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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문학 제10집 원고> - 단편소설 1편
주먹
문 승 호
“간호사. 빨리!”
교통사고로 앰뷸런스에 실려 온 환자를 북문로1가의 서울병원 응급실 시트에 눕히며 119구급대원이 재빠른 동작을 취한다. 환자는 숨이 곧 넘어갈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에서는 거무죽죽한 피를 거품과 함께 흘리고 있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토요일 오후였다. 정규 의사들은 모두 퇴근하고 당직의사와 인턴들만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한 직원들이 긴 숨을 내쉬며 사방팔방으로 연락을 취하여 보호자를 찾았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보호자를 향하여 당직의사는,
“죄송합니다. 여기 의료장비로서는 이 환자를 치료할 수 없으니, 대전의 큰 병원으로 가보세요. 응급조치는 했습니다. 이 소견서를 갖고 충남대학교병원으로 빨리 가세요.”
환자의 아버지는 기가 막혔다. 주먹을 불끈 쥐고 금방이라도 주변을 박살 낼 듯한 기세로 병원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뭐? 여기서는 안 된다?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죄송합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따지시고 빨리 서두루세요.”
아무리 큰소릴 쳐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앰뷸런스에 실려 대전으로 출발했다. 가면서도 환자의 입에서 나오는 거무죽죽한 피는 그칠 줄을 몰랐다. 환자를 보호하며 따라가던 아버지와 가족들, 관장 등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제발 병신이라도 좋으니 살아만 있게 해주세요.”
목구멍을 넘어올 듯한 신음소리를 내며 흐느끼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하였지만, 앰뷸런스는 그에 아랑곳없이 앵앵거리며 달리기만 하였다.
이윽고 충남대학교병원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역시 토요일 오후라 당직의사와 인턴들이었다.
우측 쇄골 분쇄골절, 갈비뼈 7대 골절 등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 충격으로 땅바닥에 깔리면서 생긴 상처는 흉한 몰골로 드러나 의식 불명 상태로, 입과 코와 얼굴 등에서는 거무죽죽 죽은피만 질질 흐르고 있었다.
그 환자는 강철제.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려고 몸부림치던 그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하여 119구급차에 실려 온 것이었다.
때는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제가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던 중 사건이 발생한다.
그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밤 열 시가 넘어 우암동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 건달로 보이는 패거리 대여섯 놈들이 골목을 막고서 들어오는 철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사태가 심각함을 직감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평소 남보다 비교적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아 항상 콤플렉스에 걸려있었다. 그 보상 심리로 고등학교 들어오면서 주먹을 단련했다. 남들이 다니는 도장엔 돈이 없어 못가고 대신 집에서 통나무에 새끼를 감아 주먹을 단련했던 것이다. 한번 통나무를 치면 온 동네가 떠나갈 듯 그 소리가 요란했다. 주먹으로 기왓장을 깨고 수도(手刀)로 나무를 빠개는 등 그의 주먹 단련은 정말로 대단했다. 그렇게 남달리 주먹 단련을 했으므로 상대의 공격이 있으면 자연스레 주먹을 감아쥐면서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는 늠름하게 심장을 쥐어짜는 듯 큰소리를 질렀다.
“왼 놈들이냐. 억!……”
철제는 팔을 들어 날아오는 주먹을 미처 막아내지 못하고 상대의 단 한번 번득임에 콧잔등을 얻어맞았던 것이다. 순간적인 돌출행동이었다. 그는 동작이 둔한 편도 아닌데 워낙 상대편의 주먹이 빨리 날아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얻어맞고만 것이었다. 코피를 흘리면서도 정신을 차려 공격자세를 취하였으나, 벌써 놈들이 철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순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음 동작을 예민하게 돌리면서 한 대 치고 한 대 맞기를 거듭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철제는 이미 피를 본 상태이고 상대는 숫자적으로도 상대가 되질 않았다. 주먹 하나만 믿고 상대를 너무 가볍게 여긴 결과가 뻔했다. 그만 그는 너무 얻어맞아 고꾸라지는 바람에,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튀어!” 하는 구령 소리에 맞춰 그 패거리들은 골목을 쏜살같이 달아났다.
때는 봄. 산과 들의 풀잎도 싹이 트고 산들도 엷게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봄바람이 낮에는 제법 따뜻하였지만 밤이 되니까 점점 싸늘히 식어갔다. 찬바람이 쓰러져 누워있는 철제의 머리를 서늘하게 불며 지나간다. 그 바람이 철제를 깨워 집으로 향하게 했다. 그는 집에서 흘린 피를 닦고 깨끗이 씻은 후 자리에 앉아 소리 없이 통곡을 하였다.
‘아…, 내가 이리도 약했던가! 날아오는 주먹 하나 막지 못하고 얻어맞고 말다니……. 이 병신아, 병신아. 차라리 죽어라 이 병신아.’
