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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10월12일~13일) 서울답사. 회장님과 부회장님, 모두9명이 서울답사를 떠났다. 청명하고 포근한 가을 날씨는 우리의 답사를 더욱 즐겁고 보람 있게 해주었다. 아리랑축제중인 광화문광장을 돌아보고 우리나라 최고의 고궁인 경복궁으로 들어섰다. 와우! 여러 나라 외국인들이 조선시대의 고궁을 많이도 찾고 있어 흐믓했다. 아름다운 건축미, 아름다운 꽃담과 굴뚝, 그림 같은 정원, 고궁의 훌륭함을 만끽하고, 맛있는 점심을 배불리 먹고, 북촌한옥마을을 답사했다. 다음 창덕궁을 찾아 나서본다. 이곳 또한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아서 우리가 외국에 나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창덕궁과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모신 유교 사당인 종묘를 답사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탑골공원과 인사동 쌈지길, 청계천과 광장시장 먹거리 장터에서 빈대떡과 여러 가지전을 맛있게 나누며, 빠듯한 1일일정을 마쳤다. 2일 상쾌한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서울성곽을 따라 남산을 오르는 것으로 하루를 멋지게 시작하였다. 부지런한 외국관광객들은 일찍부터 많이들 올라와 있어 놀라웠다. 전망대에서 서울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다음답사지인 우리나라에 처음생긴 한남동 이슬람사원을 답사하고, 강남에 자리한 천년고찰 봉은사를 찾아드니 마침 봉은대제행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을 끝으로 빡빡한 일정을 우리회원님들이 무리 없이 씩씩하고 즐겁게 잘 마무리하였다.
세종대왕(世宗大王) 한글을 만든 조선의 제4대왕(1418~1450재위). 한국인이 세계위인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1408년(12세)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16세)에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아버지인 태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418년(22세) 6월 세자로 책봉, 8월10일 조선 제4대 임금으로 즉위.
경복궁중건(景福宮重建) 사적 제117호 1865∼1868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한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본궁(本宮)으로서 태조가 1395년(태조 4)에 창건한 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燒失)된 이후, 역대의 왕은 재정이 부족하여 재건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고종(高宗)의 즉위와 함께 당시의 섭정(攝政)이던 흥선대원군이 단안을 내려 경복궁 중건계획을 발표하고, 1865년에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대원군은 조선 말기 이래로 외척(外戚)의 세도에 밀려 추락된 왕실의 존엄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경복궁의 재건을 서둘렀던 것이다. 재목은 강원도·함경도 등의 먼 지방에서 운반해 와야 했으며, 석재(石材)도 각처에서 모아들여야 했다. 심지어 서낭당의 큰 나무나 석재, 양반 집안의 선영(先塋)의 목재까지도 강제로 거두어들이며, 우여곡절 끝에 1868년에 공사는 완성되었으나, 백성의 언성과 경제적인 타격 또한 막심하여 대원군 몰락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북촌한옥마을(北村韓屋─)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재동, 삼청동 일대의 한옥이 모여 있는 마을. 경복궁과 창덕궁, 비원 사이 북악산 기슭에 있는 한옥 보존지구로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으로 북촌이라고도 한다. 북촌은 고관대작들과 왕족, 사대부들이 모여서 거주해온 고급 살림집터로 한옥은 모두 조선시대의 기와집이다.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 금천교(昌德宮錦川橋) 보물 제1762호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하마(河馬) 형상의 석수(石獸)를 배치하였다. 법수 밑에는 멍엣돌 위치에서 돌출된 석재에 짐승머리모양을 환조(丸彫)로 조각하였다. 다리 측면의 홍예 사이 벽에는 귀면형(鬼面形)이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쪽의 홍예 기반석 위에는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이상 등 환조로 만든 동물상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금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창덕궁 낙선재(昌德宮 樂善齋) 보물 제1764호 창덕궁 동쪽에 있는 건물로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원래 이곳은 상중(喪中)에 있는 왕후들과 후궁들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기거하던 곳이며, 1963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이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상중에 왕후들이 기거하던 곳이라 하여 단청(丹靑)도 하지 않았다. 낙선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八作)기와지붕이며, 누마루가 깔려 있고, 모두 17칸 반의 규모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고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여사가 기거하였다. 영현문을 들어서자 내의원체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현'이란 “어진 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세자가 공부하던 처소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하였다. "조화어약"과 "보호성궁"이란 글자에서 "성" 자와 "어" 자는 임금을 지칭하는 글자란다.
