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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형 선배님을 그리워 하며.........!!!
자하(紫霞) 신경수(申京秀) 정리
그는 용산고등학교 4회 졸업생으로 등산계나 지도계에서는 ‘현대판 김정호’, ‘고지도 제작자’로 불리워지며 서울시산악조난구조대 대장등을 역임하고 평생 출판사를 하며 등산관련 서적과 지도제작 등을 하여 배포하고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 의한 우리의 전통 산줄기를 답사내지는 지도를 제작하여 배포하는 등 대한민국 등산 문화와 인문지리역사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지만 아는 산인들이 별로 없어서 애석하게 생각되었다 2022년 4월29일 그의 사망2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그의 업적과 삶을 되돌아보고 자랑스러운 산인의 대선배로서 기억하고자 한다
아래 글은 그와 같이 지도제작 등을 함께해 온 최선웅님이 쓰신 ‘바람같이 살다간 이우형’이라는 글을 인용하고 축약하고 재배치하고 일부 내용을 추가하여 되도록이면 연도별로 다시 고쳐 쓴 글이다
1935년 12월 30일
부 이상직, 모 이명기의 8남매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기록은 부산 동래서 태어났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의 직장이 광주광역시이므로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아야한다
초등입학때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여 고사리손으로 학교마당에 밭을 일구고 군복단추를 다는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하는 바람에 피터지도록 종아리를 맞았으며 은행에서 쫒겨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해 죽을때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1947년 3월
아현초등핚교 졸업
6.25전쟁시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1953년 3월
용산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 정치과 입학
1953년 12월
학생 신분으로 기독교중앙방송국제1기 성우 공채 합격
1954년 1월
육군 입대
1957년 10월
육군 제대
1958년 3월~1962년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이후 여러 방송국을 돌며 프리랜서로 성우 활동을 했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중학교때 교회주보를 프린터로 칼라인쇄를 했고 대학교때도 학보를 만들었고 군에서도 출판과 방송일을 했다
1967년 6월
대한민국 최초로 등산백과 사전인 등산수첩을 펴냈다
1969년 5월
등산 5월호 창간
1969년 6월
산수 6월호 창간 이후 자비로 출간하고 판매도 1000부 정도라 자금난으로 인하여 7, 8월호를 내고 9, 10월 합본호를 낸후 폐간하고 그후 동아방송국에서 성우 생활을 하면서도 지도제작에 매진하였다
1969년 10월 23일
이화여대를 졸업한 권정자와 결혼을 했지만 역마살이 도져 집을 나가기 일수였다 그러나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란 것을 알고 내조하기로 하였다 그는 재경 재윤 두딸의 딸바보 아빠였다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호탕한 성격이라 술자리를 사양하거나 일찍 끝내는 법이 없고 지도이야기 산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1971년부터 도봉산장을 근거지로 하여 매주 토요일 구조활동을 하였는데 이 모든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본인이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1972년 2월
서울시 산악연맹 산악조난구조대 초대회장 역임
1973년
중앙지도사에서 지도편집을 맡아 제주 경주 관광지도를 출간하였다
잡지 ‘산악인’도 전주가 손을 떼는 바람에 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이던 노산 이은상씨 동생 이신상씨에게 넘겼으나 겨우 1년을 버티다 그당시 정계의 인물들로 이루어진 신우회로 넘어가자 손을 떼고 한국소문사에서 일본지도제작을 했다
1974년 12월
서울시 산악연맹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합동구조대 회장 역임
1975년 1월
제주적십자사 산악안전대 초청으로 훈련강사로 참여하였다
1977년
최선웅님과 함께 제주도지도를 제작하였다
1978년 8월 1일
세계문화사에서 종합제주도총도를 발간하였다 이 지도는 그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작품이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관광지도였다 아울러 제주도 사진작가 고길홍씨의 사진을 모아 삼다도사진첩을 부록으로 곁들여 내놓았는데 지금 내놔도 전혀 손색이 없을 훌륭한 지도로 평가된다
