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서체(漢文書體)의 종류
한자의 경우는 고대 한자의 서체인 전서(篆書)를 비롯하여, 중국 한나라 때의 예서(隸書), 한자의 일점.일획을 정확히 독립시켜 쓰는 해서(楷書), 해서를 약간 흘림글씨로 쓰는 행서(行書), 그리고 이들 글자의 일부 자획을 생략하여 흘림글씨로 쓰는 초서체(草書體)등을 가리킨다.
1. 전서(篆書)
전서는 진한 이전의 여러 서체를 통칭하는 말이다. 전서는 크게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나누고, 100년전에 발굴된 은상 시대의 복사문(卜辭文)도 대전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시기에는 거북, 동물의 뼈등에 새긴 복사문 이외에도 청동기에 새기기도 하였는데 이를 금문(金文) 또는 종정문(鐘鼎文)이라고 부른다. 또한 대전은 주문 이라고도 하는데 주나라 때 사(史)주가 문자의 짜임을 실용적으로 간소화 시켰으므로 붙여졌다.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주대의 석고문(石鼓文)이 있다. 소전은 진시황(B.C.246~210)이 중원을 통일 하였을 때 승상 이사(李斯)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새로운 모양으로 정리한 것이다. 대전이 자연스럽고 질박하다면 소전은 반듯하고 중후한 감을 준다. 소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진시황의 공적을 기록한 태산각석, 낭아대각석, 역산비가 있다. 소전은 모두가 원필이며 자형이 아래위로 길다. *갑골문(甲骨文)
갑골문은 귀갑수골(龜甲獸骨)의 준말이다. 갑골문은 은나라 때에 점을 치기 위한 정복문(貞卜文)과 그 당시 사실을 적은 기사문(記事文)이다. 곧 제사, 전쟁, 사냥. 농사, 질병에 대한 길흉을 판단하기 위한 것으로서 거북의 배 부분의 뼈나 소와 사슴의 어깨뼈에 정인(貞人)이나 제주(祭主)가 의문이나 해답 그리고 점친 후의 경험들을 새겼다. 갑골문은 상형문자에 가까우며, 예리한 공구로 새겨서 직선이 많으며 획의 끝이 뾰족한 것이 그 특징이다. 갑골문은 1899년에 처음으로 발견 되었다.
제사수렵도주우골각사(祭祀狩獵途朱牛骨刻辭)
*금문(金文)
금문은 청동기 시대의 산물로 그 대부분이 종정(鐘鼎) 곧 종이나 솥 따위에 주각(鑄刻) 하였으므로 종정문 이라고 부른다. 그릇, 무기, 거울, 도장, 돈 같은 것에서도 발견된다. 동기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은 상(商)에서 한(漢)대에 까지 이른다. 상대의 것은 그림 문자도 많으며, 대개의 금문은 갑골문을 계승하고 진(秦)대의 소전에 이어지는 대전이다.
*석고문(石鼓文)
대전 자체(字體)의 가장 구체적인 작품이며,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각석으로 북 모양으로 다듬은 돌에 세겨져 있다하여 석고문이라 부른다. 돌의 수는 10개이고 표면에 700여자가 실려 있으나 판독이 가능한 글자 수는 270여자, 현재 통용되고 있는 글자 수는 470여자 정도이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동주의 위열왕 4년(기원전 481)에 진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석고문은 4언구로 현재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전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냥을 하는 것과 영토의 개척으로 도읍을 세운것, 제사에 관한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석고문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자체는 대체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 태산각석(泰山刻石) 태산각석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동방의 군현을 순회 하면서 세운 송덕비의 하나로 낭아대각석과 더불어 소전의 표준 이라 불릴 만큼 유명하다. 이 각석을 탁본해 본 결과 223자의 전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명시대의 탁본에는 29자만 남아 있었고 청초 때는 화재로 파손되어 그 패석에 겨우 10여자가 보일 뿐이었다.
* 낭아대각석(廊牙臺刻石)
진시황제는 태산각석을 세운 해에 산동의 낭아에 올라가 제대를 쌓고 돌에 각하여 진의 덕을 기리었다. 이 각석의 글자는 뭉개지고 떨어져나가 겨우 탁본으로 10행정도 전해지고 있다. 이 비석의 패석은 북경 박물관에 일부 소장 되어있다. 이사의 서(書)로 전해지며 태산각석이 정제된데 비해 용필이 좀 부드럽고 좌우 상칭의 균제가 잘 잡힌 힘찬 표헌의 장중감을 준다.
