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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사천왕문에 걸려있던 문귀가 인상적이다. 山寺로의 마음 여행, 지리산 삼정산 오암자 유람기
▶일시 : 2007년 6월 6일 / 맑음 / 지리산 자락은 약간 운무 ▶산행 시간 : 10시 40분 출발 ~ 16:20 도착 ▶산행 코스 : 음정마을 - 벽소령 작전도로 - 영원사 - 삼정산 - 상무주암 - 삼정산 - 문수암 - 삼불사 - 문수암갈림길 - 도마리 - 삼정산 능선 - (약수암) - 임도 - 실상사
절집으로 떠나는 여행은 늘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일상에 쫓기며 나 자신조차도 돌아보지 못했던 것을 차분하게 정리해준다. 내 자신도 불자가 아니거니와, 굳이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라는 믿음의 구별을 떠나 몸과 마음도 깨끗이 정화시켜준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시간의 시(時)는 日(날일) 과 寺(절사)를 합쳐서 時가 완성된다. 이는 절집의 하루처럼 시간을 헛되게 쓰지 말라는 뜻이 들어 있다. 사찰에 들려서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 혹여 ‘나는 시간을 낭비하며 살지는 않았는가’ 각성만 해도 큰 마음 공부하는 것이다. 삶이 날마다 좋을 수는 없어 나는 길을 떠난다. 삶이란 한 세계에서 또 한 세계로 넘어가는 아주 짧은 경계. 그러니 1년 365일은 그저 눈 깜짝할 사이의 순간일 뿐. 인생을 좀 알 수 있는 나이에 이르러 어렵지 않게 와닿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속됨에 길들여진 마음이 앞서 무심히 가는 세월만 야속타 한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어제와 달리 보인다. 문득 문득 지나온 시간을 뒤돌아보며, 내 영혼의 무게가 얼마쯤 나가는지 달아보고픈 즈음이다.
♣ 류시화 /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 전문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산행초입인 음정마을...어서오세요... 절은 늙을수록 곱다. 어느 절집 해우소에 써있는 ‘파리야 극락가자’란 낙서를 보면, 집값 걱정, 일 걱정, 가족 걱정도 잊고 6m 깊이 아래 똥통에 너털웃음을 뚝 떨어뜨리게 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산은 당신의 도피처일 뿐이라고.... 그게 설령 미흡한 인간의 피난처로 전략할지라도 난 그 산이 있기에 행복하기만 하다.
지리산 삼정산(1.255m) 은 그 자태를 잘 드러내지 않는 지리산 깊은 안쪽에 자리한 곳에 있다. 이곳은 상무주암,영원사,문수암 삼불사,도솔암등의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불교의 수행처로서 많은 고승 대덕스님을 탄생시킨 곳.
지리산 중북부 능선의 삼정산은 내지리(內智異) 최고의 망루 역할을 하고 있다. 반대로 청학동 뒷편의 삼신봉은 외지리의 망루인 셈이다. 그리고 중북부 능선이라기 보다는 삼정산 능선 또는 독립된 삼정산 자체의 산줄기로 인식되기도 한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내지리산의 깊숙한 곳까지 그 진면목을 한눈에 가장 쉽게 살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중북부 능선상의 삼정산 정상이다.
하봉 안부에서 중봉·천왕봉·촛대봉을 이어 반야봉·노고단·만복대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처럼 연결되는 지리의 영봉을 가슴에 안아볼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지리의 망루인 셈이다. 삼정산 능선의 또다른 특징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숱한 불적들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언제인가부터 ‘사찰순례산행’이라는 테마로 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름하여 ‘7암자 산행’이라는 테마산행이 그것이다. ‘7암자’는 ‘도솔암,영원사,상무주암,문수암,삼불사,약수암,실상사’를 모두 일컫는 말이다. 지리산의 선경과 지리산 천년 불교의 발자취를 만끽하기에 충분한 능선이기도 하다. 이곳의 절집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수행정진도량으로 이름이 높아, 삼정산 자락 전체를 불향 가득 서린 곳으로 이름나게 만들어 왔다. 특히 마천면 도마부락에서 문수암이나 삼불사로 이어지는 작은 골짜기는 ‘견성골’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을 지녔다. 영원사를 비롯한 곳곳에 고승 대덕들의 수행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산자락 아래 마천면 군자리에는 조선시대까지 ‘군자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구산선문의 하나로 스님들의 실천적이고 청빈한 수행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실상사의 명성은 여기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이 능선은 또한 경남과 전북의 경계선으로도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경남(함양군 마천면)과 전북(남원시 산내면)의 도경계를 이룬다. 삼정산(三亭山·1,225m)은 산아래 동네가 양정,음정, 하정마을이라 삼정산이라 칭한다. ▲영원사 초입에 서 있는 옛. 표지석. 절입구에 최근에 만든 표지석이 또 있었다.뛰어난 사찰이 있기에 산은 명산(名山)이 될 수 있고, 명산 속에 있으므로 사찰은 명찰(名刹)이 된다. 거기 역사마저 가미되면 고찰(古刹)이 된다. 이 능선상에는 모두 7암자가 있다. 지리산자락의 전체 사찰의 절반이 몰려있는 셈이다. 이 구간을 등반하려면 우선 마천면 삼정마을과 마천면 도마마을,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실상사 등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삼정마을에서 벽소령도로를 따라 도솔암을 거쳐 삼각봉을 등반했다가 연하천 산장을 이용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는 이 능선의 등반이라기 보다는 삼각봉과 연하천 등산 코스로 인식할 수 있다.
