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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
박영선 목사
행5:1-1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는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아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5 : 1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아주 유명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조금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건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내용들은 놀랍고 영광스럽고 신자들로서는 늘 흥분스러운 내용들로 연결되어 있는데 중간에 이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등장해서 조금은 흥을 깨는 것 같이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핏 보기에 시시하게 헌금 떼어먹은 것으로 나온 얘기 같아 더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기록했을 때는 헌금 떼어먹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위협하려고 기록하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 떼어먹어도 그렇게 죽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좀 있을 뿐이지 크게 뭐 어떻게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신자가 신앙상에서 실수하는 일이 있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수가 있고 또 어리고 연약한 면이 있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방향과 목표 자체가 비뚤어진 것은 분명하게 손을 대십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이것은 용서할 문제가 아니고 봐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학교 가서 시 험을 봤는데 밑으로 세서 십등 안에 든다. 그것은 조금 꾸중 듣고 말면 되지만 학교 가야 할 시간에 학교 안 가고 디스코 텍에 갔다 하면 이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등장하는 것도 그와 같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그렇게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그 소유를 팔아서 헌금을 하기로 결심을 했고 그리고 그것 중 얼마는 어차피 갖다 냈습니다. 그것이 뭐 그렇게 죽을 일이라고 그 자리에서 두 부부가 죽어나갈 일이 생겼습니까? 그 앞에 4 : 32부터 보시면 당시에 다음과 같은 분위기가 있었던 것을 아셔야 됩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니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마나마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 4:32-37). 그리고 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소유를 팔아 돈을 가져오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도행전 2장의 기록같이 유무상통하는 일과 물욕이 없어지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소유를 내놓고 이기심과 소유욕에서 벗어난 신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고 그 특징들은 언제나 신령한 신자들의 모임에서는 늘 있다고 기록하는 것을 대합니다.
그런데 구브로에서 난 이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 나중에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그리고 사도 바울과 합께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주인공이 되는 이 사람은 상당히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팔아서 헌금을 한 것이 괴장히 요긴하게 쓰여졌던 것 같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도 씀씀이가 많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사도들은 생업을 위해서 시간을 낼 틈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있는 대로 말씀 전하는 일과 뛰어 다니는 일과 또 병 고치는 일들로 저들의 모든 시간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먹고 지고 여행하는 경비가 따로 넉넉하게 조달되지 않았던 듯 싶습니다. 또한 가장 크게는 지금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들은 단기간의 체류 목적으로 전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여행경비가 다 떨어졌어도 이제 막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에 남아서 당분간 기거하려니 많은 경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유무사통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들이 서로 먹고 사는 데는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교회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정적인 보충이 완벽하지는 않았던 듯 싶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 돈을 가지고 왔을 때 굉장히 요긴하게 쓰여졌던 것같이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말마암아 이 사람의 별명이 바나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여러분 성경에 있는 것과같이 번역하면 권위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권은 여기서 권할 권자에 위는 위로할 위자입니다. 이 사람이 갖다 낸 헌금으로 인하여 초대교회에 굉장히 요긴하게 쓰였고 필요한 모든일에 넉넉한 충당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궈위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칭송, 그 영광 받는 것이 탐이 났단 말입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중요한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헌금을 떼어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처음부터 저들의 신앙을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얻기 위하여 출발시켰느야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개서 그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은 요셉의 일, 요셉이 얻은 바 그의 영광과 칭송을 얻고 싶어서 어떤 방법을 취했느냐 하면 돈을 갖다 내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갖다 낸 헌금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갖다 낸 헌금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 문제만은 늘 교회에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터지고 5:11을 보면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이 문제만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실수가 없어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신앙의 목표하는 것과 신앙을 인도하는 방향이 이런 것을 늘 경계시키고 이런 것이 틈을 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유혹 받고 시험 받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만 교회가 이런 일을 낳기 시작하고 자기도 모르게 여기에 타협하기 시작해서 신자들이 이 시험에 걸리고 교회 전체의 분위기가 이리로 가지는 말아라 하는 것이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거을 크게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은 기독교 역사상 늘 있어왔던 범죄 중의 하나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 문제를 꾸짖을 때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그럽니다. “성령을 속이고”라고 꾸짖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아나니아가 하려는 일, 그가 성령을 속이고 사단이 마음에 가득하여 일으킨 일, 그 본질적인 원리와 내용이 무엇인가 먼저 알아야 됩니다. 그가 하고 싶었고 얻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칭찬이 아니고 사람 앞에서의 칭찬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가 믿음을 쏟아냈고 진심을 쏟아낸 일이라면 이렇게 속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속이겠습니까?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속이고 사람 앞에 받는 박수를 얻어내기 위하여 돈을 동원합니다.