2. 예서(隸書)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뒤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공문서 등이 증가하면서 전서를 간략하게 만든 새로운 서체가 필요 하게 되었다. 이 때 만들어진 것이 예서이다. 예서는 한나라로 그대로 이어지면서 해서, 행 서, 초서 등 여러 서체로 다시 분화 발전하였다. 예서는 1cm정도의 폭을 갖는 죽간(竹簡)에 쓰였던 초기에는 세로로 긴 형태였으나 목판과 비석으로 옮겨 가면서 점차 가로로 충분한 길이를 갖게 되었고 이 때 파잭의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파책은 빈 공간을 조형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역할을 맡게되었다. 이로써 예서는 나름대로 조형성을 갖게 되었고 후대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전서는 대칭을 맞추어야 하고 곡선이기 때문에 쓰기에 불편하다. 그리하여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고 원필도 방필로 많이 바꾸고 필획도 줄여서 쉽게 쓰게 한 것이 예서이다. 기록에 보면 예서는 정막(程邈)이 만들었다. 그가 죄를 지어 감옥에 있을 때 십 년을 연구하여 예서 삼천자를 지어 진상 하였는데 진시황이 좋게 여겨 어사를 시켰다. 예서란 말은 진대의 복역수를 도예(徒隸)라 하였는데 정막이 그러했으므로 예(隸)자를 따서 지었다. 예서에서 파책이 없는 곧 전서와 근접한 것을 고예(古隸)라 하고 파책이 있는 것을 팔분이라 한다. 예서는 전한과 후한에 걸쳐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조전비와 예기비 같은 유려형(流麗형), 장천비 같은 방정형(方整형), 하승비 같은 기고형(奇古型)들로 분리되며 그 수많은 서적은 이루 나열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예서의 자형은 납작한 것이 보통이다.
* 예기비(禮器碑)
예기비가 새겨진 것은 약 1800여년 전 후한의 환제 영수(永壽) 2년의 일이며 한래비라고도 한다. 이비문의 내용은 노나라의 제상이던 한래의 공적을 칭송한 글인데 그는 공자를 존중해 그 자손 일족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 징병이나 노역을 면해 주는등, 진심어린 예우를 다했다. 또 그는 진시황제의 복거 이후 산뚱성 취무에 있던 허물어진 공자묘(이곳은 한이후 역대의 비가 많아 곡장비림(曲章碑林)이라 불린다)를 수리하고 제사에 쓰이는 가장 중요한 기구류,즉 예기를 정비하고 또 공자의 생가를 수복하고, 묘 주변의 배수 사업등도 했다. 이와 같은 한래의 작업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높은 덕을 기리고자 돌에 새긴 것이 바로 이 예기비이다. 한비는 중후한 것과 연미한것이 있는데 이 비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지키고 있다. 문자의 구성이 알맞고 운필이 정교하여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는 비로서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 수도 많아 예서를 익히는데 적당하다. 그리고 예기비의 선조(線條)에 관하여서는 유(여윔), 경(단단함), 청(맑음), 정(곧음)이 언급 되어진다.
- 예기비 - * 을영비(乙瑛碑)
후한의 환제(桓帝)때 노나라의 재상 을영의 신청에 의하여 공자묘에 묘를 관리하는 사람을 두게 한 것을 기술하고 을영 이하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문은 18행, 각 행에 14자로 되어있다. 결구가 잘 맞춰져 있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조전비에서 처럼 중심으로 밀집 시키고 좌우 양면으로 세를 확장시켜 내는 결구도 아니며 장천비 처럼 방형안에 필획을 제한시키는 결구형식도 아니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 소박 하면서도 경부 한 느낌을 주지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된 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 사신비(史晨碑)
이 비는 후한의 영제 시대에 노나라의 승상이 된 사신이 공자묘에 성대히 제사를 치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현재 산동성 곡부(공자묘의 비림)에 있다. 이 비는 전후 양면으로 문장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앞면을 사신전비, 후면을 사신후비라 칭한다. 사신전비의 내용은 대개 사신이 공자의 고향에서 노나라 승상의 직에 있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아울러 상서(尙書)에게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공자의 제사를 올리도록 청하여 주기를 간청한 것이다.사신후비의 내용은 사신이 공자에게 제사 올릴 때의성대한 정황에 대하여 기술한것이다. 고박하고 후실(厚實)하며 팔분예의 전형적인 것의 하나이다. 글자체는 3:2내지 4:3정도의 세로 구성이다. 서법을 확실히 지켜 늘씬한 맛이 있고 화려하고 기교있는 필법에 신중하고 긴장미가 있으며 단아하게 자형이 잡혀 있어 예서를 배우는 입문으로 적당하다.
