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시간계획과 나의 시간계획
찬양사역자 중에 최용덕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낮해밤달> 월간쪽지로 더 잘 알려진 분입니다. 대청호 근처에 거처를 마련해서 악보집을 만들고 쪽지를 출판하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분은 뇌종양을 앓고 있던 중학생 어린 딸 로아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최용덕님을 알고 있는 많은 분들이 간절히 기도했지만 부모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지요. 사람들의 시간계획은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시간계획은 딸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여러 해 동안 조금씩 물질을 도와주었던 형제분이 한 분 계십니다. 여러 해 동안 얼굴로 대면하지를 못했습니다. 너무나 궁금하기도 해서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만남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오기가 생겨서 만나고 나서 도움을 줄려고 도움주는 일을 중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는 더 이상 연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만나기를 꺼려하는 그 형제를 만나지 말고 좀 더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얼마 전에 인도한 집단상담에서 참석자 중에 한 분의 역동이 필요하다고 느꼈지요. 그래서 좀 더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토설하기를 원했습니다. 토설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본인의 마음이 준비가 되어야 하며 집단상담자와 집단원에 대한 신뢰심과 친밀감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아직 덜 준비된 분에게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하도록 도전(강요?)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열었지만 곧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 분은 집단상담에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자유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을 했습니다. 자신의 감춰진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힘들었지요. 하나님의 시간계획은 좀 더 기다려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인내는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나의 시간계획을 하나님의 시간계획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시간을 계획을 고집하고 나의 뜻을 고집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시간계획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김 영 근 목사<예수사랑, 가족사랑 발행인>
2012년 3월 가족치유회복중보기도
중국 상해에서 남서쪽으로 비행기로 1시간 정도가면 저장성의 온주지역입니다. 온주지역은 산업이 발전된 곳으로 다른 지역보다 가정교회가 뿌리를 잘 내린 지역입니다. 여러 곳에 교회들이 보였고 저녁에는 교회의 종탑 십자가의 네온사인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이 지역의 교회는 문화혁명시절에도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기독교가 건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이곳 출신의 온주상인들은 상업적인 수완도 뛰어나고 신앙적인 열정을 가진 분들이 많아서 전국으로 흩어져 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이라고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중국하면 중공이라고 부르면서 절망의 땅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절망 가운데에도 여전히 희망의 씨를 뿌렸고 자라게 하셨습니다. 절망처럼 보였던 문화혁명시기에 중국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원수가 뿌리는 가라지를 염려했지만 주님은 그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게 했습니다. 작금에 이 땅에 해체되는 가정들과 폭력이 난무하는 학교현실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 가정과 학교에 여전히 희망의 씨를 뿌리고 자라게 합니다. 우리의 남한 땅의 시·군·구는 248지역입니다. 내가 사는 지역의 가정과 교회와 학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더욱 간절히 중보기도의 손을 모읍시다.
1. 기도시간: 가족중보기도는 개인이나 교회별로 정해진 시간에 하루 1회 이상씩 합시다.
2. 중보기도참여자: 가정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3. 기도의 대상: 내가 살고 있는 <시ㆍ군ㆍ구>에 있는 가정들이 기도의 대상입니다.
<일반기도제목>
첫째, 가족식구들의 상한 마음을 건강한 마음으로 변화시켜주옵소서!
둘째, 내가 먼저 주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가족 안에 용서를 실천하게 하소서!
셋째,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하소서!
넷째, 가족식구들의 생각이 합리적인 생각과 성경적인 생각으로 바꿔지게 하소서!
<특별기도제목>
첫째, 학교공동체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아름다운 인격들이 많아지게 하소서!
둘째, 모든 가정이 서로의 연약함과 실패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셋째, 김정은 체제의 북한 사회가 국제사회를 향한 개방과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소서!
넷째, 계층과 지역 간의 갈등과 편가름이 사라지고 화해와 통합이 이루어지게 하소서1
김영근
거절하지 않는 마음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내가 쓴 영어과제에 대해서 정성껏 교정을 해준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의 도움으로 서투른 영어로 쓴 과제물을 교정받아서 제출하게 되어서 무척이나 감사했습니다. 사례하려고 했지만 끝내 거절해서 졸업할 무렵에 약간의 도서비를 감사의 선물로 드렸습니다.
한 번은 이 자매의 외할머니가 아파서 다음날 아침 일찍이 뉴왁공항(뉴저지에 있는 공항)에서 비행기로 폴로리다주의 마이애미로 가야했습니다. 나는 이 자매를 대신해서 다음날 제출할 나의 과제물의 영어를 교정해 줄 사람을 찾았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자매는 밤늦게 까지 내 과제물의 영어를 교정해주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고 다음날 일찍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자매는 거절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절하지 않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상담자가 가져야 할 여섯 번째 마음이 거절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가장 좋은 상담자였던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고 수용하셨습니다. 그는 손가락질을 당하는 결혼실패자 사마리아 여인, 나병환자들, 간음한 여인, 혈루증 여인, 거라사 광인,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등 모든 사람을 수용하셨습니다.
나의 영어과제를 교정해 준 그 자매는 나와 함께 임상목회교육(CPE, Clinical Pastoral Education) 과목을 수강했는데 이 수업 시간에 크리스라는 흑인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이 상담실습보고서(Verbatim) 발표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병실방문을 환영했던 독일계통의 백인여성환자에 관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때 과목의 담당자였던 여자 교수는 "그 백인여성이 너를 환영한 것은 너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네가 흑인이기 때문에 호기심이 있어서 환영했다”고 코멘트했습니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흑인학생 크리스는 그 교수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고 하면서 교수가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 수업을 보이콧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교수도 자신의 코멘트는 정당한 것이었다고 하면서 결코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임상수업은 교수 두 명과 학생 다섯 명으로 이루어졌는데 교수 한명과 학생 한명의 심각한 갈등국면으로 힘든 수업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이 자매는 끈질긴 노력으로 그들 둘의 의견을 잘 경청하면서 화해시켰습니다.
