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 안양공고 졸업, 연세대 졸업
포지션 : FW, MF
K리그 통산 기록 : 통산 154경기 출장 34득점 11도움
부산 통산 기록 : 위와 동일
국가대표 통산 기록 : A매치 통산 58경기 출장 21득점
○ 주요 기록
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이라크와 공동우승 (정해원 선수는 여기서 2골기록)
80년 대통령배 전국 축구대회 (Park's Cup하고 다른 대회) 연세대 우승. 정해원 선수는 이 대회에서 50M 드리블을 선보임
80년 아시안컵 준우승 (정해원 선수는 3골 기록)
82년 스페인 월드컵 아시아 예선 출전
83년 대우로얄즈 입단
84년 LA 올림픽 아시아 예선 출전
84년 대우로얄즈 우승
86년 K리그 2경기 연속 헤트트릭 기록
86년 K리그 득점왕, 특별상 수상, K리그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공격수 부문 선정.
87년 대우로얄즈 우승, K리그 MVP 수상
88년 서울 올림픽 대표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 , 본선 출전
90년 국가대표 은퇴
91년 부산대우로얄즈 우승, 현역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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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원 선수 이야기는 안양공고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안양공고하면 지금은 한정화 이영표 선수등을 배출하며 안양 LG 유소년 팀 구실을 하던 학교로 기억되고 있지만 70년대 안양공고는 전국대회에서 무패를 자랑하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고교강호엿다고 합니다. 당시 안양에 있던 군소공장들이 5천원씩 차출해 안양공고 축구부를 후원해주기도 하는 등 당시부터 안양은 축구를 사랑하는 도시였고 안양공고는 안양군민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당시 안양공고를 이끄셨던 감독님은 부산의 초대감독이기도 하신 고 장운수 감독님이셨는데요. 당시 안양공고 축구부는 주로 고아가 된 소년들을 모아 기숙생활을 하며 오로지 축구 훈련만 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당시 안양공고 출신인 또다른 부산의 레젼드 이춘석 선수의 회고담에 의하면 고아인지라 나이를 알 수없는(;;) 형님들이 안양공고에 많으셨다고 하네요. 물론 정해원 선수나 이춘석 선수도 고아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해원 선수의 부친은 군장성 출신이셨다고 하니까요...;; 정해원 선수는 안양공고 재학시절 78 방콕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대표로 발탁되며 대 이란전과 대 아프가니스탄 전에서 각각 1골씩 득점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북한 청대와의 준결승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끝에 승리, 대한민국 청대는 이라크와 공동우승을 차지하며 귀국길에 오르게 되죠.
이후 정해원 선수는 안양공고를 졸업 후 연세대로 진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해원 선수를 따라오신건지는 몰라도 ㅡㅡa 장운수 감독님도 연세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시게 됩니다. 당시 연세대 축구부는 고려대와 더불어 국가대표의 산실이자 연고전으로 더욱 유명한 대학축구 최고의 명문이었죠.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당시 연세대 선수진은 정성교, 장외룡, 왕선재, 이춘석, 이장수 선수들이 포진한 충실한 구성이었습니다. 거기에 정해원 선수가 들어가면서 화룡점정을 해낸 것이죠. 연세대 재학 시절 가장 유명한 사건이자 정해원 선수 이야기를 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그것, 50M 드리블도 이 때 해낸 불멸의 기록입니다.
80년 4월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에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가 가장 중요한 A매치 대회였다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는 오늘날의 FA컵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아마팀과 대학팀 모두 참여하는 대회였으니까요. 덧붙여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는 지금도 현존하는 대회입니다. 2006년에는 김포할렐루야가 우승, 부산교통공사가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에서 연세대가 결승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맞닥뜨린 팀은 다름아닌 충의 육군 체육부대. 당시 충의팀에 소속돼 있던 선수들 면면을 살펴보니 최종덕 박성화 조광래 신현호 당시 내로라하는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포진해 있더군요. 당시 결승전은 동대문 구장에서 열렸는데 TV 중계도 했었다고 하네요. 여기서 정해원 선수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축구 올드팬 분들에게 자신의 이름 석자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게 됩니다. 전반전 하프라인에서 볼을 잡은 정해원 선수가 단독 드리블로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답니다. 정해원 선수의 질주앞에 충의 팀 미들, 수비 도합 5명의 선수들이 맥없이 나가 떨어졌구요. 마지막 남은 충의 팀 GK 강창근 선수마저 손쉽게 제치고 골을 성공시키버린 정해원 (;;;;) 이것이 50M 단독 드리블로 회자되며 오늘날까지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훗날 마라도나가 선보인 60M 단독 드리블보다 몇년 앞서 해낸 대기록이었죠. 그런데 오늘날 정해원 선수를 한국의 마라도나라고 애칭하고 있어서 마치 정해원 선수가 마라도나 선수보다 뒤에 50M 단독 드리블 돌파를 선보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더군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정해원 선수는 마라도나보다 먼저 50M 드리블을 선보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전후무후할 것 만 같았던 환상적인 퍼포먼스였겠죠. 충의 팀은 정해원 선수의 환상적인 골에 넋을 잃고 결국 2:0으로 연세대가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후 정해원 선수는 곧장 아시안컵을 준비중인 국가대표로 발탁되죠.