* 서협송(西挾頌)
서협송은 마애각으로 무도(武都)의 태수가 서협의 각도(閣道)를 수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형, 사가형의 결구로 시작하거나 끝나고 파책이 다른 비석처럼 강조되지도 않은 소박하고 야성미 넘치는 글씨, 굵고 가늠이 없이 똑같은 굵기로 글씨를 쓰고 있지만 무미 건조하지 않고 마음에 다가오는 박력이 있다.장천비에서 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감서성 성현 이궁협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처음에 오단크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시 오단크기의 유래가 적혀있다. 이 왼쪽에 서협송의 본문이 있다. 글의 끝에 구정(仇靖)이란 글쓴이의 서명이 있다. 한비는 대체로 글쓴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 작품은 서명이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풍은 중앙 도시의 전형을 약간 벗어났지만 의지적인 늠름한 붓놀림이 모든 한비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 조전비(曺全碑)
조전비는 흙속에 매몰되어 오다가 명나라때 섬서성 부양현의 옛 성터에서 발굴되었다. 그전에 이 비는 한비의 하나에 불과 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 였으나 20C영국 고고학자인 스타인이 한인들의 진적(眞蹟)을 발견 함으로써 조전의 수려한 서풍이 한말의 퇴폐한 풍조와 일치하지 않다는 것과 이 비의자형이나 필화의 모양새은 예법이 완성된 극치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비의 서법은 300년간의 정칙을 고스란히 표현 하고있다. 그러나 진적이 아니라는 아쉬움은 면할 길이 없다. 또 하나 조전 비의 단정한 모습에서 결체나 용필의 비밀을 엿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단정하면서도 아리땁고 중후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풍모와 중심 밀집과 좌우서전(左右舒展)의 결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비는 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비의 치보(致寶)라 일컬어 지고 있다. 조전비의 내용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상황 증거를 추리 하건대 부양현 장관이던 조전의 희망에 따라 그의 창덕비가 세워지기로 되어, 며칠후면 입비식까지 갖게 될 무렵 돌연 조전이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관계한 사람들의 이름과 기부한 금액까지 명기되어 있는데 바로 그들이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증거품이 될 비를 땅 속에 묻어 버렸을 가능성이 짙다. 이 비를 세운 날짜는 중평 2년 10월이고 사서에 의하면 그 해 9월 삼공 즉 최고 권력자중의 한 사람인 사공 양사가 죽었다. 동시에 그 참모 격이던 간의대부 류도는 갑자기 실각하고 다음날 처형 되었다. 조전도 그 일당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조전의 동생 영창 태수 조란도 당쟁 때문에 죽고 조전도 그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7년 간이나 숨어 지내던 일이 거로 되어 있다.
* 장천비(張遷碑)
낙음현의 현령이었던 장천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본문에는 가차자假借字)나 오자가 더러 있어서 후세의 모각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너그러운 서풍은 후세에 따르기 힘든 미를 지니고 있다. 시기상으로는 후한의 말기에 해당되는 이 비는 용필이 방모하고 졸후(拙厚)한 맛이 있다. 서법은 위진의 팔분서체의 선구가 되었다 소박하고 힘찬 점획,완강한 네모꼴의 구성, 굵기를 모르는 단순한 선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충분히 뻗은 점획, 자유롭고 메이지 않은 결체에 그 참 맛이 있다. 필획의 기필과 수필이 곧바로 이루어지고 전절(轉折)이 항상 직각을 이루어 장천비가 한예중 방필 웅강의 전형으로도 일컬어 진다. 또 후한 말에 나타난 이 비는 이미 해서의 형태에 매우 근접한 서체를 보이고 있어서 그 시기에 해서의 원형이 태동 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도 가치가 있다. 본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유래와 사자구(四字句)로 된 명문이 있다.