▲지리산 공비토벌루트와 간첩등의 산죽비트에 대한 험상궂은 안내판이 도로 곳곳에 있다. 불적 많고 전망 좋은 삼정산의 등반 묘미는 삼정마을에서 영원사를 거치고 <상무주암>을 지나 삼정산 정상에 오른 뒤 문수암·삼불사를 지나 실상사를 연결하는 코스이다. 반대로 산행을 해도 무방하다. 오늘은 도솔암을 제외한 삼정산 6암자를 답사할 수 있는 기회이다. 삼정마을에서 영원사까지는 꼬불꼬불한 도로가 잘 닦여있다. 이 도로는 무장공비 소탕을 위해 건설된 벽소령까지 이어지는 작전도로 이다. 영원사는 차를 이용해서도 쉽게 오를 수 있다.
더운 날씨에 뜨거운 열을 발산하는 콘크리트 도로를 걷는 맛이 영 아니다. 이 길에 대한 보상은 따로 있었다. 길 옆에 널려있는 오디 열매와 앵두등을 따먹는 맛이 쏠쏠하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이 지날 무렵 영원사에 도착한다. 절 입구의 수백년 이상 되었을 느티나무가 절의 연륜을 대변해 주고 있다. 과거 영원사 일주문이었을 거석 옆에 작약이 소담스럽다. ▲영원사의 앞마당에도 작약꽃 여러 송이가 만개해 있다. 여름의 문턱인 유월. 이맘때가 되면 산과 들을 형형색색으로 단장했던 봄꽃들은 대부분 신록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지천이던 봄꽃의 이별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탐스러운 꽃을 차례로 피우는 초목이 있다. 바로 모란(목단)과 작약이다. 사랑하는 왕자가 죽어 모란꽃이 되자, 그 곁에 영원히 남고 싶다는 공주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미쳐 작약꽃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꽃. 마치 영원사라는 절집의 이름처럼 두 꽃은 영원한 사랑 이야기로 맺어진다. 모란과 작약은 꽃이나 잎이 너무나 닮아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모란은 ‘목본(나무)’ 이어서 지난해의 가지에 싹이 난다. 모란은 땅 위의 전년도 가지에서 싹이 트지만 작약은 흙속(뿌리)에서 새싹이 나온다. 향이 없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윽하다. 그러나 역시 향보다는 꽃의 화사함과 풍성함 을 감상하는 꽃이다. 나란히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해 있다. 모란은 ‘목본(나무)’인 낙엽관목이고 작약은 ‘초본(풀)’인 여러해살이풀이다. 서양에서는 모란과 작약을 크게 구별하지 않고 ‘피어니(peony)’라고 부르지만, 구체적으로 말할 때는 모란을 ‘트리 피어니(tree peony)’라 하고 작약을 ‘허베이셔스 (herbaceous·초본) 피어니’라고 한다. 모란을 보면 오월 어느 날 문득 시들어버릴 것 같은 옛 시인의 감성이 떠오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 풍성함과 품위 때문에 ‘부귀화(富貴花)’라고 하며 ‘꽃들의 왕’으로 꼽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란꽃 그림을 병풍으로 만들어 혼례 때나 신방을 꾸밀 때 사용 하였다. ‘유월 목단’은 지금도 화투 속에서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단(丹)’자가 의미하듯 대표적인 꽃색은 붉은색이다. 작약은 꽃모양이 크고 함지박처럼 넉넉해 ‘함박꽃’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작약 종류로는 흰 꽃을 피우는 산작약, 붉은 뿌리를 지닌 적작약이 있다. 낮에는 피었다가 오후에 해가 기울면 꽃잎을 닫아 그 속에 든 꽃술을 보호한다. 작약의 굵은 뿌리는 좋은 약재가 되고 그 뿌리에 모란 줄기를 접붙이면 꽃이 더 크고 우아해진다. ▲영원사 전경.