디모데전서 6 : 10에 의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제일 사랑하십니까. 성실히 살고 부지런히 살고 윤택하게 사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은 늘 강조하는 대로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 삼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것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인정을 받는 것은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 헌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비유하시기를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데 바리새인과 세리가 올라가서 기도를 합니다. 바리새인은 뭐라고 기도를 했습니까? 하나님 저를 저 세리와 같게 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십일조를 내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분명히 그 세리보다 뛰어나고 더 놀랍고 정성스러운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하나님 앞에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아버지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였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합니다. 헌금이란 액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결국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며 누구의 눈에 들기로 하느냐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들기로 하는 싸움이냐 사람의 눈에 들기로 하는 싸움이냐가 지금 돈 문제로 분명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을 찾으시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 : 13 - 21)
재물을 쌓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그의 삶의 근거이고 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재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힘의 근거가 되고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면 재물은 썩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설교가 소중한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바로 이런 시험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도 돈 모은 분들이 많이 있겠습니다만 돈 모은 분들 보고 부자냐고 물으면 그저 나 쓸 것 정도 모았습니다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대하는가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희는 저희 딸 아이 때문에 얼마 전 아주 쇼크를 받았습니다. 이제 국민학교 2학년인데 어느 날 정색을 하고 제 아내와 저를 보고 묻습니다. 엄마 아빠는 죽을 때 나한테 뭘 남겨줄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심각해져서 임마 남겨주기는 뭘 남겨주냐 했더니 오빠한테는? 남겨줄 것 없다. 큰 아이는 아빠 저 책이나 주세요 그럽니다. 딸은 얘기하기를 적금들어 놓은 통장이나 뭐 그런 것 달라고 합니다. 어디서 배웠을까요. 저희는 안 가르쳐 줬으니 자기 또래한테 배웠겠죠. 그 아이들은 자기 부모한테 배웠겠죠. 여러분도 이 부자 같은 생각을 혹시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돈은 조금 모았는데 이 돈으로 뭘 할까. 저금을 해서 이자를 놓을까, 사채나 투자를 해볼까. 땅을 살까. 혹시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말년에 슬슬 등산이나 하면서 놀지 뭐 합니까. 혹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여기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다르다고 단언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이 탐심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에베소서 5장을 봅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로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엡 5 : 3 - 5)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이것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탐심이 왜 우상 숭배냐. 그러면 바로 여기에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핵심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보통 이스라엘 민족을 제외한 이방민족들에게 있어서 우상은 처음에는 자연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생겼습니다. 무지로 말미암는 미신입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하자 미신을 추방한 것뿐만 아니라 사람 마음에서 종교를 전부 뽑아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우상은 단순한 자연에 대한 두려움, 무지로 인한 미신이 아니고 조금 다른 성격을 띱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뭐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크게 이스라엘 민족과 차이가 나리라고 보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 자연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는 우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 벌벌 나가 떨면서 할 무슨 경외의 대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 욕심을 채워주는 자로 우상을 섬깁니다. 애굽을 떠나와서 가나안이라는 땅에 들어오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이방 민족들이 여러 신을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거기서 그들이 농경문화 속에서 농경문화에 필요한 때를 따라 비를 내리고 다량의 수확을 해주는 풍요의 신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알 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알 신이 제일 많이 등장합니다. 바알, 아세라, 몰록, 밀공 그런 여러 가지 우상이 있는데 그 중에서 바알 신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유가 그가 생산의 신, 풍요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갈멜 산 전투에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문제를 놓고 바알 선지자들과 싸울 때도 비 오는 문제로 바알 선지자들과 대면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성경이 우상 숭배를 어떤 말로 그 본질을 규명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의 필요한 것을 내가 결정하여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요구하는 대상 그것이 우상입니다. 