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세푸스는 초기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 c.100)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일어났던 시기에 예루살렘에 살았던 유대역사가였다. 그는 바울보다는 연하였으나 바울과 동시대인이었고 그가 생존해 있는 기간 동안에 바울, 누가, 요한, 베드로 등에 의해 후일 신약성경으로 집성되는 신약의 책들이 기록되었다. 요세푸스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세례 요한이나 예수를 알고 있었고 그의 저술 가운데서 이들을 언급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아주 분명하게,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 집단이 오늘까지 우리 가운데 있다.”(the tribe of Christians is with us to this day)고 말하고 있어 그는 기독교에 대한 목격자였고 따라서 1세기 기독교회에 대한 그의 증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
유세푸스는 유능한 역사가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삶의 현장이 예수가 가르치고 행하셨던 곳인 동시에 초기 기독교가 발원했던 팔레스틴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기록은 신약성경의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전거가 된다. 특히 신약의 첫 다섯 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20명 이상의 사람들, 예컨대, 대 헤롯, 세례요한, 펠릭스, 베스도, 헤로디아, 두르실라 등이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다 자세히 나타남으로 신약과 초기 기독교에 대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모든 저술들 가운데서 흥미나 중요성에 있어서 요세푸스의 저술에 필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요세푸스는 그의 저작에서 신약의 인물들과 초기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고, 또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요세푸스의 초기 기독교에 대한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생애 여정과 그가 남긴 저작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요세푸스의 생애 여정
고대의 작가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를 남기지 않고 있다. 신약기자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껏해야 자신의 이름을 남겨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로 불 때 많은 작품을 남긴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Judaeus, 20 BC-AD 50)2)도 자신의 삶의 여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흔히 서방에서 최초의 자서전이라고 불리고 있는 「생애」(Life of Josephus)라는 작품을 남겼고, 이 책을 통해 자신에 관한 많은 정보를 주고 있다. 그의 「유대전쟁사」(Jewish Wars) 또한 그의 삶의 세세한 여정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록 과장된 점이 있고 수사학적 첨언들이 적지 않지만 이 자전적 기록은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을 헤아리는 데 있어서 소중한 문헌이다.
요세푸스는 가이우스 가이사(Gaius Caesar)3)가 통치하던 첫해 예루살렘에서 마티아스(Matthias)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 때는 AD 37년이었다. 이 해는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총독으로서의 임기를 마감하는 해였다. 동시에 이 때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지 몇 년 후였고 바울이 개종한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의 본래 이름은 조셉 벤 마티아스(Joseph ben Matthias), 곧 마티아스의 아들 조셉(Joseph, son of Matthias)이었다. 그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출신배경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제사장 가문의 귀족 출신이자 하스모니안가(家, Hasmoneans)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다. 당시는 사회적 신분의 유동성(social status mobility)이 인정되기 이전이었는데,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해 자랑스럽게 변호하고 있다. 그가 겨우 14살이 되었을 때 대제사장과 그 도시의 중요한 인물들이 유대 율법의 어떤 조문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듣기 위해 빈번하게 찾아왔다고 한다.
16살 때는 바리새파와 사두게파, 그리고 에세네파의 입장을 비교 검토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바리세파를 신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바누스(Banus)라는 수도사의 탈 현세적 삶의 방식에 감동을 받고 그에게로 가서 3년간 같이 지냈다.4) 그 후 약 7년간의 젊은 날에 대해서는 특별한 정보가 없다. 그가 27세가 되던 64년에는 펠릭스(Felix)에 의해 투옥된 제사장을 신원하기 위해 로마에 파견되었다고 하다.5)
당시 황제는 네로(Nero, 54-68)였고, 이 해는 로마에 대 화재가 발생한 해이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때였다. 아마도 바울은 이때 로마에 있었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네로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유대인 배우를 통해 네로의 부인 폽피아(Poppea)를 만나 제사장의 석방을 요청했다고 한다. 네로의 부인은 유대교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일은 잘 해결되었고, 이 기회를 통해 요세푸스는 로마의 위용과 엄청난 군사력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유대인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그가 이방 나라 수도인 로마의 위용을 보고 유대인의 반 로마 항쟁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6)
그로부터 3년 후인 66년에 발발한 유대인들의 반 로마 항쟁인 유대 전쟁은 유대인의 역사에서나 요세푸스 개인의 생애에서 다 같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의 자서전인 「생애」에서는 이 기간의 일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가 앞서 기록한 「유대 전쟁사」와 상충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 요세푸스의 지위,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요세푸스는 갈릴리지역 항쟁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7) 7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하여 지역 수비를 했고, 다른 이의 수비지역이었던 기쉬아라(Gischala)와 세포리스(Sepphoris) 지역까지 관할했다고 한다.
