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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8]스콧니어링 자서전 50-8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무엇을 가르칠지를 결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의 모교인 워튼 스쿨의 교육과정은 재단 이사진과 학교의 일상적 행정에 책임을 진 실무진의 경제적 사회적 관심사에 따라 엄격히 제한을 받았다. 이들은 기존체제를 솔직하고도 공공연하게 지지했고, 미국적 방식이라는 공인된 원칙을 확고하게따랐다. 물론 각 개인으로 본다면, 현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걱정과 개선 요구사항이 있겠지만, 다들 이데올로기적으로든 직업적으로든 미국적 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어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 나도 이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미국 기성사회의 일부이자 한 구성원이었다. 나는 미국 사회의 원칙을 신봉하고,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며 미래에는 좀더 나아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내가 속한 사회가 당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건전하고 합리적이며 친절한 사회였다면, 나는 성실하고 헌신적인 시민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기질상 반항아나 선천적인 반골은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체제에 맞서는 '반체제 인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법의 지배를 신봉했고, 그 법을 준수하고 바람직한 관습을 지키는 것을 당연한 책무로 알고 있었다. 친구들 중에는 나를 '보수적인 급진주의자'라 부르는 이도 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사회철학이나 사회윤리, 도덕, 또는 사회사나 사회학 일반, 경제학, 정치학, 그리고 사회의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고급 학문 등이 가능한 대상으로 떠올랐다.
역사학은 비록 잘 가르칠 자신은 없지만,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인간과 그들이 살아온 과거에 대한 지식은 그 나름의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학이란 이미 형성되고, 응결되고, 결정화된 과거의 사실이었다. 그에 반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간의 행동 - 미래에 역사가 될 것이다 - 은 유동적이어서 잘 훈현된 사람들의 손과 마음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고 방향을 잡아나간다. 만일 경제학자인 사이먼 패튼 교수와 만나지 못하고, 경제학이 실천적 학문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더라면, 나는 역사를 전공했을 것이다. 내가 경제학을 가르치기로 선택한 데에는 그것이 공공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906년 워튼 스쿨에서 신입생들을 상대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 패튼 교수가 나를 자기 방으로 부르더니 내 강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자네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게." 패튼 교수는 나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하지만 소득의 분배문제를 다루는 것도 괜찮을 걸세. 이 나라에서는 민감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끊임없이 사실에 기반을 두고 연구하는 태도를 잊지 말도록."
그의 조언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 바로 이거다! 분배문제를 파고들어야 한다. 노동과 자본의 갈등, 부자와 빈자, 매년 높아만 가는 생활비 문제, 고소득과 저임금 사이의 모순.
생산량이 충분하다고 가정할 경우 (서구 경제가 생산증대만큼은 확실하게 이루어놓았다), 누구에게 어떤 비율로 생산의 성과가 돌아가야 하는가? 토지 사용료, 자본에 대한 이자, 위험 수당, 노동에 대한 임금, 경영에 대한 보수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과연 어떤 비율로 생산성과 분배되어야 하는 것일까? 분배문제를 놓고 자산 소유권과 전문, 비전문 노동 사이의 사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상 그것은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는 사람들 간의 싸움이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생산은 안정되게 자리를 잡았으나, 분배는 아직 전쟁터였다.
나는 1902년 신입생으로 워튼 스쿨에 입학한 수로 줄곧 달려들어 볼 만한 연구과제를 찾고 있었다. 당시는 링컨 스테펀스, 레이 스태너드 베이커, 이다 타벨, 업튼 싱클레어를 비롯한 '부정 적발자들'의 시대였다. 또한 산업노동조합이 동업조합에 도전장을 내밀고,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분배의 진상을 밝히고 가능하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기여하기로 결심했다.
워튼 스쿨을 졸업하던 1905년에 나는 내 인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몇 가지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천번째는 펜실베이니아 주 아동노동 규제위원회의 의장인 조지 우드워드를 만나고, 그 위원회의 서기로 있던 헬렌 마롯의 보조역으로 임명된 일이다. 훗날 나는 마롯을 대신해 서기로 취임했다. 이 위원회는 광산, 제재소, 공장 등의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수많은 어린이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개인 및 단체들의 조직이었다.
아동학대금지협회의 서기인 벤저민 C. 마쉬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나는 벤과 함게 여러 해를 비공식적 차원에서 같이 일했는데, 그를 통해 아동노동과 빈민생활의 여러 양상들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당시 아동노동이 집중적으로 행해지던 현장은 석탄광산이었다. 채굴된 석탄은 쇄탄기에 들어가 잘게 부서지고, 외지로 수송되기 전에 잡석을 골라내는 과정을 거친다. 새카만 석탄 중에는 잿빛 점판암 부스러기들이 많이 섞여 잇었다. 이 잡석 고르는 일을 아이들이 맡았다. 이들을 '쇄탄 보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시간당 보통 11센트 정도에 고용되었다.
