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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대에 빛났던 10권의 시집
● 高銀 - 「高銀 全集1」(청하 刊․1988)
중노릇을 하던 20대의 高銀이 허무와 맞서 싸우던 시절에 발표했던 3권(「彼岸感性」,「해변의 운문집」,「제주歌集」)의 시집을 한데 묶은 책이다. 1952년 자신을 삭발 행자로 만든 방랑승려 慧超(혜초)가 환속하자, 曉峰(효봉)스님의 상좌로 들어가 10여년 동안 禪(선)과 遍歷(편력)으로 세월을 낚던 시절의 이야기가 시집 곳곳에 녹아있다.
그 시절, 高銀은 스스로 뱀이 되었다. 戰後 허무주의와 폐허의 절망에 맞서 똬리를 틀고 彼岸(피안)의 혀를 길게 내밀었다. 미치지 않고선 못 배길 것 같은 심사였다. 아니, 그는 분명 미쳐 있었다. 목포 유달산 암굴의 거지대장 수제자가 되어 거지 의발을 전수받았고, 「한동안 세상의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 보여서 혼자 1시간 2시간도 웃어대기도」 했다. 「태극기도, 사람의 얼굴도 우스꽝스러웠고」, 한 번은 未堂 徐廷柱(서정주) 선생의 서울 공덕동 집을 찾아가 30분 가량 웃어댔고 결국 「高銀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평론가 김현은 高銀의 초기 시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기묘한 손길로 빚어놓았다』고 평했다. 「순진한 듯하면서 잔인하고, 비속한 듯하면서 날카로운 말투를 지녔다」는 것이다.
<…눈먼 눈으로/나는 입 없이 무수하게 말하였다./나는 무수하게 空虛와 慾望을 말하였다./가을이여 나더러 더 무슨 말을 하라고/나의 눈에 달밤을 퍼붓는가./나는 말하였다./나는 말하였다./오 나는 거짓, 大地만이 藝術家였다.>(「가을노래」중에서)
<…눈에 밤이 새이네, 내 나아오는 病도 보이면서/비로소 달빛 아래 밤 바다가 울어나 보이네./물 나는 썰물바다 기다렸다가/저승길까지 드러나는/내 생각 하나로 눈물 어리네/…>(「눈물」 중에서)
<絶句 하나를 위하여 몇 해를 보냈습니다./저 臨終의 바다 水平線/저 近親의 마을/저 비 온 뒤의 밤 별똥이/아 너무나 방대한 領土로부터 이루어집니다.…>(「죽은 叔父에게」 중에서)
그러나 그렇게 웃다가도 갑자기 슬픔이 북받쳐 오래오래 울기를 작정하더니 결국 1962년 한국일보에다 환속을 선언했다. 중노릇을 그만 둔 것이다. 그 후 투신자살을 하기 위해 찾아간 제주도에 눌러 앉아 제주 화북동에 도서관을 세우고 관장 노릇을 했다. 또 금강고등공민학교를 지어 교장과 국어교사 생활을 했다. 「高銀 全集1」에 실린 3권의 시집은 高銀 선생이 1958년 등단한 뒤 1967년까지 발표한 3권의 시집을 묶은 것이다. 절망한 삶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 미쳐갔던 시절의 「낭만歌集」이다.
● 申庚林 - 「새재」(창작과 비평 刊․1979)
<정미소 앞, 바구니 속에서/목만 내놓은 장닭이 울고/자전거를 받쳐놓은 우체부가/재 넘어가는 오학년짜리들을 불러세워/편지를 나누어주고 있는 늦오후//햇볕에 까맣게 탄 늙은 옛친구 둘이 서울 색시가 있는 집에서 내게 술대접을 한다>(「어느 장날」 중에서)
<바람은 진종일 읍내를 돈다/밥집을 기웃대고 소줏집을 들락인다/싸전 윷놀이판을 구경하고 섰다가/골목을 빠져 언덕 토담집들을 뒤진다>(「바람」 중에서)
충북 충주 태생인 申庚林(신경림·72) 선생은 영문학도이지만 민중의 설움과 고난, 그 역사성에 평생 천착했다. 도회적 삶이 아니라 시골 장터, 부둣가 선술집의 축축하고 투박한 토속적 정감을 끄집어내고 거기다 민요 가락을 적절히 활용, 「민중시인」의 전범이 되었다.