그러나 갈릴리에서 유대인들의 항쟁이 실패로 돌아갔고 67년 7월 요타파타(Jotapata) 요세가 함락되었을 때, 그는 동료 40명과 같이 동굴로 피신하였다. 자신의 동료들은 항복하는 대신 자살을 선택했지만 요세푸스는 로마의 장군 베스파시안(Vespasian)에게 항복했다.8) 그는 자살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변명한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언젠가 베스파시안 장군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9)
베스파시안은 이 말에 감동을 받고 그의 예언이 성취되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요세푸스의 생명을 헤치지 말고 감금해 두도록 명령했다. 그로부터 2년 후, 곧 69년 12월 이 예언은 성취되었고,10) 요세푸스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의 군대를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갔고, 곧 타이투스와 함께 포위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AD 70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성전은 불탔다. 전쟁은 74년 마사다(Masada)가 폐허가 되기까지 계속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요세푸스는 친 로마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의 아들이자 팔레스틴 주제 로마군의 후임 사령관인 디도(Titus)와 그 군대의 통역관으로까지 활동했다.
이제 그의 생애는 급변했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협력했고, 그 이후의 전쟁기간 동안 로마인들의 대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받은 그는 바울이 처형된 지 10년이 되기 전인 AD 70년 디도장군을 따라 로마로 이주했고, 여기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에 불과했다. 그는 베스파시안의 사저(priuata aedes)에서, 황제의 가신으로 연금을 받으며 특권을 누리는 노후를 보냈다. 그리고 저술에 진력하여 4권의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그는 유대인이었으나 로마인들을 위해 봉사했다. 특히 황제의 보호아래 일생을 살게 된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성(family name) Flavius 을 자기 이름으로 채용하여 Flavius Josephus라고 부르게 된다. 이 점은 그가 베스파시안으로부터 시작되는 프라비안 황제들의 사랑과 보호 아래 있었고, 저들이 자신의 후견인이었음을 반영해 준다.
요세푸스는 친 로마적 활동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는 배교자, 반역자, 이중인격자, 혹은 배신자라는 혹독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떤 이는 그를 죽이려했고, 어떤 이는 요세푸스의 자기 변호를 반박하기 위한 의도에서 전쟁 중에 취한 요세푸스를 비난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11) 그는 자서전에서 이런 비난을 변호하려고 했으나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그의 무덤까지 갔고,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유대인의 비난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요세푸스가 언제까지 살았는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적어도 63세가 되는 AD 100년까지는 살아있었음이 분명하다.12)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의 조각상이 로마에 세워졌고, 그의 저작들은 공중도서관에 두게 했다고 한다.13) 그의 가정생활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적어도 3번 이상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2. 요세푸스의 저작과 역사적 의의
요세푸스가 예수님과 바울 등 사도들과 동시대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의 작품이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은 그의 작품은 신약과 초기 기독교의 배경에 관하여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기록 속에는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과 지명, 제도와 관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헤롯왕에 대한 기록에서부터 그의 분봉왕 아켈라오, 안티파스,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가 언급되고 있고, 로마 황제들, 곧 아구스도, 디베료, 글라우디오, 네로 등이 언급되고 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예수님이 활동했던 갈릴리 지역, 사마리아 사람들, 유대와 유대교의 종파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특히 팔레스틴의 지리적 상황(지형)에 대한 상세한 기록 때문에 요세푸스의 작품이 12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은 기독교신자들에게는 1세기 상황에 대한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의 저술의 의의에 대하여 스티브 메이슨은 이렇게 말한다. “요세푸스의 작품들은 다른 고대의 저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원을 제공할 뿐 아니라 신약성경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잠재력을 지닌 금광의 역할을 한다. 만약 그의 작품들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지금의 성경사전들은 문고판 정도의 크기로 축소되었을 것이고, 신약성경의 배경에 관한 교과서들도 우리에게 말해줄 만한 내용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14)
그는 4권의 책을 남겼는데, 「유대전쟁사」(The History of the Jewish War)는 75-79년에 출판되었고, 93년 혹은 94년에는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와 「생애」(Life)가 출판되었다. 그리고 96년경에는 「아피온에 반대하여」(Against Apion)를 집필했다.15) 즉, 이 작품들은 1세기 말경에 기록되었다.
「유대전쟁사」16)는 요세푸스의 첫 작품으로서 가장 중요한 작품인데, 요세푸스가 로마시민권을 얻고 베스파시안이 살던 사저에서 살면서 로마항실의 은급을 받으며 쓴 첫 결실이다. 그는 유대전쟁에 참여했던 지휘관으로서 목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 정보를 제공하는 등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람이었다.17) 또 그는 전쟁 후에 전투에 관련된 모든 공식문서를 열람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전쟁사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기술하는데 있어서 신뢰성을 더해 주고 있고, 요세푸스 자신도 이 점을 과시하고 있다.18) 이 책을 「유대전쟁사」라고 부르고 있지만 요세푸스가 붙였던 책의 제목은 문자적으로 「유대 전쟁에 관하여」(Περὶ τοῦ Ἰουδαἴκοῦ πολέμου)였다.
그래서 Richard Laqueur는 이 책의 제목 자체가 유대전쟁사를 로마적 시각에서 썼음을 노출시켜주고 있다고 평가했다.19) 이 책은 본래 로마제국의 가장 동쪽 변경(Upper Syria)에 사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처음에는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나 아람어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후에 히랍어역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히랍어문에 능통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저술되었으며, 기원전 170년부터 기원 후 74년까지의 유대인의 역사를 취급하고 있다. 이 책은 베스파시안의 임기 말기에 해당하는 75-79년 어간에 출간되었다.