유리공장에서는 자잘한 물건들을 나르고 붙잡고 있는 일을 아이들이 했다. 기계조립공장에서는 볼트와 너트 등 부품들을 분류하는 일을 맡았다. 직물공장에서는 원자재를 나르고 바닥을 청소하는 일이 아이들 몫이었다. 아이들은 열세 살부터 일을 할 수 있었다. 위원회의 요구는 주간작업은 열네 살로, 야간 작업은 열여섯 살로 최소 연령을 상향 조정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 주 브리스틀 시에서 조지프 그런디라는 인물이 큰 섬유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펜실베이니아 주 제조인연합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 사람 역시 자기 공장에 아이들을 고용하고 있었고, 공화당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법 제정에 반대하는 자들 중에서 중신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런디와 여타 제조업체 경영진들은 마치 기업활동이 하늘의 가호를 받고 있어 번영을 위해서라면 국가도 함부로 방해해서는 안 되는 양 행세했다. 아동노동규제법률은 물론이고 심지어 감찰행위조차도 이들은 체제를 위협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이들 보수주의자들이 펜실베이니아의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터여서 아동 노동규제법의 통과와 시행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동노동규제위원회의 대표 자격으로 어린 노동자들과 그들의 부모, 그리고 고용주들을 자주 만났다. 또 존 C.딜레이니가 책임자로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공장 감찰부와 워튼 스쿨 사회학부의 새뮤얼 맥퀸 린지 교수가 이끄는 (뒤에는 오웬 R. 러브조이가 그 자리를 맡았다) 국립아동노동위원회,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언론사들, 그 중에서도 특히 <필라델피아 프레스>의 편집인 톨코트 윌리엄즈와 자주 접촉했다. 당시 세간의 관심을 모으던 이 문제에 관계된 사람들과 조직을 무수히 만나고 다녔던 것이다.
이러한 유명인사들과 매일 접촉하면서 나는 내가 속한 사회의 체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독서와 연구를 통해 기성사회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생생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내가 터득한 사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내 오랜 친구인 샐리 클레그혼이 지은 유명한 4행시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장 바로 옆에 골프장이 있어, 일하는 아이들은 놀고 지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필라델피아 윤리협회의 집행위원장인 S. 번즈 웨스턴이 주도하는 오찬모임을 통해 필라델피아와 펜실베이니아 주의 여러 인사들과도 사귀었다. 번즈 웨스턴은 활력이 넘치는 활동가였다. 로커스트 거리에 있는 그의 사무실 옆에는 요리용 스토브와 식품저장실, 그리고 주방기구들을 갖춘 작은 식당이 있었다. 이 식당에서 일 주일에 한 번씩 가정부가 와서 초대손님들에게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제공했다. (일인당 25센트를 점심값으로 지불했다.)
번즈 웨스턴의 모임에 고정으로 참석하는 멤버는 철학자 헨리 레프면, 변호사 롤런드 모리스 상인 찰스 W. 어빈, 직업적 사회주의 운동가 프레드 화이트사이드, 그리고 나였다. 좌석은 열다섯 개가 준비되어 있지만, 평균 열두 명 정도가 매주 모였다. 번즈 웨스턴은 늘 참석했고, 뒤에서 모임이 잘 되도록 신경을 썼다. 우리는 현안문제에서부터 사회철학, 심지어는 신학까지 화제로 다루었으며, 서로의 생각을 주로받는 데 아무런 제재나 장벽이 없었다.
나의 사고에 영향을 준 세번째 사건도 바로 이 모임에서 비롯하였다. 어느 날 프레드 화이트사이드가 필라델피아에서 20마일 가량 떨어진 볼티모어와 오하이오 간 철도가 지나가는 델라웨어 주 하비에 땅을 한 곳 임대했다고 말했다. 토지 측량에 대해 내가 약간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다음 주말에 자기와 함께 가 새로 얻은 땅을 설계하는 일을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부탁했다.
프레드의 당은 반 에이커 정도 되었는데, 단일세(한 종류의 재화에만 과세하는 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새로 개발한 마을인 아덴이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아덴 개발의 주역은 예술가인 윌 프라이스와 조각가이자 냉철한 무정부주의자인 프랭크 스티븐스였다. 이들은 헨리 조지(1839~1897. 미국의 경제학자로 토지에만 과세하는 단일 과세론자)의 추종자들로 지가 상승이 공적인 목적에 유용되면, '단일세'만 가지고도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재원을 충당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아덴의 토지는 법정 신탁관리인에 의해 운용되고, 원예와 수공예를 하기에 충분한 크기로 개인들에게 임대되었다. 마을에는 커다란 공용지가 있었는데, 주민들에게 필요한 운동시설이나 극장, 여인숙, 공구점 등이 거기에 들어서 있었다. 나중에는 주민들을 위한 사교클럽까지 생겼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공용지에서 나오는 폐수가 흘러 들어가는 저지대 구석의 땅 한 뙈기만 배고 공용지에 면해 있는 모든 땅뙈기가 다 임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반 에이커의 땅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성싶은 땅이 아니었다. 임대료는 1년에 13달러였다. 나는 즉석에서 그 땅을 임차해, 그후 10년 동안 여름과 주말을 아덴에서 보냈다.
