미드의
원형이라는 것도 아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발굴을 하지 못하는 것은 동이족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환인, 환웅, 단군시대를 거쳐 고구려까지 수많은 무덤들이 지금의 중국 서안근처에 세워진 것이기에 지금은 발굴할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그러한 훌륭한 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랑하기 좋아하는 중국민족이 그냥 놔둘 상황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고구려사 홈치기가 시작되었고, 고구려만 정리되면 그 이전의 왕조는 저절로 중국 것이 되기에 지금과 같은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도 중국의 역사왜곡과 고구려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켜려는 행동을 계속할 것이다.
속내용을 들여다보면, 이제 강대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국입장에서 역사적으로 세계문명의 원천이라는 내용은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
그런데 우리 때문에 그 사실을 공표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냉철히 판단하고 정말 정성을 다해 우리민족의 경이적인 유물을 지켜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연구는 필요하고 또 노력할 것이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아물러 격려와 응원 또한 필요할 것이다. 지금도 역사전쟁 최전선에서 분투하시는 많은 분들에게 감사한다...
자료출처 http://debseer.com/ http://sacredsites.com/ http://earthquest.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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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도 고대 한국이 원조
중국문명은 황하문명부터 시작합니다. 황하문명은 4천 몇백년전에 시작한 문명입니다.
신화통신이 보도한 5천년 이상 전에 만들어진 만주 북서부(내몽골) 피라미드는 황하문명 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지역은 원래 중국지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국당국이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래 장안지역 피라미드들에 대하여도 중국당국이 홍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http://www.earthquest.co.uk/china/chinamap.jpg
중국 내륙 가운데 시안(Xian)이란 지명. 당의 수도였던 장안. 붉은 동그라미.
9번, 독일인 Hausdorf씨가 중국 함양지역에서 촬영, 세상에 처음 공개한 피라미드군락 사진.
상공에서 촬영한 장안지역 피라미드들.
(사진 출처 - http://www.earthquest.co.uk/china/china.html)
위 피라미드들에 대하여 중국당국이 홍보를 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오래된 피라미드들이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4천 몇백년 전에 시작한 황하문명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만약 황하문명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고 중국인들이 만든 것이라면, 중국당국이 벌써 오래전에 세계를 향하여 초강력 홍보를 하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을 것입니다.
위 피라미드들이 당나라 무덤이고 흙무덤이라는 분들도 계시지만, 원래 중국은 돌로 무덤을 만들지 않고 흙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흙무덤이 천년이상을 저렇게 각이 잡혀있을 수 있나요. '각' 말입니다. 흙무덤은 아래 사진 같은 것.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건릉(乾陵)으로 추정된다는, 산(양산,梁山)을 깍아서 만든 흙무덤.
이 흙무덤(산무덤)은 위의 피라미드들과는 다르지요. 위의 석조 피라미드들은 한단고기에 나오는 [고대 한국]에서 만든 것들로 보여집니다.
내몽골(만주 북서부)의 피라미드가 5천년 이상 전의 것이라는 것은 중국 신화통신이 이미 보도했고 장안지역 피라미드들에 대하여는 중국당국이 고조선 고구려 역사 훔치기가 확실히 성공했다고 확신한다면, 고대 만주역사 통째로 훔쳐가기가 확실히 성공했다고 확신한다면, 세계를 향해 대대적으로 선언할 것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중국의 피라미드를 배낀 것이라고. (사실은 중국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 [고대한국]의 피라미드인데 말이죠.)
장안지역 피라미드 공중사진과 이집트 피라미드 공중사진을 비교해 보지요.
1. 상공에서 촬영한 서안지역 피라미드들 2.상공에서 촬영한 이집트 피라미드들
두 지역 피라미드들이 비슷하지요. 그런데 워낙 유명한 위 사진의 이집트 '대 피라미드'들도 4천 몇백년 밖에 안된 것입니다. 서안지역 피라미드보다 최소한 대강 한 천년 후의 것들이라는 거지요.
1번이 고대한국(환국), 2번이 배달국(한웅(환웅)님의 나라), 3번이 고조선 입니다.
오랜 옛날 시베리아(만주) 고대 한국인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가 인디언이 됩니다. 아래는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미국 인디언들이 만든 피라미드.
아메리카 인디언 피라미드 유적(단계식 제무덤)
미국 일리노이주 커호키아에 있습니다. 미국의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
인디언이 이런 문명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요. 그 인디언 일부가 아래로 더 내려가서 중앙아메리카에 마야문명을 세웁니다. 아래 사진은 마야문명의 피라미드들입니다.
티칼,피라밋
달 피라밋 Pyramid Moon -Teotihuacan
태양 피라밋, Pyramid Sun -Teotihuacan
상당히 엄청난 크기이지요.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다음 그림을 보십시오.
왼쪽부터,1.장안지역의 피라미드, 2.이집트의 피라미드, 3.마야문명의 미라미드, 4.오리온 별자리
같은 문명이 만든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고대 한국]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 피라미드는 [오키나와]에도 있습니다. 오끼나와는 일본과 대만 중간에 있는 섬들로 일본이 오키나와를 합병한 것은 한 4백년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전에 오키나와는 독립국으로서 조선에 조공을 하고 그랬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도 그러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바다 속에 잠겨있는 오키나와 피라미드.
