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단순하다. 도구도 규칙도 그렇다. 공과 평지만 있으면 내전과 학살, 가난과 기아 속에서도 치고 달리고 몰아가서 차넣으면 승부가 갈린다. 맨발이면 어떤가. 그러니 축구는 글로벌한 스포츠가 맞는 듯하다. 그리고 영화 <맨발의 꿈>의 주인공 김원광(박희순)은 글로벌하게 철딱서니가 없다. 한마디로 무대뽀다. 그런데 이 과장된 단순함이 현실 앞에서 증발될까봐 그를 응원하게 되는 것은, 어딘가 처박아두었던 꿈을 말하기 때문일까?
동티모르의 아이들. 영화는 김신환의 <맨발의 기적>이라는 책이 원작이다. 김신환은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의 감독이다. 극중 감독인 김원광은 실제 인물 김신환에 비해서는 말이 많고 유머러스한 인물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김원광은 현대자동차 선수였으나, 은퇴 후에 사업에 실패하고 빚을 진 채, 세상을 떠돌다 인도네시아를 거쳐 동티모르까지 흘러간다. 신생 독립국 동티모르. 거머쥘 것 없는 폐허야말로 모든 가능성의 터전이라고 여기는 원광은 이곳에서 새 사업을 시작한다. 어쩌면 원광이 ‘무야말로 유(無卽有)’라고 우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혼을 포함해서 거듭되는 실패로 인해 인생에서 더 이상 밀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먹고 살기도 어려운 땅에 오픈한 스포츠 용품점은 1달러 수금도 여의치 않다. 그런데 이 와중에 원광은 맨발로 공을 차는 동티모르의 아이들에게 끊을 수 없는 연대감을 느낀다. 휩쓸리고 떠밀려 닳고 허름해진 자신의 인생, 그리고 꿈을 가질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부터 허름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미래가 원광에게 확실한 동질감으로 다가온다. 원광은 유소년 축구팀을 만들고 무급 감독으로 이들과 동고동락한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동티모르의 유소년 축구팀은 2004년 히로시마 리베리노컵 국제 유소년축구대회에서 우승한다. 항공료도 마련할 수 없었던 가진 것 없는 팀의 우승,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축구 지능. 영화에 나오는 어린 선수들은 실제 동티모르의 유소년 축구팀원들이다. 특히 극중에서 라모스라는 소년은 축구 실력이 출중하다. 라모스의 플레이를 지켜본 원광은 감탄한다. 그리고 원광은 라모스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집에 찾아가고, 라모스 형의 위협을 이겨내고,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라모스를 뒤쫓기도 한다. 원광을 매료시킨 라모스의 축구 능력은 타고나는 걸까?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공부 머리 따로 있고, 운동 머리 따로 있다. 학업성취에 필요한 지능이 분석적이고 통찰적이라면, 운동에 필요한 지능은 실용적이다. 스턴버그는 이를 실용지능이라고 명명했고, 이것은 수행의 성공 여부를 예측하는 요인이다. 이것은 일종의 절차적 지식, 즉 해당 동작을 하는 방법과 실행 순서에 대한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뛰어난 축구 플레이를 한다는 것은 축구에 대한 우수한 절차적 지식을 가졌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러한 실용지능은 경험에 관련되므로, 개인의 경험에 따라서 적용 영역이 달라진다. 판매와 영업에 필요한 지능이 다르고, 운동에 필요한 지능이 다르다. 이것이 영화에서 일본인 중고차 판매상 도죠는 이재에 밝고, 한국의 외교관 박인기는 협상과 원조에 밝고, 원광은 축구를 해야 비로소 유능해 보이는 이유다.
축구 기술. 그런데 영화에서 유소년 축구팀원들이 모두 라모스처럼 축구 실력이 출중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극중 모따비오나 뚜아처럼, 처음에는 체력도 딸리고, 운동 실력도 신통치 않다. 그리고 이들이 체력과 기술을 갖춘 선수로 변모하는 것은 훈련을 통해서다. 그렇다면 운동 기술은 훈련과정에서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구를 포함한 운동 기술의 학습은 일종의 자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날아오는 공을 달리면서 받아 차고 패스하거나 킥을 하기까지 연결되는 동작은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시간상 공이 발에 닿는 순간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할지를 선택하는 것도 거의 반사적 수준의 판단이다. 즉 경기 중에 어떤 기술과 전략을 사용해야 할 지에 관련된 지식과 운동 능력 등은 순식간에 빠르게 활성화되어야만 한다. 이런 빠른 활성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자동화, 즉 일종의 과잉 학습뿐이다. 우리가 자동차 운전을 배운 후에 어떻게 운전에 익숙해지는 지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뛰어난 축구 지능이 있어도, 반복적인 훈련이 없이는 좋은 선수가 되기 어려운 이유다. <맨발의 꿈>에서도 모따비오와 뚜아가 훈련을 통해 약점을 극복하고 국제 유소년축구대회에서 뛰어난 어시스트와 골 득점을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 놓여 있다.
영화는 혈기왕성하고 매끈한 청년의 꿈이 아니라, 삶의 굴레가 질겼던 중년의 꿈, 폭력과 분쟁의 굴레가 질겼던 아이들의 꿈을 말해준다. 김훈은 ‘공이 땅으로 떨어진 후에도 보이지 않는 인간의 공은 오랫동안 허공에 떠 있다’고 했다. 그런 듯하다. 결국 원광은 아이들의 코 묻은 돈으로 돼지 농장을 차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돈은 못 벌었어도 동네 축구감독 대신 국가대표 축구감독을 했다. 원광과 동티모르 아이들의 좌충우돌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 꿈을 이해하고 도운 현실적 인물들이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지만, 길을 만들려면 지원군도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의 재능대로 수장도 하고 지원군도 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영화로 구상하고 혹서 속에서도 뚝심 있게 밀어 붙이는 것, 이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방법일 것이다. 원광의 말처럼, 지금이 아니라도 “그 다음, 또 그 다음, 끝이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뜻을 세우고 때를 기다리며 노력하는 것 자체가 보람일 것이다.
출처: 청룡시네마 (blueaward.co.kr)
첫댓글 개봉 당시, 월드컵 기간에 썼던 글 입니다.
<맨발의 꿈> 주인공, 박희순, 지금 청룡영화상 남자 주연상 후보입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머리카락이 노랗게 타는줄도 모르고 연기했다고 합니다.
잘찍고 못찍고를 떠나서, 용기를 주는 영화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