아덴의 착실한 시민이자 거주자로서 나는 내 반 에이커의 땅을 뒤덮고 있는 잡초와 가시나무, 덤불들을 뽑아내고 작지만 살기 좋은 여름 별장을 손수 지었다. 문짝과 창문까지 직접 만들어 달고, 밭을 일구고, 토요일마다 서는 읍내 장에 내가 가꾼 농작물을 내다 팔고, 마을회관에서 연극공연을 할 때는 샤일록이나 카시우스나 로미오 역을 맡아 참여하고, '아덴의 행복과 안녕'을 논의하는 읍민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아덴은 단일 과세론자들에 의해 단일세 홍보를 위한 시범케이스로 개발되었지만, 1905년 내가 아덴에 갔을 때는 단일세운동은 쇠퇴하고 사회주의 운동이 급속히 고조되고 있었다. 아덴이 살기도 좋고 윌밍턴이나 체스터, 필라델피아 등지 - 모두 반경 20마일 이내에 있다 - 로 통근하기도 좋은 곳이라 생각한 사회주의 신입자들이 곧 아덴을 개발한 단일세 주창자들을 수적으로 앞질렀다. 새로 이주해 온 사회주의자들은 아덴 읍민회를 자신들의 이론을 설파할 수 있는 이상적 공개토론장으로 보았다. 그 결과 읍민회는 매회 고참 단일세 주창자들과 신참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설전 마당이 되었다. 그러나 1백 60에이커 되는 이 거주지가 온통 새 입주자들로 채워짐에 따라, 결국은 사회주의자들이 단일세 주창자들을 투표수로 이겼다.
읍민회와 더불어 가정토론회는 아덴의 사회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열정적이고 박식한 사회주의 지지자들에 의해 다양한 관점이 자연스럽게 제시되고 논의된다는 점에서 읍민회와 가정토론회는 나에게 개방적인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아젠에서 제기된 문제와 논의들은 처음에는 윌밍턴의 신문들에, 그리고 나중에는 필라델피아 신문들에 게재되었다. 이런 보도 탓에 아덴에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주말에는 야구경기나 연극공연이 열려 아덴을 찾는 방문객의 수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시카고 가축 사육장에서 식용고기를 마련하는 과정을 다룬 업튼 싱클레어의 책 [정글]이 1908년에 출판되었다. 아덴을 방문한 싱클레어는 아덴의 생활과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며 내 땅 바로 옆의 땅을 세내, 거기에다 커다란 천막을 쳤다. 그렇지 않아도 세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싱클레어 덕분에 아덴은 더욱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되었다.
펜실베이니아의 아동노동규제위원회와 번즈 웨스턴 오찬 모임, 아덴의 읍민회와 가정토론회는 나에게 개방적인 학교 밖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내가 1905년까지 10년 간 출강한 워튼 스쿨과 성인 하계대학, 스워트모어 대학, 필라델피아 사회사업학교의 강의에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강의를 처음 시작할 무렵 나는 스물두 살의 신출내기 선생에 미혼이었다. 그런데 교단에서 10년을 보내고 난 뒤의 나는 서른둘의 기혼자로 부양할 가족이 잇었으며, 분배의 경제학이라는 내가 선택한 연구과제에 관해 가르치고 강연하고 글을 쓰고 있었다.
<경제 결정론에 대한 투쟁>
안락한 생활을 보장하는 직업들을 마다하고 교사라는 가난한 직업을 선택한 나는 당장 생계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 어제 나는 난생처음으로 가보는 지역엘 갔었다. 처음 들어오는 풍경들이 나쁘지 않았다. 만나본 사람들도 꽤 좋은 인상을 주었다. 모르는 곳이었지만 택시가 아니라 걷거나 버스를 이용해 목적지를 가보고자 했었다. 대견스럽게도 무사히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다 어떤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이곳이 살기에 괜찮은가요?"
"어떤 곳이든 있으면 살기 좋은 곳이지요." 우문현답이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많은 병폐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사회... 자본주의 ... 정말 돈만 있으면 어떤 곳이든 살만한 곳인가?
그러면 돈이 없다면 어느 곳이든 살기가 힘들다는 말인데... 오늘 이 책을 읽다가 돈이 없어도 이런 곳이라면 살아 볼만 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 뿔뿔히 개인이 아니라 오직 밟지 않으면 오히려 밟혀야만 하는 그런 곳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고, 함께 문화를 즐기면서, 그렇게 싹튼 공동체 의식이 곧 경제에서도 어느 정도 연결 고리를 가질 수 있는곳.
