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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굿바이 만루홈런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1975년
광주 야구가 본격 부활을 선언한 해입니다. 정말 입추의 여지가 없이 관중들이 꽉 찬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광주일고 4번 타자 김윤환(金潤煥)은 경북고 성낙수(成洛秀) 투수를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때리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모두 좌측 펜스위에 꽂히는 홈런이었습니다. 성낙수(成洛秀) 투수는 당시 “설마”하고 오기로 던졌는데 김 선수가 계속 신들린듯 똑같은 코스에 처박아 넣었다는군요.
사실 성낙수(成洛秀) 투수는 변화구에 능했던 반면, 구질이 매우 가벼운 편이어서 장타를 많이 맞은 편입니다.
그날 경북고 타선은 강만식(姜晩植)의 묵직하게 파고드는 강속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승부는 6대2.
광주일고는 1번 심상수(沈相守) 2번 차영화(車榮華) 3번 이기종(李基鍾) 4번 김윤환(金潤煥) 5번 강만식(姜晩植) 등으로 이어지는 짜임새있는 타선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2루수 차영화(車榮華)는 차분하고 빼어난 수비로 야구전문가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광주일고의 우승은 호남 고교팀으로서는 6·25이후 처음 결승 진출이었고, 우승 역시 1949년 광주서중의 청룡기 우승이후 26년만의 경사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후 강만식(姜晩植) 투수는 부상을 당해 제대로 마운드에 서지 못했고, 고교를 졸업한 뒤에도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투수에게 한번 닥친 큰 부상이 얼마나 결정적인 충격을 주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경북고는 이어 열린 청룡기와 봉황기에서 모두 우승을 거두어 체면치레는 했지만, ‘김윤환(金潤煥)의 3연 타석 홈런’ 기록은 지금도 경북고 야구사에 가슴아픈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경북고의 4번 타자 겸 포수인 손상득(孫祥得)은 팀이 청룡기에 우승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단 한개의 안타도 치지 못하는 극도의 부진을 보여 화제가 됐습니다.
청룡기 준우승팀은 선린상고였지요. 1학년 사이드암 투수인 이길환(李吉煥)이 역투했지만 경북고에 0대3으로 완패당하고 말았습니다.
경북고는 봉황기 결승전에서도 두뇌파 조규식(曺圭植) 투수가 마운드에서 활약한 대구상고를 물리치고 우승했습니다.
경북고 클린업 트리오에서 활약하던 왼손타자 장성규(張聖圭) 선수는 외다리 타법을 선보이며 봉황기 최우수선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편 전국 대회 우승 · 준우승팀을 대상으로 연말에 개최하는 전국 우수고교 초청대회에서는 드디어 경남고의 2학년 투수 최동원(崔東原)이 화려한 등판을 하게 됩니다.
고교최강이라던 경북고를 노히트노런으로 격파하고, 이튿날 선린상고전에서도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지요. 1976년에 벌어질 최동원(崔東原)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피칭이었습니다.
<사진설명: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시절 상대방을 삼진으로 잡고서 포수인 한문연과 함께 좋아하는 최동원.>
▶1976년
부산상고의 잠수함 투수 노상수(盧相守) 등 4명의 고교 2년생들을 과감하게 발탁했습니다. 이들 4명은 1976년 고교야구계에서 각각 우승이나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대통령배 결승전에서는 장신에서 내리꽂는 강속구가 일품이었던 김용남(金勇男) 투수와 3루수 겸 릴리프 투수를 하던 2학년생 김성한(金城漢)이 이끄는 군산상고가 대구상고와 격돌했습니다.
대구상고에는 초고교급 투수로 분류되던 김시진(金始眞) 투수와 4번 타자 겸 릴리프 투수인 송진호(宋鎭浩), ‘헐크’란 별명의 홈런타자 이만수(李萬洙)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군산상고는 빠른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하는 김시진(金始眞)에게 눌려 단 2안타 밖에 때리지 못했지만, 9회에 터진 김종윤(金鍾潤)의 결승타로 1대0으로 이겨 우승을 차지합니다.