80년 9월 쿠웨이트에서 아시아컵 대회가 개최됩니다. 이 대회 본선에서 최고의 스타는 두말할 것 없이 최순호 선수였습니다. 말레이시아전 1골, 카타르전 1골, 쿠웨이트전 2골, 아랍에미리트전 헤트트릭을 작성했고 더불어 아시안컵 본선 4경기 연속 득점이라는 훗날 이동국 선수가 간신히 타이를 이루는데 성공하는(2000년 아시안컵 4경기 연속득점) 대기록도 작성했냈습니다.. 정해원 선수는 UAE전에서 1골을 기록했지만 최순호 선수의 화려한 기록에는 미칠 바가 못됐죠.
하지만 준결승전은 완전히 정해원 선수를 위한 경기였습니다. 당시 준결승전 상대는 북한, 뭐 지금은 안 그렇지만 당시 북한과의 A매치는 말 그대로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자존심을 건 총성만 없다 뿐이지 전쟁이나 다름없었다고 하죠. 한일전과는 또다른 의미의 숙명의 라이벌이었습니다. 뭐 대놓고 응원전에서 멸공불사, 쳐부수자! 김일성! 을 외쳤다고 하니 말 다했죠 ;ㅅ; 당연히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부담감은 극에 달했을 껍니다. 결국 부담감으로 버벅거리는 플레이 끝에 북한에 선취골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최종덕 선수의 핸들링 반칙으로 인한 PK를 북한이 성공시키며 점수는 0:1. 그렇게 전반이 끝나고 후반도 거의 다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후반 35분 이강조 선수가 올려준 크로스를 최순호 선수가 뛰어올랐지만 머리에 닿지 못하고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런데 같이 뛰어올랐던 정해원 선수의 머리에 맞고 그대로 골인이 되버렸답니다. 위 사진이 바로 그 골 장면 기록사진이래요. 그렇게 1:1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대한민국 선수들은 우왕좌왕하는 북한 선수단을 거침없이 압박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후반 종료 직전 이영무 선수의 패스를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서 그대로 논스톱으로 때려 벼락골을 성공시킵니다. 조금만 각도가 더 높았다면 미국전 최용수 선수의 독수리 슛처럼 될 뻔했지만(;;;) 그 날은 정해원 선수의 날이었나 봐요. 당시 국대 감독이었던 김정남 (이때부터 감독이셨으니 대체 몇년째 감독 생활이신건가;;) 감독도 정해원 선수를 뛰어나와 얼싸 안으셨다고 하네요. 결국 2:1 역전승. 그것도 숙명의 라이벌 북한을 상대로 말이죠. 이것으로 정해원 선수는 최순호 선수와 더불어 한국축구의 영웅이 됩니다. 결승전에서 쿠웨이트에 0:3 패배했으나 북한을 멋지게 이겨줬기 때문에 카퍼레이드까지 벌였다고 하니 말 다했죠 ;;; 어느 올드 축구팬 말씀이 80년은 29만원짜리 전 모와 정해원 선수를 위해 준비된 해였다고 말씀하시더군요. ;;;
이후 82년 스페인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도 차출된 정해원 선수는 아시아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이후 무사히 연세대를 졸업하고 83년 대우로얄즈에 입단하며 원년멤버로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장운수 감독님은 또 정해원 선수를 따라(?) 부산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죠. 생각해보면 장운수 감독님을 따로 부산의 레젼드 코너에서 제대로 다뤄봐야겠다는 생각이 마구 피어오를 정도로 이 분의 축구 감독으로써의 능력이나 인간적인 면모가 참 존경스럽습니다.. 왠만한 부산의 초기 레젼드는 거의 다 이 분의 조련을 받고 재탄생했거든요. 어쨋거나 대우로얄즈에서 같은 입단동기인 이태호 선수와 짝을 이루어 대우의 공격진을 이끈 정해원 선수 본연의 득점력도 좋았지만 정해원 선수가 흘려주면 이태호 선수가 마무리 짓는 콤비 플레이가 일품이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태호 선수의 기본기나 드리블 능력도 미들 출신인지라 워낙 출중했기에 당시 대우 공격진을 막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껍니다.
