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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각박해지고 볼멘소리가 많은 이때에 희생과 사랑으로만 살다간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 인터넷을 하다가 가슴 뭉클한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장기려 선생(1911~1995년)이 찍힌 사진이었다. 무소유적 삶을 살았고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 살았던 분. ‘그렇구나. 우리에게도 이런 분이 계셨지’ 나는 서재의 한 구석에서 빛바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장기려 선생의 삶과 사상을 요약한 책이었다.
성산 장기려 선생은 생전에 박사·원장·회장 등의 호칭보다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고 범인보다 한층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단순히 ‘인간 장기려’를 추앙하기보다 그러한 삶을 가능케 했던 근원을 밝히고 그가 그토록 닮으려고 애썼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그는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에 생을 마치기까지 소외된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 진정한 의미의 ‘참의사’였다. 그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서민적이고 초라하기까지 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복음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간호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다. 돈과 사욕을 멀리 한 채 말년에는 병원(고신의료원) 10층에서 24평이 남짓한 사택에 거주하며 검소한 삶을 살았다.
심지가 곧은 사람
장기려 선생님은 1950년 12월, 6·25동란 중 평양 의과대학부속병원 2층 수술실에서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돌보다가 차남과 함께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다. 그 결과 사랑하는 다섯 자녀·아내인 김봉숙 여사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는 늘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았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재혼을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하면 그는 이런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 선생의 심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에게서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가 이런 마음자세요, 성품이다.
“문 열어 놓을 테니 살짝 도망치세요”
그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살았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겠지만 월급이나 수당 보다 가불이 많았다. 환자들이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입원비와 약값이 없어 퇴원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그들의 사정을 생각하며 눈물 겨워 했다. 그래서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곤 했다.
병원에 한 농부가 입원을 했을 때의 일이다. 그 농부는 건강을 회복하고도 퇴원할 수 없었다. 워낙 가난한 형편이라 입원비를 낼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생각하다 못한 농부는 장 선생을 찾아가 하소연을 해 보기로 했다.
“선생님 이제 곧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병원비를 다 내야 집에 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희 집은 제가 있어야 농사를 짓습니다. 선생님, 제가 돈을 벌어서 꼭 갚을 테니 제발 퇴원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농부의 사정을 딱히 여긴 장 박사님은 이런 제안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밤에 문을 열어 놓을 테니 살짝 도망치세요.” 마치 남의 병원 의사처럼 인심을 쓰는 장 선생의 말에 농부는 깜짝 놀랐다.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없으니 퇴원은 힘들 테고, 그렇다고 병원에 있으면 가족들이 굶어야 하니 가족을 위해서 몰래 도망이라도 쳐야지요.” 농부는 자신의 사정을 잘 이해해 주는 그의 말에 감동했다.
다음 날 그는 농부와 약속한 대로 원무과 직원들이 퇴근한 틈을 타 병원 뒷문을 열어 두었다. 농부가 몰래 집에 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농부의 손에 그가 따로 마련한 돈을 쥐어 주기도 했다. “이거 얼마 안 됩니다. 차비라도 하세요.” 농부는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원무과 직원이 장 선생에게 찾아와 농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간밤의 일을 고백했다. “다 나은 환자를 마냥 붙들고 있을 순 없지 않나. 한창 바쁜 농사철인데, 안 그런가?” 잠시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원무과 직원의 얼굴에는 금세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봤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그는 분단된 조국 때문에 가족과 헤어진 피해자였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 권유를 거절하였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임종을 앞둔 가족들에게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 하고 말했다.
그의 비문에는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의 벗’임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간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칭송받은 사람이다.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라는 찬사에 한 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드러내지 않고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장기려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한 귀감이 될 만하다.
나관호 / 목사,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