영원사(靈源寺)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시대 고승 이었던 영원대사가 건립했다 하여 절 이름을 영원사라 한다. 지리산 중턱 해발 920m에 위치하고 있다. 한 때 내지리(內智異)에서는 제일 큰 사찰로써 절의 규모는 너와로 된 선방이 9채에100칸이 넘는 방이 있었다고 한다.
고승들이 스쳐간 방명록이라 할 수 있는 조봉안록(祖峯案錄)을 보면 부용영관, 서산대사, 청매, 사명대가, 시안, 설파상언, 포광스님 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다. 사찰경내에는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정암당탑, 중봉당탑, 박허당탑, 청매탑 등 이름 있는 고승의 호를 딴 부도군이 현존하고 있다.
▲지리산의 옛이름을 딴 ‘두류선림’이라는 판액이 이채롭다. 현재 영원사에는 두채의 건물이 반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과거 지리산에서 가장 큰 사찰로서 100칸 수행도량의 위용은 간데없다. 그러나 편리한 교통편은 더 많은 신도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제2의 번성기를 맞이할 것으로 여겨진다. ▲절집의 처마에는 용이 많이 조각되어 있으나, 이곳처럼 용의 수염까지 표현해 놓은 곳은보기 힘들다. 용의 수염이 귀엽게 느껴진다. 영원사는 여순반란사건과 6.25 공비토벌 때 아군에 의한 방화로 소실되어 다시 지어 졌다고 한다.
▲영원사 사찰 기둥의 불에 탄 흔적 / 호랑이 무늬로 보인다
영원사 뒷마당을 지나면 삼정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명산 속에 있고, 역사까지 깊어서인지 상무주암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산행을 시작한 지 조금 지나자 안경에 땀이 떨어진다. 오르막길을 그렇게 삼십여분 걸어도 암자는 보일 생각조차 안 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오르기를 사십여분. 상무주암 이정표가 보인다. ▲영원사에서 오르다 만나게 되는 삼정산 능선의 비티재
삼정산 정상에 못미쳐 삼거리가 있는데 오른쪽으로 200여미터 정도 조금만 돌면 상무주(上無住)암자가 있다. 영원사에서 1시간이 채 안되는 거리이다. 삼정마을에서 영원사를 거치지 않고 곧장 오를 수도 있다. 삼정산 바로 아래의 거대한 두개의 암벽을 내려서니 전각 지붕이 얼핏 보인다. 암자 입구에 감로수가 흐르고 있다. 바가지로 한 입 떠먹으니 꿀맛이다.
▲지리산의 3대 명당 가운데 하나인 상무주암(上無住庵) 전경 상무주(上無住)란 ‘머무름이 없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상무주암은 일반 등산객의 출입이 잦아 수행하는 스님이 별로 반기지 않는다. 마당에는 스님과 불자 몇몇이 버섯을 말리고 있다. 이 작은 절은 세월의 흐름만큼 무거운 빗장을 걸어 놓고 있다. 상무주암은 풍수지리상으로 지리산의 3대 명당으로 꼽힌다. 앞으로는 정면으로 반야봉이 보이고 옆능선끝으로 천왕봉이 줄줄이 늘어선
흐린 날씨임에도 이곳에서 보는 조망이 압권이다. 저 멀리 아스라히 천왕봉이 보이고 반야봉을 분간할 수 있다. 과연 名不虛傳. 청학동 삼신봉이 지리산을 파노라마 처럼 바라 볼수 있는 쪽 전망대라면 상무주암이 위치한 삼정산은 지리산의 북쪽 전망대라고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곳에서 수량이 풍부한 물보시를 받고, 1년반 만에 동반한 숲님과 점심을 나눈다. ▲상무주암 바로 옆에 자그마한 평상과 공터가 있어 점심을 하기 좋다. 저마다 깊은 역사를 지녔고 어느 곳 못지않은 치열한 수행의 흔적이 배어있는 지리산의 많은 절집들... 그 중에서도 ‘독창적인 우리나라 불교의 정립과 발전’, ‘선(禪)과 교(敎)가 어우러지는 청정수행의 교풍을 이어지게 하는데 있어 대들보와도 같은 역할을 한 곳이 있으니 바로 상무주암(上無住庵)이다.