그 당시 제주신문 인터뷰기사를 보면 ‘그가 제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등산 때문이었으나 올적마다 찬란한 아름다운 제주를 한눈에 볼수 있는 지도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언젠가는 내손으로 어딜 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지도를 만들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했고 또 ‘지도의 특색은 지금까지와의 지도와는 달리 보는 지도에서 읽는 지도로 바꾸어놓아 지명 유래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제주에 관한 모든 서적을 읽었다’고 하였다
1979년 4월
종합경주관광총도를 발간을 한 후로 성우 생활을 그만두고 오로지 지도제작에만 전념하였다
1979년 6월
1979년 5월 29일 후배 박훈규가 에베레스트 등산 도중 동상에 걸려 구조되어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 아버지처럼 간호하고 격려하여 삶을 포기하고 죽을뻔한 후배를 살려내었다
1980년 1월 17일
중부경찰서에 불법지도간행, 배포혐의로 입건 구속이 되었다 측량법에 민간에서 지도를 제작 배포하려면 지도를 제작후 국립지리원의 측량성과사용승인을 받아야하는데 그때는 그런 법이 있는 줄도 몰라서 생긴 일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성우협회, 산악계, 관광업계 등과 산악인들이 진성서를 만들어서 연일 올리고 신문에서도 현대판 김정호를 살리자고 연일 기사가 실렸다
1980년 2월 4일
중부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처분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대판 김정호’라는 닉네임이 붙어다녔다
그후로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제주도총도, 경주총도를 재간행했다
1980년
우연히 인사동 어느 고서점에서 주인과 이야기하던 중에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발행된 산경표를 접하게 되었다 조선 영조때 어문학자이면서 지리학자였던 여암 신경준의 저서로 알려진 우리산줄기를 알기 쉽게 족보형식으로 편찬한 지리정보종합서인 산경표를 그가 연구하고 있던 대동여지도와 비교 검토하기 위하여 김포벌판에 나가 현지를 답사한 결과 산경표의 한남정맥의 끝자락과 대동여지도 김포부근과 정확히 일치함을 발견하고 이 두가지가 모두 우리 전통 산수경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산경표와 대동여지도는 약 100년의 시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경표를 풀어서 지도로 만들면 대동여지도가 되고 산경표는 물줄기 이야기는 별로 없지만 우리나라 모든 물줄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산경과 수경은 같은 개념이고 종래는 같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렇게 산경표에 의한 전래의 우리산줄기가 백두대간을 위시하여 1대간 1정간 13정맥의 우리산줄기 이름들이 없어진 의문을 풀기 위하여 일본국회도서관까지 뒤져 결론을 얻는다 살피건데 구한말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호시탐탐 조선을 삼키려는 일제는 1900년초 조선의 자원조사를 위해 지질학자 고토분지로를 파견하여 지질조사를 시켰고 1905년부터 지도제작을 위해 측량을 시도했으며 우매한 조선백성은 영문도 모른채 고용되어 측부 노릇만 하였다 고토분지로가 귀국하여 보고한 보고서에 우리가 현재 쓰고있는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이 이름이 있었다
이에 분개한 그는 이 사실을 세간에 널리 알리고 우리산줄기찾기에 나섰다 이때부터 백두대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당시 유행하던 단산 산행만 하던 안내산악회에서부터 백두대간종주 산행이 시작되었고 뜻있는 일반 산악인들도 가세하게 된다 그후로 각직장산악회에서 한동안 붐을 이루었지만 그걸로 끝이었고 지금은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까지 제정이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태백산맥 소백산맥을 그대로 쓰고 있는 등 안타까운 일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으나 학계나 정부에서 관심조차 주고 있지 않아 우리산줄기 이름을 찾는 일은 요원하다고 할수 있다
우리산줄기와 산경표란?
고려시대 도선국사가 쓴 옥룡기라는 풍수지리책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마쳤으니....’라는 기록이 있고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대간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산줄기’라고 표시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데
영조때 실학자인 신경준이라는 사람이 1769년도에 쓴 산경표에 구체적으로 백두대간을 비롯 1정간 13정맥이 기록된다.
그가 쓴 산경표는 1913년 책자화 되어 세상에 나오나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후 1980년 산악인 이우형이 우연히 고문서 서점에 들렸다가 이 책을 발견한다.