내가 가치판단을 내리고 제일 소중한 것도 내가 결정해서 그것을 얻어내는 방법만을 그에게 요구하는 대상, 그래서 섬기는 신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많습니다. 권세, 세상에서의 쾌락, 세상에서의 입신 양명들은 전부 세상의 돈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얻고 싶으면 돈을 가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돈으로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는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매수되지 않고 구원을 얻는 방법을 돈의 액수로 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돈으로 넘어가는 것이 우상입니다. 신앙의 본질과 우상숭배가 왜 그토록 충돌이 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인생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이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느냐 그 준비를 위하여 어떻게 훈련되어야 하느냐가 내 판단과 내 손에 들어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손에 있어야 됩니다. 너는 영원한 나라를 준비해야 한다. 신령해져야 한다. 거룩해져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너는 아픈 것이 낫다. 그러면 아픈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괴로운 편이 낫다. 그러면 그러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 역사를 보아도 늘 사로잡혀 가고 고통받는 역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을 거룩히 하기 위해서 그들을 내어버려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당장 고통스럽고 지금은 피눈물 쏟는 일이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방법과 나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내 목표를 삼고 방향을 삼고 그것이 되어지는 방법을 주께서 설정하시는 것을 단 마음으로 항복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집단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 앞에 세 번이나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내 몸에서 이 사단의 가시를 빼 주십시오.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열심히 주를 위하여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 기도를 올렸습니다. 우리가 짐작하기는 그것이 간질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뜩이나 말재주가 없고 외모도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서 기껏 복음을 전하고 나오다가 간질이 발작되면 그것이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기도를 합니다. 이것만은 빼 주십시오. 주의 복음과 주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주님이 그런 방법을 쓰신다 하면 기쁜 마음으로 항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그 뒤를 이어서 그러므로 내가 내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량하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고린도후서 끝 부분에 가면 이것이 그의 자랑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하나님께서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증명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메섹 성에서 아레다 왕이 나를 지킬 때 내가 광주리 타고 도망쳤느니라 그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오늘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다른 형태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그런 과정을 겪게 하시고 그런 처지가 되게 한 것이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그에게 최선의 길이고 그 길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정금같이 만드는 작업이란 것을 서로 인정하는 마음으로 나와 있지 않으면 교회같이 외식과 가증한 것이 드러나는 모임도 없습니다.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입을 다물기 시작한 것은 그가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고 말을 하면 곧 이런 심판이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 잘 믿었더니 형통하기만 하더라, 너 어려운 일 당하는 걸 보니 남 모르는 죄가 있지?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실상은 속으로는 피눈물 흘리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눈물을 흘려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에서는 술 먹고 울 수 있는데 교회에서는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고 늘 형통한 것같이 하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무너지는 마음을 감추고 이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속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나온다면 우리 모두가 아나니아이고 삽비라입니다. 이것만은 교회에서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그런 얼굴만은 만들지 말고 그런 환난 중에도 나와 그런 원리가 들어와 참다운 신앙훈련과 주님 앞에 순종하는 마음들을 시험들게 하지 말아라. 이것이 사도행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굳이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하는 이유입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출애굽 사건에서도 일이 재미있게 등장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민 11:4 - 6)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해주신 것에 대해서 한 번도 감사하지 않고 계속 불평만 늘어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고 웃겨서 유태인 그러면 사람같이 보이지도 않다가 열 번 이상 읽으면 그것이 자기 모습인 줄 알고 까무러치는 내용들입니다.
