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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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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
출생 | 1953년 1월 24일(1953-01-24) (62세) 대한민국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
거주지 |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1] |
학력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LL.B.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 디모테오) |
본관 | 남평 |
부모 | 아버지 문용형, 어머니 강한옥 |
배우자 | 김정숙 |
자녀 | 슬하 1남 1녀 |
경력 | 법무법인 부산 대표변호사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학과 강사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 제2대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최고위원 |
군복무 | 육군병장 만기전역 |
국회의원 정보 | |
새정치민주연합 | |
국방위원회 |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19 |
정당 | 새정치민주연합 |
지역구 | 부산 사상구 |
당내 직책 | 대표최고위원 |
문재인(文在寅, 1953년 1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2] 대학에서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군에 강제징집 되었으며 특전사에서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전두환 군부독재에 항거하다 투옥, 감옥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풀려나왔다. 이후 사법연수원을 최상위권 점수로 수료하고 최고상도 수상하였으나 학생운동 전과 때문에 법무부에서 임용을 거부하여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을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오랜 기간 인권변호사로 생활했다.
2003년에 참여 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역임하였다. 2004년, 자리에서 물러나 히말라야로 트랙킹을 떠났고, 히말라야 체류 중 노무현의 탄핵 소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의 간사를 맡았으며,[3]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제19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전국 순회경선을 통해 민주통합당 제18대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이후 무소속으로 출마한 안철수가 경선을 거부하고 사퇴한 뒤 문재인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야권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졌으나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2014년 12월 29일에 공식적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 출마를 선언하였고 이듬해 2월 8일에 대표에 당선되었다.
문재인은 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의 약 800평의 한 한옥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 한옥은 2008년 한 화가가 사용하던 화실과 작업장이 있는 주택을 구입해 보수한 것이다.[1]
문재인은 1953년 1월 24일에 경상남도 거제 거제면 명진리 694-1번지[1] 에서 아버지 문용형과 어머니 강한옥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용형은 함경남도 흥남의 남평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으로 당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이름난 수재로 흥남시청에서 농업과장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12월 23일에 흥남 철수 작전 무렵에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가족과 함께 몸을 싣고 남쪽으로 겨우 피난해 내려왔다.[4] 아버지는 거제에 정착한 후 공무원 경력을 제시하며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노무자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으나, 수입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계란 행상을 해야만 했다. 문재인의 가족은 거제도에서 제대로 살 수 있는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문재인이 태어날 때에도 셋방을 살던 주인집에 임산부가 있다는 이유로, 산모가 진통 중에 이웃 집에 옮겨가 출산을 해야할 정도로 곤궁한 생활을 했으며, 이에 문재인의 생가는 실제 그가 살던 집이 아니었다. 결국 문재인의 부모는 자녀들의 교육을 생각해 부산으로 이사했으며, 문재인의 서류상의 본적은 부산 영선동으로 되어 있다. 문재인은 남항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가난 때문에 학교 바로 위의 '신선성당'에서 양동이를 들고 줄을 서서 정기적으로 배급을 타먹어야 했다. 배급을 받으러 온 문재인에게 수녀들이 귀엽다며 자주 사탕과 과일을 쥐어주었기 때문에 문재인에게는 수녀들의 모습이 천사의 모습으로 보일 정도로 감화가 되어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았다.