상무주암(上無住庵)은 지리산과 상보관계를 이루며 오늘날까지 법등(法燈)이 이어진 명산 속의 명찰이자, 역사 속의 고찰이다. 해발 1300여 미터 고지, 언제나 빗장이 굳게 걸려있는 이 자그마한 산중 암자를 그렇게 높여 일컬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 불교역사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보조국사 지눌스님(고려 중기; 1158∼1210)이 처음으로 문을 열며 수행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기 위하여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팔공산 거조암에 주석하시던 스님은 홀연 상무주암으로 들어와 세속과 단절한 채 적정삼매와 독서삼매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득 ‘대혜어록’의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하는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라는 구절에 깨우침을 얻고는 적극적으로 보살행을 지향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대중불교에 깊이 관여하며 불교발전의 큰 틀을 마련하게 되는 스님의 2차 깨우침을 얻은 곳이 상무주라는 것이다.
이후 스님은 송광산 길상사를 개창하게 되며, 중창불사 끝에 산과 사찰의 이름을 각각 ‘조계산’과 ‘송광사’로 바꾸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니, 고려 말까지 무려 15국사의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송광사는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는 만고에 빛나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지눌스님은 스승을 두지않고 홀로 공부를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교에 치우쳤던 당시의 불교를 벗어나 교와 선을 아우르되, 선을 중시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종풍을 선도하여 우리나라 불교가 인도와 중국, 일본과는 다른 독창적이면서도 가장 균형 잡힌 종교로 자리잡는데 큰 기틀을 마련하신 것으로 평가 받는 분이시다. 그러니 우리나라 불교의 큰 뿌리를 이루는 한가운데에 상무주가 있다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고려 고종(1213~1259)때 각운스님 역시 상무주암에서 〈선문염송설화〉 30권을 저술했다. ‘진리의 등불’이 면면히 이어진 현장에 상무주암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상무주’라는 편액이 붙은 주(主)불전, 왼편에 작은 산신각인 듯 한 불전, 마당 한편에 있는 3층 석탑이 상무주암의 전부다. 그러나 이면에 흐르는 면면한 역사와 암자 분위기는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3층 석탑만 해도 그렇다. 저것이 유명한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인가. 각운스님이 〈선문염송설화〉 저술을 마치자, 붓 통 속에 사리가 갑자기 떨어졌다. 그 사리를 봉안한 탑이 바로 이 탑. 해서 이름이 ‘필단사리탑’이 됐다. 상무주암은 지리산을 앞마당으로 가진 거의 유일한 사찰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상무주암의 축대 한 구석. 들꽃속에 놓인 석탑이 천년의 역사를 지탱하고 있다 반야봉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천왕봉을 옆에 끼고 자리한 상무주암. 비록 시계(視界)가 닫혀 아름다운 천왕봉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함이 아쉬웠지만 깨우침과 중생제도에 온 힘을 기울였을 선인들을 떠올리며 상무주 앞 그 길을 마음의 합장을 하며 걷는다.
▲상무주암 벼랑 아래의 채소밭도 안온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상무주에서 점심을 하고 삼정산 정상에 오른다. 산사 기행만 하려만 상무주암에서 그냥 능선길로 내려서면 되지만 여기까지 와서 삼정산 정상을 안가볼 순 없는 일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십여분 옮기자 바로 삼정산 정상이다.
정상석 바로옆에는 필례님,hoon님,수선화님이 점심을 하고 있다. 마치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던 천왕봉이 새파란 하늘 속을 구름인 듯 보였다가 말다가를 반복한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부처님의 가피이다. 어차피 오늘은 산세나 조망보다는 암자를 찾아보는게 주목적이 아니었던가? 쓸데없는 욕심을 또 부리니... 이 몸의 탐진치는 정령 그 끝이 어디메고.... 역시 삼정산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감동이다. 한참을 조망하다가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 상무주암으로 간다.
▲천왕봉의 장대한 봉우리가 보인다.