잘 보시면 어떤 경우에 이런 불평이 나오느냐 하면 11 : 4 이하의 말씀을 보면 탐욕을 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좀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애굽 땅에서 노예로 굉장히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처절한 노역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만큼까지 그들이 처절했느냐 하면 아기를 낳았을 때 남자면 죽여라까지 였습니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만 살려서 노동력에 쓰는 것입니다. 여자들끼리 나와서 피라밋 쌓고 벽돌 굽는 일해야 되고 남자들은 다 죽여서 그들의 세력이 커져서 독립하지 못하게 그들을 눌러 놨습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사 그들이 짓지 않은 집, 그들이 경작하지 않은 땅,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의 열매를 먹게 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중동지방의 낮 기온과 밤 기온은 굉장히 일교차가 심합니다. 낮에는 50도 가까이 올라가고 밤에는 0도 가까이 떨어집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햇볕을 가려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히터를 틀어 주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이 40년 동안 너희가 광야길을 걸었지만 의복이 헤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불평을 합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아침에는 만나가내리고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떨어져 고기를 줍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불평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바로 탐심이 있기 때문이고 탐심이 곧 우상 숭배고 우상 숭배가 신앙과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인 것을 안다면 광야생활은 이것보다 힘들어도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잣집에서 종 노릇 하면 옛날 못살던 때에 어쨌든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어도 고기 찌꺼기를 먹는 것입니다. 그것과 자유인으로 사는 것 중에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종 되었던 땅에서 이제 인도하심을 받아 가나안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자유를 얻은 정도만이 아니라 약속된 땅을 가고 있습니다. 거러면 그 길이 더 험하고 더 괴로워도 그것은 행복한 길입니다. 웃으면서 가고 이제 며칠만 참으면 된다는 길일 것입니다. 그 길을 보호받고 있고 참으로 많은 기적 속에서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탐욕만 품으면 그 모든 것이 눈에서 가려지는 것입니다.
탐욕을 품으면 가장 크게 무엇이 영향을 받느냐 하면 영원을 보는 시선이 끊어집니다. 그러면 지금을 보게 되고 지금 당장 남과 비교해서 최선의 것을 내놓으라는 욕심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아먹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박수를 받기 위해서라면 주를 속이기까지도 불사하게 되는 자리에 들어오게 됩니다.
오늘 내가 먹고 싶은 참외와 수박과 부추를 먹기 위해서라면, 탕수육 한 그릇을 위해서라면, 영원히 지옥 가도 좋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물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 리도 없습니다만 자기를 팔아먹게 됩니다. 이 팔아먹는 모습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이 그 시험을 받고 있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생애를 지금 돌이켜보아 주십시오.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지금 처하게 한 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과정이라고 인정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 여러분이 혹 당하고 있는 고통을 하나님이 나를 왜 억울하게 만드시는가라고 한탄하는 것으로 불만과 불평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으로까지 나오지 않았는가 점검해 보십시오.