정말 대형 정통파 투수들끼리의 볼만한 전쟁이었지요. 김용남(金勇男)과 김시진(金始眞),
두 사람은 이후 한양대에 진학해서도 같이 투수생활을 했는데, 대학시절이나 프로시절이나 모두 김시진(金始眞)에 비해 김용남(金勇男)은 별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두 선수의 공 스피드는 비슷했는데, 김시진(金始眞)이 슬라이더에 강점을 보인 반면, 김용남(金勇男)은 뚜렷한 결정구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사진설명: 삼성 라이온즈 시절의 김시진 투수>
하지만 군산상고는 6월20일 열린 청룡기 최종결승전에서는 경남고의 초고교급 투수인 최동원(崔東原)에게 5대0으로 12개의 삼진에 단 2개의 안타로 농락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청룡기에도 패자부활전 제도가 있었는데, 최동원(崔東原)은 최종결승전에 앞서 열린 승자결승전에서는 군산상고와 맞붙어 20개의 삼진을 기록했음)
177cm에 73kg의 체구인 최동원(崔東原)은 금테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빛과 발과 팔을 높이 치켜들고 던지는 다이내믹한 투구 폼으로 팬들을 휩쓸고 다녔습니다.
로진 백을 툴툴 털고, 검정색 야구 스타킹을 잡아당긴뒤, 안경을 한번 고쳐만진 후, 한쪽 어깨를 가볍게 돌리는 몸동작을 마치 의식처럼 했지요.
타자와 정면승부를 거는 시원시원한 강속구에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뚝떨어지는 드롭성 변화구로 타자들을 마음껏 요리했고,
게임당 10개 이상의 스트라이크아웃은 기본이었습니다. 특히 강타자를 만나면 시속 80㎞도 안되는 ‘아리랑 슬로커브’를 던지며 약을 올리는 대단한 승부사였습니다.
이후 선동열(宣銅烈)과 더불어 한국야구 최고의 투수로 대활약을 벌였던 최동원(崔東原)이건만, 요즘엔 이따금씩 TV의 개그 프로에 나와 썰렁한 유머를 내놓는 모습을 보면 웬지 안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최동원(崔東原)은 90년대 중반에는 스포츠 캐주얼 의류인 ‘안티구아 코리아’를 친구와 함께 공동설립하여, 패션사업계에도 뛰어든 적이 있다고 하는군요.
1976년에는 선린상고의 2학년생 언더핸드 투수인 이길환(李吉煥)은 변화구로 그라운드를 누볐습니다.
그는 인천고와의 봉황기 준결승전에서 1대0완봉승을 거두며 결승전에 올랐으나, 부산상고의 좌완 이윤섭(李閏燮) 투수와 맞붙어 0대4로 완패하고 말았지요.
1976년에 야구부를 창설한 신일고는 창단 첫해에 황금사자기를 거머 쥐었습니다. 신일고에는 당시 1학년 괴물투수인 우완 김정수(金貞洙)를 비롯,
스마트한 얼굴의 왼쪽타자인 박종훈(朴鍾勳), 대형타자인 김남수(金男洙)와 김경훈(金炅勛) 등이 맹활약을 벌여 선린상고를 6대0으로 격파하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전체적으로 1976년에는 훌륭한 투수들은 즐비했던 반면, 상대적으로 타자들중에는 대어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1977년
우선 대통령배 대회에서는 뜻하지 않게 공주고가 부산고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공주고는 오영세(吳英世) 투수와 김경문(金卿文) 포수가 호흡을 척척 맞추면서,
2학년 두뇌파 투수인 양상문(楊相汶)이 이끄는 부산고의 추격을 4대3으로 따돌렸습니다. 충청도팀으로서는 처음으로 고교정상에 올라 역사의 한 획을 그었지요.
전통의 대구상고는 발을 하늘처럼 높이 들면서 쾌속구를 던지던 박영진(朴英辰) 투수를 중심으로 타격에서는 ‘헐크’인 이만수(李萬洙), 유격수 오대석(吳大錫)이 클린업 트리오를 이루면서 청룡기에서 동산고를 7대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사진설명: 청룡기 대회 우승후 동문에게 업혀 기뻐하는 이만수 선수>
지금 SK 감독을 맡고 있는 조범현(曺凡鉉)이 포수로 활약한 충암고는 1977년 봉황기에서 광주 진흥고를 누르고 우승했습니다.
물론 당시 충암고 우승의 주역인 기세봉(奇世峯)·이근식(李根植)·조범현(曺凡鉉) 등은 모두 해체된 대구 대건고에서 전학해간 선수들입니다.
충암고에는 키큰 이근식(李根植)과 키작은 이근식(李根植)이란 동명이인이 선수로 뛰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공교롭게 둘다 좌완이었습니다.