「새재」는 詩人의 두 번째 시집이다. 1956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한 뒤 10여 년간 작품을 접었다가 1973년 첫 시집 「농무」를 내놓고 6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새재」를 출간할 당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얼마 동안 쉬었다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자라면서 들은 우리 고장 사람들의 얘기, 노래, 그 밖의 가락 등을 시 속에 재생시킴으로써 그들의 삶이며 사상, 감정 등을 드러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詩人이 가난한 이들의 아우성을 담은 것은 자신의 삶이 「뜨내기」였기 때문이었다. 충주에서 영어강사를 하던 시절, 치기만만하게도 「공산당 선언」을 가지고 영어구문을 가르친 것이 화근이 돼 결국 사표를 써야 했다. 이후 지역사회에서 쫓겨나 이곳저곳 떠돌기 시작했다. 공사판으로 친구를 찾아가 신세를 지고, 광산을 한다는 다른 친구의 외사촌에게 빌붙어 지내기도 했다. 소문만 듣고 농토를 개간한다는 일면식도 없는 당고모부를 찾아간 일도 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정박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나는 늘 내 한계를 깨달으면서 절망하고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얻은 것도 있으니,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농촌에서 나서 자라면서도 그 동안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보호에 싸여 세상 모습도 농촌의 현실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고 살아온 터였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목계장터」 중에서)
그때 詩人은 문득 발견한다. 「詩란 결국 그 시대의 질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 李晟馥 -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문학과 지성사 刊․1980)
시인 李晟馥(이성복․55)이 1980년 펴낸 첫 시집 「뒹구는 돌은…」은 그의 나이 25살 때 나왔다. 음험하던 維新(유신)과 독재의 그림자가 오버랩 되던 시절에 쓴 시였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는 「불감증과 무기력」이었다.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 끝에/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짓고/…/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자면서 고통과 불행의 正當性을 밝혀냈고 反復法과/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중에서)
1977년 여름 李晟馥은 서울大 불문과 선배이기도 한 김현 선생에게 詩 뭉치를 건넸다. 노트 한 권 분량의 시를 안고 김현의 연구실을 찾아간 것이다. 김현은 그 중 「정든 유곽에서」와 「1959년」 두 편을 가려 그해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 실었고 1980년 시집으로 묶어졌다. 원래 시집 제목을 「정든 유곽에서」로 정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文知社를 이끌던 김병익 선생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고집한 것으로 알려진다.
<누이가 듣는 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못하도록 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정은 유곽」 중에서)
「뒹구는 돌은…」은 당시 「관습 평단」의 기대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別種(별종)이었고 충격이었다. 오죽하면 『그에 대한 마땅한 비평적 척도가 없다』(박덕규)는 말이 나왔을까. 그의 시어들은 「나아갈 수 없는 모든 지경을 절개지의 형상」(이경호)과 닮아있거나, 「괴상한 이미지들이 숨가쁘게 변주되도록」(정과리) 꾸며져 있었다.
삶의 풍경들은 느닷없이 해체되고 훼손되며 일그러져 낯설기까지 했다. 그의 언어는 방법적인 「파괴적 조합」을 지향했다. 일종의 「뒤틀림의 美學」이었다. 비어와 속어, 역설과 반어가 출몰한 끔찍한 언어에다 아버지, 어머니, 누이 등 親權者를 향한 욕설까지 등장한다. 維新과 군사독재에 대한 나름의 「모더니즘式 저항」이었다.
● 朴南喆 -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청하 刊․1982)
싱그럽고 치열하고 뜨겁고 번뜩이는…
「경희문단」의 주축인 경희大 국문과 74학번 朴南喆(박남철·53)과 78학번 朴德奎(박덕규·49)의 공동 시집이다. 詩人의 첫 번째 시집인 「그러나…」는 1982년 4월 출판됐다. 피가 절절 끓던 시절에 쓴 詩다. 이 시집에는 「朴南喆다운」 싱그러움이 배어 있다. 「朴南喆다움」이란 「치열하다」는 뜻도 되지만 이단자라는 말과도 통한다. 그는 우리 詩壇(시단)에 몇 안 되는 奇人(기인)이다. 근엄한 표정으로 짐짓 세상을 다 꿰는 듯 「착한 척」 하지 않았다. 착한 척하는 대신 싸움닭이 되었다. 하도 유별나서 미움까지 받았다.