거절은 사람들 사이에 벽을 만들지만 수용은 막힌 벽을 허물고 서로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살게 하고 당대방의 이야기를 스폰지처럼 빨아들입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거절을 당하면 나중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건강한 자아상을 갖지 못한 사람은 거절을 당할 때마다 상처를 받게 되고 그의 영이 침침하게 죽어가며 나중에는 아주 소멸하게 되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지게 됩니다(잠언 20:27).
사무엘하 17장에 보면 압살롬의 다윗에 대한 반역사건이 나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압살롬군대는 도망가는 다윗왕의 무리들을 즉시 추격할 것인가 아니면 전열을 재정비하고 군대를 더 많이 모집해서 추격할 것인가에 대해서 두 가지로 의견이 나누어집니다. 그 때 압살롬의 고문관이었던 아히도벨은 다윗왕의 무리들이 지쳐서 피곤할 때 엄습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또 다른 고문관이었던 후새는 지금 공격하면 다윗왕의 군대가 비록 쫓겨 가는 도망병신세지만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용사들이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이스라엘 나라 전체의 협력 속에 군대를 보강해서 공격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는 후새의 모략을 받아들였는데 아히도벨은 자신의 충정어린 모략이 상관인 압살롬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을 알고서 거절감을 느낀 나머지 고향에 돌아가서 삶을 정리합니다.
사람들은 거절당하면 활기와 원기를 상실하고 모든 일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계속된 거절은 자기증오의 감정을 일으키며 남에게 거절당한 후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미워하게 됩니다. 열등감이라는 거절의 벽돌은 사탄이 주는 최대의 공격무기입니다. 거절당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못난이와 부족한 사람으로 비하시킵니다.
거절이 주는 아픔은 크리스천에게도 동일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교회를 섬겼는데 교회는 부흥되지 않고 교인들이 자신의 목회능력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질 때 목회자는 뼈아픈 거절감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영향력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거절을 당했을 때 실망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거절했지만 진정한 상담자이신 하나님은 나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상담자는 결코 거절하지 않는 수용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치유목회칼럼 7 나의 치유목회 한영수목사
내 위치에서 떠나는 생활
여러 해전 일입니다. 거제에서 목회하는 목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점심을 교회에서 같이 한 후에 그분의 간증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제도 촌에서 목회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서 지금은 거제도 중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신도시 지역에서 개척교회를 하시는 분입니다. 들어보니 진실하게 느껴졌고, 믿음과 열정이 있었고, 많은 고생을 한 분이었습니다.
처음에 10평 남짓한 홀을 하나 빌려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고생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쌀이 없어 굶어보기도 하고, 이후에 작은 교회당 부지를 마련했는데 주민들의 반대로 교회를 옮기기도 했고, 그러다가 지금은 거제도 중심지에서 약간 외곽인 곳에 녹지 500평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값으로 따지면 4억 정도 나가는 땅인데, 형편은 어려웠지만 너무나 비전이 있는 땅이어서 부채를 많이 안고 구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서울 S교회에서 2억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부목사로 계신 분이 이 목사님과 아는 사이인데 교회에 도움을 요청해보라고 해서 편지로 교회의 어려운 점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S교회에서 2차에 걸쳐 현지 답사해 보고는 한번은 5천만 원, 그 다음에는 1억 5천만 원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내려와서 쭉 살펴보고 이야기를 다 듣더니, 목사님 사택을 보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방을 보여주었는데 여기서 큰 감동을 받았다는 후문입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교회를 개척하면서도 자기가 살 궁리는 다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목사님은 그렇지 않음을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목사님의 진실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분의 열정과 순수한 믿음을 본 것입니다. 저는 녹지 500평을 믿음으로 구입한 목사님도 대단하지만, 거액 2억 원을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주는 S교회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S교회는 서울에 있는 대교회입니다. 이 교회로부터 감동받는 것은 대교회이기 때문이 아니고, 대교회의 위치에서 떠나 어려운 개척교회를 돌아볼 줄 아는 교회라는 점에서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큰 감동을 받는 것도 이런 모습 때문입니다. 하늘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셔서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내 위치에서 내려와 조금 낮은 곳에 처해보면 상대방이 이해가 되고, 눈이 열리고 정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내 위치에서 내려와 보는 것은 대단히 성숙한 모습이고, 소통을 가능케 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에 한번 씩 유월절에 누룩없는 떡을 먹어보고, 초막절에는 장막에서 생활해 보는 경험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 힘들게 살았던 과거를 재현하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이런 경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없어서 먹지 못하는 것은 자랑스런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있는데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절식하고 부유한데도 고생해보는 것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가진 조건이 좋아도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내 위치에서 내려오는 생활입니다. 내 위치에서 내려오면 지금보다는 문제가 많이 회복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말 씀 묵 상>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눅17:21)
"우리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을 수 있습니다."(히6:18)
"이 날은 야웨께서 내신 날, 다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시118:24)
"야웨께 바라는 자 모두 힘을 내어라 용기를 내어라."(시31:24)
"너희에게 어떻게 하여주는 것이 좋을지 나는 이미 뜻을 세웠다. 나는 너희에게 나쁘게 하여주지 않고 잘하여 주려고 뜻을 세웠다. 밝은 앞날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렘29:11)
"야웨는 우리의 도움, 우리의 방패, 우리는 애타게 그분을 기다린다."(시33:20)
김영근의 가정행복교실 3
가족끼리도 섭섭한 마음을 표현해야 좋습니다.