또 혹 하나님이 여러분을 순탄한 길로 걷게 하사 많은 좋은 것으로 주셨거든 그것으로 인하여 더 하나님 가까이에 가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아니면 이것을 어떻게 굴려서 이 편안함을 더 배가시킬 것인가라고 생각을 했는가 점검해 보시면 분명해집니다. 거기엔 있는 것과 없는 것, 잘난 것과 못난 것이 똑같은 가치를 가집니다. 남한테 괄시를 받고 고통스러운 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면 그것이 소중한 것이고 그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는 것이라면 그냥 쓰러져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점검해 보시면 확실해집니다. 여러분이 구원 얻은 백성인 것을 제가 믿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답게 살지 않을 위험성은 늘 있습니다. 점검해 보십시오. 크게 두려워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내 손 안에 갖는 순간 영원을 준비한다는 자신을 잊게 되고 지금이라는 순간이 영원에 도달하는 하나의 디딤돌이며 과정이며 훈련하는 과정인 것을 분명하게 갖다 줄 것이라고 믿는 돈과 세상에 타협해 버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현대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을 점검하십시오. 사람 앞에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십시오. 이렇게 무서운 것으로 여러분의 운명을 끝내지 마십시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속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동안에, 말씀으로 여러분을 깨우치시는 동안에 돌이키십시오. 여러분의 영광을 준비하십시오.
아나니이와 삽비라(2)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는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아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5 : 1 - 11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생각보다 신자들에게서 좀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생각보다 심각한 사건인 이유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로 시작된 초대교회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건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사람들 안에 담대함을 가지고 초대교회가 시작이 됩니다. 매일 믿느 자가 더하고 떡을 떼고 유무상통하고 날마다 모여찬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처음 초대교회에 나타난 커다란 사건 중의 하나가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이것은 교회가 가져야 할 아주 중요한 힘이고 원리고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늘 경계해야 되고 조심해서 아예 이런 일들이 교회에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중요한 부정적인 사건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헌금좀 숨겼다고 해서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식으로 밖에는 이해하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해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이와 흡사한 사건을 다른 대목에서 찾아서 그 사건에서 이 사건이 갖는 영적인 죄악성을 한 번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으로 갑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오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니라.” (출 32 : 1 - 10)
이 사건을 보시면서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모세는 지금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이나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기다리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고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보고 반석에서 나온 물을 먹고 만나를 먹고 하던 백성들이었지만 지금 여호와를 잊고 그들의 손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거기에 절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내용은 정확히 일치합니다. 나타난 형태는 다르지만 원리는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무슨 일로 속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같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라는 그런 식의 신앙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하지 못하고 안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이 출애굽에서 일어난 금송아지 사건보다 결코 덜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 금송아지 만든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보다 더한 것도 없이 이 둘은 막상막하의 동급의 엄한 벌을 받아 마땅한 중한 죄입니다. 이제 그 비슷한 점들을 출애굽 사건을 좀더 추적해서 알아 보려고 합니다.
출애굽기 32 : 1을 보시면 금송아지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이 왜 발생했느냐 하면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사건이 터졌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위협합니다. 모세가 누에 안 보이자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보면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자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보면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고 모세만 보이는 것입니다. 모세가 누구 손에 있고 무슨 일을 시행하는 자인지를 못봅니다. 그래서 금방 넘어집니다.
출애굽기 19장을 찾으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뻠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출 19 : 1 -12)
백성들을 성결케 하고 이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는 장면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저들 앞에서 굉장히 위엄과 엄중한 권세로 나타나서서 백성을 겁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20 : 1 - 17까지는 십계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18, 19절에 “뭇 백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말하자면 출애굽기 19장 사건에서부터 하나님이 분명하게 백성에게 이 얘기를 확인시킵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꺼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렸고 홍해를 갈랐고 만나를 주었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해서 이 자리에 오게 했다. 너희는 내 백성이다. 내가 너희를 제사장나라로 삼으려고 한다. 나의 거룩한 백성,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한다. 너희는 내 앞에서 거룩하라. 그래서 19장에서부터 시작해서 31장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하는 법과 하나님을 섬기는 뻡과 섬기기 위한 제사법, 제사장들의 세움 이런 제도들이 주어집니다. 그러는 동안 산 밑에서는 백성들 앞에 모세를 불러내시는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우뢰 같은 음성, 빽빽한 구름, 불타는 산을 보이심으로써 모세가 한 일이 아니라 모세 배후에 온 천하만물의 주관자, 주권자, 권세자, 주인이신 분이 모세를 지금 종같이 부르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켰습니다.