비록 요세푸스는 전쟁의 “사실들을 신실하게 기록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그런 확신에서 이 책을 제일 처음으로 베스파시안 황제와 그 아들 타이투스에게 보냈다고 말하지만,20) 요세푸스의 로마에서의 은급생활, 타이투스가 그의 서명과 함께 이 책을 출판하도록 한 점, 베스파시안과 타이투스의 전시(戰時) 비망록(memoirs)을 이용하도록 허락한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를 편견 없는 객관적인 기록으로 볼 수 없다. 적어도 베스티안이나 타이투스에 대해서 비판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친로마적 시각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대 고대사」(ΙΟΥΔΑΪΚΗΣ ΑΡΧΑΙΟΛΟΓΙΑΣ, Jewish Antiquities)는 그가 남긴 두 번째 작품인데, 「유대전쟁사」를 쓴지 20여년이 지난 93년 혹은 94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약 20년간의 공백기는 아마도 이 대작(magnum opus)을 쓰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이에 몰두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도미시안 황제 (Domitian, 81-96)는 문필활동을 증오했던 황제였는데, 그가 재임하는 기간동안 역사가의 위치가 불안정했다. 이 기간 동안 로마의 역사가들, 곧 Tacitus, Pliny 그리고 Juvenal 등도 아무런 책을 발표하지 않는 것을 보면 요세푸스도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다가 도미시안 황제 임기 말년이 이르자 이 책을 발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요세푸스의 작품 중 가장 긴 작품으로서 전 20권으로 구성되어 있어 구약성경 보다 불량이 많다. 이 책은 창세기부터 자기 당대까지의 유대인의 역사를 기술한 작품인데, 이것이 자기 조국에 대한 정신적 봉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흔히 유대인에 대한 변증적 동기로 쓴 책이라고 말한다. 즉, 「유대전쟁사」가 로마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선전의 도구였다고 평가하면서, 그로부터 20년 후 이 책이 저술되기까지 요세푸스의 심경의 변화가 나타나 이 전의 친로마적 입장을 철회하는 작품이라고 추측한다.
요세푸스가 이 책을 쓴 것은 모든 유대인은 ‘인간성을 증오한다’는 그릇된 비난에 대항하여 유대인을 변호하기 위한 동기
에서였다. 요세푸스 당시 유대인, 유대인의 기원, 종교, 의식 등에 대한 그레꼬 로망 세계의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은 제국의 모범적인 시민이며, 그들의 신에 대한 경건, 인간에 대한 정의를 추구하며 동시에 가장 고상한 특성을 지닌 고대의 전통을 지니고 있음을 변호할 필요가 있었다.
요세푸스는 유대교를 변호하면서 ‘유다이모니아’(eudaimonia), 곧 ‘선한 정신’이라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이 용어는 ‘행복’ 혹은 ‘번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아리스토테레스가 철학의 목표는 유다이모니아(행복)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요세푸스는 유대교를 그레꼬 로망세계에서 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두려고 한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책은 유대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이상의 두 권이 대작에 속한다면, 「생애」와 「아피온에 반대하여」는 내용이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은 논쟁적인 저술이다. 요세푸스의 생애(ΙΩΣΗΠΟΥ ΒΙΟΣ, Life)는 내용상으로 볼 때 「유대 전쟁사」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생애」는 별도의 서론이 없으며, 「고대사」의 마지막에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세푸스는 그의 「생애」를 끝내면서, 이제 ‘우리의 고대사’(our antiquities)에 대한 설명을 끝맺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21)
이런 이유에서 「생애」는 모든 사본에서 「유대 고대사」와 함께 편집되었고, 유세비우스도 「생애」를 「고대사」의 일부로 인용했다.22) 비록 요세푸스의 「생애」가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유대인의 항쟁기간 중 자신이 갈릴리 지역 지휘관으로 있었던 5개월 간의 일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다(Life 28-406)는 점은 이 책의 동기와 목적을 헤아리게 한다. 이 「생애」는 또 다른 유대인 역사가인 디베랴의 저스투스(Justus of Tiberias)의 비판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 글(apologiapro vita)이다. 저스투스는 요세푸스가 그의 전쟁사에서 기술한 바를 비판했는데, 이 글을 접한 요세푸스는 이 책을 통해 66-74년에 있었던 유대전쟁에서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해 변호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완전한 자세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책은 보통 93 혹은 94년에 기록된 것으로 보지만, Laqueur는 이 책의 욧점은 요세푸스이 나이 30세 때 이미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요세푸스의 말년의 책이 아니라 최초의 저서가 된다. Laqueur는 이 기록은 조타파타가 함락되기 이전 갈릴리에서 자신의 활동에 대하여 예루살렘 최고 당국자에게 보내기 위해서 작성된 공식적인 보고서라고 주장한다.23)
96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아피온에 반대하여(ΠΕΡΙ ΑΡΧΑΙΟΤΗΤΟΣ ΙΟΥΔΑΙΩΝ, Contra Apionem)는 「유대 고대사」의 속편으로서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세푸스의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다. 비록 짧은 책이지만 적절한 배열, 문학적인 가치, 헬라철학과 시에 대한 익숙함, 그리고 자국 종교에 대한 열정이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것은 아피온은 이스라엘의 원수 중 한 사람의 이름일 뿐이며, 아피온에 대해서는 제2권 전반부에서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훨씬 더 광범위한 내용을 취급하고 있다. 보다 오래된 이 책의 제목은 「유대인의 고대성에 관하여」(On the Antiquity of the Jews)나 「헬라인들에 반대하여」(Against the Greeks)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24)
이 책은 자신의 「유대 고대사」에 대한 비판에 답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었는데 히랍사상의 여러 측면들과 대비하면서 유대종교(Jewish faith)를 변호하고 있다. 즉, 반(反)유대적인 모함에 대하여 변호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유대인의 고대성에 대해 변호한다. 따라서 이 책은 1세기 당시의 반 유대주의(anti-Semitism)에 대한 정황을 제시해 준다. 이 책이 현존하지 않는 많은 자료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이 책의 가치를 더해 준다.