시집간 딸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엄마가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딸을 위해 손자도 돌봐 주는데 식사 한 번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따님한테서 먼저 이야기가 나오지가 않았지요. 딸의 바쁜 생활은 이해하지만 섭섭합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에 남아있는 섭섭함은 거리를 만들기 때문에 표현해야 딸과 엄마 사이가 더욱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섭섭한 감정을 표현하면 혹시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까봐 말하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둘 때가 많습니다. 감정이란 나눌 때에 더욱 정화가 되고 아름답게 자라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정서로 변해서 굳어지고 건강하게 자라지를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초창기에 그렇게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성장하면서 인격이 완성되어 가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엔가 서로를 향해서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성장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자녀가 부모의 감정표현으로 스트레스가 과중될까봐 꼭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지 않고 지냅니다. 이것은 자녀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는 성장하면서 부모님의 힘든 삶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의 감정표현이 부모님을 더 힘들게 만들까봐 감정표현을 망설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와 자녀 사이가 예의를 갖추고 더욱 성숙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부모와 자녀사이에 친밀감은 소멸되며 서로가 눈치만을 보게 됩니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시절에는 그렇게 감정표현이 좋았는데 결혼하고 함께 인생을 살아가면서 감정표현에 인색해집니다. 그러면 둘 사이의 관계도 멀어지고 친밀감도 약해지면서 더욱 남남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순진하다는 의미는 마음이 부드럽다는 의미이고 유연성이 있으며 감정 표현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입니다. 감정표현이 어눌해지면 어느 순간에는 울 때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울게 됩니다. 결국 우는 자유가 박탈됩니다.
물론 감정표현에도 방법이 있습니다. 감정의 표현은 건설적으로 해야지 파괴적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감정표현을 파괴적으로 하면 감정은 거친 분노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감정을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서로의 관계는 파괴됩니다.
올바른 감정표현은 나 전달법(I-message)을 사용해서 해야 합니다. 나 전달법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긴 사건이나 행동을 말한 다음에 그 사건으로 인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되는 의미가 너 전달법(You-message)입니다. 이것은 사람사이에 생긴 사건이나 행동을 말한 다음에 상대에게 그런 사건이나 행동을 만들어서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상대를 비난합니다.
나 전달법의 예를 들어봅시다. "엄마는 외손자를 돌보면서 돌봄의 행복을 누리게 되어 감사하다. 그런데 엄마는 너로부터 수고하는 엄마에게 식사자리를 한 번 마련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내 마음이 섭섭하구나."
이것을 너 전달법으로 표현해봅시다. "엄마는 외손자를 돌보면서 돌봄의 행복을 누리게 되어 감사하다. 그런데 수고하는 엄마에게 식사라도 한 번 하자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 너의 이기적이고 무정한 태도에 엄마는 화가 난다."
딸의 입장에서 엄마로부터 나 전달법의 감정표현을 듣게 되면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런데 너 전달법의 감정표현을 듣게 되면 오히려 화가 치밀어서 마음을 닫게 됩니다. 따라서 감정표현은 가능하면 나 전달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면 성숙한 인격이 못된다고 여기는 유교문화 속에서 성장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 식구끼리도 자신의 힘든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뢰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든 부분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집 둘째 아이가 중학교를 다닐 때에 어버이날에 감사카드를 보냈습니다. 그 카드에는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내용을 먼저 적었고 말미에 어머니가 고등학생인 형의 공부만을 도와주고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는 자신을 도와주지 않아서 어머니에게 섭섭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카드를 보면서 자신의 섭섭한 감정을 표현하는 아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고 대견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가 두려워서 아버지에게 감정표현하지 못하면서 성장기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친구사이가 경쟁관계로 남아 있으면 진정한 친구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쟁사회는 친구사이도 누가 더 세상적으로 성공하느냐는 관점에서 보기시작하면서 진정한 친구관계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진정한 친구사이는 자신의 연약하고 힘든 부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는 예수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보이면서 살아갑시다. 예수님도 울기도 웃기도 잘 하셨지요. 우리의 감정은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관리해서 그 감정이 아름답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문형욱
친밀감
믿음의 크리스천 청년 여러분!!!
어느덧 2012년도 힘차게 시작되어 새싹이 나오는 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네요.
여러분은 봄 하면 무슨 생각을 떠올리시나요?
따스한 봄날에 동화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을 하고 싶지 않나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정의로도 표현하기는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만 해도 설레이는 아름다운 단어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이번 2012년에는 마음 놓고 해 보면 어떨까요?
갓데이트는 크리스천 청년들의 올바른 결혼관을 심어주고 건전한 데이트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선교단체입니다.