창경궁 온실 종묘 정전(宗廟正殿) 국보 제227호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사당.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모신 유교 사당이다.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옆으로 증축하여 가로로 긴 건물 형태가 되었다. 정전은 정면 19칸, 측면 3칸, 맞배지붕, 일출목(一出目) 이익공(二翼工) 집이다. 1395년(태조 4)에 준공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제1∼11실을 완공한 이래 1726년(영조 2)에 제12∼15실, 1836년(헌종 2)에 제16·17실, 그리고 1870년(고종 7)에 제18·19실을 이어서 증축하여, 한국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이 되었다. 여기에 모신 신위는 제1실의 태조를 비롯하여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등 19왕과 그의 비인데, 이곳에 모시지 않은 왕의 신위는 이 건물 서쪽에 있는 영녕전(永寧殿:보물 821)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 보물 제821호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사당. 이 태극모양은 하늘과 땅, 사람을 나타냄이란다.
청계천에서 공연관람
광장시장(廣藏市場) 서울시 종로구 예지동 293-1에 있는 재래시장이다 맷돌로 즉석에서 갈아 빈대떡을 만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약김밥, 순대, 만두, 각종분식집 등등 여러가지 먹거리가 펼쳐져있다.
남산(南山) 서울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부에 있는 산. 산의 높이는 262m이며 한양이 조선의 도읍(都邑)으로 정해지면서 도성(都城)의 남쪽에 위치하는 산이라 남산이라고 불렀다. 본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목멱산이란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다. 또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불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재위 4년인 1395년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이를 모시는 사당을 목멱신사(木覓神祠)라 하였다. 매년 나라에서 재사를 올리게 되자 목멱신사를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불렀다. 남산은 북악산(北岳山)·낙산(駱山)·인왕산(仁王山)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하나이며 북악산과는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여러 산과 더불어 왕도의 위곽(圍郭)을 이루어 그 능선을 따라 성벽이 쌓여졌었고, 도성을 에워싸는 방벽은 태조 재위5년인 1395년에 축성되어 이후로 여러차례 증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남산의 정상에는 5개의 화구를 가진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었고 전국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봉화가 서울로 집결되는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북쪽 산허리에 왜장(倭將)들이 왜장대(倭將臺)라고 한 성채를 쌓았던 일이 있었다. 또한 군영인 어영청과 금위영의 분영이 남산 자락에 위치했다.
이슬람사원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아랍의 이슬람사원이다. 아치형의 입구에 아랍어로 새겨진 글씨들을 본 순간 낯설지만 신비스럽기도 하다.
봉은사(奉恩寺) 대한불교조계종 천년고찰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수도산(修道山)에 있는 사찰. 794년(원성왕 10)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하여 견성사(見性寺)라고 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선릉(宣陵:成宗陵)을 위하여 중창하고 봉은사로 개칭하였으며, 1562년(명종 17) 현위치로 옮겼다. 중종 때는 이곳에서 승과시(僧科試)를 치르던 곳이며 서산(西山) ·사명(泗溟) 두 대사도 여기서 등과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불탄 것을 숙종 때 중건하고 1825년(순조 25)에 다시 중수하였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대부분의 전각들이 파괴되었으며 이후에 재건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법왕루(法王樓) ·북극보전(北極寶殿) ·선불당(禪佛堂) ·천왕문(天王門) ·일주문(一柱門) 등의 당우(堂宇)가 있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현판, 철종 때 승려 영기(永奇)가 조각한 《화엄경(華嚴經)》(81권) 금강경(金剛經),《유마경(維摩經)》등 불경판(佛經板) 13종, 3,479장이 보존되어 있다. 보물 제321호로 지정된 고려청동루은향로(高麗靑銅縷銀香爐)는 동국대학 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인사동 쌈지길 |
첫댓글 다사로운 가을 날에
멋진 곳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1박2일강행에 힘드셨죠 전 거웠답니다. 다음에는 서북쪽을 답사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서울, 그저 서울이었는데 깊이를 알고 보니 서울이 새로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