우리도 이런 공간을 우리가 힘이 있을때 만들어 볼 수 있을까......^^
오늘은 조금 길었네요 내일은 좀더 재밌는 이야기였으면 하고 기대하며 이만 책장을 덮어요^^
멋진 주말 보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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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스콧니어링 자서전 50-9
<경제결정론에 대한 투쟁>
안락한 생활을 보장하는 직업들을 마다하고 교사라는 가난한 직업을 선택한 나는 당장 생계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사라면 의당 평균 이상의 생활 수준은 유지하겠거니 했다.
졸업후 1년 뒤, 나는 모교의 경제학부에 조강사로 입명되었다. 보수는 연봉 8백 달러였는데,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열 달 동안 나누어 다달이 지급되었다. 쥐꼬리만한 강사 월급을 보충하려면, 남는 시간에 과외 강사를 하거나 연구 용역, 논문이나 교과서 집필, 신문 잡지에 원고 기고, 또 대중강연 등에 기대야 했다. 나는 결국 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적인 강연자들 - 얼 반즈, 찰스 조블린, 에드워드 하워드 그릭스, 존 코퍼 포위스 등 -은 모두 평균 수준 이상의 생활을 누렸다. 이들은 문학, 예술, 철학, 심리학 등에 관한 주제를 다루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가볍게 건너뛰고, 경제학처럼 딱딱한 주제는 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들의 청중은 대개 중산층이었다. 이와 반대로 경제학이나 정치학, 계급투쟁 같은 주제를 다루는 연사들은 강사료로 기껏해야 동전 몇 푼 정도밖에 낼 수 없는 하층 계급을 상대로 강연을 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공개강좌, 성인 하계대학, 공개토론회 등은 연사들의 강연료가 미리 정해져 있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같은 유명강사는 강연료를 스스로 결정한다. 브라이언이 좋아하는 강연료 협정방식은 자신이 2백50달러를 받고, 강연회 주관 단체에 따로 2백50달러가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도 남는 돈이 있다면 자신과 주관단체가 반씩 나누어 가졌다. 그 정도 강연료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돈이었다. 내 기억으로, 뉴욕 시의 노동자 전당 시절 초기에는 윌듀란트 같은 연사들이 집회에서 한 차례 연설하는데 25달러를 받으면 기뻐하고, 심지어 15달러나 10달러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요구하는 강연료는 일정치 않았다. 아동노동구제위원회를 위해 강연할 때는 위원회나 주최측으로부터 여행경비만 받았다. 정식 강연회에 연사로 나서는 경우에는 많든 적든 후원조직의 프로그램에서 최고액을 받는 연사의 강연료에 준해서 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경우에는 거금을 받지만 어떤 경우에는 거의 혹은 한 푼도 못 받았으며, 심지어는 내 돈을 들여 강연을 하러 가는 경우도 있었다.
봉급으로 가족과 함께 생계를 꾸려가는 강사들은 빈민층에 가깝거나 그보다 못한 생활을 했다. 그 시절 철강왕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앤드퓨 카네기는 은퇴한 대학교수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퇴직 교수들에게 최소한의 노년의 생활비를 보조하자는 취지에서 였다. 그러나 이 연금제도는 비합리적 보수체계라는 당면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우리 젊은 강사들은 이 문제를 논의했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품위는 품위대로 지켜야 하면서도 가난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염증을 느껴, 가르치는 직업을 그만두려고 했다. 시간강사에서 조교수로, 또 전임교수로 이어지는 승진의 사다리를 올라가게 될 사람은 소수였다. 그렇게 버티다가 정년퇴직을 하면 카네기 연금수혜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과연 그 백만장자의 하사금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연금을 받지 않고 부업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대학강사들의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최소한의 수입 보장을 요구해야 하는가? 내가 워튼 스쿨에서 강의를 시작하던 1906년에만 해도 교원노조의 설립 가능성이란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금전상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윤리상의 문제에까지 봉착해 있었다. 직업윤리의 기준을 확립하고 그것을 실천할 경우 어떤 사태가 발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예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을 강의실 안에서나 캠퍼스 밖에서 그대로 발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학생이나 마을 주민들이 직선적인 질문을 해올 때, 슬쩍 비켜가야 하나 아니면 우리의 지식과 능력을 총동원해 솔직하게 답변해야 하나? 교사의 자리는 진보의 제일선이라고 한 사이먼 패튼의 말이 과연 옳은가? 우리가 편안한 노년생활을 보장받기 원하고 정년퇴직 때까지 교수라는 직업을 유지해야 그것이 보장된다면, 카네기 연금은 고분고분 말 잘 듣고 바른 말은 삼가면서 승진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연금수혜자가 되는 교수들에게 지급되는 뇌물이 아닐까?
나는 이 문제를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아니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대로 가츠치고 실천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카네기 연금이 교수들을 피츠버그의 오픈샵 정책에 동조하게 만들기 위해 피츠버그측에서 내놓는 뇌물인데 나는 내가 진리라고 믿고 잇는 것을 가르치고 싶다면, 나와 내 가족의 앞날을 보장해 주고 카네기나 다른 백만장자들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한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같은 경제문제에 중압감을 느껴, 나는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일 것.