속으로 울부짖으며 가슴을 쥐어뜯어 봤지만, 그래도 울분이 풀리지 않았다. 한참을 울며 통곡을 하던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 도장을 다니는 거야. 주먹만 단련할게 아니라 체계적으로 무도를 배워 진짜 주먹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렇게 결심한 철제는 그 다음날 청도태권도장에 입문하여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오후에 한 시간씩 기초부터 수련을 하고, 야간에는 집에서 낮에 배운 기술을 복습하는 등 주먹과 수도를 단련하였던 것이다. 주먹 단련은 통나무에 새끼를 감아 피가 범벅이 되도록 두들겨 패는 것이다. 그리고 샌드백을 걸어 주먹 단련을 하며 발차기도 겸하였다. 수도는 모래자갈을 단지에 담아 손바닥과 수도를 단련한다. 나중엔 어지간히 주먹이 단련됐다 싶어, 쇳가루를 뜨겁게 달구어 단지에 담아 손바닥과 수도가 얼얼하도록 단련하였던 것이다. 어찌나 주먹이 돌처럼 단단한지 시원찮은 샌드백은 단 한대의 주먹으로 찢어지고 만다. 앞으로 찢어질 것에 대비하여 샌드백도 아주 단단한 가죽으로 된 것을 마련하여 주먹 단련을 계속하였다.
발차기는 무기로서의 위력은 강한데 동작이 느리다는 단점이 있어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강이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샌드백을 향하여 발차기 동작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새벽녘에 일어나 모래주머니를 차고 우암산을 뛰어오른다. 산 중턱에 오르면 허리도 뒤틀려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이겨내고 하루도 거르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뛰어와서 모래주머니를 풀면 마치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돌려차기를 하면 몸이 확 돌아 순식간에 상대의 머리통을 부수고 내려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 태권도장에 다니면서 주먹을 단련한 지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할 시기가 되었던 것이다.
철제가 학교에 다니면서 사귄 귀여운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녀도 벌써 아가씨티를 내며 제법 뽐내고 있었다.
생글생글한 눈웃음을 앞세운 모습은 뭐랄까, 마치 눈부신 빛 덩어리가 가슴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듯한 모습의 아리따운 여인, 고덕순 이었다.
졸업을 며칠 앞둔 2월 어느 토요일 오후 둘이는 상당산성을 찾았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둘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겨울의 짧은 해는 산마루 고개에 걸려 마지막 아름다운 광채를 곱게 물들이고 있는데, 청청한 소나무는 깊은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둘에게 어서 내려가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빠. 나 좋아해?” 그녀는 방울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얼마나?”
“이만큼.”
손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면서 그녀를 가슴에 품었다. 그녀의 가슴이 풍만하여 철제의 가슴을 자극했다. 뭉클한 젖가슴이 알맞게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부드러웠다.
“나 지금처럼 황홀한 기분에 빠진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이대로 영원히 있어 줬으면, 아……이게 꿈이 아니길 빕니다.”
그러면서 그녀를 더욱 힘주어 껴안아 주었다. 그 다음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의 입술을 살며시 대보았다.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향기가 좋았다. 어느 소고기가 이보다 더 맛있을 수가 있을까. 둘이는 그것을 간파했는지 입속에 서로의 혀를 밀어 넣었다. 암소의 부챗살이 혀에 닿아 살살 녹는 기분이었다. 그걸 으깨져라 더욱 빨고 돌렸다. 한 10여분쯤 그랬을까? 부챗살이 다 녹았는지 둘은 서로 떨어져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저 남은 부챗살을 먹어치우기나 하듯이 또 열렬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다. 산 위에 내리는 눈발은 우리들의 숨소리조차 차곡차곡 삼켜버리고 있는 듯했다. 하늘 높이 바람에 흩어진 눈가루가 민들레 꽃씨처럼 부스스 날고 있었다. 날리는 눈에 반사되어 배꽃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가슴이 떨릴 정도로 황홀했다.
“자, 이제 슬슬 내려갈까?”
“그래요. 오빠.”
“난 순이가 오늘따라 이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어. 이건 예술이야. 순이.”
“에이, 오빠는. 난 오히려 오빠가 더 멋있어. 비록 작은 체구지만 무시무시한 주먹과 하늘을 찌를 듯한 용기. 진짜 나 너무너무 좋아. 오빠.”
“그래. 우리 이 행복한 시간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자. 우리 영원을 같이 하는 거야. 알았지?”
하며, 어깨를 꼭 감싸 쥐어 안았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사랑은 인생의 소금이다. 둘은 손을 맞잡고 부스스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산을 서둘렀다.
추억이란 시냇물 속의 돌멩이와 같다 했던가. 예뻐서 주워들면 평범한 돌멩이일 뿐이듯,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는 추억이 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왜곡된 허상일지라도 그건 눈물겹고 따스하다.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는 눈을 어느 시인은 ‘서글픈 옛 자취 / 잃어진 추억의 조각 / 먼 곳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로 표현했다지 않는가!
