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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조선에서는 새로운 민족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민중적 요구는 건국주비위원회의 건설로 현실화되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에 이르는 지부를 결성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는 각 지방에서 식민지 국가기구가 사실상 기능을 정지한 상태에서 치안, 행정 기능을 담당하면서 자치행정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세력 중 어느 세력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인 받지 못한 상황에서,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 양군에 의해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되었는데, 미군은 1945년 9월 6일 서울에 진주했다. 연합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회담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한반도를 연합국의 공동관리 하에 두는 것으로 합의 하였다.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군은 전시 중의 합의를 매듭짓기 위해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를 개최했다. 회의 결과 최장 5년간의 식탁통치가 결정되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신탁통치 찬반문제로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 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함께 협의할 정당사회단체를 선정하는데 합의를 보지 못하여 결국 결렬되었다.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 이승만은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제기하여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우익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 행의 유엔총회에서 미국 국무장관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포기하고 조선문제를 유엔에 이관하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소련대표는 조선문제를 유엔에 제의하는 것은 미소 사이의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라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미국대표는 유엔 임시조선위원단을 설치하고 그 감시 하에 1948년 3월 말까지 남북에 걸친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국회 및 정부를 수립하고 미소양군이 철수한다는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하였으며, 유엔은 이를 결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대해, 중도파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 등 단정을 저지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남북에 각기 분단국가들이 수립되었다. 남한만의 5.10 총선거에는 좌익은 물론 우익세력의 일부와 중간세력도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승만계의 국민회와 한국민주당 등 이승만 지지세력이 압승하였다. 선거 결과 무소속 85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계) 53명, 한국민주당 (김성수계) 29명, 대동청년단 (이청천계) 14명, 민족청년단 (이범석계) 6명, 기타 단체 11명이 당선되었다.
이 때 강동 지역이 속한 경기도 광주군에서는 신익희(申翼熙)가 당선되었다. 신익희는 당시 입법의원 의장이자 자유신문사 사장의 자격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출마했는데, 구천면에서 몰표가 나왔다.
6ㆍ25 전쟁은 미소의 분할점령과 그것에 따른 남북 분단국가들의 성립이라는 외적 요인,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과정에서부터 있어온 민족사회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라는 내적 요인, 그리고 남북 분단국가들 사이의 여러 가지 대결요인들이 요인이 되어 발발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파죽지세로 개전 4일 만인 28일 새벽 1시경 벌써 미아리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에 따라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인도교와 3개의 한강철교가 폭파되었다. 광진교는 이보다 약 1시간 반 뒤에 폭파되었다.
한강교량이 파괴된 극도의 혼란 속에서 국군은 28일 아침 한강을 건너 철수하기 시작했다. 미아리 정면에서 인민군을 저지하던 혼성병력은 광나루나 뚝섬을 비롯하여 마포ㆍ하중리 (서강)ㆍ서빙고ㆍ한남동의 나루터를 통해 철수했다. 광나루를 거친 병력은 수원으로 집결했고 서빙고와 한남동, 뚝섬을 경유한 병력은 시흥과 수원으로 집결하였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남한지역 점령지에서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점령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사회경제적 정책으로는 토지개형, 노동법령 실시, 농업현물세제 실시, 친일파 및 친미파의 숙처 등이 주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북한의 점령정책은 대체로 강동 지역에서도 실시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구천면에서도 명사무소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38선 이남 1,526개 면 중에서 1,198개 면에서 토지개혁이 완료되었다. 점령지역에서 몰수한 토지의 약 38%가 국유화되었고 점령지역 총 농가의 66%가 몰수토지를 분배받았으며, 농민들이 미리 지주에게서 구매한 토지에 대한 부채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유엔군에 의해 남한지역이 수복되면서 김일성 정권 하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은 파기되었고, 그 토지는 다시 지주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 토지개혁으로 남한의 지주세력은 크게 약화되어 이루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에 조직적으로 반발하지 못하였다.
9월 15일 새벽 UN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전함 261척과 미 해병 제 1사단과 한국 제 1해명연대를 진두지휘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월미도에 상륙하고 연이어 미군 보병 제 7사단이 인천해안의 3개 지점에 상륙하였다.