책을 읽어내려가던 이우형은 머리가 돌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측량장비도 없던 시절에 만든 산경표라는 책에 수록된 내용들이 너무나도 완벽하고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내용이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산경표 내용을 직접 답사하며 백두대간에 미쳤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지도를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백두대간을 비롯 1대간, 1정간, 13정맥이라고 하는 산맥이 아닌 우리산줄기를 실은 책이다
산경표에 있는 주요산줄기를 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
산경표 산줄기 체계(1대간 1정간 13정맥)
(괄호)내 거리는 겹침산줄기 거리로 원산줄기에 포함되지 않음
산줄기명 | 분기점 | 강줄기명 | 주요지명 | 길이(km) | 종점 |
백두대간 | 백두산 장군봉 | 10대강 | 두류산 마대산 두류산 추포령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대관령 매봉산 태백산 소백산 대야산 속리산 덕유산 영취산 백운산 지리산(노고단, 영신봉) | 1658.6 | 지리산 천왕봉 |
장백정간 | 두류산 설령봉 | 두만강 | 궤상봉 관모봉 백사봉 송진산 우암산 | 364.2 | 두만강하구 서수라곶 |
청북산맥 | 마대산 낭림산 웅어수산 | 압록강 청천강 | 백산 향래봉 대암산 비래봉 천마산 법흥산 연태산 | 455.6 (58.6) | 압록강하구 미곶 |
청남정맥 | 마대산 낭림산 웅어수산 | 청천강 대동강 | 천궤산 묘향산 오석산 국사봉 연대산 | 355.6 (58.6) | 대동강하구 광량진 |
해서정맥 | 두류산 화개산 명지덕산 | 대동강 예성강 | 대각산 언진산 오봉산 멸악산 까치산 달마산 성주산 병풍산 국사봉 | 404.6 (89.7) | 극서점 장산곶 |
임진북예성남정맥 | 두류산 화개산 명지덕산 | 임진강 예성강 | 화개산 학봉산 묘지산 천마산 송악산 진봉산 백마산 | 158.8 (89.7) | 예성강하구 |
한북정맥 | 추포령 식개산 | 임진강 북한강 | 대성산 광덕산 백운산 청계산 운악산 불곡산 도봉산 삼각산 고봉산 장명산 | 235.5 | 파주시 교하면 곡릉천변 |
낙동정맥 | 매봉산 천의봉 | 낙동강 | 백암산 주왕산 단석산 가지산 영축산 천성산 금정산 봉화산 | 419 | 부산 다대포 몰운대 |
한남금북정맥 | 속리산 천왕봉 | 한강 금강 | 선도산 상당산성 구녀산 좌구산 소속리산 마이산 | 158.1 | 안성 칠장산 |
한남정맥 | 칠장산 | 한강 | 광교산 수리산 계양산 가현산 문수산 | 178.5 | 한강하구 보구곶 |
금북정맥 | 칠장산 | 금강 | 서운산 성거산 차령 수덕산 가야산 오서산 지령산 | 282.4 | 태안 안흥진 |
금남호남정맥 | 영취산 | 금강 섬진강 | 장안산 팔공산 성수산 마이산 | 70.7 | 주화산 (주줄산) |
금남정맥 | 주화산 (주줄산) | 금강 | 운장산 싸리봉 대둔산 계룡산 부소산 조룡대 | 131.4 | 부여 금강변 |
호남정맥 | 주화산 (주줄산) | 섬진강 | 만덕산 경각산 내장산 추월산 무등산 제암산 조계산 도솔봉 | 425.2 | 광양 백운산 |
낙남정맥 | 지리산 영신봉 | 남강 낙동강 | 삼신봉 옥산 여항산 무학산 천주산 정병산 용지봉 분산 | 226 | 김해 낙동강변 |
산경표 설악산 부근
산경도 : 산경표에 의한 우리산줄기 체계도
고 이우형선배님이 만드신 산경도
1980년 10월
고상돈의 유해가 제주도 1100고지로 이장할 때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다니며 일을 처리하였다
1981년 1월
제주산악회에서 명예회원으로 추대하였고 이후 제주에서 구하기 어려웠던 자일, 카라비너 등을 보내 주었다
1981년 12월
충주호 수몰로 인한 중원문화권 유적 조사에 참여한후 중원문화권 유적 분포 지도를 제작하였다
1983년 2월
도서출판 광우당 설립하여 안경호와 공저로 170개산을 묶어 ‘산으로 가는 길’이란 등산관련 책자를 발간하였다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에서 대동여지도 원본을 빌려와 제판용카메라로 촬영하고 훼손되거나 가필된 부분은 다른본과 일일이 비교하며 원도 복원에 온힘을 기울였다
1984년
제주산악회 20주년 행사때 손수 제작한 한라산 등산지도 100부를 기증하였다 제주 사람들은 그를 ‘마음이 비단같은 사람이고 인간 냄새가 물씬 나는 사람이다’라고 사망 이후 못내 아쉬워하곤 했다고 한다
1985년 12월 20일
드디어 대동여지도가 복간되었다 실로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지 124년만의 일이다 어찌 감격스럽지 아니할소냐 그가 그때 만든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선생이 찍어낸 목판본보다 더 선명하고 완전하였다