1965년에 남항국민학교를 졸업한 문재인은 당시 명문이던 경남중학교에 수석 입학했고, 1968년에 졸업한 후에는 당시 한강이남 최고의 명문고라 불리던 경남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했다.[5][6] 고교 시절 초기에는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말기에는 극도로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낙망, 술·담배에도 손을 대며 방황을 하다 입시에 실패, 서울대학교 진학도 이루지 못했다.[7] 문재인은 졸업 후 1971년 종로학원 진입 시험에서도 일등을 하며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했지만,[8] 서울에서 계속 재수 생활을 이어갈 만큼의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끝내 자신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이북에서 내려와 부산과 서울에서 경희대학교를 일으킨 조영식 박사의 권유를 받고,[9]1972년 4년 전액장학금을 약속한 경희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문재인은 경희대 법대 시절 운동권으로서 총학생회장이던 강삼재를 대신하여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로서 집회를 주도하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그 해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강제로 군에 징집되어 1975년 8월에 육군에 입대하였고 대한민국 39향토보병사단 훈련소를 거쳐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서 복무했다. 군복무 중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와 여단장 전두환으로부터 두 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수상했다.[10] 전역 후 1980년에 경희대 법대를 졸업한 후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청량리구치소에 수감 중, 경희대학교의 조영식 총장의 신원보증 아래 제22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후에 극적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제대 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내려지면서 실시된 예비 검속으로 체포되어, 사법시험 합격 통지서는 청량리구치소에서 받았다. 이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동기였던 박원순, 고승덕, 조영래 등 걸출한 인재들 사이에서도 일등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사법연수원 시험성적이 수석[11] 이었고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도 수상했지만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성적이 차석으로 밀리고[11] 원하던 판사는 물론 아무런 임용도 되지 않았다. 당시 사법연수원에서 12등이었던 고승덕이 판사로, 상위권이 아니었던 박원순도 검사로 임용되었기 때문에, 불합리한 처사였다.
이후 문재인은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변호사 노무현를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오랜 인권변호사 생활을 했으며, 부산광역시에서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법무법인 부산에서 노무현과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30년 가까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12]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부산변호사협회 인권 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 변호사로 일했으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론했다. 그는 1996년 8월 발생한 페스카마호 사건에서 조선족 선원들의 변호를 맡았다.[13] 한겨레신문 설립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문재인은 무료로 변론하게 되면 자칫 사건 당사자와 가족들이 재판을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료 변론은 하지 않았는데, 경상대학교 교수들이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저서를 강의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자 5년 간 변론을 맡아 항소심에서 승소했을 때 고작 1백만∼2백만원대의 수수료를 받기도 했다.[출처 필요]1988년에는 김영삼으로부터 노무현, 김광일과 함께 국회의원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문재인은 3명 중 유일하게 정치입문을 거절했으며[14] , 정계입문을 결심한 노무현과 김광일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변호사 활동을 하며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특히 2002년 대한민국 제3회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몇 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음에도 '나는 참모용'이라며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고사했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문재인은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 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러나 민정 수석을 그만두고 네팔 산행 도중[15]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영자 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으며[16],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 안에서 이정호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이호철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 등과 함께 PK인맥을 대표했는데, '왕수석'으로 불리며 한나라당으로 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인해 국정 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2인자로 주목받기도 했다.[17] 비서실장 시절 이해찬 국무총리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는 인사들과 내기 골프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고심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해임을 촉구하기도 했으며[18],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내는 업무 스타일을 보였다.[19] 또한 참여정부 들어 검사장으로 승진한 17명 중 문재인과 이호철 비서관의 경남고등학교 동문은 한 명도 없었는데, 두 사람은 아예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고, 고등학교 동창인 고위 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쫓겨난 적도 있으며, 또한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단 한차례의 식사나 환담 자리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20]
2006년 11월 6일 국정자문회의 의원 138명을 보궐할 때 국정자문위원으로 추가 보선되었으며[21],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재인에 대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22]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장례 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으며, 이후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 특수전사령부 출신, 사법연수원 차석 졸업 등 이력으로 인하여 대선에서 야권 후보들 중 지지율이 높은데, 2011년 8월 언론사 여론 조사에서 '당신이 원하는 국회의원' 부문에서 지지율 1위를 차지했고[23],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24] 이후 민주통합당의 대선 예비주자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다가 6월초, 출마를 결정하게 된다.
2012년 6월 17일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보통사람이 중심 된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라고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25] 슬로건은 "사람이 먼저다", 캠프명은 "담쟁이 캠프"로 정해졌다. 이후, 8월 25일부터 9월 16일까지 열린 국민참여경선에서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과 겨루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의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2012년 11월 18일 2기 지도부 총사퇴에 의해 민주통합당의 대표권한 대행이 되었다.