▲ 반야봉및 주능선의 크고 깊은 계곡 능선이 운무속에도 확연히 조망된다.
상무주에서 다시 오솔길을 따라 20여분 걷다보면 문수암(文殊庵)이 있다. 삼정산 자락 약 1100m 고지에 있는 작은 암자이지만 정갈하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문수암 해우소가 그림같은 풍경이다. 문수암을 올라서니 스님은 간데 없고, 참배하러온 불자 몇몇이 따사로운 햇살 아래 지리산을 내려보고 있다.. 법당에는 불경 외는 소리가 낭낭하다.
암자 뒤편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서편에 천인굴(일명 천용굴)이라는 천연 동굴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마을사람 1,000명이 피난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문수암의 도봉스님은 예를 갖추면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어른이라고 한다. 겨울 산객에게는 '오미자 차'도 한잔 함께 나눌 수 있다도 한다. 도봉스님의 말씀으로는 1000명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천인용굴이라 칭했다고 한다.
▲입구 바위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가 퍽이나 인상적이다. 문수암에서 다시 10여분 걸어 내려오면 삼불사(三佛寺)가 있다. 비구니 스님이 지키고 있는 삼불사는 산골마을의 고향 집 같은 느낌이 든다.
▲삼불사 아궁이의 무쇠솥단지
아궁이의 솥단지도 정겹게 여겨진다. 본전에는 비구니 스님의 護法과도 같은 진돗개 한마리가 지나가는 산객들을 향해 제법 사납게 달려든다.
조용한 山寺의 고요를 깨뜨린 미안함을 어찌할꼬. 삼불사와 약수암은 비구니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소란스런 소리에 밖을 내다본 스님에게 불청객이 합장으로 예를 표하고 길을 묻자, 스님은 조용히 미소지우며 알려주신다. 스님에게 합장의 예를 갖추며 다시 길을 나선다. 어릴 적 할머니를 생각하게 하는 스님이다. 내려오면서 생각해보니 가져간 과일과 과자류가 좀 있었는데 그것이라도 부처님께 공양하고 老스님이 드시도록 할 걸 잘못했다는 후회가 든다.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고 그냥 온 게 영 마음이 개운하지 못하다.
삼불사를 마지막으로 계속 이어지는 불적은 잠시 멈춘다. 시계를 보니 절집 구경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여기서부터 30여분간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길을 재촉한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삼정산 능선산행 길을 택한 hoon님과 수선화님이 앞에 있다. 잠시 숨을 돌리면서 과일을 나눠먹는다.
견성골과 아래 도마마을 길을 지나니 임도를 만난다. 임도를 만나 20여분을 내려서면 약수암인데, 약수암을 가는 길을 놓쳐 들리지 못했다. 거의 마지막에 약수암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알았으나 너무 늦어서 다음 기회로 미룰수 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는 지리산 암자 순례 길이다. 공연한 아쉬움에 나뭇가지에 앉은 새에게도 길섶에 피어난 들꽃에게도 나는 부질없이 말을 걸기도 하였다. 실상사로 내려서는 산길의 끝자락에 인동초 군락이 장관이다. 늘 맏 형님같은 모습의 ‘메나리’님이 손짓해 알려준다. ♣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 도종환 피었던 꽃이 어느 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 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벌떼가 정말 벌떼처럼 붙어있다. 임도와 숲을 지나 대규모 양봉단지에 들어선다. 사방은 온통 꿀벌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진동한다. 이 소리는 실상사에 내려와서도 환청처럼 계속되었다.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인 실상사는 구산선문 최초 가람이다. 구산(九山) 또는 구산 선문(九山禪門)이라함은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에 형성된 선종(禪宗)의 9개파. 신라 말기 당나라에 들어가 구법 수행한 선승들이 귀국하여 구산 선문을 크게 일으켰는데 9산 선종 중 가장 먼저 생긴 것이다. 실상사는 구산선문의 본산인 셈입니다. 실상사는 산 속이 아닌 동네 앞, 들판 한가운데 있다. 예전에는 이곳도 산중이었다고 한다.
