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8일, 선친을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셨습니다.
올 8월이면 9주기를 맞이하는데 어머니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킨 것이지요.
아버지를 교회 묘역에 모시고 난 직후 어머니는 저에게 아버지를 현충원으로 모시지 않은 것을 섭섭해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경황도 없었고, 모실 수 있는 현충원 묘역이 이천이나 영천밖에 없어 사정을 말씀드리고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꼭 현충원으로 모시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까맣게 잊은 채 지내왔고 최근 아내가 서울묘역에도 모실 수 있다는 정보를 주었음에도
어머니가 위급한 상황이 되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선친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될 때도 보훈처의 연락에 의한 것이었고,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등록도 어머니가 직접 하신 것이니 장자가 나선 일은 이번 이장이 전부인 셈이지요.
직업 군인이셨던 선친 덕에 나는 군 자녀를 위한 특수설립 학교에 진학하여 6년을 지냈습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또래의 친구들과 기숙사 생활을 한 것입니다.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외박이 허용된 날과 방학기간 뿐이었고
그래서 오랜만의 만남 이후의 이별의 순간이 참 싫었지만
춘천으로 향하는 시외버스터미널로 배웅 나오신 선친은
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시는 사인으로 저를 격려하셨지요.
선친과 저의 그러한 교감은 대화로, 편지로 6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 시절 이후의 선친과의 모든 기억은 하나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될 뿐입니다.
결혼과 분가, 그리고 아이들 양육, 치열한 직장 생활 속 효의 기준은 제 판단에 의한 것이었지요.
다만 선친께서 담낭암 수술을 하셨을 때 잠깐 그 중심을 다시 아버지께로 옮긴 적이 있습니다만,
그 시기 역시 내 생각이 우선했고 또 오래 가지도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나마 선친과 함께 의미 있는 여행을 한 적은 있습니다.
선친의 군 생활시절의 주둔지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우리들을 낳고 키우던 추억을 돌아보게 하시고
그 시절의 지인 가족을 만나 회포를 푸는 여행이었습니다.
그 여행을 자랑으로 여겨왔지만 지금 생각하니 여든을 바라보시던 연세의 부모에겐
육체적으로 힘드신 여행이었을 것이고 오히려 나의 추억 여행이었을 뿐이란 생각에
오히려 가슴이 아픕니다. 좀 더 일찍 해드렸다면 몰라도.....
소천하시기 전, 주일마다 선친을 찾아뵐 때 마다 쇠락해가는 육신과 스스로 가꾸지 않는 모습이 속상했지만
그래도 그 무렵 좋아하시던 돈까스, 메밀소바, 냉면을 사드리는 것만으로도
자식의 도리를 하고 있다고 여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아내가 남긴 사진 한 장입니다.
우연히 발견된 구형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 속엔 아버지 면도를 해드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유난히 수염이 잘 자라시는(그것은 제게 유전인자로 남아 있지요) 선친이
일회용 면도기로 자주 피부를 상하시기에 전기면도기를 사드렸지만
그 무렵엔 그것도 귀찮아하신 것 같습니다.
일부러 의자에 앉혀드려 흰 보자기를 두르고 비누 거품을 내 면도를 해드리며
어릴 때 아버지 쫓아 이발소 가던 시절을 말씀드리거나
가위로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이발사 흉내를 내면서
아버지를 따르던 김 하사나 이발병 아저씨 이야기도 하면 피식 웃기도 하셨지요.
그런 추억이 담긴 사진입니다만 지금 생각하니 그때 이미 이별을 준비하며 더 신중하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원하시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여쭙고 따랐어야 한다는 후회가 듭니다.
그렇게 거부하시던 요양병원에 입원하시어
낯 선 환경, 멈추지 않는 중환자의 신음, 간병인의 거친 손길조차 거부할 수 없는 그 긴 시간 중
다만 몇 시간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 도리를 다 했다고 돌아가는 자식들.....
아버지의 신체적 상태와는 별개로 자식들은 죽음이 그리 가까이 있지 않을뿐더러
말 그대로 요양중이라 여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선친은 삼복더위 어느 날 갑작스런 저혈당 쇼크로 종합병원 중환자실로 이송되셨습니다.
중국인 간병인들을 피해 한국인 간병인이 있는 병실을 선택에 옮겼습니다만
외려 그가 더 거칠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친은 말씀도 못하고, 오른 손은 마비된 채 겨우 눈을 뜨시고 생명연장장치에 의지하고 계셨고
자식들은 그저 제한된 면회시간에 만나 뵐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내는 아버지께서 유난히 정을 많이 주셨다는 작은아버지께 연락을 해야 한다고 몇 번을 얘기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면회시간에 ‘아버님, 작은 아버님 오시라 그럴까요?’라고 아내가 여쭙자
아버지는 눈 깜빡임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급히 모시고 온 작은아버지 부부를 보신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거짓말처럼 마비된 손의 경직이 풀리셨지만 다음날 소천하셨습니다.
선친이 소천하신 해의 내 나이는 54세,
그 54세 때의 선친은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이 직장에 복직한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내 나이 63세,
선친의 63세 때는 분가하는 큰아들 가족의 모습을 지켜보실 때였습니다.
주치의 말로 ‘출렁거리며 하향곡선을 그리는 중’이라는 모친은 지금 요양병원에 계십니다.
죽음에 대해 아무 경험 없는 자식들의 섣부른 경험과 지식으로 인해
중환자실에서 소천하신(그러함에도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기는) 선친의 경우를 반면교사 삼아
어머니는 재가요양에서 요양병원으로 그리고 요양원을 거쳐 노인전문요양병원으로 모셔졌습니다.
때로 응급상황이 벌어지기도 하고, 곡기를 끊으신 채 약물에 의존하시긴 하지만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 가운데 간혹 놀라운 인지력을 보이셔 웃기도 하고 여동생들은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어머니는 편안히 돌아가실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망하신 대로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으로 모실 준비도 마쳤습니다.
자신이 아닌 당사자로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이제야 마음을 평화롭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