3. 해서(楷書)
해서는 문자의 부호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쓴 형태를 말하며 이런 까닭에 정서라고도 불린다. 예서가 더 실용적으로 변모하면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와서 해서의 특유한 풍격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동한 말에 이르러 해서 보다는 행초서가 널리 유행하였다. 그러나 행초서가 다시 해서화를 추구하게 되는데 위진남북조 시기에 만들어진 이른바 북위의 해서와 이를 더욱 단아하게 만든 수당 시기의 해서가 그것이다. 북위의 해서는 예각을 많이 사용 하였기 때문에 날카로운 획과 비대칭의 조형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수당의 해서는 직각을 사용하여 대칭의 안정된 조형을 추구한다. 수당 초기의 구양순 등이 북위에서 수당으로 옮겨오는 역할을 하였다면 뒤에 오는 안진경은 대칭의 미학을 완성 하였다고 할 수 잇다. 종요와 왕희지을 거쳐 초당의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이 북위서를 계승하고 왕희지법을 더 하여 방필에 원필을 가미한 완미에 가까운 체계를 이루었고 그 후 안진경이 출현하여 그의 원필을 이용하여 웅장한 남성적인 해서를 완성하였다. 해서의 자형은 정방형에 가깝다.
* 안근례비(顔勤禮碑)
안씨가묘비와 더불어 안진경 해서의 2대 역작 중의 하나이다. 비가 세워진 연도는 정확 알 길이 없으나 비문 중에 기재된 사실을 감안해 입비는 안진경의 말기의 글씨로 추정되어 진다. 비는 사면각이나 셋째면은 갈아 없어졌고 약 1천6백여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안근례비는 비의 자획이 온전하며 특히 삼면의 글씨는 원필이며 강, 유가 잘 조화되어 있다. 또한 장봉의 표현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의 해서 중에서 가장 우수한 기교 표현 작품이라 한다. 안진경의 필법은 구양순의 경우와 다른 바 없으나 구법(歐法)보다도 약간 붓을 세우며 안서(顔書)의 가로획은 우상향세(右上向勢: 손에 쥔 붓을 그대로 댄 후 일단 조금 띄웠다 오른쪽으로 그음)의 수법을 사용한다. 구의 배세(背勢), 안(顔)의 향세(向勢)라고 부르는 이 상대적인 조형수법은 해서 기법의 양극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이 내용은 안진경이 그의 증조부인 안근례의 일대기를 써 놓은 것이다.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天銘)
이 비는 당태종 6년(632)에 당태종이 수나라의 인수궁을 수리 하면서 만든 구성궁에 샘물이 뿜어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여 만든 비이다. 문장은 위징이 쓰고 글씨는 황제의 명에따라 구양순이 특별히 정성들여 썼다. 구양순의 나이 75세때의 서(書)로 구양순이 왕희지의 필법을 배웠으나 이미 글씨는 구양순 자신의 자체였다. 그리고 해서의 필법이 극에 달했다고 평가된다. 전각은 양문으로 되어 있고 구성궁예천명의 여섯 글자가 2행에 있고 본문은 24행으로 되어 있다. 남북서풍을 융합한 수대의 서풍을 전, 예서에 바탕을 둔 구성법으로 방향을 바꾸어 장방향의 형태로 씌어져있다. 내핍법(內逼法) 혹은 배세(背勢)에 따르고 있으므로 점, 획이 중심에 모여 있으나 비의 결체는 여유가 있고 전절과 구부러진 곳의 용필은 아주 훌륭하다. 구성궁예천명비는 새 시대 감각을 불어 넣은 것으로 화도사비(化度寺碑)와 더불어 구양순의 대표작이다. 해서를 쓰는데 있어서 정통이라 할 수 있으나 너무도 정제된 필획의 구성을 하고 있어서 자칫 하면 형태만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기 쉽다.
* 장맹룡비(張孟龍碑)
육조 시대의 대표적인 해서이다. 서도에서의 힘은 적절한 조화가 따라야 한다. 결구법이 바로 그것인데 장비액(張碑額)은 그런 것의 본보기라 하겠다. 본문도 점획의 배치에 따라 소박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지적으로 당대의 서와 같은 정제미를 나타내고 있다. 경중의 배합, 각도의 변화, 그리고 글자의 흐름에 따라 그것들을 조절하는 의욕적인 필력, 이러한 모든 요소가 큰 비석에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흔적들을 표면에 나타나지 않게 할것, 여기에 서도의 비결이 있다. 장맹룡비는 북위서가 유행하던 때의 이상형 이라고 할 수 있다. 용문의 강함과 예리함, 정도소(鄭道紹)의 온화함, 고정비의 완성된 계획성 등이 함축되어 있는 훌륭한 유산으로 여겨진다. 비면은 해서로 26행, 한 행에 24자씩 새겨져 있고, 비음은 이 비를 세움에 있어서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의 관위 성명을 연서한 것이 10여단 있다. 이 비의 비액에서 "청송(淸頌:덕을 칭송한다)"으로 표현 되는 바와 같이 송덕비이다. 장맹룡은 당시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지만,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깊이 믿는 유교를 선양하였다. 그 공적이 컸기 때문에 향당(鄕黨)들이 이에 감탄하여서 장맹룡의 덕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고 그의 일대기에 관한 것과칭송이 그 내용이다.