그 이듬해 봄이 찾아왔다. 투덜투덜 물러가는 동장군, 등 뒤로 두런두런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얇게 언 실개천 밑으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동면에 취한 개구리 울음소리, 마른가지 사이로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소리, 쑥 냉이 봄꽃들 새싹 돋는 소리, 따사로운 봄 햇살 부서지는 소리, 겨우내 텅 빈 놀이터에 아이들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이 모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들린다.
따뜻한 봄날 햇볕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으며,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참으로 보내기 아쉬운 봄날의 정경이었다.
철제는 졸업 후 강일체육관에서 격투기로 전환한 후 주먹과 발차기를 더욱 연마하였다.
단련된 주먹과 발을 이용하여 각종 무술대회에 나가 무수히 얻어터지면서도 4전 3승 1무의 전적을 기록하는 쾌거를 이뤘다.
철제는 오랜만에 친구인 정기만의 손에 이끌려 오정목 단란 주점에 갔다가 그 주점 패거리들 손에 이끌려가는 여종업원을 보았다. 그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그들과 피할 수 없는 접전을 벌인다. 그가 여자의 손목을 끌고 가는 패거리 두목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점잖게 말을 걸었다.
“어이, 그 손 좀 놓지 그래.”
“자네는 좀 빠지게. 젖비린내 나는 놈이.”
“이봐. 말이 좀 지나치잖아!” 철제가 언성을 점점 높였다.
“이거 안 되겠구먼.” 하며 주먹을 철제의 왼쪽 얼굴을 향해 날렸다. 순간 철제는 날아오는 주먹을 허리를 이용하여 감아 돌렸다. 나머지 대여섯 명의 패거리들도 단 한방의 주먹으로 일순간에 제압해 버렸다.
젖비린내 난다고 깔보며 대들었다가 졸지에 매를 맞고 혼쭐이 나 도망쳤던 주점 패거리들은 설욕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십여 명의 패거리들을 데리고 몰려 왔다.
“얘들아. 저 놈을 밖으로 끌어 내!” 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수하들을 향해 큰소릴 쳤다.
“예!” 수하들은 하나같이 복창을 하며 행동 개시를 하려 했다.
“야야, 손대지 마라. 내가 나간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 주점의 패거리들은 철제의 현란한 발차기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철제의 통쾌한 승리는 시내 전역에 퍼져 화젯거리가 됐다.
오정목 단란 주점의 패거리 왕초가 철제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청주시내의 어깨들은 일제히 그 주점에 모였다. 그 중 청주시내 어깨들의 조직인 아디다스파의 두목이 수하들에게 철제를 찾아 3일 안으로 데려오라고 명령을 했다.
소문은 구름처럼 떠돈다고 했던가, 벌써 그 소문을 듣고 철제는 비장한 결심을 한다.
‘이런 조직들과 싸우면 그 끝이 좋질 않아. 차라리 일이 더 확대되기 전에 무술을 더 연마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군대를 갔다 와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철제는, 패거리들이 그를 찾는 동안 그는 그들의 작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육군 특전사를 지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초겨울 특전사를 지원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던 것이다. 4주간의 신병 훈련을 받고 광주특전사에 배치되었다. 평소 무술로 단련된 몸이었기에 고된 훈련도 별 저항 없이 해 냈던 것이다.
철제는 광주특전사에서 배치되어 졸병 생활을 하면서 고참에게 얻어맞지 않으려고 국가에 충성은 물론 고참에 대한 충성, 상관에 대한 충성 등 군 생활을 요령껏 처리했다. 졸병 생활이 고달플 때 가끔 짬을 내어 사랑하는 덕순이를 하늘의 구름 위에 떠올리며 그려보고 눈물짓곤 하였다.
철제는 그날 밤 괴상한 꿈을 꾸었는데, 불타오르는 태양의 덩어리가 구름을 뚫고 공중으로부터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도중에 잠이 깨었던 것이다.
이튿날 어젯밤의 꿈을 되살리며 철제가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치고, 한가롭고 긴 봄날도 다만 괴롭고 길게만 생각되어 몸과 마음을 둘 곳을 몰라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철제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뜻밖에도 덕순이 로부터 온 것이었다.
편지는 풀칠로 야무지게 봉해져 있었는데, 만져보니 편지지가 여러 장 들어 있었다. 사연이 꽤 길어 보였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창황히 뜯어보았다.
『사랑하는 오빠, 그 동안 군대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셨는지요.
저는 오빠가 염려해 주시는 덕택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로 시작되는 인사말에 이어 사연이 구구절절 애정이 맺혀 있는 글귀가 철제 가슴을 들뜨게 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철제는 아연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다 다시 한번 편지를 뚫어져라 읽고 또 읽어 내려갔다.