갓데이트는 결혼식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습니다. 결혼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준비하는 곳입니다. 호화로운 결혼식이 아니라 행복한 믿음의 가정생활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갓데이트는 결혼 전 준비해야할 것들에 대해 훈련하고 준비하는 곳입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며 실천을 통해 더욱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웠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가 나를 일방적으로 이해해주고 사랑해주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첫 번째, 먼저 다가서서 친밀감 있는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친밀감은 자기 자신의 공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느낌을 상대방에게 잘 표현해 보세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 때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훈련을 해보세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따뜻한 말투로 이야기 하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데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또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만을 한다면 친밀감을 느끼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경청하며 비언어적 표현을 적당히 사용하며 들어 주어야 친밀감이 느껴 질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공개하고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 상대방도 친밀감이 느껴 사랑을 나누는데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대화패턴을 검토 해보세요. 혹시 상대방을 깎아 내리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의 생각을 모호한 표현으로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는지. 상대방의 다른 생각들을 묵살하고 있지는 않는지 사랑의 대화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많은 학대적 관계 속에서 학대적 언어를 서스럼없이 표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학대적 대화를 한다면 인간관계는 더욱 깨어지게 되고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분노만이 남을 것입니다. 사랑의 대화를 하기 위해 따뜻한 마음을 표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해 준다면 상대방은 더욱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기쁜 마음을 가지고 열정을 다해 사랑을 나누어 보세요. 기쁨 없는 행위는 모두 허사가 될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실 때 더욱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고 상대방에게 사랑을 표현해 보십시오. 내가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렛을 10만원 어치 해주었다고 상대방도 내가 해준 것 이상은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 보세요.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 형상을 닮은 아름다운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멋진 사랑을 지금 시작해보세요. 축복된 만남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
<성 찰>
"위대한 일은 무엇이든지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토마스 칼라일)
"어둠이 깊을지라도 신앙과 희망을 지니고 살라. 너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너의 근심을 맡기라 그분은 너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분께서 너를 홀로 버려두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그런 일은 그 분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김영근의 마음치유여행 4 - 고통 속에 얻은 깨달음 -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여러 해 전에 위로 차 방문했던 경북 김천지역에서 목회하던 목사님의 하소연입니다.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우리 가정에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안동에서 중학교교사로 있던 결혼한 따님이 불량 청소년들의 폭력으로 인해서 살해당하고 시체는 낙동강에 버려졌습니다. 그 후에 이 목사님도 교통사고로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먼저 죽은 큰 따님은 제가 1996년 7월에 최용덕님이 섬기는 갈릴리마을에서 인도한 내적치유모임에 참석했던 선생님이셨습니다. 그 때에 따님은 아버지 목사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구에서 자취하면서 어렵게 학교를 다닐 때에 자신들도 힘드는데 더 어려운 형편의 친척과 함께 생활하도록 해서 서운했다고 합니다.
따님의 죽음과 연이은 아버지 목사님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왜, 하나님은 이렇게 신실한 가정에 고통을 허락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주변을 보면 참으로 신실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억울한 희생자가 됩니다.
나영이 사건이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2008년 12월 경기도 안산시에서 성폭력전과자 조두순은 성폭행으로 8살짜리 나영이의 육체와 영혼을 완전히 망가뜨려놓았습니다. 아버지는 일용직노동자, 어머니는 가사도우미로 살아가는 가난한 소시민 가족입니다. 어린 딸의 고통이 이들 가족의 고통이 되었고 모든 국민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소설가인 고 박완서님은 남편을 사별한 뒤에 1년도 안되어 외아들을 잃게 됩니다. 그녀는 마취과 전문의 과정 중에 있던 미래가 창창했던 26살 밖에 안된 외아들이 죽자 발작해서 십자가를 땅바닥에 내어치기까지 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신자였던 박완서님은 처음에는 아들을 데리고 간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속의 인물들이 겪는 고통들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욥입니다. 동방의 의인으로 알려진 욥의 가정에 재앙이 닥칩니다. 자녀들이 모두 죽고 모든 종들과 가축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빼앗기게 됩니다. 욥은 몸에 악창이 나서 견딜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 그의 아내도 그에게 악담을 퍼붓습니다. 욥을 위로하러 왔던 세 친구들은 고통을 겪는 욥에게 그의 환난은 죄의 결과라고 말하면서 욥을 정죄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습니다. 욥은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지만 욥의 세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의 고통은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욥을 힘들게 합니다.
신실한 농부였던 나봇도 힘든 고통을 겪었습니다. 나봇은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왕의 궁궐근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밭을 채소밭으로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말로 나봇의 포도밭과 왕궁소유의 토지의 맞교환을 원했지만 나봇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처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왕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 아합왕의 부인 이세벨왕후의 술수로 그는 죽임을 당하고 그의 포도밭은 강제로 빼앗겨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고통을 겪으셨는가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행복한 시간도 가졌지만 남보다 고통을 많이 겪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말씀을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사53:2,3)"고 말씀하십니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올곧게 만난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어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이 있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귀머거리에게 알아듣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는 소유한 모든 재물을 탕진하고 굶주림의 고통을 겪게 되었을 때 하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우리 삶에 무엇이 틀렸는지,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은혜로운 도구입니다. 우리가 만일 고통을 체험할 수 없다면 문제점을 감지하고 개선을 향한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기에 고통의 순간은 깨달음의 시간입니다.
욥은 혹독한 고난을 겪은 다음에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하나님을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내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욥42:5) 고통을 겪기 전에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고통을 겪고 나서 이제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 욥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새롭게 만납니다.
고통 중에 깨달은 진리
저의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목회자이지만 오랫동안 전형적인 물량주의자로 살았습니다. 나에게 크고 많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작고 적은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면서 물질의 넉넉함은 저에게 거리가 멀었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신학대학원의 동기들을 보면 상당히 많은 동료들이 어느 정도 물질의 자유함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물질면에서 보면 상·중·하에서 중 ·하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물질의 부족함 속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초라해짐을 경험합니다. 종종 나의 부족함을 자족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에 그렇지 못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나이 50세를 넘어가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겪은 작은 고난을 통해서 한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동안에는 한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고 많은 수만을 원했습니다. 집을 떠나면 고생이라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009년 12월 21일부터 2010년 2월 6일까지 약 50일 동안을 도보로 전국여행을 했습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도보여행의 고통을 견디고 저녁에 방문하는 가정에서 나를 환영해 줄 것인가를 염려하면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나는 여행 중에 크고 넉넉한 집이 아니더라도 작고 초라하지만 안정된 거처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를 환대하는 손님의 마음의 소중함도 깨달았습니다.
