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국가 운영을 위한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거나 또는 도전할 소지가 있는
세력들을 하나둘 축출하였다. 가장 먼저 태종의 눈에 가시가 되었던 인물이 이거이였다.
태조 대 무장으로, 그리고 태종과 혼인관계가 있던 이거이였으나 사병혁파에 반대했다는 이유에서
제거되었다. 이거이는 당대 가장 많은 사병을 거느렸던 인물이었다.
이어 태종의 공격 화살은 자신을 그토록 도왔던 원경왕후의 집안으로 겨냥되었다.
외척으로 그리고 태종을 도와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기에 그 권력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러나 1406년(태종 6년)과 1409년 두 차례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전위 표명 과정과 1415년을 거치면서 결국 원경왕후의 4형제가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야말로 피의 숙청의 연속이었다.
태종은 생전인 1418년(태종 18년) 8월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아버지로서 비장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왕위를 물려주기 2개월 전에 있었던 일로,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대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었다.
당시 의정부를 비롯해 6조 등 조정의 많은 관원들이 양녕대군의 잘못을 논하면서
“만세(萬世)의 대계(大計)”를 위해 폐위시키기를 요청하였다.
어렵게 세운 왕조의 수성을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관리들이 세자의 폐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국왕과 교감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왕세자의 폐위에 대해 태종은 천명임을 강조하면서
후계자를 어진 이로 삼는 것은 고금의 대의라고 하며 그 정당성을 말하였다.
그 일이 비록 정당하다고는 하지만, 아비되는 입장에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록에서는 당시 태종의 심정을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냉철한이라도 이 상황에서 심적인 동요가 없을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