기성 문학과 문단을 향해 싸우는 「사고뭉치」, 그래서 미움까지 받는 「괴짜」지만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스승 趙炳華께서 악수로써 껄껄껄 세배를 받으신 다음, 歐羅巴的 술잔에서 꼬냑을 한 잔 따라 주시면서, 스승의 연구실은 무척 따뜻했습니다
얘, 南喆아, 詩人에게는 집이 없지 여기 장영자씨도 계시지만, 評論家에게는 집이 있지 小說家에게도 집은 있고, 劇作家에게도 집은 있고, 심지어는 隨筆家에게도 높은 집은 있는 法이지 그러나 얘야, 南喆아, 詩人에게는 집이 없지 그냥 사람 「人」자, 「詩人」이지 뭐, 헐헐헐…
스승의 弄談은 듣고 보니 詩였습니다…>(「詩人의 집」 중에서)
詩人은 자신을 「가짜 시인」이라 부른다. 왜냐면 그의 詩가 반성문이기 때문이다. 삶의 허위에다 대못질을 한다. 형식도 없고, 형식이어야 하는 것도 없다. 산문과 운문을 종횡무진하며 굳이 詩가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번뜩이는 정신이 다름 아닌 詩니까. 그의 詩를 「삶에 대한 도저한 반성적 성찰(김현·이선이)」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朴南喆씨가 소설마비로/이륙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나는 깜짝 아니 이/럴수가 세상에 그분이 돌아가시다니 나는 천정이/내려앉는 것을 오오 세상에 그 善漢, 분이 돌아가시다니/이제 우리는 다 살았다 그 워낙 속 좁은 분이 돌아/가시다니 온몸이 부르르 떨었다 그분이 정말 가셨을까…>(「깨어진 거울 앞에서」 중에서)
그는 정형화된 세상을 거부한다. 거울을 깨고, 깨진 거울로 일그러진 세상을 본다. 세상이 일그러졌으니 詩語나 어법도 무릇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 그는 첫 시집 이후 줄곧 형식파괴 실험을 이어갔다. 말이 실험이지 실은 「공습」이나 다름없었다. 「지상의 인간」(1984), 「반시대적 고찰」(1988), 「용의 모습으로」(1990), 「러시아집 패설」(1991), 「자본에 살어리랏다」(1997)와 「바다 속의 흰머리뫼」(2005)를 내놓으며 그는 고여 있지 않았다. 아직도 각반을 죄며 전투복을 매만지고 있다.
● 黃芝雨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문학과 지성사 刊․1983)
黃芝雨(황지우․55)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 한다」
1983년에 출간된 첫 시집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자신이 체험한 광주항쟁의 아픔이 배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집이 주목받는 이유는 1980년대 해체시의 전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해체를 양식화」한 이유는 「재래적인 서정시의 문법이 파편화된 현실을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광호)이라고 한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삼천리 화려 강산의/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자기들끼리 끼룩끼룩거리면서/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중에서)
<여기는 초토입니다/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이제 울음소리도 없습니다/파리 여러분!/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에프킬라를 뿌리며」)
「새들도 세상을…」에서 감행된 실험도구들은 인유와, 콜라주, 패러디, 몽타주, 시각적 활자 구성 등 다양하다. 어떤 면에선 거의 잡스럽다는 느낌도 들지만, 그런 수다스럼까지도 나름의 기지로 돌파하는 힘을 느끼게 만든다.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KBS2TV 산유화(하오 9시45분)」은 신문의 방송 면에 실린 멜로드라마 소개기사와 화장실 벽에 쓰여진 음담패설을 나란히 배치한다. 드라마나 신문기사나 화장실 음담패설과 다름없다는 얘기다.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이라는 시는 신문 미담기사와 「大盜 조세형」의 장물 목록을 나란히 포개놓는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숨어있는 많은 행간과 만나게 된다. 그의 「주석들」은 때로 비겁하고, 연민과 자기부정으로 가득하다. 일부러 솔직 하려한 「위선」까지도 시로 형상화했다. 이런 자기연민은 당시 민중문학 진영에서 「현실 도피적이고 지식인 냄새가 짙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黃芝雨의 형식파괴는 첫 시집으로 끝이 난다. 이후 그는 형식파괴의 실험을 포기하고 禪의 세계와 낭만적 허무주의 사이를 오갔다.