유력 대권후보로 떠오른 안철수와 단일화를 추진하였지만,[26] 단일화 과정을 둘러싼 문제로 11월 23일 안철수가 사실상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며 대선 후보직을 사퇴하였다.[27][28] 진보정의당의 심상정 대선 후보도 후보 등록을 앞두고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며 대선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또, 상도동계인 김현철, 김덕룡, 문정수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선후보급인 문국현, 박찬종의 지지를 받았다. 또, 보수인사로 알려졌던 윤여준의 찬조연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29] 그밖에 김영삼의 측근으로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폭로한 것으로 유명한 강삼재는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다.
한편 문재인은 12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와 함께 토론에 참석했다. 문재인 후보 측은 국가정보원에서 자신을 비방하는 여론조작을 벌인다고 12월 11일 공개하였다. 문재인 후보측은 그런 활동을 벌인 직원중 한명을 지목했다. 3차 TV 토론이 끝난 12월 16일 오후 11시 서울지방경찰청은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뒤에 허위로 밝혀졌다.
이후 2012년 12월 19일 선거에서 탈락 후보 사상 최다이자,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의 후보들 중 두 번째로 많은 14,692,632표(48.0%)를 득표했지만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약 100만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다음날 문재인은 패배를 승복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저의 역부족이었습니다. 정권교체와 새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습니다. 모든 것은 다 저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지지해주신 국민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선거를 도왔던 캠프관계자들과 당원 동지들 그리고 전국의 자원봉사자들에게도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의 실패이지 새정치를 바라는 모든 분들의 실패가 아닙니다. 박근혜 후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박근혜 당선인께서 국민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나라를 잘 이끌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국민들께서도 이제 박 당선인을 많이 성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문재인의 패배승복 대국민 기자회견 전문[30]
2013년 4월 9일 발표된 민주통합당의 대선평가보고서에 따르면, 패배의 주원인은 캐릭터 정립 실패로 국민들에게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또한, 설문조사 결과 당내에서 4번째로[31] 패배의 책임이 크다고 평가되었다.[32]
문재인 후보는 본인의 이미지와 캐릭터를 명확하게 정립하지 못했다. 따라서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문재인 후보가 얻은 득표의 45%가 안철수 지지자로부터 왔다. 이는 문 후보가 안 후보와 그 지지자들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문재인 후보보다 박근혜 후보가 능력이 훨씬 더 우월하다는 판단이 박근혜 후보 선택의 쪽으로 이동.— 민주통합당 대선평가보고서[33]
그러나, 오랫동안 칩거하던 기존의 대선 패배 후보들과는 달리 빠르게 정계에 복귀하며 패배책임을 지고 물러나 있어야하지 않냐는 논란이 일었다.[34] 노무현 대통령 서거 4주기 추도식을 기점으로, 온·오프라인을 통해 현안에 대한 입장도 자주 밝히며 대선 재도전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35][36]
2014년 12월 29일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37] 그는 당 대표가 되면 2016년에 치러질 차기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출마 선언 이후 약 5개월 만에 박원순 현 서울 시장을 제치고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탈환하였다.[38] 다음은 그의 당 대표 출마 선언문이다.
