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중국의 사서에서도 가무을 즐기는 순박한 민족으로 기록할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풍류와 예악을 아는 문화민족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통과
풍토속에서 살아 온 우리 민족에게 민중의 애환을 담은 대중가요는 일부 인텔리
겐챠나 거룩주의 크리스챤에게는 기피의 대상이었지만 그 시대 일반민중문화의
정수요 꽃이였습니다.
대중가요의 초창기라 할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비운과 고통을 노래한 트로트
가락에서 시작된 우리 대중가요는 오랜 우리의 옛 전통처럼 시가 곧 노래요
노래부르는 시인 시조를 수록한 해동가요, 가곡원류, 청구영언에 이 가요명칭의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근대에 이르러서 일본 식민지통치시대에는 엔까의
압도적인 영향하에서 시대의 암울과 항일의 노래가 주류를 이루었고, 일제의 억압
에서 해방을 맞아 조국광복의 감격과 신천지의 밝은 희망을 노래하였으며, 서양의
팝송, 포크송, 록앤롤, 헤비메탈의 홍수를 맞았다가 최근에는 신세대 청소년들의
랩과 레게, 비보이의 세례가 우리 청소년을 상대로 강하게 타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중가요의 흐름속에서
초창기에는 일제치하에서 일본에서 유학하고 오다 현해탄에서 죽은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비롯하여 "홍도야 울지마라, 돈에 속고 사랑에 울고" 같이 구시대의
봉건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여성의 인고와 원한을 주로 노래했습니다.
왕년의 가수 진방남은 가수로 첫 취입하는 일본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도
가지 못하고 슬픔을 울면서 노래한 "불효자는 웁니다" 를 비롯하여 "고향초,
고향만리, 사모곡"을 불렀는데 뒤에는 작사가가 되어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등의 노랫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백년설(이창민)은 춤추는 듯한 곡선의 바이브레이션을 가미하여 "번지없는 주막,
유랑극단, 나그네 설음, 대지의 항구" 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었고
초기의 대표적인 항일가요로 유랑극단의 막간가수들이 불렀던 "두만강 뱃사공" 은
뒷날에 가수 김정구가 불러 유명해졌고 그의 평생 고정레파토리가 되었습니다.
일본 식민통치의 암울한 시대에도 우리의 마음을 달래 주던 트로트가요의 대표적인
세 가인으로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라는 삼대 산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마음씨 좋고 키가 큰 미남 고복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 트로트 가수로서
"타향살이, 사막의 한, 짝사랑" 등을 불러 망국백성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내인 가수 황금심은 "삼다도 소식, 알뜰한 당신"을 불렀습니다.
본명이 강문수(<=최창수)인 고음의 미성가수인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 울며 헤
어진 부산항,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불렀는데 그는 특히 여인들에게
인기와 염복이 많고 한편으로는 돈씀씀이가 짜서 별명이 "여인수" "돈인수"로 불렸
다고도 합니다. 목포의 눈물을 불러 "눈물의 여왕"으로 불려진 이난영은 "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을 불렀으며 그의 남편 김해송은 고운봉이 불러 술자리의
필수곡으로 히트시킨 선창의 작곡자였으나 월북한 후 이름은 잊혀지게 되었고 노래
만 남았읍니다. 이리하여 고복수 남인수 이난영의 삼인전성시대가 흘러갔습니다.
이 삼인전성시대를 전후하여 우리 가요계에 수 많은 히트곡을 공급하여 한 시대를
주름잡던 한국가요의 대부 박시춘(박순동)은 일제에 훼절하여 친일가요라 하여,
노래는 불려도 작곡가를 쉬쉬하는 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밀양에서
기생을 양성하던 권번을 운영하는 주변환경속에서 일찍부터 음악적 감성을 키워
대성하였고, 왕년의 가수들은 그의 노래를 불러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특히
남인수가 그렇고 백년설, 김정구, 현인이 그렇습니다. 여가수로는 이난영, 황금심,
문주란이 그렇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멀리 떠나 있어도, 애수의 소야곡, 꼬집힌
풋사랑, 어둠속에 피는 꽃, 고향만리, 고향초, 신라의 달밤, 전우야 잘자라,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럭키 서울 등 3000여곡의 서정가요가 있습니다.
이어서 우리 대종가요계에는
성악을 공부한 최초의 학사 가수인 현인(현동주)의 "신라의 달밤"이 널리 불려지고,
태생출발이 그런데도 왜색가요라고 한참 수난을 당한 동백아가씨를 부른 이미자,
우수를 깊게 깔고 심금을 흔들어 놓는 배호(배만금)의 "돌아가는 삼각지"가 있었고
우아한 카리스마의 가희 페티 김(김혜자)이 부르는 "초우, 마이웨이, 사랑의 맹세,
이별, 서울의 찬가, 사랑은 영원히" 에는 전 남편 길옥윤의 작곡작품이 많습니다.
본명이 최치정인 吉屋潤은 일본의 작가 요시노 노부꼬의 성과 다니자끼 쥰이치로
의 이름에서 따온 예명인데 평생을 섹스폰으로 살다 죽은 영원한 에뜨랑제입니다.
최희준은 서울법대를 나온 가수로 "하숙생"을 노래가 마치 철학인양 설교조로
불러 공전의 대히트를 거두었고 한때는 국회의원으로 의정에도 참여했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이어 "친구"를 불러 국민가수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조용필은 가성도 바이브레이션도 구사하지 않고 복부에서 끌어 올리는 순정한
음성으로 듣는 이에게 감동과 공감을 야기시켜 주었습니다.
이 두사람은 가히 우리가요의 철학시대를 열어준 선구자라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특히 조용필은 가요계에 새로 풍미하던 팝, 재즈, 소올, 록을 혼용하여 노래 불러
서 종래의 트로트와는 차원이 다른 랩등을 가능케하는 가교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용필 이후 우리의 대중가요계는
새로 등장한 박미경, 김건모, 조성모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더욱 고조시킨 록
과 랩-레게 그리고 뮤직댄스, 비보이의 춤은 한국 대중음악의 컬러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이리하여 기성세대는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과 빠른 리듬과 템포에
적응하지 못하여 이른바 문화적 쇼크를 겪으면서 신세대와 소통의 경로를 차단당
한채 소외감과 무력감에 빠져 도저히 이루워 낼수 없는 불가능의 트로트복고를
꿈꾸며 반란을 꾸미고 있습니다.
끝으로 이색적인 가요사의 한 가닥을 풉니다.
우리 한국가곡의 대표곡의 하나인 "가고파"와 수많은 명곡을 작곡한 김동진선생은
당시로는 이단이라 한 영화음악을 쓰면서 "저 구름 흘러 가는 곳" 의 명가곡을 썼고
영화 백치 아다다에서 그 주제곡 "백치 아다다" 를 작곡하였고, 또 김래성 원작의
영화 청춘극장에서 "축배의 노래" 라는 가요를 썼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 을 작곡한 최영섭선생은 자신이 쓰고
가수 태진아(조방헌)가 불러 히트한 "가버린 사랑" 을 고운산작사 / 박인섭작곡으로
발표하였는데 노래방에서 많이 불려져 저작권수입의 효자노릇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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