오키나와 해저구조물
오키나와 해저구조물
오키나와 해저구조물
오키나오 해저 구조물 전체 그림
위 사진의 오키나와 피라미드는 최소한 5천년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입니다. 외국의 다큐멘타리에서 이미 많이 다루어졌던 것입니다. 일본정부가 이 피라미드들에 대하여 대대적 홍보를 하지 않는 이유도 중국이 현 중국의 피라미드들에 대하여 대대적 홍보를 하지 않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들의 선조가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오래전 것이라는 이유입니다.
고구려 호대왕릉과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우즈베키스탄) 벽화에 나오는 고구려 사신들.
디지털 복원한 호대왕릉(한변 길이 약 70~80미터)
고구려 수도였던 중국 길림성 집안(吉林省 集安)의 장군총(일명 동방의 피라미드), 한 변 31.58m
함께 찾아나가는 '인류문명 뿌리의 진실'입니다. 잊혀진 고대사를 바로 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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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통신이 보도한 만주의 고대 한국 피라미드(번역)
5,000-year-old "Pyramid" Found in Inner Mongolia
5천년전 "피라미드"를 내몽골(만주 북서부)에서 발견했다
Chinese archaeologists has discovered a pyramid-shaped building, dating back more than 5,000 years ago, in the Inner Mongolia Autonomous Region, in north China.
중국 고고학자들은 중국북부의 내몽골 지역에서 5천년이상 된 피라미드 모양으로 된 건물을 발견하였다.
The "pyramid", located on a mountain ridge one kilometer north of Sijiazi Township in the Aohan Banner (county), is a three-storied stone building, with the bottom layer being more than 30 meters long and 15 meters wide.
이 피라미드는, Aohan Banner의 Sijiazi Township의 북쪽 1킬로미터의 산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3층의 돌로된 건물이고, 밑 바닥은 30미터가 넘고 폭이 15미터 이상 된다.
The "pyramid" belongs to the Hongshan Culture period of 5,000 to 6,000 years ago, according to Guo Dashun, a famous Chinese archaeologist who works in Liaoning Archaeological Research Institute.
Liaoning(랴오닝 - 요녕)고고학 연구소안에 일하는 유명한 중국 고고학자 "GuoDashun(구오다쉰)"에 의하면 이 피라미드는 5천~6천년전의 [홍산문화]에 속한다,
Seven tombs and ruins of an altar were found on the top of the "pyramid."
At the site of the altar there are many fragments of broken pottery carved with the Chinese character “mi" (rice).
Archaeologists said that the character "mi" may have something to do with people's understanding of astrology in ancient times.
피라미드의 정상에서 제단의 7개의 무덤과 유적을 발견하였다.
제단의 위치에 한자로 "Mi"(米 - 쌀)이 새겨져있는 많은 도자기의 파편들이 있었다.
In one of the tombs, archaeologists found a bone flute and a stone ring, and they unearthed a stone sculpture of a goddess the size of a human body in another tomb.
고고학자들은 무덤의 한곳에서 뼈대와 돌반지,
그리고 다른 무덤에선 사람 몸크기의 돌로 조각된 여신상을 발굴했다.
Archaeologists were surprised to find a stone-carved linga on the wall of a tomb and a small stone statue of a goddess below the linga in the same tomb.
동일한 무덤안의 돌로 된 벽에 새긴 Linga와 이 밑에 있는 작은 돌로된 여신상을 발견되어, 고고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Archaeologist Guo said that many of the relics were first-time discoveries and they are of great significance in studying the burial customs, religious and sacrifice rituals, and the social structure of the Hongshan Culture.
고고학자인 구오(Guo)는, "유적의 많은 부분이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홍산문화에서 그들의 매장풍습, 종교와 제사 그리고 사회구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이다." 라고 말하였다.
He pointed out, the discovery of the "pyramid" is also of great significance in exploring the origin of the Chinese civilization.
그는 피라미드의 발견은, 중국문명의 원류를 밝혀내는 중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 황하문명은 배달문명의 한 지류.)
The Hongshan Culture, belonging to the Neolithic culture, is mainly distributed in the juncture area between Inner Mongolia, Liaoning and Hebei provinces.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홍산문명"은 Liaoning(랴오닝)이 Hebei(허베이)성과 만나는 지역안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Xinhua News Agency 07/09/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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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비밀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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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쿠푸왕의 피라미드(제1피라미드), 가운데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제2), 왼쪽에 제일 작은 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제3). 그 앞에 조그만 3개의 초기 피라미드들.
피라미드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한번에 다 나오게 찍기 위해서는 좀 멀리..와서 찍어야 한다.
가운데 있는 카프라왕의 피라미드는 제일 윗부분에 화강암이 남아있다. 원래 옛날에는 저 화강암으로 피라미드 전체가 다 쌓여 있었다는데, 만약 지금까지 훼손되지 않았더라면 상당히 멋지고 아름다운 피라미드가 됐을텐데..하는 아쉬운 생각도 들고.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피라미드중 제일 커서 대 피라미드라고도 부른다.
원래의 높이는 146m가 넘었는데 지진도 일어나고 벼락도 맞고 해서 맨위쪽 9m정도가 손상되어서 지금은 약 137m 정도라고..
카프레왕(저변216m,높이136미터), 쿠프왕(저변230m 높이146.5미터<현재137m>)
쿠푸왕 피라미드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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