백성들이 그것을 다 알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것을 다 듣고 그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어서 모세보고 당신이 가서 말씀을 나누고 와서 얘기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24장에 가면 이 문제를 아론과 70장로들이 가서 확인을 하고 옵니다.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노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멀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 24 : 1 - 8)
그래서 이것을 어기는 자는 죽는 것입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중에 이들이 무슨 문제로부터 타락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모세가 안 내려오는 것만 눈에 보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모새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모세로 시선이 옮겨 오자 자기가 필요한 자기 욕심과 자기 계획과 자기 뜻으로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신앙이란 원래 이런 것입니다. 일반 모든 종교라 자신의 잘남을 증명하는 것이고 혹은 조금 저급해지면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써 가서 비는 것입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만 주신다면 집을 팔아서 바치든 뭐든 바치겠나이다. 이것이 모든 일반 종교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내 소원이 앞서고 그 소원을 이루어 가는데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이가 신입니다.
기독교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획을 갖고 있고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방법도 정하십니다. 그래서 비록 내가 원하는 바대로 생긴 모습이 아니라도 그것을 기쁨으로 삼고 하나님이 그것을 가지고 영광 나타내신다면 아멘 하고 영광과 기쁨과 감사로 알고 사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뭐가 안 보이면 신앙이 잘못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세상을 만들었고 세상 역사를 주과하시고 내 인생을 지키시며 그의 뜻대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놓아 버리면 아무도 우리를 명령할 자가 없고 나를 흔들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금방 자기 인생과 자기뜻에 자기가 주인이 됩니다. 이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원리가 그것으로 나타나는 것만은 신앙문제에 있어서 처음부터 철두철미하게 뽑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이 문제에서 넘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쳐버리고 모세만 보입니다. 모세가 안 보이니까 이제 각자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우상을 만들어라 합니다.
아론은 자기도 가서 하나님을 보았고 그 자리에 칠십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세에 밀려서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렸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둘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 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출 32 : 21 - 25)
여기서 방자하다는 것은 영어 성경을 보면 벌거벗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뜻을 분명히 하면 방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방종한다는 것은 어떤 규율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근신하지 않고 자기를 마음대로 발산하고 있는 것으로 규칙과 무서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대표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방자해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나의 주인인 것과 그 앞에 내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놓치면 사람은 방자해집니다.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하게 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사람에게 요구하게 되고 하나님을 속이는 줄 모르고 사람을 속입니다.
그래서 신앙에서는 이것이 제일 무서운 시험거리고 타락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다른 것이 죄가 아닙니다. 거짓말했다거나 살인하고 간음했다든가 하는 이것 자체가 죄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수로 짓는 것은 훨씬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생각을 가져서 타락한 결과로 나온 것이라면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 그것은 뿌리를 뽑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도행전에서는 네 마음에 어찌 사단이 가득하였느냐 하고 설명합니다. 아나니아에게 베드로가 꾸중하는 것이 어찌하여 네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였느냐입니다. 성령을 속이느냐, 사단이 가득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죄의 원리 중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죄의 원리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에덴 동산에서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시킬 때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저것을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못 먹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왜 먹었느냐, 하나님과 맞먹으려고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권할 때 저들이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남 앞에 꿇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 아니라 신의 뭐라도 난 꿇릴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남한테 무슨 동정을 구하거나 가서 머리를 조아려서 물 달라고 하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비록 빌빌거리며 살더라도 떳떳하게 살다가 죽겠다는 것입니다. 지옥이 있으면 지옥에 떳떳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갖는 가장 큰 방자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을 꾸중하다가 제일 화날 때는 우리가 자녀를 잘못 꾸짖을 때입니다. 너 왜 이것 이랬느냐 하니까 애가 눈을 부릅뜨고 내가 안했는데 왜 나한테 그래요. 그러면 부모님은 금방 너 어디 눈을 그 따위로 뜨고 쳐다보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설사 혹 부모가 잘못 알았을 수가 있어도 어디 눈에다 힘을 주고 부모를 쳐다봅니까. 그러나 자녀들은 억울하다고 대답합니다. 부모님이 잘못 알고 계신데 어떻게 안 그럴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싸움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것이 누가 했느냐가 먼저가 아니라 너 어디서 그런 태도를 배웠느냐 그럽니다. 그것은 아주 다른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의 모든 타락의 현장, 신앙이 좋지 않은 현장에 가 보시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 그 이유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 보여서 그럽니다. 이유가 먼저 여러분에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타난 하나님의 종이 눈에 안 보여서 그렇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기는 합니다만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안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부름받은 종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아서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이 제일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책임이 굉장히 큽니다.