유엔군은 서울을 향하여 부평, 소사, 경인가도와 김포공항 일대에서 인민군을 격퇴하고 18일 영등포지역을 공격하였다. 인민군 사대는 한강뚝방의 사수에 주력하였으나 연합군 전투부대는 대공세로 9월 19일 한강이남 강뚝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9월 20일 미해병사단 1개 연대와 국군해병 1개 대대가 서울의 서쪽 마포와 서대문에 있던 적의 방위선을 공격하고, 미 17연대는 강남에서 한남대교 동쪽으로 아침 일찍 수륙양용장갑차로 한강을 도강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이렇듯 연합군의 합동작전이 전개되어 1주일 후인 9월 28일 서울탈환이 이루어졌다. 미 7사단 17연대는 한남동, 이태원, 청량리를 거쳐 이천, 충주, 금천, 대구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부산으로 집결했다. 이 때 이미 폭파된 광진교에 부교를 설치하여 강을 건너 구천면 길을 통해 관주를 경유하여 이천으로 들어갔다. 서울을 탈환한 후 국군과 유엔군을 38도선을 넘어 (9월 30일) 평양을 점령한 (10월 19일) 후 계속 진격하여 한중 국경선 근처인 박천, 태천, 운산, 희천, 이원을 잇는 선까지 나아가고, 그 일부가 10월 26일 압록강변의 초산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10월 25일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전세는 역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총 퇴각하였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의 철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전쟁은 소련의 유엔대사 말리끄의 휴전제의, 미국 정부 내의 전쟁확대론과 반대론의 대립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종결되었다.
전쟁은 만흥 전재민을 남겨 놓았는데, 성내동 등지는 들판이 넓고 땅값이 싼데다가 생활 용수를 쉽게 구할 수 있어 전재민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했다. ‘1ㆍ4 후퇴’ 이후 강동 지역에는 한강 이북으로부터 피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철원, 금화, 양구, 연천 등지의 주민들이 유입되었는데, 쌀 배급통계의 의하면 무려 30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길가나 창고 등지에서 지내다가 야산에 움집과 판자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천호동과 성내동은 그때부터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암사동에는 ‘복지말’ 이라는 마을 이름이 전해지는데, 1957년에 이석겸, 김재홍 두 사람이 월남피난민을 위하여 새로 농장을 만들어 복을 받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또 둔촌동은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북쪽의 길리와 합하여 선린동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본래 1955년 최문환 목사가 이 지역에 새로 마을 조성하여 전쟁으로 인해 양산된 부랑자나 걸인 등을 수용하여 자활촌을 만들고 이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선린촌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1962년 11월 21일에 법률 제 1172호로 공포된 [서울특별시 도ㆍ군ㆍ구의 행정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애 의해 서울시가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확장함에 따라,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은 중대면, 언주면, 대왕면 일부와 함께 서울시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편입될 당시 구천면의 면적은 34.4였고, 인구는 20,280 명이었는데, 면적은 언주면보다 작아 편입된 4개면 중에서 두 번째였지만 인구는 제일 많았다. 이후 강동 지역은 1975년 10월 대통령령 제 7816호로 강남구가 성통구로부터 분리 신설되면서 강남구의 관할지역이 되었다가, 197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 9630호에 의해 강동구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강동 지역의 개발은 1970년대 초반부터 이미 시작되어, 대규모 주택지가 조성되기 시작했고 교통 중심지로 발돋움하면서 유통 서비스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1988년 1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강동구의 일부가 송파구로 분리 신설되었다.