*고정비(高貞碑)
당의 구양순과 더불어 이지파(理智派)의 대표적으로 이 비석을 꼽을 수 있다. 이렇듯 고정비는 구양순의 비와 쌍벽을 이룰 만한 해서의 비문이다. 이 비문의 작자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 출토시기도 얼마되지 않아서, 이 서체에 관한 논의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분만 아니라 이 비를 수록한 책도 그리 많지 않다.한 책에 의하면 고정이라는 사람은 비서랑의 벼슬을 지냈고 나이 26세에 죽었다고 한다. 이 비는 그가 죽은 지 9년이 지나고서 세워졌다고 한다. 이 비에서 그려지고 있는 고정이 명족(名族)이었고 게다가 외척(外戚)이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비를 쓴 사람은 당시 제일의 명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비는 구양순의 비와 마찬가지로 필의 기수(起收)가 매우 자연스럽고 형태의 조합이 합리적이어서 비난할 여지가 없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더불어 전서의 균형감과 통일성을 갖추고 있어서 회화적인 미가 뛰어나다.
4. 행서(行書)
행서는 초서와 해서의 중간 형태로 아마 해서와 거의 동시에 생겨나서 발전 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왕희지의 난정서는 고금에 빛나며 그 후 당의 저수량과 안진경을 거쳐 청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해서, 행서, 초서가 널리 쓰이면서 당 이후에는 전서와 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청나라 초기와 중기에 비학의 풍토가 일어나면서 다시 문인, 묵객의 작품에 전서와 예서가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작품에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 난정서(蘭亭敍)
행서의 용이라 불리는 난정시서는 왕희지가 51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 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영화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 황희지의 주재하에 성대하고 풍아로운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각자의 명사들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난정집을 엮었다. 여기에 왕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가 된 것이다. 즉석에서 시편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 뿐만 아니라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상되어 7대째인 지영에게 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제일의 행"이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홍복사(弘福寺)의 승려 회인(懷仁)이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끝에 집대성한 것이다.(감형 3년(672)12월 8일 경성법려건립(京城法侶建立) 집자 성교서는 변이나 방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 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奬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변역한 반야심경이 함께 비문을 이루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라고 생각될 정도로 비틀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틀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의 시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이단본(已斷本)이라 구분해 부른다.
5. 초서(草書)
한나라 때 예서가 주로 쓰였지만 초서의 기원이라 볼 수 있는 특유한 서체가 대나무나 나무조각에 쓴 편지글 등에서 나타났는데 그것이 곧 장초(章草)이다. 장초는 획이 예서와 비슷하나 글씨의 짜임은 초서에 가깝다. 장초의 장(章)은 사유(史游)가 지은 급취장(急就章)의 서체에서 이름 붙여졌다. 장초는 그 뒤에도 계속 발달하여 왕희지에 이르러 초서의 완전한 체계를 굳히게 되었다.
* 십칠첩(十七帖)
이 법첩 첫머리에 십칠일선서(十七日先書)가 나오므로 법첩 전체를 십칠첩으로 일컬었다. 옜날부터 초서의 전형으로 존중되었으며 왕희지 초서 연구에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자료이다. 당 나라의 태종은 왕희지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그 수집에 전력을 다 하였고 그는 황희지의 글씨 3,000여점을 모아 이를 분류 정리하여 80첩을 만들었다. 십칠첩은 그 중의 하나로 일민첩(逸民帖)을 비롯 29점이 수록되어 있다.
- 십칠첩 -
* 행초서(行草書)
행서는 문자의 부호를 있는 그대로 갖추고 있으면서 동적인 형태로 만든 서체이다. 초서는 부호를 생략하여 동적인 형태로 만든 것이다. 이둘은 동적인 흐름을 같이 보여주기 때문에 서로 어울려 많이 쓰이고 있다. 획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형태를 만들어 내는 행초서는 쓰는 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수많은 자연스런 형상은 서예를 문자의 기록보다는 회화로 까지 인식 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런 이유로 행초서는 서예가 뿐만 아니라 화가들도 반드시 익혀야 되는 필수과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출처: ☆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별짱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