이북에 있는 동포들의 꿈은 이밥(쌀밥)과 고깃국이라는 말을 합니다. 물질의 궁핍함의 고난 중에 있는 그들의 소박한 행복은 배고픔의 해결입니다. 고통을 겪으면서 얻은 깨달음은 참된 행복은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고 진정한 행복은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경험하는 작고 소소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은 인생에 꼭 필요한 소중한 경험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피해가고 싶어합니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의 공통된 심정은 자녀들을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장과정에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은 자녀들을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자녀들의 편리와 안일을 위해서 과보호를 하며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심지어 군대가는 것이 고통스럽기에 자녀의 군복무를 면제받기 위해 묘안을 짜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자연의 실상이요, 법칙이기에 인간의 성장에도 꼭 필요합니다. 충만된 삶을 살아가려면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찰스 코우만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 고치구멍을 뚫고 나오는 광경을 관찰했습니다. 나비는 작은 고치 구멍을 뚫고 나오려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코우만은 나비가 안쓰러워서 가위를 가져다가 고치구멍을 조금 뚫어주었습니다. 나비는 밖으로 나왔지만 창공을 날지 못하고 비실거리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나비는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날아갈 힘을 갖지 못했습니다. 나비는 작은 고치구멍을 뚫고 나오려고 애쓰는 가운데 날개 힘을 키우게 되는데 코우만의 값싼 동정으로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어떻게 고통을 해결할 것인가?
고통을 해결할 뚜렷한 방법은 없습니다. 고통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실한 종이었던 사도바울도 몸의 가시 때문에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가시는 눈병이라고 알려지기도 했고 간질병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간질병이라는데 무게의 중심을 둡니다. 그는 처음에 이 고통을 없애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도바울의 기도요청에 응답하지 않으시면서 다른 응답을 주셨습니다. "바울, 너는 이미 충분한 은혜를 받았다. 가시를 제거하지 않고 두는 것은 큰 아픔이지만 그 가시로 인해 더욱 나를 의존하게 되고 그 연약함으로 인해 너는 겸손할 수 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네가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길이다."(고후12:9)
바울사도는 자신의 몸의 가시를 안고 가야 하는 십자가로 겸손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고통의 십자가는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해결할 수 없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고통은 인간의 실존이기에 고통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고통 안에서 쉽니다. 고통을 받아들일 때 고통스러운 상황은 존재하지만 평화의 자리는 마련됩니다.
충만한 삶은 충만한 고통을 전제합니다. 우리가 고통을 감내하고 안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생애는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고통도 기쁨도 삶의 한 영역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십자가가 없었다면 그 삶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들의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진정으로 가치가 있었던 삶은 언제였던가요? 그것은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입니다. 해병전우들의 멋진 공동체는 그들이 고통을 함께 겪었기 때문입니다.
젊은 남녀가 만나서 연애를 할 때는 행복합니다. 결혼하고 나서 얼마 동안은 행복하지만 거기에는 곧 경제적인 어려움도 생기고 자녀의 육아문제로 인해 고통도 시작됩니다. 이러한 때에 고통받기를 서로 피하면 그들의 결혼생활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실 육아는 고통이지만 육아를 통해서 부부는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광일
떠남의 영성
성경은 <떠남>을 배경으로 읽혀지고 해석되어야 할 책이다. 창세기는 이를 뒷받침한다.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향한 새 출발이 있었기에 성경이 말하는바 대 주제인 "창조와 구원의 신앙"이 가능했다.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이 떠남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적 뒷받침이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떠남>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믿음이 있었기에 떠날 수 있었고 또 떠남으로 믿음이 확증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믿음과 떠남은 같은 말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한번 물어보자.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분명히 이렇게 답할 것이다. "믿음은 한마디로 떠나는 것이요" 라고.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기에 그는 수천 수만리 대장정의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이다. 현재 진행형이다. 이성적 머리의 믿음, 감정적 가슴의 믿음도 때때로 필요할는지 모르겠으나 믿음은 실천적 손과 발 그리고 몸의 믿음이다.
믿음은 떠남으로 확증되고 떠남은 믿음을 통해 완결된다.(?) 떠남이라는 훈련과 실천의 과정 없이는 믿음은 그저 관념의 영역에 머무르고 만다. 믿는다면 떠날 수 있다. 믿음이 있기에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떠남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주겠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났고, <하란>을 떠났고, 이른 아침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떠났다. 이런 떠남의 영성은 이삭에게 그대로 전수된다. <그랄>에 거주하던 이삭은 블레셋 사람이 시기할 정도로 많은 양과 소를 가진 거부가 되었으나 그 곳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서 살기 위해 메워진 우물을 파 샘의 근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랄 목자들과의 다툼 때문에 그 곳을 떠나 새 우물을 파고 또 다툼 때문에 다른 우물을 파고 <브엘세바>란 곳에서 세 번째의 우물을 판 다음에야 비로소 그곳에 거주하게 된다. 그의 아들 야곱은 어떠한가?
야곱은 그야말로 떠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될 듯싶다. 그는 형을 피해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 이라는 곳으로 향한다. 어느 날 이름도 모르는 한 땅에 이르러서 지친 몸을 돌베개에 맡기고 잠을 자다가 꿈에 하늘까지 이어진 사다리의 층계를 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 28:13-15)"
야곱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의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다. 야곱은 그 땅을 떠나 라반의 집으로 가서 14년을 섬기며 산다. 그러나 라반을 또 떠나야 했다. 길르앗 산, 미스바, 브니엘 그리고 숙곳으로 길 떠남의 삶은 계속되었다. 야곱은 자신과 그의 조상의 삶을 "나그네 길"로 밝히고 있다(창 47:9). 자신이 걸어온 130년의 험악한 세월도 조상의 나그네 세월에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떠남의 나그네 생활이 있었기에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이어지는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더불어 "야곱의 하나님"으로 고백되었다. 더 이상의 다른 이름은 필요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떠남의 영성은 아들 요셉에게로 이어져 내려온다.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지나치게 받은 것이 화근이 되어 형들의 시기와 모함 때문에 멀리 이집트로 팔려 떠나가는 신세가 된다. 성경을 읽으며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장자상속이라는 엄연한 히브리적 가족제도가 있었음에도 영적 계보는 장자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일까? 왜 가인이 아니고 아벨이며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며 왜 르우벤이 아니고 요셉일까? 첫 아들에 대한 영적 상속권은 어찌된 것일까? 영성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 답은 분명하다. 바로 떠남의 문제인 것이다. .
