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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夷叔齊(백이숙제 [고사성어]) 오늘날 富(부)에 절대적 가치를 둔 拜金主義(배금주의)의 蔓延(만연)으로 人倫(인륜)도, 天倫(천륜)도 무시되는 moral hazard(도덕적 위험)가 수위에 달한 이즈음에 史記(사기)의 伯夷列傳(백이열전)에 나오는 그들 형제간의 우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示唆(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伯夷叔齊 孤竹君之二子也. 伯(백)은 주로 형제가운데 맏형을 가르킨다. 백이숙제 고죽군지이자야 4형제라 한다면 둘째는 仲(중) 셋째는 叔(숙)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넷째는 季(계)가 된다. 例). 伯父, 叔父, 季父. 임금의 두 아들이다.) 고로, 伯夷가 장남, 叔齊가 3남임을 알 수 있다 之(지)는..의, 也(야) ..이다 의뜻으로 쓰임
父欲立叔齊 乃父卒 부욕립숙제 내부졸 立(립)은 자동사로 쓸 때에는 '서다'이지만 타동사로 (부가 왕위에 숙제 쓸 때에는 '세우다'로, 여기서는 王을 세운다는 뜻 를 세우려 하였는 卒(졸)은여러가지 뜻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죽다' 데 부가 죽자) 乃(내)는 ‘이어서’의 뜻 부사로 쓰임.
叔齊讓伯夷 숙제양백이 (숙제는 형 백이에게 왕위를 사양했다.)
伯夷曰 父命也 曰(왈)은 말하다. 也(야)는..이다 의 뜻. 백이왈 부명야 (백이 말하기를 아버지 명령이다)
遂逃去 遂(수)=이루다, 나가다, 따르다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수도거 사용되나 '드디어' 라는 부사로 쓰임. (하고 마침내 도망가버리니)
叔齊 亦不肯立 而逃之 而(이)는 ‘..고’ 라는 뜻으로 접속사로 쓰임 숙제 역불긍립 이도지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國人 立其中子 국인 입기중자 (나라 사람들이 그 가운데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그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당시 서역(西域)의 백(伯:국경 수비장)이었던 주(周)의 문왕(文王)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周)로 들어가지만 주(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문왕(文王)은 죽고 그 아들인 무왕(武王)이 즉위한 뒤였습니다. 곧 무왕(武王)의 신하가 된 두 형제는 충신(忠臣)으로서 자신들의 소임(所任)을 다하고 있었는데, 당시 천자(天子)인 은(殷)의 주왕(紂王)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일삼으며 학정(虐政)을 거듭하자 무왕(武王)은 혁명(革命)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붙잡고 신하(臣下)된 입장에서 왕을 시해(弑害)한다는 것은 불가(不可)하다고 간언(諫言)[고마이간(叩馬而諫)]을 하지만 무왕(武王)은 이를 뿌리치고 주왕(紂王)을 제거하고 주(周)나라를 세웁니다. 낙담(落膽)한 백이와 숙제는 이러한 나라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하면서 주(周)나라의 음식(飮食)과 의복(衣服)은 입지도 먹지도 않는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만으로 연명(延命)하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맙니다.
史記(사기) : 中國(중국) 前漢(전한)의 歷史家(역사가) 사마천의 著書(저서)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동양에서는 사마천을 역사의 비조(鼻祖)로 부릅니다. 사관(史官) 집안에서 난 사마천(司馬遷)은 부친(父親)의 숙원(宿願)이었던 중국(中國)의 역사서(歷史書)를 완성하고자 하는 포부(抱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마천에게 큰 불행(不幸)이 닥쳐옵니다. 당시 한(漢)의 무제(武帝) 대에 북방(北方)의 약탈자(掠奪者)였던 흉노족(匈奴族)을 토벌(討伐)차 출격(出擊)했던 한(漢)의 이릉(李陵) 장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적(敵)에게 항복(降伏)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한(漢)의 조정(朝廷)에서는 무제(武帝)을 포함한 많은 신하(臣下)들이 이릉(李陵)의 일족(一族)을 모두 처형(處刑)하려 했지만 사마천(司馬遷)을 필두로 한 소수의 신하들은 이릉(李陵)의 불가피(不可避)함을 변호(辯護)하면서 그를 옹호(擁護)하게 되었는데, 그 후 이릉(李陵)이 흉노(匈奴)의 장수(將帥)가 되었다는 정보를 접한 무제(武帝)는 이릉을 옹호한 신하들까지 모두 처형을 하게 됩니다. 특히 황제(皇帝)의 노여움을 산 사마천은 죽음보다 심한 남자(男子)로서의 최대 치욕(恥辱)인 거세(去勢)를 하는 궁형(宮刑)을 당하고 하옥(下獄)됩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궁형(宮刑)의 치욕(恥辱)을 감내(堪耐)하면서 옥(獄)에서 불후(不朽)의 역작(力作)인 《사기(史記)》를 완성하게 됩니다.
'史記(사기)'의 구성은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열전(列傳)'은 문호·학자·정치가·군인·자객·유협(遊俠)·해학가·관리·실업가 등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일생의 일을 기록한 전기입니다. '열전'은 그 분량면에서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성격이나 활약상을 유려한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그려 주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실린 伯夷列傳(백이열전)은 伯夷·叔齊의 정의로운 삶의 자세를 보여 주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작가의 歷史(역사) 哲學的(철학적) 관점을 가장 克明(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기도 합니다. 폭력으로서 폭력을 치는 것은 自己 矛盾(자기모순)이 아니냐는 백이·숙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무왕이 듣지 않았기 때문에 백이·숙제는 마침내 비극적으로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盜蹠(도척)과 같은 極惡(극악) 무도한 인물은 奸惡(간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天壽(천수)를 다 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마천은 천도(天道)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懷疑(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苦惱(고뇌) 끝에 사마천은 矛盾(모순)에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선악 정사(善惡正邪)를 바로 드러내어 後世(후세) 사람들의 감계(鑑戒)로 삼는 것이 바로 歷史家(역사가)의 할 일임을 깨닫고 마침내 歷史(역사) 執筆(집필)의 붓을 들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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