종합적으로 평가해 볼 때 요세푸스의 저작이 갖는 주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의 배경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안내서의 역할 외에도 성경의 내용을 확인하는데도 도움을 준다.25) 예컨대, 가말리엘이 사도행전 5장 37절에서 언급한 “갈릴리의 유다”에 대한 기록은 요세푸스의 전쟁사(2:8)와 고대사(18:1)에 언급되어 있고, 사도행전 11장 2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글라우디오 황제 당시의 흉년에 대해 요세푸스는 언급하고 있다. 누가는 이 때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에 원조를 보냈는가를 기록하고 있지만, 요세푸스는 메소포타미아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디아빈의 유대인들이 아사직전에 있는 예루살렘 주민을 구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옥수수를 구입해서 보낸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26) 또 사도행전 12장 19-23절에서 언급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에 대해서도 요세푸스는 「고대사」(19:8,2)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아그립바왕은 유대지방을 만 3년 통치한 후에 전에 스트라토의 탑이라고 불리던 가이샤로로 오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가이사 황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연극을 상연하였다. 그는 이것을 황제의 존영을 위한 향연으로 축하하였다. 그 때 그 향연에는 지방 관리들을 비롯한 중직으로 영전한 많은 관리들이 참석하였다. 향연 제이일째 되는 날에 그는 아주 곱게 짜여진 모두 은으로 된 예복을 입고 먼동이 틀 때 연극장에 출두하였다. 그 때 그 은은 첫 햇살을 받자 멋지게 반짝였으며 그 광휘는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일종의 공포와 경외를 고취시켰다. 갑자기 그의 아첨자들은 사방에서 사실상 그에 대한 축하의 말이 아닌 소리로 그를 신이라고 부르며 “창성할지어다 지금까지는 폐하를 하나의 인간으로 존경하였지만 이제부터는 당신을 자연계의 영장으로 추대하오리다”라고 외치며 신의 도움을 빌었다. 왕은 그들을 꾸짖지도 않았고 그들의 불경건한 아첨을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머리를 들어본즉 자기 머리 위 밧줄 위에 올빼미가 날아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그것은 전에 길조의 사자가되었던 것처럼 흉조의 사자가 된 줄로 알게 되자 비통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배가 매우 아파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자 그는 급히 궁전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죽게 되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 그는 배의 발병으로 병석에서 5일간 고생하다가 그의 나이 54세 제위 7년 만에 죽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요세푸스의 기록은 누가의 기록과 상호 의존적이다. 누가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을, “주의 사자가 그를 쳤다”(행 12:23)고 기독교적으로 표현했으나 요세푸스는 질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왕의 변사의 보다 근원적인 원인이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불경이었다는 점에는 요세푸스와 누가가 동일한 증거를 하고 있다. 어떻든 요세푸스의 기록은 성경 사도행전의 기록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모든 작품이 신약시대와 초기 기독교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지만 특히 고대사는 중요한 문헌이다. 왜냐 하면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세례요한을 살해한 헤롯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의 순교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특히 플라비우스의 증언(Testimonium Flavianum)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초기 기독교에 대한 언급
요세푸스는 그의 고대사에서 초기 기독교와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3가지 사실을 언급했는데, 이는 신약인물의 역사성과 초기 기독교의 상황, 그리고 성경의 기록을 확증하는 데 있어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27)
세례요한의 처형
요세푸스는 세례 요한을 살해한 헤롯에 대하여 언급했는데, 비록 이것을 기록한 동기는 성경의 동기와 다르지만 복음서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 준다. 요세푸스에 고대사 18권에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나바티안 아랍(Nabataean Arabs)의 왕 아레타스 4세(Aretas IV, 9BC- AD40)28)에게 참패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글 속에서 요세푸스는 세례요한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아라비아 왕 아레타는 헤롯 안티파스에게 대하여 적대감을 가졌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헤롯이 제수인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본처를 버렸는데 그녀가 바로 자신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의 죽음과 관련한 요세푸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헤롯의 군대가 패망한 것은 바로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인 일에 대한 정당한 형벌인 하나님의 심판(divine vengeance)이었다고 생각했다. 세례요한은 선한 사람이며, 유대인들에게 의로운 삶을 살도록 권면했으며, 피차를 향하여는 의를 나타내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경건을 보이며, 세례에 의하여 연합할 것을 가르친 선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가르치기를 이 세례는 자신의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로운 행위로 이미 영혼이 정결케 된 후에 육신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받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동료 유대인들이 그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의 가르침을 들을 때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헤롯은 세례요한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으므로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매사에 그의 말을 기꺼이 따를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롯은 그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그를 체포하여 죽이는 것이 바람직한 대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헤롯은 이전에 한차례 폭동이 있었던 일을 감안하여 사건이 터지고 난 후에 후회하는 것 보다는 요한을 죽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헤롯의 의심 때문에 요한은 마카에루스(Machaerus)에 감금되어 있다가 거기서 처형을 당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헤롯의 군대에 이런 화를 내리신 것은 요한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고 믿었다.29)
요세푸스가 남긴 이 글의 목적은 헤롯 안티파스의 패배를 기록하는 것이지만, 의로운 세례요한을 처형한 것이 패배의 원인일 수 있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여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성경의 기록과는 약간의 상이점도 보여준다.