그런 점에서 요셉도 예외일 수 없다. 그는 그의 부친이나 조부나 증조부보다 더 어릴 때부터 떠남의 나그네 세월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가나안의 아버지 집을 떠나 이집트로 팔려가게 된 요셉은 경호 대장 보디발의 집 머슴살이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집의 재산관리 책임자가 되었으나 안주인의 모함으로 끝내 감옥행. 그러나 감방마저도 그의 안식처는 될 수 없었다. 간수장, 술 시종장, 빵 시종장을 거쳐 파란곡절 끝에 이집트 왕 <바로> 앞에 서게 된 요셉. 지나 온 날은 떠남의 세월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는 "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39:3), 주께서 요셉을 돌보셨다(39:23)"고 기록한다. 심지어 바로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 사람 말고,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41:38)" 이 떠남의 은총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삭을 거쳐 야곱을 이어 이렇게 요셉의 경우까지 이어 내려온 것이다.
영성이 하나님을 단순히 머리로만 알고 이해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하나님 체험은 어떻게 가능할까? 알지 못하는 세계,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삶이야말로 온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길이 될 것이다. 미래의 허공을 향해 두 발을 내 딛는 것, 이것이 진정한 <떠남>이다. 따라서 순례자는 어디에도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늘 길 떠나는 삶이다. 여우의 굴이 부럽고, 새의 보금자리가 탐난다면 그 길로 가면 될 일이다. 예수는 자신이 머리 둘 곳 없는 나그네의 삶임을 제자들에게 먼저 상기시켰다. 아버지의 장례도 머무름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마태 8:22)" 이것이 예수의 말씀이다. "나를 따르라!" 이 말 보다 강력한 "떠남"의 촉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따르라>는 말은 <떠나라>는 말이다. 떠나지 않고는 따를 수가 없다. 떠남을 전제하지 않는 따름은 진정한 따름이 될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다. 그러나 끝내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떠남의 문제였다.
<떠남>이라는 물리적 현상도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떠남>을 영성화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떠남>과 <떠남의 영성> 이 둘의 차이는 유목민과 유목성의 차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한 곳에 머물며 농사짓지 말고 한평생을 돌아다니며 떠돌이로 살라는 뜻이라기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던지 유목성을 생활화 하라는 말이다. 농사를 해도 유목성의 농사가 있을 수 있고 유목민으로 살아도 정착과 안주의 유형이 있을 수 있다. 수 백 년 전부터 해온 방식 그대로 그 어떤 새로운 시도나 도전 없이 낡은 관습과 전통에 얽매어 그저 그렇게, 그냥 그렇게, 의미 없는 단순한 반복의 연속 이라면 밭을 갈든 양을 치든 소를 먹이든 무엇이 다르랴! 떠남의 참 영성적 의미는 무엇일까?
영성이 참으로 인간의 문제이고 인성의 문제이고 다른 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문제일진데, 떠남도 그것이 진정한 영성의 차원이라면 곧 나 자신으로부터의 떠남을 뜻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이 떠남은 단순한 "나의 떠남"과는 다르다. 나의 떠남은 그냥 내가 떠나는 것이다. 산에 가고 싶으면 산에 가고 바다에 가고 싶으면 바다에 가는 그런 떠남이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피곤해진 몸과 마음을 달래며 원기를 회복하고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기 위한 떠남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내가 나로부터 떠나기 위해서는 보다 큰 용기가 요구된다. 보다 크다는 말 보다는 다른 차원의 용기라고 해야 맞을 듯싶다. 앞의 용기가 가던 길을 더 잘 가기 위해 자동차에 주유(注油)하는 정도의 차원이라면 뒤의 용기는 자동차 자체를 근본적으로 점검하는 리모델링 아니 리엔지니어링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어디로 가느냐 얼마동안 있다 오느냐에 대한 물음이 전자의 경우라면, 후자는 여행 그 자체 또는 여행 떠나는 사람 그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말이다. 그렇다. 영성의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출발선으로 삼으며 또한 늘 자신을 목적지로 삼는다. 내가 떠난 그 지점이 내가 다시 돌아와야 할 지점이다.
떠남은 머물지 않음이다. 왜 떠날 수 있는가?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떠남으로써 본질이 지켜진다. 떠남으로써 변질되지 않는다. 이른바 "처음처럼"이 유지될 수 있다. 우리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본래의 의도, 처음 순수했던 상태를 져 버리고 나중에 변질되었음을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를 가끔 한다. 첫 시작의 아름다움이 계속 유지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떠나야할 때를 놓치면 그렇게 되고 만다.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더럽다.
떠남의 대상이 집이나 땅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때로 어머니의 품이기도 하며, 때로 아버지의 영향권이다. 때로 학설(學說)이며 때로 교리(敎理)이며 때로 신앙체계가 된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절대시 해왔던 그 무엇, 그것을 위해서 살아왔으며 그것 없이는 못산다 한 그것을 떠나는 것이다. 그런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가 아니 버릴 수 있는가 과감히 내 던질 수 있는가? 과연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가? 성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며 그런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기독교는 가능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태 4:20)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태 4:22)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누가 5:11)
김은섭
포대에서 보내는 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마을이 숨기지 못할 것이요."