변화와 단결로 ‘이기는 정당’을 만들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당원 동지 여러분. 저는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경선에 출마합니다. 피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고민했습니다. 당의 갈등과 분열도 걱정했습니다. 깊이 숙고했습니다. 피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당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질 것을 결심했습니다. 저 문재인이 나서서 당의 변화와 단결을 이루어내겠습니다. 더 이상 패배하지 않는, 이기는 정당을 만들겠습니다. 저 개인을 위해서는 계산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정치적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겠습니다. 계산하지 않는 정치가 항상 옳았다고 저는 느낍니다. 오로지 ‘변화’와 ‘단결’로 ‘이기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일념뿐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당을 살리는 데 제 정치인생을 걸겠습니다. 당을 살려내는 데 끝내 실패한다면 정치인 문재인의 시대적 역할은 거기가 끝 이라는 각오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사랑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새정치민주연합은 창당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실정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일 년 내에 전혀 다른 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당으로 바뀌지 않으면 총선 승리는 불가능합니다. 정권교체의 희망도 멀어질 것입니다. 당의 존립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은 극도의 비상 상황입니다. 당의 변화를 위해 모든 힘을 모을 때입니다. 리더의 역할을 분리할 때도, 임기를 나눌 때도 아닙니다. 서로를 지역으로 나누고 계파로 구분하면서 대립하고 다툴 때가 아닙니다. 국민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국정이 난맥상을 보여도 우리 당은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런 현실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누구나 위기를 말하지만 당을 살리려는 절치부심이 없고, 실천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당의 기본을 세우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저 문재인이 당원 동지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우리 당을 완전히 바꾸어 놓겠습니다. ‘지는 정당’에서 ‘이기는 정당’으로 환골탈태하겠습니다. 승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승리의 동력은 바로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변화와 단결이 그 핵심입니다. 저 문재인이 하겠습니다. 총선 전까지 당을 완전히 바꾸겠습니다. 당을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제품으로 만들겠습니다. 기득권을 버리겠습니다. 지역주의를 뛰어넘겠습니다. 저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변화하고 혁신하겠습니다. 대표가 되면 저는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선당후사의 자세로 변화와 혁신에만 전념하고, 기필코 당의 총선 승리를 이끌겠습니다. ‘정치정당’을 명실상부한 ‘정책정당’ ‘경제정당’으로 바꾸겠습니다. 시민은 정당의 존립 근거입니다. 시민의 삶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합니다. 복지만이 아니라 경제성장에도 유능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성장방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소득주도성장’에 바탕을 둔 대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겠습니다. 극심한 소득불평등을 개선하는 대안이 될 것입니다. 민주정책연구원의 역할과 위상도 강화하겠습니다. 국민경제정책을 수립하는 최고의 싱크탱크로 만들겠습니다. 민생과 경제를 위한 일이라면 정부여당과도 협력하겠습니다. 정권교체에만 목표를 두지 않고 정권교체 이후를 준비하겠습니다. ‘여의도 정당’을 국민 속의 ‘생활정당’으로 바꾸겠습니다. 튼튼한 수권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지기반 확장이 중요합니다. 더 많은 당원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시민의 참여를 넓혀야 합니다. 당원과 시민이 네트워크 속에서 함께 해야 합니다. 네트워크 정당, 플랫폼 정당, 스마트폰 정당을 만들겠습니다. 당원이 당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만들겠습니다. 우리당을 시민의 직접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통로로 만들겠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삶을 책임지고 있는 자치단체장들의 당내 권한과 역할도 크게 높이겠습니다. 우리당을 지역주민들의 삶과 함께하는 풀뿌리 정당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치단체의 뛰어난 성과가 우리당의 업적이 돼야 합니다. 서로 소통하고 함께 참여하는 천만당원시대를 열겠습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저 문재인은 네 가지를 약속합니다.
첫째, 가장 강력한 당대표가 되겠습니다. 정부여당에게도, 당 혁신에서도 대담하고 당당한 리더십을 발휘하겠습니다.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당대표직을 수행하겠습니다. 유린되고 있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겠습니다. 당의 승리를 위해 저부터 변화에 앞장서겠습니다. 사사로운 욕심은 모두 버리겠습니다. 오로지 국민과 당원 동지들만 보고 일하겠습니다.
둘째, 계파논란을 완전히 없애겠습니다. 이른바 ‘친노’가 정치계파로 존재한다면 해체할 사람은 저 뿐입니다. 친노-비노 논란을 끝낼 수 있는 사람도 저밖에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김근태 의장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과 가치만 남기겠습니다.
셋째, 당대표 또는 계파의 공천은 결코 없습니다. 공천제도를 선거전에 미리 투명하게 만들겠습니다. 대표의 손에서 공천권을 내려놓고 공천제도와 룰이 공천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우리가 깨끗한 공직선거를 만들어냈듯이 역사상 가장 깨끗하고 공정한 공천혁명을 당원 동지들과 함께 이루어내겠습니다.