둘째, 학교 밖의 수입원을 늘일 것.
세째, 수입의 일부를 노후생활을 위해 적립할 것.
이 세가지 원칙 중에서 가장 지키기 힘든 것은 사치와 낭비가 미덕인 풍요로운 사회에서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일이었다. 첫번째 단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 필수품 외의 옷가지와 가재도구, 가구 같은 사유재산은 출세주의자에게나 가치가 있을까 대부분 아무런 본질적 가치도 없는 신분의 상징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나야 출세주의자가 될 의향도 없었고 출세주의자인 적도 없었으니, 갖고 싶은 것은 물론 꼭 필요한 것까지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당연했다. 가능한 한 내가 먹을 것은 직접 재배해서 만들어 먹고, 빨래, 집짓기, 수선수리도 손수하고, 병을 치료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최상의 건강을 유지하고, 집세, 이자, 세금 같은 고정비용을 늘리지 않고, 이자를 물어야 하는 돈이나 물건은 절대 꾸거나 빌리지 않으며, 반드시 현금을 사용하고, 적어도 1년 간의 실직은 견뎌낼 수 있는 예비비를 적립해 두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경제학자로서 이러한 기본원칙을 따르다 보면, 최소한의 에너지와 돈을 지출하면서도 최대한의 만족을 얻게 되고, 분배문제를 계속 연구하여 개인경제와 가정경제의 효율성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저소득 대학 강사의 행복한 삶을 위한 이 세칙들을 가정과 사회에서 실천하는 일에 착수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나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가족과 친구, 친지들은 내 황금률에 따라 생활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인간의 행복은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재화와 편의시설, 사유재산의 총량과 직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나는 어는 모로 보나 가진 것이 많을수록 행복은 줄어든다고 대꾸했다. 나는 이런 견해를 개진함으로써 그들의 일상생활과 행동양식, 기득권, 안락한 생활을 꿈꾸는 미래상에 이의를 제기했다.
어느새 나는 입센이 말하는 '사회의 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만약 나의 도덕률을 실천하고 다음 세대에게도 그것을 따르라고 권하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기성사회를 교란하거나 심지어는 기성사회의 붕괴를 부추기는 불순분자가 될 판이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 볼 때, 그 원칙들은 단지 좀더 공정하고 온정있고 소박한 생활방식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뿐이다.
나는 내 도덕률을 실천하기 시작하면서, 독립적으로 내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학교 밖 활동에 손을 댔다. 노후생계비 문제와 진부하고 비굴한 교수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카네기의 부도덕한 제안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을 두고 당당하게 내 자신의 힘으로 노후에 대비할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내가 가장 활발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시기는 아마도 마흔 살 이전까지일 것이다. 할말을 다 한다는 이유로 나게게 사회의 칼날이 떨어질 공산이 큰데, 그럴 경우 마흔 살 이후에는 수입이 현저하게 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산을 맞춰보니 나에게 맞는 노후보장책은 스물다섯 살부터 마흔다섯 살까지 보험료를 납입하고, 마흔다섯 살부터 예순다섯 살까지는 절립금을 내지 않고, 예순다섯 살부터 죽는 날까지 연금을 수령하는 식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스물다섯에서 예순다섯 사이에 죽을 경우, 보험금은 가족에게 보상금으로 제공하면 될 것이다. 나는 이 안을 가지고 몇몇 보험회사를 찾아다녔다. 보험회사에서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후로 이 '이중조건 양로 보험'은 인기있는 보험상품으로 자리잡았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건대, 내 계획이 잘 진행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꼭 필요한 것들은 충족되었고, 뜻밖의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도 그런저럭 돈은 융통되었다. 나는 최근 20년 동안 양로보험에서 나오는 보장금으로 수수하게 생활해 왔다. 그리고 그동안 대부분의 시간과 정력을 교육활동에 바칠 수 있었다. 내 말이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에 특별히 관심을 두거나 염려할 필요없이, 강연이나 집필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및 더 넓은 사회에서 내 원칙들을 실천할 수 있었다.
당시 내 직계가족(나의 첫 아내 넬리 시즈와 어린 두 아들 존과 밥)은 생필품이 부족해 고통을 겪는 일은 없었으나 나의 별난 특성을 견뎌야 했다. 레이스가 달린 그릇받침이나 화려하게 세공된 유리 식기들이 슬그머니 식탁에 오르는 데 이의를 제기하다가, 나는 나무그릇과 나무수저 한 벌을 장만했다. 그리고 그 뒤로 죽 이 단순 소박한 식기만을 이용해 채식을 해왔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그릇들은 하나에 20센트짜리로, 30년 이 넘은 것들이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모두 나와 똑같이 간소한 밥상을 받는다.
한번은 여동생 메리네 집을 방문했는데, 당시 메리는 보스턴의 고급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내가 백베이에 있는 메리의 집에 도착하자, 메리가 공연히 미안한 투로 인사를 했다.