첫째, 헤롯이 요한을 투옥하고 처형한 것은 헤로디아와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한 요한의 책망에 대한 반감 외에도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공관복음서의 기록과 모순되지 않고 상호 보완적임을 보여준다,
둘째, 요세푸스는 세례요한의 세례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성경 마가복음 1장 4절에서는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이 점에 대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해사본’의 발굴과 연구결과에 따라 요세푸스가 그렇게 기술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엣세네파가 이해한 세례는 자신들의 영혼을 정결케 한 의로운 사람들이 받는 것이었고 이것은 육신을 깨끗게 하는 의식이었다. 이것이 엣세네파의 쿰란 공동체에서 실행한 세례였다. 엣세네파에 익숙했던 요세푸스는 요한의 세례를 엣세네파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했던 것이다.
셋째, 요세푸스는 요한을 가리켜, “세례에 의하여 연합할 것을 가르친 선한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누가복음 1장 17절과 동일하다. 여기서 세례요한은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기 위하여” 오는 자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자였다는 점을 중시하지만 요세푸스 또한 이런 이해를 가졌어야만 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어떻든 이 요세푸스의 기록은 세례요한의 실제와 그의 죽음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의 활동,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인 집단
특히 요세푸스는 흔히 학자들에 의해 ‘플라비우스 증언’(Testimonium Flavianum)이라고 불리는 그의 「고대사」(Antiquities) 18권 63-64항에서 예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흥미로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요세푸스는 유대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기간(AD 26-36) 중의 일을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기록이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한 언급은 4세기 유세비우스 이전에는 아무도 언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30) 이 글은 성경 이외의 기록으로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역사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문헌사적 의의가 있다. 우선 요세푸스가 언급하고 있는 이 부분을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이 무렵 예수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만일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실로 그가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자였고, 기쁨으로 진리를 받은 사람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많은 희랍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메시야였다. 빌라도가 우리 중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고소를 듣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선고를 내렸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한 사람들은 그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는 부활하여 나타났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와 같은 일들과 그에 대한 무수히 많은 다른 일들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따라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the tribe of the Christians)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31)
이 기록을 보면 초기 기독교에 대한 요세푸스의 견해가 동정적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기록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정보가 유대인 역사가가 활동한 곳까지 소개되고 알려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요세푸스의 기록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어왔다.32)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글을 신뢰하고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사실적인 증거라고 보았으나, 특히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가면서 이 글속에는 가필과 의도적 변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기록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근거는 4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바리새적 유대주의에 충실했던 요세푸스가 예수를 메시야였다고 말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 둘째, 오리겐이 그의 글(Contra Celsum 1. 47과 Comment. in Matt. xiii.55)에서 요세푸스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한 점(AD 280년 경), 셋째, 일련의 반란(a series of riots)을 기술하는 문맥에서 예수에 대한 이 기록은 문맥의 흐름에서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점, 다시 말하자면 18권 65항은 62항에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글이므로 소위 Testimonium Flavianum이라고 불리는 18권 63, 64항은 삽입일 수 있다는 점, 넷째, 이 본문의 문장은 요세푸스의 문장이나 술어(idioms) 등에 보이는 독특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고 있다. 요세푸스는 분명히 기독신자가 아니었으나33) 그의 글 속에는 오직 기독교인만이 진지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독특한 표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이 글의 진정성을 인정하는 이들은 Testimonium Flavianum은 모든 사본(MSS)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며, 유세비우스에 의해 인용되고 있고(Eusebius Hist. Eccl. i.11 그리고 Dem. Evang iii.5.105), 문장 형태나 술어가 근본적으로 요세푸스의 것과 상이하지 않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34)
위에서 인용한 요세푸스의 글에서 가필이거나 첨가된 것으로 의심받았던 부분은 3부분인데, 첫째는, “그를 만일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이었다. 이 말은 예수가 인간 이상의 존재였다는 점을 암시하는데, 이것은 예수가 인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삽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위대한 고대사학자인 에드윈 야마우치(Edwin M. Yamauchi)도 이점을 인정하고 있다.35)
두 번째는, “그는 메시야였다”(ὁ χριστὸς οὗτος ἦν)는 기록이다. 그 앞의 “그 이유는 실로 그가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자였고, 기쁨으로 진리를 받은 사람들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많은 희랍인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진술은 요세푸스가 다른 곳에서 사용했던 언어나 문장형태와 아주 유사하다는 점에서 진정성을 인정받았으나 그 다음에 나오는 그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였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첨삭된 것으로 보는 이가 적지 않다.36) 그것은 요세푸스가 야고보를 언급하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불리워졌다”고 말하는 등 예수가 추종자들에 의해 메시야로 간주되었다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메시야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요세푸스의 예수 인식에서 상이점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는 메시야였다”는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리챠드(G. C. Richards)와 셔트(R. J. H. Shutt)는 ‘그리스도’(메시야)라는 단어 앞에 ‘소위’(so-called)를 삽입하여 읽는 것이 본래의 기록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37)