● 李文宰 -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刊․1988)
별빛이 길을 비춰주던 시대는 행복했다!
李文宰(이문재·48)의 첫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는 그의 나이 서른 살 때 나왔다. 서른 살 답지 않은 사유의 깊이와 詩的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다. 詩語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행간이 만드는 오밀조밀한 상상력과 말랑말랑한 슬픔이 밴 형상미가 빼어나다. 적어도 경험이 없이는 이런 詩가 나오지 못하리라는 느낌까지.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역시 반짝여 주곤 했다/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이러는 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나는 빈집을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기억을 기억하고 있다>(「우리 살던 옛집 지붕」 중에서)
「우리 살던 옛집 지붕」을 읽다 보면 게오르그 루카치의 글이 생각난다.
<별이 빛나는 하늘이,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였던, 그리고 그 길을 별빛이 비춰주던 시대는 행복했었다>
빈손으로 길 떠난, 행자의 지도란 하늘을 밝히던 수많은 별자리가 전부였다. 그 별을 지도삼아 산을 타고, 강을 넘던 시대가 있었다. 그 광경은 김환기의 그림에 등장하는 둥글고 키 작은 나무처럼 아름답다.
<멀리 있는 것들은 아주 멀리서 편안해/있고 나는 하모니카를 불고 들판을/굴리며 둥근 저녁 집으로 들어서는데 여기는/아궁이보다 따수운 저녁일 것 같으다 농촌에/와서 너의 기억들을 비오기 전/개구리 울음으로 바꾸어 듣는 깊고/푸른 저녁인데 언제부터 농촌은 비어 있었을까>(「유월의 여섯 시」 중에서)
詩人은 아궁이 같은 「따수운」 기억을 반추한다. 과거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고통이 심할수록 기억은 선명하다. 옛집을 떠나오며 문에다 박은 못이 자라나 벽과 담장을 허물더라도, 기억은 자꾸 사랑 쪽으로 허물어진다. 더 이상 내놓을 게 없는 기억은 견고하게 삶을 쓰다듬는 법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어느 날 문득, 우리의 살을 베어 낸 나뭇잎이 환하게 기억의 강으로 떠오른다.
李文宰는 1988년에 나왔던 시집을 조금 고쳐 2001년 再출간했다. 출판사도 민음사에서 문학동네로 바꾸었고, 詩 배열도 달리했다.
●奇亨度 -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刊․1989)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奇亨度(기형도·1960~1989)는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죽었다. 1989년 3월7일 서울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다. 병명은 뇌졸중. 숨진 그의 자리 옆에는 검은색 가방이 놓여 있었고 가방에는 곱게 타이핑된 詩 뭉치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도 詩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또 푸른색 수첩에는 쓰다만 詩들과 메모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詩 뭉치들은 친구(성석제·원재길·박해현)들에게 전해졌고, 죽기 전 출판계약을 맺었던 「문학과지성」社 편집장 임우기를 통해 빛을 보게 된다. 김현 선생은 직접 「입 속의 검은 잎」이란 제목을 붙였다. 그리곤 시집 말미에 자신이 쓴 해설을 싣고서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날 저녁, 지친 눈으로 들여다본 석간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거짓말처럼, 아니 환각처럼, 읽은 짧은 기사는, 「제망매가」의 슬픈 어조와는 다른 냉랭한 어조로, 한 詩人의 죽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럴 수가 있나, 아니, 이건 거짓이거나 환각이라는 게 내 첫 반응이었다』
생전 奇亨度는 유쾌하고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詩人 남진우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는 다변가였고 쾌활했으며 가창력이 빼어났다고 한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가나 「한오백년」을 부를 때면 좌중의 숨소리까지 멎게 만들었다.