넷째, 권한은 나누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우리 정당의 역사에서 분권의 사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반면 책임 있게 추진해야 할 과제는 오히려 전가한 경우가 많습니다. 당의 변화와 혁신을 위한 권한은 강력히 행사하겠습니다. 공천권 같이 대표가 사사롭게 행사해오던 권한들은 내려놓겠습니다. 그리고 중앙당의 집중된 권한과 재정을 시도당으로 분산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권한의 책임은 저 문재인이 지겠습니다. 강력한 리더십은 많은 권한들을 가져야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움켜쥐고 있던 권한들을 손에서 놓고 제도화할 때 생긴다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당원동지 여러분. 새정치민주연합의 뿌리는 깊고 튼튼합니다. 정통야당의 맥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기에 처할 때면 민주주의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위기를 헤쳐왔습니다. 탄압 속에서 언제나 국민들과 함께 했던 우리 당원동지들의 단결된 힘 덕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민주주의 시대도 열었습니다. 민주정부 10년이었습니다. 경제와 민주주의가 함께 성장한 황금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부터 우리는 기득권에 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변화와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자세를 낮추는 겸손이 부족했습니다. 국민 속으로 들어가려는 열정이 부족했습니다. 국민들은 우리에게 보낸 신뢰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멈칫했던 지난 7년 동안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습니다. 인권과 자유가 크게 억압받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후퇴는 경제를 침체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회도 활력을 잃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이 국민들은 무기력하고 무능한 정부를 보면서 좌절과 절망을 넘어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분노를 넘어 희망을 담을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새정치민주연합에 주어진 시대적 사명입니다. 저는 국민들과 당원 동지 여러분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만큼 책임도 특별합니다. 제가 보답 못했던 사랑을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보답하고 싶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여기서 저의 정치생명을 걸겠습니다. 이제 변화와 단결로 가는 길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이 길은 ‘이기는 정당’으로 가는 길입니다. 정권교체로 가는 길입니다. 경제와 민주주의가 함께 성장하는 황금시대를 다시 여는 길입니다. 저 문재인이 앞장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 12. 29.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후보 문재인
— 문재인의 당권 출마 대국민 기자회견 전문[39]
문재인은 2006년 부산 지역 기자들과 만나 "참여 정부를 부산정권으로 안 받아들이는 것 이해 안돼",[40], "대통령도 부산 출신인데 부산 시민들이 왜 부산정권으로 안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한 지역에서 한 정당이 지방선거를 독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대통령의 의지" 라고 한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 대변인은 지역 감정 조장 발언이라면서 선거법 위반 여부를 조사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민주당 대변인은 노무현 정부가 국민과 호남인을 대상으로 사기극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40]
문재인은 2011년 6월 14일 발간한 자신의 자서전에서 대한민국의 전 대통령인 노무현에 대한 검찰 수사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인규에 대하여 "검찰은 박연차 회장의 말이 진실이라고 뒷받침할 증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대단히 건방졌다"라고 주장했다.[41] 이런 문재인의 주장에 대해 이인규는 수사 태도에 대하여서 "당시 노 대통령을 처음 뵈었을 때도 내가 상석에 앉거나 태도를 건방지게 해서 조금이라도 언짢게 느낄 만한 상황은 전혀 없었다. 조사 전에 한 10분에서 15분 정도 함께 있으면서 차를 마셨는데 여러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노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마쳤을 무렵에는 내가 직접 중수부 특별조사실로 올라가서 '수고하셨습니다'는 말을 하고는 20분 정도 선 채로 있었다. 그때 노 대통령은 앉아 계셨고 나는 예를 차리려고 최대한 노력했다"라고 밝혔고, 문재인의 증거 주장에 대하여 "그날 조사 당일 오후 5시께 미국의 핀센이라는 기관에서 노 대통령의 딸 정연씨가 미국에서 주택을 구입한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일종의 단서가 우리 수사팀에 도착했었다. 정연씨가 얼마짜리 주택을 구입했는지 금액을 특정할 수는 없고, 구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내용도 아니었다. 