황금사자기에서는 광주상고(지금은 동성고로 이름을 바꾸었음)가 우승의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광주상고는 장타자 김종모(金鍾模)를 필두로 투수 김대식(金大植), 유격수 박상진(朴商珍) 등의 활약으로 인천고를 연장접전 끝에 3대2로 물리치고 재창단 7년만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3학년이던 김종모(金鍾模) 선수는 후배들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며 팀 워크를 다졌고, 후배들은 감독보다도 김 선수를 더 무서워 했다고 합니다.
<사진설명: 군산상고 1학년때 김성한의 모습. 새벽4시부터 일어나 타격연습을 했다고 한다.>
한편 특유의 타격 폼 때문에 ‘오리 궁둥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김성한(金城漢)은 1976년부터 군산상고의 3루수 겸 투수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1977년에는 대구상고의 이만수(李萬洙)와 쌍벽을 이루는 장타자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김성한(金城漢)은 투타에 모두 능했으니 야구천재란 소리를 들을만 합니다. 하지만 군산상고는 이 해에 결승전에 한번도 오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1978년
대구상고에는 양일환(梁日煥)이란 3학년생 사이드암 기교파 투수가 있었는데, 결승전에서 7회까지 양팀은 0의 행진을 벌이다가 8회에 김호근(金鎬根)의 3루타로 2점을 내면서 승부를 결정지었습니다.
부산고는 청룡기에서도 경북고를 7대0으로 제압하면서 2관왕에 올랐습니다.
아마 제가 생각하기로 국내 야구선수들중에서 가장 지성적이고 머리가 좋기로는 양상문(楊相汶) 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최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양 감독은 자신의 실력으로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진설명: 양상문 선수가 고교시절 자신의 기사를 스크랩해놓았다.>
봉황기에서는 장타자인 김영균(金泳均)과 좌완투수 윤수봉(尹秀奉)이 이끄는 서울고가 선린상고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는가 했더니,
황금사자기에서는 초고교급 투수인 김정수(金貞洙)가 이끄는 신일고가 서울고를 누르고 우승을 각각 차지했습니다. 물고 물리는 현상이었지요.
무쇠팔 김정수(金貞洙) 투수는 고교를 졸업한뒤 고려대를 거쳐 프로야구팀 MBC 청룡에서 활약하다가 교통사고로 요절, 야구 팬들을 아쉽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전국대회 우승은 못했지만 광주일고의 미남 3루수 이상윤(李相潤)은 시즌 도중 투수로 전향, 불같은 강속구를 던져대면서 양상문(楊相汶)을 능가하는 최고 투수란 평가를 받았지요.
그해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대회에 나가서도 이상윤(李相潤)이 에이스로서 가장 뛰어난 피칭을 했답니다.
▶1979년
140㎞를 웃도는 위력있는 공을 가지고 있었지만, 승리의 여신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봉황기에서 인천고는 광주상고와 결승전에서 격돌했습니다.
2년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도 만난 적이 있던 양 팀이지요. 광주상고는 언더핸드 투수인 윤여국(尹汝國)과 이군로(李軍魯), 이순철(李順喆·현재 LG트윈스 감독) 등을 앞세워 5대0 완봉승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윤여국(尹汝國) 투수는 특유의 흐느적 거리는 모션으로 밑에서 던지는 ‘오징어 잠수함’ 피칭을 통해 현란한 싱커를 구사하면서 혼자서 6게임을 완투하는 철완을 과시했습니다.
황금사자기에서도 인천고는 역시 언더핸드 투수인 진동한(陳桐漢)과 유격수 김성래(金聲來)등이 이끄는 경북고에 0대1로 분루를 삼켜야 했습니다. 최계훈(崔桂勳)이 벤치에서 흘린 눈물을 야구팬들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1979년의 신데렐라는 뭐니뭐니해도 역시 선린상고의 1학년 박노준(朴魯俊)이었습니다. 광주일고 2학년 선동열(宣銅烈)만 해도 꽤 기대되는 유망주였지만, 박 선수의 인기에는 못미쳤습니다.
현재 SBS에서 야구해설위원을 맡고 있는 '젠틀맨' 박노준(朴魯俊)은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이전, 국내 고교야구 열기의 마지막 최고 스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좌완인 박노준(朴魯俊)은 선린상고의 에이스 투수에 정확한 방망이와 빠른 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출전하는 경기는 관중석이 꽉꽉 찼고 암표가 성행했습니다.