많은 성도들이 사랑하는 말씀이고, 또한 부담스러워 하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이렇게 크다는 사실이 가슴에 벅차면서도, 그 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장교로 입대하면서 나름 대단한 결심과 소원들이 많았다. 다양한 모양이지만, 한 가지로 정리하자면, '빛과 소금'이 되어야한다는 소원이었다. 지난 4년간 선교단체에서 많은 훈련을 받기도 했고, 왠지 이 일에 자신도 있었다. 장교 훈련을 받는 동안 남들이 잘 지키지 않는 규정들을 열심히 지켰고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했다. 청소를 하면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화장실의 소변기 속 청소를 자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지쳐갔다. 나에게는 모든 훈련을 다 받고도 힘이 남아서 봉사를 계속할 수 있는 강한체력이 있지 않았다. 일정에 잡힌 훈련만으로도 피곤해서 마냥 눕고 쉬고 싶은 평범한 체력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남들이 다 짜증을 내는 상황에서 혼자 밝게 웃을 수 있는 초긍정의 성격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힘이 들면 피곤하고 짜증도 나고, 교관들이 싫은 소리를 하면 마음속으로 욕도 나오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결심하고 살아온 빛과 소금의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맛을 잃고 빛을 잃은 것 같은 내 모습에 깊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이러던 때에 어머니께로 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마지막에 "은섭 그냥 너이면 된다."라는 말을 하셨다. 어머니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깨달아져서 많이 울었다. 까먹고 있었던 사실이 기억나서 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져야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었다면 처음부터 나 같이 못난 죄인에게 복음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분은 그저 나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나에게 "그냥 너이면 된다."라고 하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주님은 우리에게 빛이 되라(become)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미 우리가 빛이라(be)는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진짜 성도라면 나의 표정과 말씨, 삶의 소원과 생활에서 가식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묻어날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평범해서 지금 당장에는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며 밤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빛으로서 자연스럽게 빛날 것이다. '주님, 이렇게 못난 아들인데, 나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도 아버지의 존재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
<다 짐>
오늘 나는 실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굳게 서 있겠다.
오늘 나는 덜 망설이고 더 희망하겠다.
오늘 나는 나 자신과 하나님을 믿겠다.
나는 희망으로 나의 삶을 채우겠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나 하겠다.
나는 어떤 문제점이라도 해결해 나가겠다.
오늘 나는 내 주변에 펼쳐져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바라보겠다.
오늘 나는 하나님 사랑의 현존을 느끼겠다.
오늘 나는 나의 삶속에서 기쁨을 누리겠다.
하나님은 풍요롭고 보기좋게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나는 오늘 나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받아들이겠다.
오늘 나의 삶속에 하나님의 축복과 풍요로움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 날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날이다. 나는 이 날을 기쁘게 지내겠다.
나는 나의 삶을 새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기운을 북돋워 주고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나는 삶속에 커다란 희망이 있음을 확신한다.
삶의 현장에서 김하기
창조는 마지막 인내에서 성공한다.
우리는 흔히 창조성을 번뜩이는 영감이나 선천적 능력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에디슨의 말처럼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의 산물이다. 한 개인의 창조성도 벽을 문이라고 밀고 나가는 우직함과 곰 같은 인내가 없이는 발휘될 수 없다. 우직함이 만들어낸 개인의 창조성에 대해 알아보자. 페르디낭 슈발(Ferdinand Cheval, 1836~1924)은 프랑스 오뜨 리브 마을에서 우체부로 일하고 있었다. 슈발은 우편배달 도중 우연히 예쁜 돌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우편 배낭에 주워 담은 이후 매일 돌을 주워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이 일흔에 용, 피닉스, 거대한 여인상, 스핑크스 모양의 신비한 성채의 모습을 완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빨레 이데알(Palais Ideal)'이라는 거대한 성이었다. 그는 이 궁전을 완성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도 천재성을 가졌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 성을 만들었다."
지금 슈발의 성은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이 찾는 꿈의 명소가 됐다. 멋진 성을 관광하기보다 평범한 한 인간의 능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해….슈발의 성처럼 한 개인이 밀어올린 한 또 하나의 극단적인 일이 있다. '만지'는 인도의 산간마을 '가홀로우르'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산에서 굴러 떨어져 피를 흘리게 됐다. 읍내 병원까지 직선거리로는 불과 1km도 되지 않는 거리. 하지만 칼바위산이라는 험준한 산이 가로막혀 있어 무려 88km를 에둘러 가야 했다. 만지는 아내를 수레에 싣고 가는 도중 그만 아내가 죽고 말았다. 만지는 아내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정과 망치를 들고 칼바위산을 뚫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만지가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만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칼바위산을 뚫었고, 그가 정과 망치를 든 지 22년 만인 1982년에 마침내 칼바위산을 관통하는 915m의 만지 터널을 뚫어냈다. 그의 한 맺힌 집념과 끈기 덕택에 오늘날도 마을 사람들은 편리하게 자전거와 수레로 읍내를 왕래할 수 있게 됐다. 슈발의 성과 만지 터널은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창조성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나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볼 때도 이런 느낌이 든다. 창의력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의 고독과 실존적 결단에서 나오는 문제해결능력이다. 그리고 문제는 결코 단번에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공이산(愚公移山), 우보만리(牛步萬里)가 역설적으로 가장 빠른 해결책이 된다. 호랑이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은 기약한 100일을 지키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 나왔기 때문이고, 이매탈에 턱이 빠진 것은 탈을 깎는 허도령이 100일에서 하루를 채우지 못 했기 때문이다. 에디슨이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물의 비등점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은 아닐까? 물은 100도에서 1도만 모자라도 끓지 않는다. 마지막 1도가 더해져야 물방울이 솟아오르면서 물이 끓는다. 결국 에디슨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애초에 천재나 영감 따위란 없는 것이다. 마지막 1%마저도 노력과 인내다. 그것에서 천재적(창조적) 결과물이 나온다.' '암흑가의 두 사람'은 프랑스의 느와르(범죄) 영화를 예술영화로 끌어올린 명작이다, 은행 갱인 알랭 들롱은 12년 형을 받고 출소하는데 그를 체포했던 형사 장 가방은 알랭 들롱이 또다시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결혼과 직장을 챙겨주는 등 신경을 쓴다. 알랭 들롱도 가정에 정을 붙이고 올바르게 살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결국 범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채 은행 강도로 나서다 살인까지 저지르고 만다. 알랭 들롱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뒤, 장 가방은 어둠 속으로 페이드 아웃(Fade Out)하면서 명대사를 남긴다. "그는 마지막 인내에 실패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동굴 속에서 백일을 버틴 웅녀의 창조적 유전인자가 있다. 우직한 웅녀정신으로 한걸음만 더 나아가자. 창조는 항상 마지막 인내에 성공하는 것이다.