우리 사회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공업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수도 서울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에 따른 문제점도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67년을 기점으로 서울시의 주택사업 방향이 단독주택 중심에서 공동주택 즉 연립주택이나 아파트 중심을 전환되게 되었다. 이후 강동구 일대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서울에서 인구증가율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 되었다.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될 당시 인구는 444.265명이었는데, 이것을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될 당시의 강동 지역 인구 302,961명과 비교해 보면 46% 가량 증가한 것이다. 또 1988년 송파구가 강동구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도 당시 강동구의 인구가 488,607명이었던 것을 감안해 볼 때 강동구의 급격한 인구 증가 추세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1946년에 광진교가 준공되면서 일찍부터 개발된 천호동 구사거리는 강동구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주택지가 저지대에 위치하여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개발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서울시의 주택문제가 겹치면서 천호토지구회정리사업이 입안되었다. 이 사업은 도심지에서 약 15km에 위치한 천호동을 중심으로 인근의 길동, 성내동, 둔촌돈, 명일동 일부를 포함한 약 6,611,570.2m의 토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 사업에 포함된 천호동 지역은 천호 1동, 3동 중 둔촌로에 접한 주변지역이었다. 사업 시행 중인 1876년에 천호대교가 준공됨으로써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천호대교는 도심을 연결되는 3ㆍ1 고가도로와 천호동을 이어주게 되어 천호동 일대는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천호대교의 준공과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의 결과, 천호대로와 지금의 선사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신사거리가 형성되어 종래의 천호 구사거리를 대치하며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만 해도 주민의 약 70%가 농업에 종사하던 길동 지역에는 이 사업을 통해 아파트가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1974년 영세민을 위한 길동 시영아파트가 준공된 이후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급격한 이구 증가를 가져왔다. 개발 이전인 1972년 법정동, 둔촌동을 포함한 행정동 길동의 인구가 7,815명이던 것이 1988년에는 길 1,2동을 합해 49,405명으로 약 6배 가량 늘어났다. 여기에 천호대교에서 천호동, 길동을 지나 상일동의 시경계로 이어지는 천호대로가 1976년 준공되어 이 지역의 개발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풍납로 좌우 도로변 일대와 풍납로와 통하는 성내동길 좌우에 주택지가 조성 되었으며, 명일동도 새로운 주택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둔촌동 역시 천호대로와 더불어 강동대로, 둔촌로 등의 간선도로가 준공되어 교통사정이 좋아짐으로써 새로운 주택지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이어 암사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1976년 4월에 시작되어 1980년 12월에 완료되었다. 이 사업은 천호동, 암사동 일대 약 1,695,867.8m를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 암사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면서 조성된 택지 위에 암사 시영아파트, 강동아파트 등 대단위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이 사업에 포함된 천호동 지역은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빠진 천호2동과 4동 일대였다.
두 차례의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이어 고덕지구 택지개발사업이 1982년 5월에 시작되어 1985년 말 완료되었다. 고덕지구는 도심으로부터 약 16km, 천호동 중심부에서는 약 2km가량 떨어져 있는 대단위 자연녹지지역이었기 때문에 주거지 개발로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사업에 포함된 지역은 고덕동, 명일동, 상일동 일대였는데 초 면적 3,148,444.7m (약 105만 평) 에 인구 76,010명, 19,010 가구를 수용하려는 계획이었다. 총면적 중 약 65%인 2,040,106,1m는 주거용지로 설정되었는데, 주거용지 중 주택용지는 1,751,433.6m이며 그 80% 정도가 공동주택용으로서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건설되었다. 주거용지를 제외한 103,338.6m는 중심 상업지구로 설정되었다.
고덕동은 사업 총 면적 중 52% 1,580,597.3m를 점유하고 있어 고덕지구 3개동 가운데 가장 면적이 크다. 한국토지개발공사가 택지를 조성한 뒤에 주택공사가 제 1,2,8 단지에 아파트를 짓고 서울시가 고덕시영아파트를 짓는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단독주택 단지가 조성되었다.
1972년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에 포함되면서부터 농촌지역에서 도시화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 명일동은 고덕지구 택지개발사업에 포함되면서 본격적으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서울 외곽지대의 주요 주거지역이 되었다. 명일동은 이 사업의 총면적 3,040,106.1m 중에서 주거용지 454,773.4m와 상업지역 108,338.6m를 점유하고 있다.
명일동은 고적지구 중 본택지 규모가 제일 작으나 고덕동, 상일동이 27평의 이하의 중층아파트 단지로 구성된 것과 달리 30평 이상의 고층아파트 단지와 단독 주택 단지로 구성되어 있다. 또 명일동 62번지 일대에는 중심 상업용지가 조성되어 있어 고적지구 내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상일동은 이 사업으로 크게 변모되었다. 상일동은 이 사업의 총면적 중 1,004,735.4m를 점유하고 있다. 대한주택공사가 주공아파트 제 3,4,5,6,7단지를 건립하였다. 상일동 아파트단지에는 총 5,650세대 분 152동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이는 고덕지구 내에서도 주거단지 규모가 가장 크다.