진정성을 의심받았던 세 번째 문장은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는 부활”했다는 기록이다. 요세푸스의 기록 후반부에서 예수의 처형과 십자가에 대한 진술과 그의 제자들이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진실한 기록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기록인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는 부활했다”는 기록은 부활신앙에 대한 명백한 선포로서 요세푸스가 그것을 기록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위의 요세푸스의 글은 유세비우스에 의해 두 번이나 인용되었다. 그래서 많은 연구가들은 오리겐(280)과 유세비우스(324) 시대 사이에 위의 3귀절이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38)
예수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의 진정성에 대한 이와 같은 판단에 근거하여 본래 요세푸스가 기록한 것으로 판단되는 원본을 재구성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어왔다. 특히 요셉 클라우스너(Joshep Klausner) 교수는 요세푸스가 기록한 원작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39)
이 무렵 예수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실로 그가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자였고, 기쁨으로 진리를 받은 사람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많은 희랍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빌라도가 우리 중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고소를 듣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선고를 내렸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한 사람들은 그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따라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클라우스너의 가정은 앞서 언급한 의문시되었던 3가지 조항을 제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클라우스너의 견해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추정일 뿐이다.
클라우스너 외에도 여러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진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요세푸스가 본래 기술했던 원본을 재구성 하려고 시도해 왔다.40)
일반적으로 요세푸스의 이 기록에 대해 3가지 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요세푸스의 기록은 여전히 예수의 역사성, 곧 그의 실존과 십자가의 죽음, 광범위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실재 등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
고대사에서의 초기 기독교와 관련된 3번째 언급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과 관련된 내용인데, 여기서 요세푸스는 산헤드린이 야고보를 죽인 살인자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세푸스는 그의 「고대사」 20권 197항에서 207항까지 안나스가 대제사장이 되는 배경을 설명하면서 베스도 총독 사후 문제를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199항과 200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대로 안나스 2세(the younger Ananus)는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성격이 급하고 보통 이상으로 과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두게파를 따랐는데, 이미 설명한 바처럼 어떤 결정을 할 때는 그는 다른 유대인과는 달리 매우 엄격한 인물이었다. 이런 성격을 지닌 안나스는 베스도는 사망했고, 알비누스(Albinus)는 아직 임지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호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 제사장 안나스(Annas)는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동생, 곧 야고보라고 하는 이름의 사람과 어떤 사람들을 그들 앞에 데리고 왔다. 그는 그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고소하고 돌로 쳐 죽이도록 그들을 넘겨주었다. 가장 공정하고 그리고 율법 준수에 가장 엄격했던 것으로 간주되는 그 도시의 주민들은 이 일로 크게 분노했다.41)
이 기록에서 말하는 안나스는 안나스 2세(Annas the younger)인데, 누가복음 3장 2절과 요한복음 18장 13절, 그리고 사도행전 4장 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제사장 안나스의 아들이다. 그는 유대총독 베스도(Festus)가 62년 급서한 이후 그의 후임자 알비누스(Albinus)가 임지인 유대에 도착하기까지 3개월 간의 공석 기간 중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유대총독이 부임하기 전에 대제사장이 된 그는 야고보를 처형했는데, 그는 권력남용으로 곧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했다.42)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비록 요세푸스는 침묵하고 있으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율법에 엄격했던 자들이 왜 야고보의 처형에 대해 분노했는가 하는 점이다. 요세푸스가 말하는 “율법에 가장 엄격했던 이들”이란 틀림없이 바리세파를 의미하는데, 요세푸스의 이 기록은 바리세파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에 대해 어떤 정도의 동정심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43) 바울이 알고 있었듯이 그 교회 교인들을 “율법에 열심 있는 자”(all zealous for the law)들이었다(행 21:20). 바로 이 점이 당시 바리세인들이 왜 야고보에 대해 동정적이었던가를 설명해준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야고보와 대화하는 중에 야고보가 예루살렘에는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명이 있으니….”라는 언급은 분명히 과장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곳에서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있고 이 기독교 신앙은 당시의 세계적인 운동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44)
어떻든 요세푸스의 이 기록을 통해서 신약성경이 증거 하는 두 가지 사실을 확증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는 그리스도로 불렸다는 사실(행2:36)과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였다는 사실이다(갈 1:19). 동시에 예수와 야고보는 이 두 사람이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맺는 말
위에서 언급한 요세푸스의 3가지 기록을 종합해 보면 그는 예수의 역사성, 그의 이적 행하심과 이로 인한 명성, 그가 야고보의 형제가 된 다는 사실, 그가 유대인들의 고소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된 점, 그의 메시야적 주장,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그룹의 창시자가 된 다는 점, 그리고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점 등을 확인해 주고 있고 따라서 요세푸스는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즉, 요세푸스는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의 인물들의 역사성과 초기 기독교의 실체를 인정했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예수의 출생에서부터 초기 기독교회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신약성경과 그 세계를 알 수 있는 필수적인 증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와 저작, 그리고 그의 기독교에 대한 기록은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1) Josephus, Jewish Antiquities, 18. 64, Tessa Rajak, Josephus: The Historian and His Society (London: Duckworth, 1983), 1.