@@@@@@@@@@@@@@@@@@@@@@@@@@@@@@@@@@@@@@@@@
<1박 2일 마라톤치유집단상담>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일시 : 3월 23일(금)저녁 7시-24일(토) 저녁 7시, 장소;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주제 : <행복을 위한 더 깊은 샘파기> 인도자: 김영근 원장과 김희라 상담실장
회비 : 13만원 등록: 농협121015-52-049140 김영근
참가대상 : 관심있는 모든 크리스천, 교회섬김이, 상담실습생 및 집단상담전공자
가족치유상담연구원 상담 ․ 교육프로그램 안내
<제 2기 치유상담 아카데미 상담교육>
상담전문가로 임상을 경험하고 유능한 상담자로서 훈련받는 상담교육과정이다.
과목 1 |
ㆍ주제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MBTI, 자기발견, 타인수용> |
ㆍ일시 : 3월6일-4월24일(매주 화, 8회) 오전10:30-12:30. | |
ㆍ강사 : 김희라교수(본연구원 상담실장, 인제대 외래교수) | |
과목 2 |
ㆍ주제 : 하나님의 다림줄<건강한 크리스천인격계발> |
ㆍ일시 : 3월6일-4월24일(매주 화, 8회) 오후2시-4시. | |
ㆍ강사 : 김영근교수(본연구원 원장, 장신대 외래교수) |
<개인상담>
사전전화예약한 후에 상담을 진행합니다. 지역교회의 위탁상담을 환영합니다. 개인상담예약 02-3675-7368, 010-3290-1007.
<집단상담>
만남과 나눔을 통해 함께 치유와 회복을 찾아가는 소그룹 치유공동체모임
집단6기 주제 : 하나님의다림줄
일시 : 3월7일-4월25일(수, 8회) 오전10:30-12:30.
<목민독서교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저녁에 읽은 책을 함께 나누는 식사를 겸한 독서치유모임
3월 모임 : 3월 29일 저녁7시-9시 도서: 송인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4월 모임 : 4월 26일 저녁7시-9시 도서: 김덕경 ․『허물이 많아도』
<교회집회>
주제: 쓴뿌리치유, 일시: 2012년 3월 2일(금) 저녁8시-10시, 장소: 신목교회
<교회초청 세미나 • 집회인도를 실시합니다.>
구역장(목자)교회학교교사 세미나 : 상담기술훈련, 대화법훈련, 감수성훈련
교회집회 : 쓴뿌리치유, 전인치유, 가정사역부흥회, 부부행복학교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가족치유상담연구원
이제 곧 봄이 오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잘 보내셨는지요. 사람들은 기상예측을 하면서 꽃샘추위가 한 번 남아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추위를 좀 타는 편이어서 봄을 더욱 기다립니다. 새 봄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2월 20일에 충북 음성군 금왕읍에 있는 무극교회에서 실시한 집단상담 ․ 감수성훈련 모임이 10주 과정으로 지난 12월 12일에 시작해서 2월 20일까지 마쳤습니다. 처음에 시작했던 9명이 모두 수료한 역동성이 있는 그룹이었지요. 참여자들의 변화를 보는 것은 인도자의 기쁨이었습니다. 참여자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봅니다. 미소, 햇살, 스카렛, 루돌프, 수선화, 줄리아, 향기, 진선미, 해바라기님. 2월 5일-11일 사이에 중국 온주지역에서 있었던 중국교회 지도자들 목회상담교육은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섬김의 기회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여행차 들렸던 상해의 중심부의 모습은 중국의 변화에 대한 경이로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3월 셋째 주 3월 23일(금) 저녁부터 24일(토)까지 1박 2일로 한국교회백주년 기념관에서 제 1회 마라톤치유상담모임을 갖습니다. 이 모임은 연속 10회기(1회 70분)로 진행되는 마음과 영성을 나누는 <깊은 샘파기>영성치유모임입니다. 저희 연구원에 후원해주신 교회들과 후원자님들에 감사드립니다. <김영근>
1월 후원 ․ 교회: 동숭교회, 산정현교회, 참빛교회, 한마음교회, 유성교회, 안동서부교회, 일산은혜교회 ․ 개인: 이지은, 이정산
I 가족치유상담 연구원의 사역 I
►가정회복중보기도(기도사역) ►엘림상담실(개인상담ㆍ집단상담)
►지역교회위탁상담(협력사역) ►치유상담아카데미(상담교육)
►다문화가정상담(긍휼사역) ►중국교회지도자상담교육(교육선교)
►목민독서교실(독서치료) ►월간쪽지<예수사랑ㆍ가족사랑>발행(문서사역)
►구역장ㆍ교사상담기술훈련(훈련사역) ►교회집회ㆍ세미나인도(쓴뿌리치유, 전인치유)
주소: 종로구 연지동 136-46 기독교회관 504호 / 02-3675-7368, (fax)7369
원장: 김영근목사: 010-3290-1007 상담실장: 010-3219-1097
Cafe.Daum.net/familytherapy0191(daum 다음 카페→가족치유상담연구원)
메일 noksanlove@hanmail.net/ 후원계좌: 농협351-0355-2650-43 김영근
찾아오는 길: 종로5가역 2번출구 대학로 방향 200M⟶ 한국기독교회관 504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