제가 아는 제자 하나가 지방에서 부목사를 하고 있는데 한 번 방문 을 했더니 점심을 소 한 마리 낸 정도로 푸짐합니다. 그래서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렇게 많이 내냐? 하니까 괜찮다고 하며 교회 접대비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 교회 부흥회하러 온 것도 아닌데 지나가다 널 보러 온 것인데 그렇게 써도 괜찮냐 하니까 괜찮다고 합니다. 그래서 괜찮다니 무슨 뜻이냐 자기네 교회 수석 부목사는 헌금도 가져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얘기냐 했더니 교인들이 감사헌금을 낸 봉투 중에서 가장 두꺼운 봉투를 그 목사 주머니에 넣었대요. 나중에 헌금 집계를 하는데 작은 교회라 교역자들이 이 일 저 일에 참여를 하게 되는데 그러고 있다가 헌금을 낸 분이 담임 목사한테 전화를 한 것입니다. 작은 교회라 헌금을 많이 내면 금방 알게 되는데 그 헌금건에 관한 얘기가 나오니까 담임목사는 모르는 얘기라 전부 증인으로 출두하게 됐습니다.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하다가 누가 가져간 것이 드러났습니다. 제가 하도 기가 막혀서 그래서 아무런 책 이 없었다고 하니 담임목사는 더 큰 것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내보낼 수가 없었답니다. 서로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러니 결론은 이렇게 목사님과 함께 식사하는 이것은 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방자해지는 지점입니다. 우린 쉽게 무너집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무서운 것, 결국 교회가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교회는 다 불완전한 사람끼리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끼리 모여서 신앙생활하는 곳입니다. 목사도 완전한 사람이 와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이 이 일을 맡는 것입니다. 그의 약점과 연약함 때문에 그 배후에 우리에게 이 교회를 허락하시고 구원을 허락하시고 영광의 자리에 우리를 앉게 하시기 위해서 지금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과 능력과 지혜와 불꽃 같은 눈을 잠시 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당장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되는 것입니다.
제일 대표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에 헌금 내봤자 밤낮 친목회에서 먹기만 하더라. 그러니까 난 안 낸다. 이것은 여러분이 낸 헌금이 잘못 쓰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집행한 사람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안 내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교회에 헌금 내는 것이 맘에 안 들면 그 헌금 어디 딴 데로 내세요. 시골에 어디 어려운 교회에 낸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하실 것은 하셔야 됩니다. 이런 설교를 하다 보면 끝에 가서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결국 부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교묘하게 헌금 내라는 소리구나 합니다. 정 어디 내기 싫으면 땅에 묻으세요. 제가 예를 들 것 없어서 헌금을 얘기해서 그렇지 무엇으로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결국 오늘이라는 이 시간, 오늘이라는 이 한 날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로서의 근실함과 긴장됨과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충성하느냐 안하느냐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감춰니고 사람이 나오고 사람 앞에서 나를 비교하는 것으로 빠져들면 아무도 이길 자가 없습니다. 방자해집니다. 내가 하는 짓이 하나님 앞에 벌받을 짓인 것을 좋칩니다. 목사가 변변치 못해서 여러분이 시험을 받으시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만 목사는 목사대로 하나님 앞에 벌받을 것이지만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어쨌든 하나님 앞에 평가를 받습니다. 너희 교회 목사가 신통치 않아서 네가 이렇게 됐으니 용서한다. 이것은 없습니다. 선생님이 잘못 가르쳐 줘서 공부를 못했으면 대학입학시험 볼 때 봐주지 않습니다. 정답대로 써야 됩니다. 혼자서라도 참고서를 더 보거나 노력을 해서 보충을 해야 됩니다.