『…… 오빠. 나 이해해 주세요. 우리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이번 어느 총각에게 시집가기로 했으니 깊은 이해 있으시길 바랍니다. 오빠가 제대하시면 이 몸은 이미 오빠 것이 아닌 남의 사람이 되어있을 거예요. 부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사세요…….』
편지를 눈으로부터 떼자마자 싸늘한 밤기운이 섬뜩하게 달려들었고, 그 순간 하늘에서 어둠과 별이 쏟아져 내리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은 옷소매를 적시고 손은 떨렸으며, 얼굴도 상아의 조각처럼 핏기를 잃어갔다. 곁에 있는 사람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철제는 덕순이의 편지에 마음을 빼앗겨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다.
“안돼, 덕순이. 이건 분명 누군가의 모함이야. 한번 찾아가서 그 진위를 알아봐야겠어.” 철제는 정신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며칠을 두고 고민에 휩싸였다.
철제는 군 입대기간이 1년이 채 안되어 휴가를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적(私的)인 일로 특별 휴가를 신청할 수도 없어 벙어리 냉가슴 앓 듯하였다. 밖에 나가 만나 볼 수는 없으므로 편지로 사연을 적어 몇 번 띄웠다. 그러나 그녀로부터의 속 시원한 답장은 없었다. 철제는 단단히 결심을 한 듯 중대장실을 감연히 찾았다.
“충성! 일병 강철제, 중대장님께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뭔가. 강 일병.”
“특별휴가를 신청하러 왔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뭐? 특별휴가? 이놈 봐라. 지금은 연말이라 안돼.”
“아닙니다, 중대장님. 이번 휴가는 제겐 아주 특별합니다.”
“뭐가 특별해. 애인이라도 신발 거꾸로 신었어?”
“네. 바로 그겁니다. 중대장님께선 귀신같이 알아 맞혔습니다.”
“이놈 봐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말해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렸던 것이 아주 유효했던 것이다. 그동안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드려, 철제는 늦여름의 독사만큼이나 날카로운 그 모진 성질을 가라앉히고 그해 겨울 1주일의 특별 휴가를 얻어내었다.
그는 광주에서 곧바로 그녀의 집으로 직행했다.
들녘엔 세찬 바람과 함께 모진 눈발이 흩날렸다. 철제가 물고 있는 담뱃불의 끝이 벌겋게 살아나다 차가운 눈을 맞고 이내 꺼져 버렸다.
덕순이 일로 당황해하던 철제는 서서히 냉정을 되찾고 그녀의 집안으로 감연히 들이닥쳤다. 그러나 덕순이는 보이지 않고 그녀의 어머니만이 쓸쓸히 철제를 맞아주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느 정도 진정된 철제의 마음을 읽었는지 비로소 그녀의 어머니는 진지하게 한마디를 했다.
“자네도 이해하게. 워낙 쟤 아범이 고집이 세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자네가 이해해 줘. 응?”
상호는 말을 진지하게 받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덕순 어머니의 말씀을, 눈을 뜨고 귀를 세워서 끝까지 듣고 있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나요? 이젠 영원히 끝인 가요? 네? 어머님!”
“……” 그녀의 어머니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동안 작별의 인사를 고하고 읍내로 돌아가는 길목의 휘황한 가로등에 이르자 상호는 우뚝 멈추어 서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그 동안 덕순이와 산비둘기처럼 다정하게 함께 찍은 추억의 사진이었다. 이내 철제는 열방망이로 가슴을 지지면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더니 잿빛 하늘 눈 속으로 훌훌 뿌렸다. 가느다란 눈물을 흘리며 찢어발긴 사진 조각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무엇을 결심했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래. 모든 걸 깨끗이 잊자.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원점에서 다시 뛰는 거야. 정신 차려! 각오해, 이놈아!”
이렇게 철제는 자신에게 모질게 꾸짖으며 허공을 향해 굳은 맹세를 했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철제는 넋을 잃고 잿빛에 가리어진 산천을 바라볼 뿐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들 무렵에는 철제의 마음을 달래 주기나 하듯 잿빛 하늘에서 눈을 계속 사뿐사뿐 뿌려주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귀대하여 나머지 2년 동안 합기도와 특공무술 등 감히 상상도 못할 온몸을 불사르는 훈련을 이겨냈다.
특히 합기도는 그것이 지닌 특수성이 다른 무술에 비해 상당히 많다. 어떤 무술이든지 그 기법은 모두가 특이하고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 합기도의 기법은 크게 나누어 보면 270여 종류로, 방어와 공격하는 수(手)는 3,864수에 달하고 이 막대한 수를 그 반대기법과 변화기법까지 나누어 합치면 무려 일만여 수에 달한다. 상대방이나 적을 공격할 때도 체내의 힘을 단전호흡법으로 집중시켜 전광석화와 같이 목표를 때리거나 차며 찌르기 때문에 제대로 공격을 가했을 경우 적이나 상대방은 생명의 위험을 초래한다.