2) Philo Judaeus (Philo the Jew)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예수님이나 바울의 동시대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유대인 저술가였다. 헬라어로 저술했던 그의 현존하는 책은 43종에 이르며 Charles Duke Yonge(1812-1891)에 의해 영역되어 1854-1855년 어간에 Bohn's Ecclesiastical Library의 4권의 책으로 출판된바 있다. 이 책은 1993년 미국의 Hendrickson Publications에 의해 The Works of Philo: New Updated Edition, Complete and Unabridged in One Volume 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필로의 생애 여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는데,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팔레스틴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그 인구는 약 100만명으로 추산된다(C. D. Yonge trans., The Work of Philo, xi-xii). 그는 그의 생애에서 오직 한번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다고 한다(De Providentia, 2.64).
3) 그의 생애 여정에 대한 정보는 요세푸스의 1차 자료 외에도 David Bentley-Taylor, Josephus, A Unique Witness (Fearn: Christian Focus, 1999), 17-33, Steve Mason, Josephus and the New Testament (Peabody: Hendrickson, 1992), 35-52, 그리고 The Leob Classical Library (Harvard University Press, 1969)로 출판된 Josephus, Life of Josephus, Books I, 의 서론(vii-xx) 등에 근거함.
4) Life, 12.
5) Tessa Rajak, Josephus: The Historian and His Society (London: Duckworth, 1983), iii.
6) Life, 3, David Bentley-Taylor, 18.
7) War 2. 20. 3.
8) War 3. 8. 7.
9) War 3. 400-401. 이 예언은 요세푸스가 자신의 항복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해석이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예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예언의 근거이다. F. F. Bruce는 요세푸스는 창세기 49장 10절의,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에서 유다에서 통치자가 출현할 것이라는 예언은 유대인 혈통에서 나온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유대지방에 있는 로마군대의 지휘관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 예언이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세푸스 같은 애국적인 유대인이 이스라엘 조상 대대로 믿어오던 소망에 대하여 일반적 해석과는 상이한 해석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지만 그래도 그는 다니엘의 예언, 곧 70주간 혹은 490년(단9:24-27)은 그 때 당시에 끝나도록 되어 있었는데, 요세푸스가 바로 이러한 계산법에 영향을 받아 베스파시안을 ‘장차 올 왕’(단9:26)으로 동일시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부르스, 「예수님과 기독교의 기원」 (생명의 말씀사, 1984), 39-40.
10) War 4.10.4
11) Life 425, War 3. 438, 7. 447-450.
12) 요세푸스 자신이 언급한 기록 중에 가장 늦은 연대는 그의 나이 56세이던 AD 93년 이었다. David Bentley-Taylor, 33.
13) Eusebius, Hist. Eccl. iii. 9.
14) Steve Mason, Josephus and the New Testament (Hendrickson Pub., 1992), 스티브 메이슨의 이 책은 유태엽에 의해 「요세푸스와 신약성서」 (대한기독교서회, 2002)라는 제목으로 역간되었다.
15) 요세푸스의 저작은 여러 가지 형태로 출판되었으나 대표적인 영역본은 William Whiston의 The Works of Josephus (Hendrickson, 1987) 이다. William Whiston(1667-1752)는 Isaac Newton을 이어 켐브릿지대학 수학과장을 역임했던 고전학자로서 1736년 요세푸스의 저작을 영역하였는데, 이 영역본은 ‘흠정역본’(the Authorised English Version)으로 불릴 정도로 권위 있는 영역본으로 인정을 받아왔다.
16) 이 책의 현존하는 희랍어 사본은 9개뿐인데, 10-12세기에 기록된 것이다. 라틴어로 번역된 사본은 4세기 것이 있다.
17) Apion 1. 10. ".... having been an actor myself in many of its transactions and an eye-witness of most of the rest...."
18) Steve Mason, 60.
19) R. Laqueur, Der jüdische Historiker Flavius Josephus, 1920, 274ff. 그러나 Steve Maison는 이 견해에 반대한다. 메이슨은 “요세푸스는 자존심 있는 유대 제사장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1.3) 유대인의 용기에 대해 마땅한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로마의 저자들처럼 그것을 과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또 그는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서문의 내용을 보면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는 결코 로마적 관점에서 로마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기술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보다 객관적으로 기술했다고 주장한다(Steve Mason, 60).