"오빠가 편하게 있다 갔으면 해서 나름대로 애를 썼어요. 오빠 식사습관을 알기 때문에 내가 늘 다니는 시내 상점에 가서 작은 나무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자단나무로 만든 예쁜 그릇 하나를 80달러짜리라며 보여주더군요. 그래서 소박한 걸 좋아하는 오빠가 쓰기에는 좀 비싼 것 같다고 말하니까 크기는 같은데 값은 60달러밖에 안 한다며 은그릇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무래도 오빠는 내가 쓰던 오래된 사기그릇에다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한 게 없고, 대부분의 편의시설과 당시로서는 사치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까지 많이 갖추고 살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학창시절에 이미 부의 위험을 알게 되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욕망에 따르다가 타락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여 자기 배를 불린다는 사실을.
* *
급진주의자이면서 부유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참 과학적이면서 소박한 삶 그것은 누구나 계획할 수 있지만 어떻게 실천해 나갔는지 무척 궁금해진다. 어쩌면 야망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우리가 꿈꾸는 삶일지도 모른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원칙 몇가지는 따라해보면 어떨까.... 절약하는거, 소식, 채식하는것, 나중의 삶을 위한 준비...등등. 그렇지만 중요한건 알수없는 내일을 위한 지금의 찡그림보단 자신있게 지금을 즐길수 있는 현명함이 왠지 더 끌림은 나만의 생각일까^.~
내일 또 만날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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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스콧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의 생애와 사랑
완전하고 조화로운 삶을 찾아서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한 탄광 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꼭 1백 년 뒤인 1983년 메인 주 하버사이드에서 페놉스콧 만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는 인생의 가장 정점에 이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지극히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철저한 채식주의와 검약이 몸에 밴 그는 백 살이 되자 지상에서의 자신의 임무를 마감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었던 것이다. 그것은 은둔과 노동, 절제와 겸손,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죽음이었다. 그는 1백 년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가장 완전하고 조화로운 삶을 산 사람이었다. 성인이 아니면서 그런 완전한 삶을 산 사람들은 아마 드물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의 삶이 순탄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가 살앗던 1백 년 동안은 여러 면에서 현대사회가 격변을 겪은 시기였다. 젊은 시절 그는 열정적인 사회개혁가엿고, 자유주의자이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산주의자였다. 에디슨이 새로운 발명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중년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 발명품들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또 혁명과 전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니어링은 흥분하였으나 두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죽어가는 수백만의 민간인과 병사들을 보고 절망을 느꼈다.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인 그는 전쟁의 광기에 대해 강한 목소리로 비판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재판정에까지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중요한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곤 했는데 그러한 문제들이 사회 전반에 널리 인식되기 위해서는 한참 시간이 흘러가야 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개인적 자유의 수호자,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문명 전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가한 사회철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실천적인 생태론자가 되었다.
일찍부터 그가 가진 관심의 영역과 통찰력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들이 많다.
에를 들자면 스콧 니어링이 1911년 [아동노동문제의 해결책]을 출간했을 때만 해도 아동노동문제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지 않았던 1912년에 [여성과 사회진보]를 출간하여 여성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1917년 미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려 할 때 니어링은 [거대한 광기]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전쟁 기계를 움직이는 역학관계를 상세히 묘사했으며 징집법안을 "비미국적"이며 "헌법정신과 미국의 전통에 명백히 위반되는 법안"이라고 비난했었다. 1923년 니어링이 [석유, 전쟁의 씨앗]을 발간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후 60년 지나 발발한 걸프전은 그의 통찰력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1929년 스콧 니어링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대한 책을 많이 저술하였는데 [블랙 아메리카]는 미국내에서 흑인들이 당하는 폭력을 생생히 묘사한 글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흑인을 니그로 등의 경멸적인 호칭으로 부르던 시기였으며 그러한 폭력사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삿거리로 다루어지던 때였다. 또한 1933년 니어링은 [파시즘]을 저술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파시즘을 제약없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생각했으며 세상에 대한 첫번째 경고라고 말했다.
이러한 선구자적 생각과 단호한 태도 때문에 그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굽힘이 없이 설파했던 니어링은 두 대학의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순회강연 요청도 끊겨 버렸다. 국가에서도 그를 위험인물로 분류하여 1916년 법무성이 그의 원고를 압수하였는데 이때는 FBI가 창설되기도 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차세계대전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행적 때문에 스파이 활동혐의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모든 학문적 강의는 중단되었지만 니어링은 뉴욕 시에서 열린 미국 사회과학학회에서 주최한 랜드 스쿨 반전사회과학학회에 회원으로 참여했으며 [거대한 광기]를 포함해서 수편의 반전논문을 학회지에 발표하였다.