합기도는 상대방의 힘과 상대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 제압하는 특이성도 있고, 특히 방어의 경우에 있어서 상대방이나 적의 힘을 둥글게 끌어 동시에 기법의 수를 적용시키면서 자신의 모든 힘을 자기의 체내에 집중시켜 상대방이나 적의 기를 자신의 기와 합하기 때문에 방어의 기법은 다른 무술에 비하여 더욱 특출하다.
상대방이나 적이 주먹, 발, 혹은 무기를 이용하여 공격해 들어올 때 상대방의 정면에서 그대로 받아 방어하려면 같은 힘을 갖고서는 감당해 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런 경우 상대방이나 적의 힘을 둥글게 원형으로 받으면 적은 힘으로도 능히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 이런 이치는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정면에서 막으려면 힘이 들지만 물줄기를 옆으로 돌려 막으면 쉬운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합기도의 기법은 방어에 있어서만 우수한 것이 아니고 공격에 있어서도 상당히 독창적이며 우수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발차기는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앉아돌려차기, 점프이단옆차기, 공중회전돌려차기, 양발 벌려 높이 차기, 어깨잡고 두발로 차 뒤로 젖혀 던지기, 상대방의 발 뒤를 걸고 돌려 가슴을 걸어 뒤로 던지기, 뛰어 들어가며 허리감기, 뒷발로 뛰어 들어가며 상대방의 가슴을 차기, 뛰면서 목을 감아 돌려 던지기, 앉아돌려차기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 이 발차기만 연마해도 웬만한 상대방은 단방에 제압할 수 있다.
이렇게 피나는 훈련과 기술을 연마하여 드디어 흰눈이 펄펄 내리던 날 전역을 했다.
전역을 하던 날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 환영의 파티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보여야 할 애인 고덕순 여인이 보이지 않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그녀는 그녀 부모님의 반대로 이미 딴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우린 영원을 같이 하자고 맹세했건만 그녀가 돌아설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사람은 성실하고 좋은데, 장래성이 보이질 않아. 더구나 주먹패거리들의 말로는 더욱 안 좋아. 그 사람이 군대 가 있을 때, 내가 평소 보아 놓은 마땅한 사람이 있으니 얼른 시집 가거라.”
이렇게 그녀 아버지의 설득으로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던 것이다.
철제는 환영 파티장을 빠져 나와 초연히 바라보다 멎은 시선 위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 정경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내 곁을 떠나야만 했니? 그렇게 모질게 떠나야만 했니? 그렇지만 보고 싶구나. 미워도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철제는 속으로 울분을 삭였다. 어느덧 그의 눈에서는 보이지 않는 눈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구름이 아름다운 건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지금 사라진 그녀가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일까.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일의 성공 여부는 하늘에 달려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와 헤어지게 되는 것도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고, 흘러간 구름은 되찾을 수 없다. 그렇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가버린 그녀는 되찾을 수도 없고,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지치게 하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라.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참을성을 길러주어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맹자의 말씀을 새겨듣고, 여자에 대한 미련을 벗어던지고 마음의 새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새 출발을 하는 뜻에서 그는 다시 몸 담금질을 계속하였다. 모래주머니를 정강이에 매달고 우암산을 뛰어갔다 온 후 샌드백과 새끼 감은 통나무를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샌드백과 통나무에 떠나버린 그녀의 얼굴을 그려가며…….
철제는 다시 강일체육관에 입관하여 킥복싱을 연마하였다. 킥복싱에 대한 정만수 관장의 정신교육도 간간이 이어졌다.
“약자가 오히려 강자를 쓰러뜨린다. 이것은 천시(天時)이겠느냐 아니면 지리(地利)에 있겠느냐. 사람의 힘, 사상, 경영, 작전, 인망, 이 모든 것이 사람의 기에 의한 힘의 바탕이 다대하다…….”
이렇게 힘보다는 기를 중시하는 정신교육을 받다 철제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무릎을 치며, “관장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뭔가 갑자기 운무를 헤치고 이 지구 끝까지 일만대관(一望大觀)한 듯한 생각이 듭니다.” 하고 그 눈동자는 장래의 희망과 이상에 벌써 불타는 듯했다.
킥복서는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 고독을 사랑할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운동이 킥복싱인데, 그는 떠나간 여인으로 하여금 늘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킥복싱만큼 고독을 떨칠 수 있는 운동도 별로 없다.
킥복싱은 타이식 복싱(무에타이)에 일본 가라데(공수空手)를 가미한 격투 경기로써, 위험한 기술이 많이 허용되는 타이식 복싱보다 위험도는 덜하지만 다리기술, 권법, 유도, 박치기, 가라데, 팔꿈치 치기 등의 공격법으로 싸우는 과격한 경기이며 오락적인 면이 강하다. 또한 1964년 일본의 흥행사 노구치 오사무(야구수野口修)가 발안하여 1966년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것으로써, 다리기술을 많이 사용하여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경기 방법은 복싱과 같이 링에서 하며 1라운드 3분으로 3~5라운드를 겨루고, 라운드 사이에 2분간 휴식이 있다. 반칙은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일, 물거나 목을 조르는 일, 하복부를 공격하는 것 등이다. 체급은 복싱과 같은 중량제로, 7체급이 있으며, 심판은 주심 ․ 부심 2명, 채점은 5점법(五點法)에 의한 감점법이 있다.