하지만 남겨진 작품은 그가 주변사람에게 보여 준 삶과는 다른 것이었다. 시집 속 자아는 「타자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 자신 속에 유폐된 소외된 존재의 초상」(남진우)이었다. 카프카처럼 낮과 밤이 다른 이중의 삶을 산 것이다.
奇亨度의 친구들은 詩人의 10주기(1999년)를 맞아 詩와 산문을 모은 「기형도 전집」을 출간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우리 詩壇의 스테디셀러로 통한다. 박찬옥 감독은 2002년 「질투는 나의 힘」이란 詩에 모티브를 얻어 동명의 장편 극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 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전문)
●蔣正一 -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8년)
蔣正一(장정일·45)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중퇴다. 학교수업 대신 독서를 통해 문학적 상상력을 키웠다. 그는 당시 150원 했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삼중당 문고」를 읽고 또 읽었다. 위장병에 걸려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었고, 교련 문제(아마도 여호와의 증인 때문인 듯)로 진학을 포기했을 때, 서점에서 혹은 물물교환센터에서 일할 때, 심지어 소년원 문을 나설 때 수북이 삼중당 문고를 옆구리에 끼고 나왔다.
삼중당 문고로 문학적 수련을 쌓은 그는 1982년 詩人 박기영을 만나 詩를 배웠다고 한다. 1985년 청하에서 나온 첫 시집 「성과 아침」은 박기영과의 공동시집이다. 이후 1988년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펴냈고 이 시집으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이 시집에는 아름다운 詩가 많다.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굵직굵직한 나무 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중에서)
<알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강정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나같이 환한 얼굴 빛내며 꼭 내가 물어보면/금방 대답이라도 해줄 듯 자신 있는 표정으로/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내가 아는 사람들은/총총히 떠나간다. 울적한 직할시 변두리와 숨막힌/슬레이트 지붕 아래 찌그러진 생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제비처럼 잘 우는 어린 딸 손잡고 늙은 가장은 3번 버스를 탄다.…>(「강정간다」 중에서)
이후 그는 시집을 몇 권 더 출간했고 신춘문예 희곡으로 등단, 희곡을 쓰다가 소설로 나아갔다. 그러더니 1992년 소설 「아담이 눈뜰 때」를 발표한 후, 『詩의 시대는 끝났다. 詩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며 詩作(시작) 활동을 접었다. 이후 蔣正一의 이름 뒤에 詩人이라는 꼬리표는 영영 사라졌다.
● 김경주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문학동네 刊)」
황병승 - 「여장남자 시코쿠 (랜덤하우스중앙, 2005년)」
강정 -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문학동네, 2006년)
낯선 화법의 「유령」들을 불러 모으다!
1970년대産 시인들인 김경주·황병승·강정은 소위 「시적인 시」에 혐오감을 갖고 있다. 선배 詩人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적 이미지에 갇혀 있지 않다. 이들 詩人의 변화무쌍한 상상력을 따라가다 보면, 현기증이 꾸역꾸역 밀려온다. 「형체 불명의 非具象畵(비구상화) 한 폭을 언어로 복사해 놓은 듯」(김수이)하다. 이런 감수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낯섦을 더욱 낯설게 일그러뜨리고, 생경함을 非文(비문)으로 토해 내는 作法(작법)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불쾌하게 만든다. 20년전 황지우가 즐겼던 「파괴의 양식화」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詩라는 장르가 지녔던 율격이니, 운율이니, 압축이니 하는 전통적 합의는 간단히 폐기처분된다. 정형화된 세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전망은 그저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냉온이 빠르게 교차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라고 하는 건/한갓 누군가의 원망을 대신 실현하려/파리나 모기 따위에게로 쏠리는 식욕을 감춘 채 인간의 영역에 파견된/짐승과도 같다는 것…>(강정,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중에서)