100부를 만들어 그동안 신세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95000원에 판매하였다 이 복간본도 지금은 희귀본이 되어 고서점에서 200만원 이상을 홋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고지도 연구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쌍용그룹의 김석원회장이 그를 불러 200부를 더 만들어 김석원 회장의 인사장을 덧붙여서 배포하여 대동여지도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 인사장 내용을 살펴보면 ‘.........전략 애석하게도 대동여지도를 이룬 소중한 목판들은 남아있지 않고 지금은 목판에서 떠낸 원본만이 보물제850호로 남아 있다
’평소 고산자선생의 높은뜻에 감명과 존경심을 가져왔던 제가 이번에 지도연구가이신 이우형씨의 도움을 얻어 당시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한지로 제작방법도 같이 하여 200부 한정으로 대동여지도를 재현시켜 세상에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선각자이신 고산자선생의 지극하신 애국심을 높이 기리면서 선생의 땀이 점철된 대동여지도의 복간본을 올립니다’
1986년 1월
언론매체로는 처음으로 이우형의 권유로 월간 ‘스포츠레저’에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986년 7월 24일
조선일보에 ‘국내 산맥 이름 일제가 바꿨다’라는 기사가 실렸고 이 시기부터 대간 정간 정맥의 개념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1987년
중고등학교 사회과부도와 지리부도를 제작하였다
1990년 10월
대동여지도 목판본 제작 전에 필사본으로 제작한 동여도와 대동여지도를 비교한 결과 대동여지도에 누락된 7400여개의 지명을 3/2로 축소한 대동여지도 영인본에 제자리를 찾아 별색활자로 첨쇄하는 복간본으로 제작하고 그가 연구한 성과를 한테 묶은 ‘대동여지도의독도’를 펴냈다 그는 이책에서 ‘고산자의 대동여지도를 한 시대의 문화와 과학을 집약한 것으로 문헌과 사료로서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우리 조상의 얼과 살아있는 우리땅의 지도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1993년
‘우리땅의 산과 산줄기 고(考)“를 발간하였다
3년여동안 초등학교 교과서 국어읽기 김정호 단원의 오류를 고치고자 부단한 노력 끝에 1993년 이후 김정호 이야기는 오류를 수정하여 새롭게 태어났다
생몰연대를 알수 없는 김정호선생의 제사를 모시기로 하고 신촌 봉원사에서 박용기 이상태 성남해 최선웅 등이 모여 구혼제를 올렸다 아마도 김정호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젯사밥을 받아드신 것일게다
1997년 11월 8일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전통제례의식에 따라서 제례모임(김정호 선생의 제사)이 있었다 제례가 끝나고 성신여대 양보경박사의 ‘김정호선생의 지지와 학문’,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박사의 ‘김정호의 생애와 사상’, 한국교육개발원 국어교육연구부장인 이인제박사의 ‘초등학교의 국어읽기 김정호 단원의 개정’이란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그가 죽은후 그의 파일에서 나온 공적조서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우형은 고지도 연구에 입문한 이래 2001년 4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국토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고지도 연구와 전통지리학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우형은 우리 국토와 그 위의 모든 자연 인문 사회 문화를 담고 있는 고지도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며 특히 조선시대 사람들의 국토관과 지역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투영하고 있는 대동여지도와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 대동여지도를 일반 국민들이 공유할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하였으며 지도보급과 전통지리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수많은 일을 하면서 그는 비록 출판사를 하였으나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그가 돈을 벌리가 만무하여 미국사는 형이 불러들였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내 이루지는 못했다