단발머리와 갈래머리를 딴 여고생들이 몰려들면서 ‘오빠부대’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노준(朴魯俊)은 1979년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부산상고의 대선배인 윤학길(尹學吉)과 맞붙어 15대1로 압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3학년인 좌완 윤석환(尹錫環) 투수가 적지않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은 “박노준, 박노준”만 외쳤습니다. 선린상고로선 이길환(李吉煥) 이후 계속되던 ‘준우승 신화’를 씻어버린 것이지요.
박노준(朴魯俊)의 인기에 힘입어 동기인 김건우(金健友)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갔습니다. 박노준(朴魯俊)은 청룡기 결승전에도 올랐지만 아쉽게도 부산고에 5대2로 져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박노준(朴魯俊)은 이듬해인 1980년10월4일 광주일고의 선동열(宣銅烈)과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격돌, 3대2로 간신히 앞서고 있던 8회말 승리를 굳히는 투런 홈런을 뽑아냈고 또 5회부터는 직접 마운드에 올라 2안타 1실점으로 자신의 결승점을 지켜내 영웅이 됐습니다.
결국 박노준(朴魯俊)과 선동열(宣銅烈)의 고교시절 역사절 대결은 선린상고가 5대3으로 승리한 가운데, 박노준(朴魯俊)이 선동열(宣銅烈)에게 4타수3안타에 홈런1개 타점 3개를 뽑아낸 결과를 낳았지요.
<사진설명: 일본 주니치에서 뛸때 선동열의 투구 모습>
하지만 박노준(朴魯俊)의 신화는 1981년들어 이상하게 왜곡됩니다. 1981년 대통령배에서 우승후보 선린상고는 1회전에서 진흥고의 좌완 김정수(金正洙)에게 2대0으로 느닷없이 덜미를 잡혀 불길한 조짐을 보이더니, 청룡기에서는 경북고와 연장전까지 가는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6대5로 패했지요.
봉황기 결승전에서는 경북고와 다시 맞붙었는데 1회에 경북고 좌완 성준(成埈)을 난타하는 가운데 이경재(李敬宰)의 적시타로 박노준(朴魯俊)이 홈으로 들어오면서 슬라이딩을 하다가 발목을 접지르는 대형 부상을 당하면서 병원으로 실려가고 말았습니다.
전국 여고생들이 통곡하는 날이었습니다. 박을 대신하여 우완 강속구 김건우(金健友)가 마운드에 올랐지만, 이미 전열이 흐트러져 버린 선린상고가 경북고를 이기기는 힘들었겠지요.
경북고 1학년 잠수함 투수 문병권(文炳權)은 다가오는 봉황기를 여유있게 붙잡고 모교에 넘겨주었습니다.
<사진설명: 박노준이 1981년8월26일 경북고와의 결승전에서 1회 홈으로 들어오다가 발목을 접지르는 순간.>
박 해설위원은 최근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1981년8월26일. 생일은 까먹어도 이날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제는 흑백사진 속에 앨범에 묻혀버린 23년 전의 일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일이 더욱 생생해진다.
아직도 야구해설가라기 보다 ‘비운의 고교스타’로 나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올드팬들을 위해 그 때의 심경과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싶다.
돌이켜보면 24일 4강전에 이어 예정돼 있던 25일 결승전이 비로 하루 순연된 것이 불운의 전조였다.
선발로 나와 경북고의 1회초 공격을 가볍게 막은 뒤 1회말 적시타를 때리면서 기세를 올린 나는 5번 이경재의 적시타 때 홈으로 뛰어들었다.
볼이 포수 뒤로 빠지는 줄도 모르고 포수를 피하기 위해 사이드 슬라이딩을 하는 순간 왼쪽 발 스파이크에 붙어있는 쇠징이 땅에 박히면서 발목이 돌아가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도 나는 홈플레이트를 밟아야 한다는 일념에 엉금엉금 기어서홈 플레이트를 찍은 뒤 쓰러져 버렸다.
엄지발가락이 뒤로 돌아가 복숭아뼈의 바깥쪽 두 군데가 부러졌고 안쪽에 있는 인대는 모두 끊어져 15㎝의 철심과 나사로 고정시키고 인대를 잇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결승전 전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먼지를 일으키며 멋들어진 슬라이딩 장면을 보여줄 상황이었지만 물먹은 모래땅이라 미끄러지지 않았다.
그 이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 아득한 통증과 함께 화려하던 나의 고교야구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재활의 고통을 통해서 나는 절망을 이기는 법을 터득했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이상 70년대 고교야구 스타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는데, 대체로 경북고 남우식(南宇植)의 신화로 시작하여 선린상고 박노준(朴魯俊)의 인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