같은 때에 니어링은 사회당에 가입했는데 1918년에는 현직 의원 피오렐로 라 가르디아에 맞서서 선거에도 출마하였다. 후보자는 단 두 명뿐이었는데 사회당의 높아가는 인기에 위협을 느낀 민주당과 공화당이 피오렐로 라 가르디아를 연합공천 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것이 다반사였다. 신문사들은 탄압을 받았고 사무실이 불시에 수색을 당하고 우편물이 검열되었다. 국외로 추방되는 사람들도 생겼다. 뉴욕 시는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투옥하였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블랙웰 섬의 교도소에 사회당 강령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뉴욕 콜>지가 풍자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유세장은 공공토론과 투쟁에 있어 가장 좋은 장소가 되었다.
후보지명 수락연설에서 니어링은 현 민주당 정부가 스파이법 등의 법률을 만들어 헌법에서 보장된 권리들을 제한하고 부정하는 것에 반대하여 의회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니어링 자신이 이미 스파이 법을 위한 혐의로 연방법원에 기소되어 있는 상태였다. 당국이 제출한 유일한 증거는 그가 쓴 논문 [전쟁의 광기] 하나뿐이었다. 출판사와 랜드 스쿨도 그 논문을 출간한 혐의로 함께 기소되었다.
<미국노동연감(1919~20)>에 의하면 한창 전쟁중이던 1917년 4월에서 1918년 11월 까지 미국 내에서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와 관련하여 기소된 사람은 모두 4천5백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1천5백 명 정도가 유죄 판결을 받아 투옥되었는데, 그 중 9백98명이 스파이 죄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진짜 간첩 중에서는 스파이 법에 의해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신 미국 정부는 자국 내의 수많은 급진주의자와 평화주의자들을 이 법에 의해 감옥으로 보냈던 것이다.
1918년 11월 선거에서 니어링은 14,523 : 6,214로 가르디아에게 패했다.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스파이 혐의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1919년 2월 6일에서 2월 19일까지 열렸는데 니어링은 많은 기자들로 가득 찬 이 재판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며,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그는 모든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으며 [거대한 광기]의 모든 내용이 자기의 생각과 일치함을 인정했다. 최후진술에서 니어링은 열정에 찬 목소리로, 그리고 매우 감동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믿음과 철학에 대해 말했다.
"....... 여러분, 나는 징병 및 등록 업무를 방해하고 불복종과 불충성, 반란 및 전쟁의무 이행을 거부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하지만 검찰측은 내가 징병업무를 방해했으며, 의무이행의 거부, 불복종, 반란 등의 혐의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검찰측이 증거로 제시한 논문[거대한 광기]는 발간된 지 17~18개월이나 되었고 그 동안 약 1만9천 부가 배포되었지만 실제로 검찰측이 주장하는 일이 발생한 사례는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나에게 적용될 수 있는 법규는 내가 내 의견을 발표했다는 사실, 즉 내가 이 책을 쓴 것과 사회당 강령에 대한 세인트루이스 선언에서 내가 내 의견을 발표한 것에 대해 적용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나는 책을 쓰고 그 책을 출판사에 보내어 출간되게 한 죄로 기소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유죄라면 그것은 내가 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한 것이 유죄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의견 외에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민주주의가 귀족정치나 독재정치 등의 다른 정부형태보다 훨씬 뛰어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토론은 민주주의의 한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문제점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토론하여 결론에 도달하고 그 결론을 자유롭게 발표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토론을 통해서만 합리적인 공공의 의견에 도달할 수 있으며 토론이 제한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파괴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시민들에게 그들의 신념을 발표할 수 잇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권리는 올바른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동시에 포함하는 것입니다. 헌법은 시민들이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권리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자기가 정직하다면 잘못된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 권리까지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논문에서 발표한 견해는 내 자신의 의견을 정직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이 견해들이 옳다고 믿습니다. 나의 견해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미래가 밝혀줄 것입니다. 이 나라의 모든 시민은 자신을 표현할 권리를 가지고있으며 법률이 허용하는 한도에서는 어떤 주제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의문에 대한 견해를 발표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개입하여 이러한 권리를 제한한다면 그 순간 민주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의 시민이며 나의 조상들은 2백년 이상 이 나라에 살아왔습니다. 미국 수정헌법에서는 시민들에게 자유로운 언론과 출판의 자유, 즉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말하고, 출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를 이해 우리의 선조들은 유럽을 떠나 이 땅으로 온 것입니다. 이러한 권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현재도 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이 무시된다면 이 나라의 번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우리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지금 이 나라의 풍요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지금의 미국은 자유를 원합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으로서 이 자유야 말로 그것을 위해 우리가 싸워야하는 가장 소중한 자산인 것입니다. 이 자유는 법률과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것입니다. 설사 법률과 헌법이 없다 해도 이 자유는 민주사회의 일원에게 보장된 당연한 권리입니다.
나는 그 논문에서 미국의 자유, 그리고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친교를 위한 나의 희망, 나의 이상과 나의 포부를 표현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며 나머지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
배심원들이 평결을 내리는 데는 장장 30시간이나 걸렸다. 그 결과 [거대한 광기]를 쓴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이 내려졌는데 그것으로 그는 당시에 이와 비슷한 전쟁 관련 혐의로 기소되어 무죄판결을 받은 유일한 급진주의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출간한 랜드 스쿨은 스파이 법 위반혐의가 인정되었다. 랜드 스쿨은 미국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랜드 스쿨은 3천 달러의 벌금을 물었는데 모두 1달러짜리 지폐로 지불했다.