84년 LA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도 정해원 선수는 차출 되었습니다. 이태호 선수도 함께였죠. 84년 4월 아시아 최종예선 대 사우디아라비아전, 여기서 정해원 선수는 최순호 선수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의 2번째 골 득점, 3번째 골은 정해원 선수의 헤딩슛이 사우디 수비수의 몸을 맞고 들어가면서 자책골 기록, 마지막 4번째 골은 도움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의 공격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팀은 4:5로 패배하며 LA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하죠. 정해원 선수는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아쉬우셨겠네요 ;ㅅ; 이후 대표팀에서 대우로 돌아온 뒤 정해원 선수는 84년 7월 럭키금성과의 경기에서 첫 헤트트릭을 작성합니다. 그리고 팀은 승승장구 창단 이후 2년차 우승을 달성하게되죠.
85년 당시 86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예선 대표에 정해원 선수가 당연히 차출됐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김석원 선수에게 밀리며 엔트리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김석원 선수도 아시아 예선을 뛰다가 부상으로 아웃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주성 선수입니다. 정해원 선수 원 포지션을 김주성 선수가 차지해버린 것이죠. 이 현상은 국대에서 뿐만 아니라 대우로얄즈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86년 대표팀 탈락의 분풀이를 프로에서 제대로 하게 됩니다. 당시 특급 신인 공격수 함현기 선수가 리그 득점 선두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한 상황. 그런데 10월 19일 유공전 정해원 선수가 헤트트릭을 작성하고 이어 10월 22일 경기에서도 헤트트릭을 기록, 2경기 연속 헤트트릭이라는 거짓말같은 기록을 작성하며 그 해 정규리그 10골로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쥐게 됩니다. (덧붙여 함현기 선수는 9골) 더불어 특별상도 수상했고 K리그 올해의 베스트 일레븐 공격수 부문에 선정됩니다. 2경기 연속 헤트트릭의 위력이 실로 대단했었군요.
87년 대우로얄즈에 김주성 선수가 입단하게 됩니다. 당시 김주성 선수와 정해원 선수는 누가 이태호 선수와 영혼의 파트너(?)가 되느냐를 갖고 동일 포지션에서 주전경쟁을 벌였는데요. 결국에는 정해원 선수가 미드필더로 뛰는 경기가 잦아지면서 잠정적으로 김주성 선수의 승리(?)로 일단락 되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당시 A매치에서는 역으로 정해원 선수가 공격수였고 김주성 선수는 윙이다네요 ;; 어쨌든 공격진에서 보직을 안 가리고 대우로얄즈의 공격을 주도한 정해원 선수는 그 해 우승과 더불어 K리그 MVP를 수상하게 됩니다. 신인왕은 김주성 선수가 차지하며 87년 K리그는 대우로얄즈를 위한 한 해가 되었죠.
88년 서울 올림픽 대표로 발탁, 공격수로 뛰었으나 본선 무득점에 그친 정해원 선수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미드필더로 뛰게 됩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 본선에서도 줄곧 미드필더로만 뛰셨고요. 더불어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이 정해원 선수의 첫 월드컵 무대이자 더불어 마지막이었습니다. 벨기에 전을 제외한 스페인전 선발 출장, 우루과이전 교체 출장을 기록한 정해원 선수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물론 아직 프로 은퇴는 아니었지요.
91년 선수로써의 마지막 시즌, 정해원 선수는 부산에서 2경기만을 출장했습니다.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듯 그 해 부산로얄즈는 우승을 차지하며 정해원 선수의 마무리를 장식했죠. 그렇게 정해원 선수는 자신의 플레이 역사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178cm 키의 측면 공격수로 논스톱 공격의 모범을 보여주며 부산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해원 선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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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수는 세밀하고 예민하게 플레이해야 하는데, 반복 훈련이 없으면 불가능해요. 아무리 좋은 선수라고 해도 다르지 않죠. 평소에 반복 훈련을 충분히 해야 하고, 실전에서 영리하게 판단하면 골을 많이 넣을 수 밖에 없죠. ---by 정해원
이후 행보는 전남드래곤즈 코치 재임시절도 있으셨고 한 때 축구협회 기술위원이기도 하셨죠. 요즈음에는 정해원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계신걸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