이처럼 상일동은 계획적이고 이상적인 도시설계에 따라 개발되었다. 따라서 상일동 산18번지 외 86필지 591,516m 부지에 대단위 근린공원인 명일근린공원을 1988년부터 2007까지 조성하여, 공원시설 및 교양시설, 운동시설을 갖추고 지역 주민의 보건과 휴양을 돕는다. 명일근린공원 조성에는 총사업비 69억이 투자되는데 그 중 19억이 민간자본이다. 공원조성은 3단계 (1단계:1988-91년, 2단계:1992-96년, 3단계:1997-2007년) 로 구분하여 사업을 추진하기로 되어 있다.
강일동 지역은 대부분 농경지로서 주빈들도 대부분 농업종사자였다. 인근 고덕동, 상일동이 개발됨에 따라 함께 개발되기도 했으나, 아직도 도시 근교농업지역의 성격이 많이 남아 있어 인근 개발지역과 대조를 보인다. 인근 하남시 풍산동에는 제 1가나안 농군학교가 있어 농업지역으로서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또한 이 지역은 1967년 흥인동 및 서부이촌동의 철거민이 집단 이주하여 정착하고, 1968년에는 숭인동, 창신동의 화재민이 집단 이주하여 대부분 일일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저소득주민 밀집거주지역이기도 하다. 더욱이 1971년 7월 30일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개발에 한계가 있었다.
상일동 지역은 1982년 고덕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서울 외곽의 전형적인 농촌으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인근 강일동의 청송 심씨 마을과 함께 서울의 마지막 씨족마을이 있는데, 게네마을의 임씨와 동자골의 조씨 마을이다. 이들 씨족마을의 연중 대행사는 매년 9월에 지내는 치성제인데 강일동 지역에서는 음력 7월에 지낸다. 고덕동에도 함종 어씨 후손의 집성촌 남아 있다.
예전에는 농촌지역과 다름없는 빈촌에 불과하던 길동 지역은 1972년부터 개발되어 인구가 증가하고 아파트 밀집지역을 이루었으나, 그린벨트, 농경지 등이 남아 있어 지역 여건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한강은 우리 민족의 젖줄로 역할하면서 민족서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로 인한 피해 또한 적지 않았는데, 홍수로 인한 피해가 가장 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는 풍납동에서 왕십리까지 배로 다녀야할 만큼 피해가 컸다. 강동구의 성내천은 전장 12km로 유역 면적만도 66만평에 이른다. 성내천은 평상시에는 물이 적지만, 하폭이 좁고 하상이 낮아 홍수가 나면 범람하기 쉬었다. 또 일단 범람하면 주변이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피해가 상당하였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1967년 12월 4일 민간자본 유치사업을 확정할 때 성내동의 한강방수축제사업을 유치하여 4천만원을 투자했다. 또 1984년에는 성내천 하구에 유수용량 41,600m 규모에 양수기 5대를 갖춘 성내 1배수펌프장을 만들었고, 1986년에는 성내교 하류에 성내 2배수펌프장을 건설했다. 또 61억 원의 예산을 들여 780마령 동력모터 8대와 5m의 제방을 쌓아 갑문을 설치했다.
1960~70년대의 급속한 공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울의 자연환경이 많이 파괴되었다. 5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의 얼음을 사용하고 낚시와 수영도 할 수 있었던 한강이 공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도시의 흉물로 변해갔다. 이에 총 사업비 4,133억 원을 투자한 한강종합개발사업이 1982년부터 착공되어 1986년에 준공되었다. 이 사업으로 36km에 이르는 저수로가 정비되고 10km에 이르는 제방이 축조되었으며, 13개의 한강시민공원과 행주대교에서 암사동에 이르는 36km의 올림픽대로가 완공되었다. 광진교 상류는 요트 및 수상스키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각종 체육시설과 편의 시설들이 설치되어 시민들의 생활 건강에 이바지하고 있다.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