그후 니어링은 할 수 있는 한 글쓰기를 계속했으며 소규모 좌익그룹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연을 가졌다. 그러나 니어링은 이미 사회로부터 위험분자, 과격분자로 몰려 소외당하고 있었다. 차츰 강연 요청도 끊겼으며 신문에 기고하는 글조차 거절당했다. 그는 직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안락한 중산층의 가정을 추구했던 그의 첫번째 아니인 넬리 시즈는 더 이상 니어링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별거를 당하고 아이들로부터도 멀어졌다.
가족으로부터도 떨어진 니어링은 얼마되지 않는 연금에 의지하며 메인 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일반 사회의 시각으로 보자면 실패한 인생의 전형처럼 보여지는 생활이었다. 그때 그의 곁에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 사람이 나타났다. 당시 마흔다섯 살이었던 니어링보다 스무 살이나 연하였던,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지금은 헬렌 니어링으로 더 잘 알려진)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그의 인생 후반부를 함께한 최고의 반려자이자 동지가 되었다.
헬렌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음악 분야에 대해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인도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으로 그의 사상과 삶에 도취했던 헬렌은 이 보잘것없는 중년의 사내에게서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지혜를 느꼈다. 니어링과의 만남은 그녀에게도 역시 생의 일대 전환점을 이루게 한 사건이었다. 그녀는 화려하고 유혹적인 문명적 생활을 포기하고 대신 니어링과 함께 버몬트 주의 숲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단풍사탕을 만들어 파는 생활을 시작했다. 극도로 단순하고, 검약하고, 가난한 생활의 시작이었다.
1945년 8월 6일 그의 62번째 생일에 헤리 트루먼 대통령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날 니어링은 트루만 대통령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
니어링은 부인 헬렌과 함께 처음에는 버몬트에서 그리고 후에는 메인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고 겨울에 농장이 얼어붙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면 여행을 떠나고 강연을 하고 저술을 하며 지냈다. 스콧과 헬렌은 그들의 시골 생활을 [조화로운 삶]에 소개했다. 그들은 또한 [단풍사탕 만드는 법]을 써냈는데 이 책은 그 주제를 다룬 첫번째 책이자 아직도 유일한 책이다. 이 두 권의 책은 1950년과 1954년에 자비로 출판되었는데 베트남전쟁 와중인 1970년에 랜덤 하우스에서 재출간되었다. 이 책들의 내용은 반전운동을 하던 당시의 젊은이들의 욕구에 맞아 떨어졌고 니어링 부부는 미국의 우상이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이 부부에게는 매우 어색한 것이었다.
1970, 80년대가 되자 그의 이름은 차차 사람들 속에 알려져 수많은 사람들이 호숫가 니어링 부부가 손수 지은 돌집과 그들의 생활을 보러 찾아오곤 했다. 그들의 눈에는 스콧 니어링이 가난하지만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명석한 몽상가로, 개인적 희생을 개의치 않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으로 비쳐졌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숲에서 살게 되기까지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의 '화려한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의 생애 전반부에 행해졌던 열정적인 사회활동은 이제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스콧과 헬렌이 죽은 뒤 세워진 '굿 라이프 센터'의 간부들조차 정관을 작성하면서 그의 환경운동이나 정신적, 전원생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적 견해도 빠트리지 앟고 정관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할 정도였다.
말년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존경은 젊은 시절의 화려한 활동 때문이 아니었다. 새로운 추종자들이 그를 존경하게 된 것은 스콧과 그의 두번째 아내 헬렌이 숲속에서 행한 돋특하고 절제된 생화방식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찍이 데이빗 소로우가 월렌 호수가에서 실현했던 생활과 유사한 방식의 삶이었다. 이들을 모범삼아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갔다.
이 절은이들은 스콧 니어링이 걸어온 과거의 급진적 행적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유기농장에서 감자밭을 가꾸는 이 주름지고 구부정한, 팔꿈치를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괴팍한 노인이 금세기 초 버트란트 러셀과 클레런스 데로우에 버금가는 연설과 강연으로 수천 명을 흥분시켰던 명연설가였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엇을 것이다. 꾸준하고 인내심 있게 수동톱으로 산더미 같은 나뭇더미와 가지들을 16인치 크기로 잘라 부엌용 난로의 연료로 만드는 조그맣고 깐깐한 노인이 1917년 반전 논문을 발표하여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1919년 연방법정에 피고로 섰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1983년 8월 24일, 스콧 니어링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1백 년의 시간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는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극대화되면 될수록, 우리의 삶이 더욱 바빠지고 황폐해질수록, 더욱 강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1911년 그가 써놓은 좌우명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 간소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은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그날 자연과 사람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