킥복싱의 발차기는 군에서 배운 합기도의 발차기와 유사하여 이를 실전에 응용하는데 매우 유효적절했다.
철제는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여 마침내 국내 정상급에 올라 있었다. 신문에 공고 난 것을 보니 서울에서 대한격투기협회 주관으로 아시안 게임 출전 선수를 선발한다고 하였다. 경기 명칭은 「제2회 전국 아마추어 격투기 국가대표 선발전 및 아시안게임 출전선수 선발전」이었다. 시합은 3달 후인 10월에 있다고 하였다. 어느 날 강일체육관 관장이 철제를 불렀다.
“이봐, 철제. 이번 시합에 한번 나가 볼 거야?”
“글쎄요. 관장님이 허락하면 한번 해보지요 뭐.”
“전국적으로 워낙 쟁쟁한 선수가 많아서 말이야, 그래도 이번에 경험삼아 한번 출전해봐.”
“좋습니다. 한번 멋지게 해보겠습니다. 관장님. 감사합니다.”
“감사는 아직 일러. 지금부터 석 달 남았으니 한번 이를 악물고 해보라고.”
“잘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관장님.”
철제는 이를 악물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 주로 발차기로를 집중적으로 수련했는데, 앉아돌려차기와 공중회전돌려차기가 주특기라 그것을 중점적으로 수련하였다. 특히 앉아돌려차기는 비호같이 납작 엎드려 바람처럼 돌려 상대방을 순식간에 넘어뜨린다. 주먹과 수도 단련은 샌드백은 물론 쇳가루를 뜨겁게 달구어 절구통에 담아 피가 나도록 단련하였다.
드디어 운명의 시합 날이 다가왔다. 시합 장소는 대한격투기협회 체육관이었다. 철제는 라이트급으로서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광주에서 올라온 선수와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철제. 상대는 말이야. 키가 커서 자네에게 유리할지 불리할지는 몰라도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면 오히려 유리하지.”
“저도 그걸 염두에 두고 어떻게 역이용할까 생각 중입니다.”
“특히 상대는 발차기가 주특기니까, 발을 높이 들어 쳐 올리는 순간 왼손으로 감아 돌리면서 오른손바닥을 이용하여 턱을 강타하라고. 그러면 자네의 철사장 같은 손바닥에 의해 단방에 떨어질 거야. 알겠지?”
“그렇죠. 저도 바로 그걸 생각했습니다.” 철제는 관장과 같이 구체적인 작전을 짜가면서 깊이 연구를 하였다.
드디어 운명의 공은 울렸다. 두 선수는 한참을 탐색전으로 보냈다. 이리저리 잽을 날려보고 발길질도 날려 보았다. 결승전답게 서로 신중을 기하며 접근하다가 철제가 먼저 원투 스트레이트에 이어 발차기를 날려 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재빨리 피하며 서로 난타전을 벌렸다. 서로 치고받기를 수차례 교환하다가 드디어 운명의 4회전 공이 울렸다. 서로 지친 상태에서 상대가 오른쪽 앞발을 높이 들어 머리를 찍으려는 순간, 철제는 날아오는 밥을 그냥 놓치지 않고 잽싸게 왼손으로 감아 돌린 후 휘청 이는 상대의 왼쪽 턱을 오른손바닥으로 무자비하게 후려 쳤다.
『퍽 - !』
상대는 고목나무 쓰러지듯 단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주심의 카운터가 열을 넘길 때까지도 일어서질 못하였으며, 그로인해 장내가 떠나갈 듯 함성이 대단했다.
철제는 명실상부하게 국내 최강자임이 증명되었고, 내년에 개최되는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게 되는 영광까지 안았다. 관장이 번쩍 안아 장내 한바퀴를 빙들 빙글 돌았다.
“수고했어! 철제. 아까 우리 작전 짠 게 정통으로 들어맞았군. 역시 자네 머리는 좋아.”
“이게 다 관장님 덕분입니다.”
“이제 우리 체육관도 자네 덕분에 명성을 날리게 됐어. 정말 대단해. 다시 한번 축하한다. 철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관장님.”
그 기쁜 가운데서도 철제는 왠지 가슴 한 편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여인 덕순이가 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잊어버리기로 작정을 하고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라는 마약 아닌 마약 때문인 것이다. 사랑에는 묘약이 없다고 했다.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면 그녀를 놓아 주십시오. 그래도 그 녀가 당신에게 돌아온다면 그 녀는 영원히 당신의 사람이 될 것이고, 만약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녀는 처음부터 당신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누군가 사랑을 논한 바 있다. 기쁨보단 슬픔을 나누고 만남보단 기다림을 즐거워하고 나보단 당신을 먼저 생각하는 게 사랑이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그리고 기억만 남는다. 이미 철제의 곁을 떠난 순이었기에 미련을 버리고 체념해야만 했다. 그리고 영원히 기억에서 지워버리겠노라고 맹세까지 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 걸 아무리 강한 강철제인들 어찌하랴!