다만 수사의 단서로 쓸 수 있는 자료였다"라고 밝혔으며, 노무현과 박연차와의 대질을 하려는 발상 자체가 무례하다는 문재인에 주장에 대하여서는 "두 사람의 말이 틀리니까 어느 쪽이 진실인가 밝히기 위해서는 당연한 절차 아니냐.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한 것이다"라고 언론에 밝혔다.[42] 또 이인규는 문재인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검찰이 박 전 회장과 대통령 간 통화 기록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며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 것에 대해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은 처음부터 대통령이 달라고 해서 (돈을) 줬다"라고 진술, "박 전 회장은 2007년 6월 말 100만달러를 전달하기 전에 청와대 만찬에 초대돼 돈을 요구받았고, (돈을 준 후) 대통령에게 전화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박 전 회장은 만찬에 혼자 초대받아 노 전 대통령 부부와 세 사람이 식사를 했을 때 권양숙 여사가 노 전 대통령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아이들(노건호씨와 노정연씨) 집이라도 사줘야 하는데…'라는 식의 얘기를 꺼냈고, 이 얘기를 들은 자신이 직원 130명을 동원해 환전한 100만달러를 측근을 시켜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박 전 회장은 또 돈을 전달한 뒤 노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받았고, 고맙다는 취지로 받아들였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박 전 회장과 정승영 사장의 청와대 출입 기록, 달러 환전 기록 등을 확보했으나, 박 전 회장과 노 전 대통령의 통화 기록은 보존기간(1년) 경과로 이미 폐기돼 확보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43] 라고 조선일보에서 주장하고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선대위 안형환 대변인은 문 후보가 지난 2003년 일부 지분을 갖고있던 부산 부민동의 상가를 팔면서 기준시가보다 9천여만 원 낮춰 신고해 '다운계약서' 작성에 따른 세금 탈루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문재인 후보 선대위 우상호 공보단장은 부민동 상가는 당시 법원·검찰청 이전에 따라 일대 부동산 가격이 폭락해 공시지가보다 1억 가까이 낮은 2억 3천여만 원에 손절매한 것이라며 '다운계약서' 주장은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44]
한나라당 정진섭 의원은 2007년 4월 24일 한국고용정보원이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의 아들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했다고 주장했다. 고용정보원은 '문재인 아들의 경우 외부 수상경력과 외국어 실력(TOEFL 250점) 등이 높게 평가됐다'며 특혜 의혹을 부인했고[45], 문재인 측은 '동영상을 특정하지 않고 전산 부문으로 세부 공고를 한 부분이 오히려 특혜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관련 의혹을 일축했다.[46]
2012년 11월 27일부터 TV를 통해 방송하고 있는 60초짜리 대선 후보 광고에 나오는 문재인 후보의 자택광고에 나오는 가죽의자가 "임스 라운지 체어"로 밝혀져 논란이 시작되었다. 문재인후보의 배우자인 김정숙씨가 트위터에서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전시됐던 소파를 아는 분이 땡처리로 싸게 샀고 나중에 그걸 제가 50만 원에 산 중고"라고 해명했다.[47] 암스 라운지 체어의 미국 현지 가격은 4500달러 정도지만, 국내에서 중국산 OEM 제품은 50~100만원에 구할 수 있다.[48][49]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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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총선 | 국회의원(부산 사상구) | 19대 | 민주통합당 | 55.04% | 65,336표 | 1위 | |
제18대 대선 | 대통령 | 18대 | 48.02% | 14,692,632표 | 2위 | 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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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전 임 이병완 |
제30대 대통령비서실장 2007년 3월 12일 ~ 2008년 2월 24일 |
후 임 류우익 (대통령실장) |
전 임 장제원 |
제19대 국회의원(부산 사상구)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민주통합당 →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
후 임 (현직) |
[숨기기] 201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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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 ||
민주통합당 | ||
진보정의당 | ||
통합진보당 | ||
무소속 | ||
굵은 글씨는 등록된 후보를, 가는 글씨는 당내 경선에서 탈락하였거나 대선에 등록하지 않은 후보를 나타냄. [ ] : 해당 후보의 기호, ― : 중도 사퇴. |
인물데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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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문재인 |
다른 이름 | |
짧은 설명 | |
출생일 | 1953-01-24 |
출생지 | 대한민국 거제 |
사망일 | |
사망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