20) Apion 1. 9, David Bentley-Taylor, 30-31 참고.
21) Life 430, Steve Mason, 73.
22) Eusebius, Hist. Eccl. iii. 10. 8.
23) Josephus, Life of Josephus, Books I (Leob Classical Library, Harvard University, 1969), xiv-xv.
24) Ibid., xvi.
25) 이 점에 대해서 Steve Mason는 그의 책 4장 이하(85-235)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고, 보다 간단한 정리를 위해서는 David Bentley-Taylor, 123-136을 참고할 것,
26) 이 점에 대한 더 자세한 기록은, 부르스, 「신약성경 문헌」(생명의 말씀사, 1987), 109을 참고할 것.
27) 요세푸스 같은 1세기 역사가가 그의 방대한 기록에서 예수에 대해서나 초기 기독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경우가 오직 3회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보스톤 대학교의 철학교수인 마이클 마틴(M. Martin)은 “만일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요세푸스가 더 많이 언급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 그러나 요세푸스가 다른 메시야적 인물들과 세례요한을 더 상세히 언급하면서 예수는 지나가는 투로 언급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다.”고 하면서 예수의 역사성을 부인하려고 했지만, 요세푸스의 저술에서의 기록의 희소성(稀少性)이 예수의 역사성을 부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야마우찌의 설명처럼, 요세푸스에게 있어서 관심사는 정치적 사안이나 반 혹은 친 로마적 투쟁이나 대결이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어떤 점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보다 더 큰 관심을 끌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보다 정치적으로 더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참고, 리 스트로벨, 「예수사건」(두란노,1998), 103.
28) 바울은 고린도후서 11:32에서 이 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29) Antiquities 18. 116-119. Graetz는 요세푸스가 요한을 ‘세례주는 자’(a baptist)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본문을 개변된 것으로 보지만(Josephus, Jewish Antiquities, Book XVIII-XX, The Loeb Classical Library, 1969, 81) 일반적으로 세례요한의 처형에 대한 이 본문의 진정성은 인정 받아왔다.
30) 4세기 가이샤라 지방의 감독이자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교회사」(Hist. Eccl., 1. 11.7ff.)에서 요세푸스의 예수에 대한 언급을 인용한 바 있다.
31) Antiquities, 18: 63, 64. 특히, … εἰς ἔτι τε νῦν τῶν Χριστιανῶν ἀπὸ τοῦδε ὠνομασμένον οὐκ ἐπέλιπε τὸ φῦλον는 증언은 기독교의 실제를 증거하고 있다.
32) 소위 Testimonium Flavianum이라고 불리는 이 기록의 진정성을 의심했던 첫 인물은 16세기의 Scaliger였다. 그 후 Schüer, Niese, Norden, Zeitlin, Lewy 그리고 Juster 등이 이 글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33) 오리겐은 요세푸스가 그의 책에서 세례요한과 예수의 형제 야곱에 대해 언급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리겐은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Origen, Against Celsus I. 47.
34) 이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Josephus, Jewish Antiqiities, Books XVIII-XX, (The Leob Classical Library, Harvard University Press, 1969), 49를 참고할 것.
35) 리 스트로벨, 102.
36) 이런 입장의 대표적인 인물이 G. C. Richards 와 R. J. H. Shutt인데 이들은 이 본문은 본래 “그는 소위 그리스도였다"(He was so-called Christ)라고 주장한다.
37) G. C. Richards, "The Testimonium of Josephus,"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42 (1941), 70ff.
38) Josephus, Jewish Antiqiities, Books XVIII-XX, The Leob Classical Library, 49. 에프 부르스, 「예수님과 기독교의 기원」, 48.
39) J. Klausner, Jesus of Nazareth (London:19129), 55.
40) 예컨대, 로버트 아이슬러(Robert Eisler)는 Testimonium Flavianum의 첫 번째 문장에 “더 큰 문제거리”를 첨가해서 “이 무렵 예수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로 인하여 ‘더 큰 문제거리’가 발생했다.”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전체 문맥을 보다 자연스럽게 연결해 준다고 보았다. R. Eisler, The Messiah Jesus and the John the Baptist (London, 1931), 50ff.
41) Antiquities, 20. 199-200.
42) 에프 부르스, 「예수님과 기독교의 기원」, 45.
43) Paul Barnett, Is the New Testament History? (Sydney: Hodder & Stoughton, 1986), 27.
44) Ibid.
첫댓글 기독교의 실체와 인물들의 역사성을 인정한 요세푸스...
그런 그가 기독교인이 되지 못한 것은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김해근 집사님께서 요세푸스를 읽고 계셔서 도움이 될까해서 올려드립니다^^
귀중한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역하시던 시대의 상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요세푸스가 지은 책들을 읽게 되었는데
요세푸스의 저서별 특성과 상호 연관관계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해하는데 유용하고, 그 시대를 바라보는요세푸스의 관점으로부터
좀 더 객관적 관점으로 시각을 조정시켜 주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