관장님이 철제의 여자에 대하여 고민하는 눈빛을 보고 따끔하게 한마디 충고를 해 주었다.
“이 사람아. 여자에 대한 미련은 버려. 빨리 잊을수록 좋아. 여자 때문에 선수생활 그만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이 세상에 쌓이고 쌓인 게 여자야. 내가 쓸만한 여자 하나 소개시켜 줄게. 지금은 잊어버려. 우선 아시안게임이 중요하잖아? 응? 철제. 자 힘내라고.”
그 말 한마디에 그만 철제는 가슴이 뜨끔했다. 한번 한다면 하고 마는 성미의 사나이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철제는 분통 터진다는 듯 주먹으로 옆에 있던 통나무를 내리쳤다. 사람 다리 굵기의 통나무는 한 주먹에 우지직 부러지고 말았다.
‘그래, 결심했어. 잊어버리는 거야. 알았지? 이놈아!’ 하고 중얼거리며 하늘을 우러러 두 눈을 부릅떴다. 한번 한다면 하고야 마는 성미가 여자를 잊는데도 적중했던 것이다.
철제는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아시안게임 정상을 향해 몸매 담금질이 계속 되었다. 격투기는 파괴력도 중요하지만, 파괴력 못지않게 순발력도 또한 중요하므로 순발력을 키우는 발동작과 손동작에 더욱 신경을 써서 훈련의 강도를 더했다.
특히 발차기의 순발력을 키위기 위해 정강이에 모래주머니를 단단히 조여 매고 발차기를 하였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양다리를 이용하여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점프이단옆차기 등을 30분 정도 계속하고 모래주머니를 풀면 마치 날아가는 새처럼 몸이 무척 가볍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앞차고 옆차 돌려차기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발차기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도 없는 그만의 특기라면 특기이다.
겨울을 넘기며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여 몸매가 어느 정도 다져진 철제는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시합 날이 다가와 방콕으로 출전하기 위해 관장 등 시합에 관련된 사람들과 함께 출발했다.
시합은 토너먼트로 치러지는 경기방식으로 총 16개국이 참가했다. 철제는 컨디션이 아주 좋아 승승장구하며 8강, 4강이 이어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 상대는 중국 선수였다. 키는 그리 크진 않았으나, 다부진 몸매에 근육질의 사나이였다. 관장은 상대 선수의 세세한 정보를 입수하여 철제와 작전을 짜고 있었다.
“상대는 말이야, 자네보단 키는 좀 크고 균형도 잡혀 있어.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한방에 나가겠어. 그렇지만 자네는 비교적 몸이 빠르니까 그 점을 이용하면 오히려 이길 수 있는 승산이 다분해.”
“예. 알고 있습니다.”
철제는 다부진 각오로 링에 올랐다.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 두 선수는 무공 대련 자세를 취하며 접근전을 시도했다. 상대는 장쯔이이며 나이는 26세쯤 되어 보이는, 머리카락을 징그럽게 녹색으로 물들인 사나이였다. 상대의 기를 빼앗기 위한 작전인 것 같았다.
철제는 순백색의 팬티를 몸에 꼭 맞게 입고 있어 날씬한 몸매가 유난히 돋보였다. 그는 왼손주먹을 45도 밑으로 뻗고 오른손은 목 앞으로 경계를 단단히 하며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자못 당차보였다.
“핫!”
철제는 앙칼진 기합과 함께 공격을 가했다. 발끝에서 꽤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그러나 상대는 방위를 옮기지 않은 채 손목만 가볍게 움직여 철제의 공격을 차단시켰다. 상대의 동작에는 여유가 있을뿐더러 팔과 발의 움직임은 절도와 무게가 있었다.
“하아…….”
몇 차례 연속적으로 공격을 가했으나 치명타는 날리지 못하고 그는 가뿐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그러나 호흡을 가다듬고 약이 오른 듯 더욱 빠르고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서로 피를 튀길 정도로 몇 차례 공격을 주고받았다.
상대는 철제의 발차기공격을 피해 손목을 슬쩍 꺾었다. 그러자 철제의 상체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 버리고 방어자세가 뒤틀리며, 상대의 수도는 어느새 철제의 목에 닿아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철제는 화가 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목을 옆으로 튼 후 재차 상대를 공격했다. 윙! 하는 파공성과 함께 철제가 앞발을 번쩍 들어올리며 상대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상대의 신형이 기척도 없이 이동했다. 발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2미터 가량 이동하며 철제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어 버렸다. 철제는 허탕을 치자 중심이 기울어졌다. 그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수도로 느릿하면서도 확실하게 뻗어왔다. 그의 수도는 철제의 갈빗대 아래를 직선으로 파고 들어갔다.