<오리들이 죽은 시궁쥐들을 물고 하수구 구멍으로 들어간다/하수구에서 방 안의 날씨들이 눈병처럼 흘러나온다/이 동네를 마지막으로 돌아야겠군//용달차 뒤칸에서 키 작은 여인들이 생선을 뒤적거린다/생선을 좀더 싱싱하게 보이려고 사내는/주머니에서 마지막 남은 전구를 꺼내 갈아주면서 보았다〉(김경주, 「구름의 照度」 중에서)
<내가 갸르릉거리면요,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내 이름은 짐보 나쁜 친구들과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아요 쥐는/옛날부터 싫었구요 이 골목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죠/세탁소집 아이는 미용사가 꿈이구요 열여덟에 결혼한 수리공 마키는/말할 때 눈을 찡긋거리는 버릇이 있고 대장장이 키다리는, 아침부터 술이지요>(황병승, 「고양이 짐보」 중에서)
1970년대産 젊은 詩人들의 변주곡은 이미 우리 문단의 「질서」로 자리 잡고 있다. 혼돈과 말의 잔치, 낯선 화법의 「유령」들은 벌써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젊은 詩人들은 이 세계가 부여하는 기억의 얼굴을 거부하는 자들이다.(김수이)
● 李楨錄 -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문학과 지성 刊․1999)
현재 천안 중앙高에서 한문교사로 재직 중인 李楨錄(이정록․44)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그는 이 시집을 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첫 시집이 회초리만한 나무라면, 두 번째는 덜 자란 나무로 켠 널빤지다. 그리고 세 번째 시집은 그 무른 널빤지로 짠 관이다』
시인은 시집 이곳저곳에서 목수가 되어 「무른 관」을 짠다. 심지어 독자들에게 「관하나 짜라」고 권한다. 그는 관 속에 들어가 세상을 노래하고 스스로 자신이 만든 관에 꼼짝없이 갇힌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그에게 관은 「숨쉬는 집」이기 때문이다.
<개미가 촉수를 떨구지 않듯, 목수는 연필을 내려놓지 않는다. 마른침 발라 귀에 꽂고, 나무를 가늠한다. 연필심의 까만 눈동자가 목수보다 먼저 뼈대를 그린다. 외눈만 떠도 훤히 보이는 집의 풍채, 그러나 영혼의 구들장은 감은 한쪽 눈으로 들이는 것이다…>(「숨쉬는 집」중에서)
관 속에는 향나무 냄새가 나는 「집의 풍채」가 숨 쉬고 있고 「영혼의 구들장」이 깔려 있다. 때로는 잡초 무성한 봉분이 되기도 한다. 목수가 외눈을 뜨고 무른 연필로 가늠하면 또다른 세상이 보인다. 따뜻한 상상력이 흘러넘친다.
<마늘전을 지나, 기름집/추녀 밑이 그녀의 목이다/젖꼭지 달린 토마토/구부러진 오이 개구리참외/어느 것이든 그녀 앞에 가면/홍동백서로 진설이 된다/독자리 대신 황색 비닐을 깔고/맷돌처럼 앉아 있는 그녀의 점심/손가락 힘이 없어 누군가 풀어줘야 하는/민정당 보자기 한 개가 쓸개처럼 바라보고 있다…>(「깻묵」중에서)
시인의 상상력은 따스하다. 서른다섯에 쓴 시 답지 않은 삶의 성찰이 담겨있다. 멋 부리지 않고 과장되지 않으며 감정을 질질 끌지 않는다. 보잘 것 없고 내팽겨진 삶을 그저 묵묵히 감쌀 뿐이다. 낮은 자리에서 제 몫의 생명력을 다하는 세상과 사물을 착한 눈으로 응시한다.
<작은 나무들은 겨울에 큰단다 큰 나무들이 잠시 숨돌리는 사이, 발가락으로 상수리도 굴리며 작은 나무들은 한겨울에 자란단다 네 손등이 트는 것도 살집이 넉넉해지고 마음의 곳간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란다…>(「숟가락」중에서)
시인은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공주사범 한문교육과를 나왔다. 신춘문예에 두 번이나 당선되고 문학잡지 신인상까지 탔을 정도로 타고난 시인이다. 상복도 많아 김수영문학상(2001)과 김달진문학상(2002)을 받았다. 또 동화 <귀신골 송사리>, <십 원짜리 똥탑>을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