무서운 얘기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32장 뒤에 보시면 처벌을 이렇게 합니다.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아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니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애호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출 32 : 26 - 28)
혈육을 죽입니다. 결국 가족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죄진 자들 신앙문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이 문제를 타협하고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 앞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놓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 사람과 사람끼리의 경쟁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초대교회에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있슴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습니다. 각 나라의 방언을 말하고 말 한 마디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하는 이 일들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모습들 뒤에 이런 죄의 모습이 살며시 침투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병 낫는 것만이 소원이고 명성을 얻는 것만이 소원이고 이 세상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위하여 신앙을 동원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신 것과 그래서 그의 인도하심 속에 있기 때문에 내가 거룩해야겠고 하나님의 목표를 향하어 인도되는 일에 순종해야 되고 긴장해야 되고 충성해야 되는 것을 좋고 예수를 믿었더니 병도 나았다, 예수를 믿었더니 명성도 얻었다, 예수를 믿었더니 행복했다. 그래서 더 큰 행복, 더 큰 자랑, 더 큰 형통, 더 큰 성공 이것으로만 자신을 몰아가기 시작하면 벌써 하나님을 놓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너무 쉽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왜 그랬나 싶고 뭐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 하지만 그러나 출애굽기에 와 보면 어떻습니까? 열 가지 재앙을 목도하고 홍해 바다를 가르고 건너오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먹고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를 먹으며 시내산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두려움을 목도합니다. 빽빽한 구름 속에 임하신 하나님, 그의 우뢰 같은 음성을 듣고 죽을까봐 벌벌 떱니다. 모세여 가서 말씀 나누고 와서 우리에게 전해 주십시오. 우리가 직접 못 듣겠습니다. 와서 전해 준 말은 우리가 지키겠나이다 해서 열두 지파를 따라 열두 기둥을 세우고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고 언약의 피를 뿌리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택하신 제사장이요 그의 소유요 그의 나라가 되었으니 우리는 거룩히 살아야 된다. 그의 요구로 우리의 소원을 삼고 그의 명령으로 우리의 기쁨을 삼고 우리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할 때 예! 우리가 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는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가 안 내려오니 어떻게 된 줄 모르겠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주인은 누굽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처한 현실적인 여러분의 인생의 위치를 가지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사회적 지위, 경제력, 건강, 자녀문제, 가족문제 등 모든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 지금 그것을 달게 받고 있습니까,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불만스럽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하여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 여러분의 신앙이 못해서 그 수준까지 못간 것이라면 용서할 수 있지만 내 행복, 내 만족이 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나 몰라라고 고래를 돌린 불만이라면 여러분은 죽어 마땅합니다. 그것만은 안됩니다. 돌이키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모인 데가 아닙니다. 수리수리 마수리 하러 온 데가 아닙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을 부르신 이, 여러분을 거룩함으로 요구하시는 이, 그래서 여러분에게 여호와를 섬기는 법,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법을 말씀하시는 그 말씀 앞에 무릎 꿇으시고 그분을 의뢰하시고 그분을 의지하여 복종케 하는 법을 훈련하셔야 됩니다. 그런 분위기를 여러분 개인과 이 교회에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애쓰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