▲지리산 천왕봉이 정면에 보인다 통일신라 홍척국사가 시대에 왜구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서 일본의 발원을 막을 자리에 절을 하나 세웠는데, 그 절이 바로 지리산 산내면에 있는 실상사이다. 그래서 이 절이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약해지고, 반대로 이 절의 기운이 쇠하면 일본이 흥해진다는 전설이 있다. 정유재란 때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을 조선 숙종26년(1700년)에 다시 지었으나, 고종 19년(1882년)에 거의 불타 버려 일부만 남았다. 현재 이곳에는 중학과정의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 학교’와 귀농한 도시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실상사 귀농학교’가 있다. 그 때문인가.. 몇해전 새만금 간척사업 문제로 삼보일배의 땀을 뿌린 스님중 한 분이 바로 이 절 출신이었다.
▲실상사의 사천왕문
절 앞 논에는 자운영이 곱게 피어 있다. 통일신라(828년) 때 지어진 이 절에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국보 1점과 보물 11점, 지방유형문화재 3점등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수의 국보와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좌우 쌍둥이 석탑과 보물제 35호 실상사 석등이 이채롭다.
탑의 층수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탑은 는 처마 모양의 지붕돌만 세어보면 된다. 지붕돌이 3개면 3층탑, 5개면 5층탑이다. 아랫부분은 받침돌, 기단이다. 탑은 부처의 사리를 넣기 위한 무덤이었으나 후에 불법의 상징물로 변했다. 탑 안에는 사리함 같은 보물을 넣었다.
▲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실상사 철제여래불상의 시선방향은 천왕봉을 넘어 일본 후지산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왜 지리산이 명산인지 자꾸만 생각해보게 된다. 부처상과 보살상은 머리 장식으로 구분한다. 머리가 검고 꼬불꼬불하면 부처상,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면 보살상이다. 보살상은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를 둘렀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이, 보살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아직 부처가 되지 않은 이를 가리킨다. 절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을 ‘보살’이라고 부른다. 절 일을 도와하는 아주머니를 ‘보살’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 절 입구에서 반달모양의 돌다리인 해탈교를 지나면 보이는 돌장승이 인상적이다. 사바세계를 지나 해탈한 모습이 저 돌장승인가?
▲템플스테이 전각. 실상사는 템플스테이 (산사체험)로도 유명하다.스님들의 수행생활을 잠시나마 느껴보는 특별한 경험이다. 일상의 번뇌를 벗고 마음의 고요 함으로 참된 ‘나’를 찾는 들여다보는 시간이 된다. 지난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불교계에서 한국의 불교문화를 알리기 위해 시도되었다가 일반인들로부터 인기를 얻으며 확산됐다.
개인의 참여뿐만 아니라 대학, 기업, 단체 등에서 연수를 하는 공간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새벽예불·다도·참선·발우공양 등 사찰에서 전해내려오는 각종 수행과 생활방식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다. 새벽 예불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의식과 함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다도는 차를 마시는 멋을 알고 여유있는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실상사 입구 ‘생동하는 몸짓’이라 씌여있는 자연적인 나무 목각
♣ 길 위 에 서---이 정 하
길 위에 서면 나는 서러 웠다 갈수도 안 갈수도 없는 길 이었음으로 돌아 가자니 너무 많이 걸어 왔고 계속 가자니 끝이 없이 너무 막막했다
허무와 슬픔 이라는 장애물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길을 간다
그대라는 이정표 나는 더듬 거리며 길을 간다
그대여 너는 왜 저만치 멀리 서 있는가 왜 손 한번 따스하게 잡아 주지 않는가
길을 간다는 것은 확신도 없이 길을 간다는 것은 늘 쓸쓸 하고도 눈물겨운 일 이었다
▲ 실상사 입구 / 찻길과 걷는 길 이정표 누군가가 <모든 풍경은 일생에 단 한번 뿐이다.>고 했던가. 풍경을 보는 것은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행동이라 했거늘. 내년을 기약 할 수 없는 바로 지금의 지리산 풍경들... 왠지 그 말이 오늘따라 가슴에 와 부딪힌다.
해마다 그곳에 있는 바위와 나무들. 그 곳에 걸려있는 하늘이 올해와 내년이 같을 수는 없겠지. 모든 풍경은 일생에 단 한번 뿐이다. 언젠가 다녀 온 길이지만 어제의 길은 수년전 다녀온 길과는 또 다른 모습 이었다 엄마의 품속 같은 지리에는 벌써 부터 여름이 묻어 오고 있었다. 佳人遂不來 春江向夏流 님은 기다려도 도통 돌아오지 않고, 봄날의 강물은 여름으로 흘어 가는 구나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이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엇하리오.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정태춘: 탁발승의 새벽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