그와 이글을 쓴 최선웅씨는 산과 책과 등산잡지 출판, 지도제작 등과 같은 길을 걸었다
1990년 후반 그의 나이 60이 넘어서 출판사일이 힘에 부쳐서 그의 연구실인 천일빌딩의 사무실을 정리하였고 꼭 필요한 자료만 그의 집으로 가져갔고 많은 책과 자료는 대동여지도 복간에 참여했던 김규원이 보관하고 등산장비 등은 제주도에 있는 박훈규에게 보냈다
1999년 5월 24일
모든 것을 정리한 그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연구하고 구상한 것을 집대성하여 ‘우리땅 산줄기 물줄기’를 집필하다가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그간 고지도에 관한 연구를 같이 했던 성남해씨로부터 고소를 당한 것이다 내용은 국사편찬위원인 이상태의 ‘한국고지도의발달사’ 책에 자기의 연구자료를 표절했고 그가 펴낸 ‘대동여지도의독도’란 책의 내용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표절했으며 심지어 이상태와 이우형이 자신을 비하하고 인생을 망쳤다‘는 황망한 내용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후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하여 원고집필도 힘들어 후배 민병준에게 대필도 했지만 결국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2001년 4월 29일
모든 것을 남겨둔채 향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빈소에는 산악계, 지도업계, 고지도계, 방송계, 문화계 등 다양한 부류의 조문객들이 찾아와 그의 생전 삶을 가늠해보는 듯하였다 한결같이 앞으로 고지도를 정리하고 고증할 때 꼭 계셔야할 분인데 너무 빨리 가셨다고 아쉬워들 하였다
그후 고산자 김정호 선생과 이우형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뒤를 잇게 하기 위해 ’이우형기념사업회‘를 이글을 쓰신 최선웅님이 만드셨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바람처럼 살았던 이우형 선배님을 산경표를 온전하게 따르고 있는 후배 신경수가 ’2004년 제주산악회 창립 40주년 특집호에 기고한 최선웅님의 ‘바람처럼 살다간 이우형’을 참고 요약 정리 재배치하고 내 생각을 가필하여 이글을 쓴다 앞으로 우리 산인들 모두가 우리 전래의 산줄기를 사랑하다 바람처럼 가신 이우형 선배님의 업적을 기리며 그가 산경표와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며 우리 후배들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싶어했는지 조금이라도 살펴가며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의 역사인문지리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이우형 선배님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산악인 창간호
산악인 창간호 목차
김영도, 김장호, 이숭녕 등 쟁쟁한 분들이 편집고문을 맡았으며 등산기술과 에세이, 등산코오스, 등반기, 외국산서연재 등 내용이 매우 알찼다고 한다
※. 부탁의 말씀
이글을 쓸수 있는 자료를 볼수 있게 해주신 최선웅님 등 여러분께 고마운 인사를 드리며 혹여나 이글이 원래의 내용이 미비하거나 축약 정리하는 과정에서 오기된 점 등이 있거나 하여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기탄없이 010-9045-3232로 문자주시거나 shinks9769@naver.com으로 연락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면서 필을 놓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첫댓글
선배님
날씨가
입춘 지나고 우수로 달리니
보미 오긴 오나 봅니다
아직 먼가요
춘래불사춘
날씨가 변덕이 심합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이글 가져가도 되는지요?
몇번 까탈을 부리다 봄이 오겠지요
그래야 봄 답구요
본래의 내글도 아니지만
얼마든지 가져다 좋은 곳에 쓰셔도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맙습니다
용산고 4회면 우리 산경표님과는 몇년이나 차이 납니까? 용고가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나는 좋은 학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