“앗!”
철제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졸지에 공격을 당한 그는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오만상을 찌푸리고는 링 바닥에 보기 좋게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통증보다는 상대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것이 더 분한 듯 얼굴이 온통 빨갛게 상기되어 정신을 차리고 재차 공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급소를 맞아서인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경기를 마치고 말았다.
비록 지금까지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으나, 결과는 철제의 판정패로 끝났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기를 죽기보다도 싫어하는 그였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그만 아시아 영웅의 꿈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남에게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잘했어, 철제. 최선을 다하고도 진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그런 거니 너무 분해하지 마라. 자네는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이다음을 기약하자구나. 자, 울지 마 철제!”
아무리 관장이 달래도 철제의 분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귀국하여 평온을 되찾았지만 분하고 원통한 마음은 그의 뇌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몇 달이 지나 샌드백을 두드리며 수련을 하고 있건만, 철제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심호흡을 할뿐이었다. 이래저래 그는 더 이상 수련을 할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자유스런 기분을 만끽할 겸 모처럼 모든 걸 잊고 술이나 퍼 마시려고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한참을 달리다 차들이 줄지어 서 있기에 철제도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차들이 멈춰서 있는 사이를 철제는 그대로 타고 막 나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검은 승용차가 미처 철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막 치고 나가는 바람에 그는 차 밑에 깔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그로 인하여 철제는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철제는 뇌를 다친 것 같은데 확인할 수가 없었다. C․ T 촬영을 하여 뇌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여야 하는데 현재 환자의 상태가 얼굴이며 몸뚱이도 모두 퉁퉁 부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의사의 눈으로 볼 때 이 정도의 상처라면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의사는 임종만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철제는 의식이 없는 채로 가끔 「윽, 윽!」 인상을 쓰며 사지를 쭉쭉 뻗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담당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대체 이 환자는 보통 평범한 인간이 아니군요. 운동을 어떻게 얼마나 했기에 이렇게 단단할 수가 있지요? 다른 사람 같으면 이 정도 상처라면 도저히 살지 못합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보호자를 향하여 연신 감탄사를 발하였다.
어쨌든 사태를 바로 수습하여 C․ T 촬영을 끝내고 뇌에 이상 없음을 확인한 후, 뱃속에서 떠도는 죽은피(瘀血)를 옆구리에 메스(Mes)로 구멍을 내어 모두 빼내고 수술하여 간호를 극진히 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질 않다가, 드디어 5일째 되던 날 환자의 눈이 희미하게 떠지면서 입가에선 가느다란 신음 소리 같은 것이 흘러 나왔다.
「음…덕순이, 덕순이……」 희미한 목소리는 곁에 있던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형제들은 잘은 몰랐어도 관장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봐, 철제. 정신 차려! 날세. 나야. 날 알아보겠나?”
관장의 호통 치는 소리에 정신을 좀 차렸는지 눈을 살며시 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렇게 떠나가 버린 덕순이를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맹세를 해놓고서 의식이 돌아오자 그녀를 찾는 것으로 보아 한번 각인된 인상은 좀처럼 지울 수가 없나 보다. 아니면 그녀의 혼이 죽어가는 철제를 살렸는지 모르겠다.
병실에서 철제는 망연히 들 가에 펼쳐진 저녁 안개를 둘러보았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한 줄기 길에 끝없는 방황과 탄식만이 한숨 되어 흐를 뿐이었다.
어쨌든 철제는 두 달 간의 치료를 마치고 퇴원했다. 그리고 두어 달 정도 집에서 휴양을 한 후, 어느 정도 정신과 육체가 수습되었다 싶으니까 또다시 주먹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아시아의 정상을 향한 쌍심지가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야망과 사랑을 얻는 일, 동시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지. 하지만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이번 실패를 거울삼아 단점을 보완해서 또다시 담금질 하자. 후후후!’
속으로 삭이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기울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길목이었다. 가로수의 꽃잎은 그렇게 교태를 보이면서, 아양을 떨고 애교를 부리면서, 난분분… 난분분 눈웃음을 치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봄날을 시샘하여 때 아닌 춘설이 바람에 흩날리듯 하였다.
그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로드웍을 하면서 언덕길을 오르는 도로 위에는 떨어진 꽃잎들이 죽어서 어지럽게 하얗게 쌓여 있었다. 저렇게도 아름다운 꽃잎이 저렇게도 야속하게 떨어질 수 있다니, 저렇게도 아름다운 봄날이 저렇게도 덧없이 가버릴 수 있다니, 철제는 언덕길을 뛰어오르면서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운다.’ 는 유행가의 가사를 떠올리며 속으로 흥얼거렸다.
체육관으로 돌아온 철제는 아시아 정상을 향하여 샌드백을 다시 한번 힘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