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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애-여성문학의 비판적 사실주의의 성과(120)
1. 식민지하 여성문학의 위치
임헌영은 그의 저서 『민족의 상황과 문학사상』(1986)에서 “식민지하 문학을 하나의 민족문화운동으로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나, 그 중요성만큼이나 한국적 상황이 지닌 한계성으로 인하여, 당대주의적 근시안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1920년대와 1930년대는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첨예하게 이데올로기적 편파주의에 희생당하는 문학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식민지 정치 구조와 식민지하 문학의 관계 속에서 “문학을 통한 분노와 고발을 당시대에 도출시키는 것은 정치적 자유를 박탈당한 민족에게 있어 하나의 연단”이라고 보는 게르첸의 지적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크린도『문예학에서의 사회학적 방법 』(1925)에서 “어떤 집단 또는 어떤 작가에 의하여 이루어진 성과는 흔히 공통적인 재산으로 되는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점과 관련시켜 볼 때, 민족 내, 외부의 계급적 갈등이 첨예하게 격화되는 시기의 문학은 현실의 주요한 명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에 대한 관념적 태도를 지향하는 논자들은 문예작품 대부분이 개인의 창작활동이며, 예술작품이 개인의 의식세계나 세계감각, 영감의 표현이기에, 개인의 내적 생활 이외에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술적 행위’와 ‘문학적 과정’의 원인을 작가의 개성에서 찾으려 한다. 또한 작가의 생활에 연관된 ‘사실’이나 ‘기록’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문학적 과정'을 작가의 창조적 전기의 재료로서 설명한다. 그러나 문학이란 작가의 사회의식과 당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이해를 문자로 표현한 형식이란 점에서 작가의 ‘의식’과 ‘행위'는 임의의 다른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작가 자신이 처한 계급적 기초 위에서 성장하고 또한 투쟁하게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식민지하 ‘여성 문학’의 위치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시도이며, 사회적, 역사적 모순을 혁파하려는 ‘대자적 존재’로의 자리 매김을 문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시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Elaine Showalter는 여류문학의 성격을 여성적 문학(Feminine Literature), 여성해방문학(Feminist Literatuer), 여성문학(Female Literatuer)로 나눈다. “‘여성적 문학’은 여성해방의식과 무관한 남성원리에 의해 형성된 여성상을 추구하는 문학이며, ‘여성해방문학’은 여성해방의식을 수용하면서 형성되어지는 여성해방의지를 내포하는 문학, ‘여성문학’은 사회적 성차에 의해 구별되어지는 제 2의 성을 극복한 여성이 주체가 되는 여성, 즉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상을 지향하는 문학”이라고 대별한 바 있다. 그러나 1920~30년대 여류문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 세 가지 요건이 모두 혼재되어 있다.
문학이란 당시대가 안고 있는 제 모순을 극복하려는 작가들의 치열한 정신적인 기록이다. 과도기일수록 거센 시대적 변혁을 겪을 수밖에 없기에 그 변혁기에 가장 억압을 당하는 계급은 바로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약자’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기에 결국 ‘농민’, ‘노동자’ 그리고 ‘여성’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의 문학적 근간은 약자의 현실에 대한 고발과 항변적 성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성문학’이란 여성작가에 의해 현실 비판적인 성격을 띠면서 여성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한 리얼리즘으로 다루고 있는 문학인 것이다. ‘여성문학’이 전통적 잔재를 극복하고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실존의 문제를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우회적으로 제시하는 도구로서의 문학적 차원에서 보면, ‘여성문학’은 식민지하 과도기의 여성의 고유한 경험과 존재가치를 새로운 통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실로 우리 문학사에 주요한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기실 여류문인이 한국 문학사 전면에 나타나 성과를 보인 것은 ‘백수광부’의 죽음을 다룬 고대 ‘여옥’, 중세에 와서는 사대부 문학의 고답적이고 폐쇄성을 혁파한 ‘황진이’, ‘홍낭’, 가부장적 세계에 갇힌 ‘규방의 한’을 다룬 ‘허난설헌’,과 여류문필가로도 명성을 날린 ‘신사임당’, 등 이들은 여성성이 두드러진 문학적 성과를 보인바 있다. 이들은 모두 현실적인 리얼리티를 문학적 토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의의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문학적 성과가 18세기 와서는 ‘실학’과 ‘동학’의 사회 혁신적인 인식을 일부 토대가 되어 ‘반상의 차별’, ‘적서의 차별’과 함께 ‘남녀의 차별’을 혁파할 것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과부의 개가를 사회문제로 이슈화하였던 ‘갑오경장’은 변화하는 여성관을 적절히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하 ‘여성문학’이 보인 성과에 비해 한국 문단사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식민지하에서 이룬 ‘문학적 성과’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가 상당히 부정적이라는 문제와 함께, 당시 남성중심 문단의 ‘성적인 편향성’도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또한 분단 이후, 남·북한 서로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맞는 문학적 성과를 도출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할 수가 있다. 오늘날까지 강경애를 빼면 1920~30년대 여류문인들의 문학적 성과에 대한 재조명이 미비하다는 점은, 아직도 여성문학에 대한 전망과 이해 그리고 평가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일례로 백철이 백신애에 대하여 “주관적인 편견에 치우친 점에서 보편성을 잃었다”는 표현을 쓴 것과는 달리 박영희가 쓴 「현상단편서후감」『조선일보』(1929.1.2)에는 “어떻게 보면 매우 흥분된 듯 하면서도 어데 까지나 이지와 비판을 잃지 않는 인간적인 태도라든지, 모녀 사이의 갈등의 눈물겨운 정경은 독자의 가슴에 감명을 준다”는 극찬이 상반되게 나오기도 했다. 후대 서울대 김윤식 교수는 「백신애 연구」(1986)에서 “처절한 인간고의 실상에서 느끼는 비장미 속에서도 삶의 고귀한 가치와 밑바닥에 깔린 아픔과도 같은 묻혀있는 진실을 캐내려는 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쓰인 것이 백신애 문학의 특징이다”는 긍정적인 평가는 오히려 문학 비평가들의 그간의 부실한 조명을 역반증하는 평가로 보일 정도다. 이외에도 여성문학의 한계에 대한 지적은 안회남의 「소설가 박화성론」『여성』(1938.2)과 김문집의 「여류작가의 성적 귀환론」『비평문학』(1938) 등에도 나타나고 있다.
2. 일제의 문화정책과 비판적 사실주의의 성격
백신애의 일부 작품에 나타나는 비판적 사실주의적 경향을 일제의 문화정책과 연동하여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오늘날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관하여 ‘자유’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꼽는다. 현재는 권력에 의한 통제보다 자본이나 문화에 의한 통제가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제국주의’를 단순히 경제적, 군사적인 면에서 지배 및 착취의 체제라고만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속적인 지배와 착취를 위해서는 ‘문화적 지배’가 필수적이다. 그 전략은 ‘엘리트층을 전향’시키는 것과 ‘대중을 공략’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1930년대 현실에서 일제 ‘문화정책’의 시혜에 따른 문학적 ‘표현 자유’와 ‘출판의 자유’가 과연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뤄진 것이었는가는 식민지라고 하는 정치적 역사적 질곡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 ‘조선사회의 이해’는 중요하다.
경제학자 박현채는 “식민지시대 조선 사회는 일본제국주의의 군사적 정치적 강점의 피억압 상태와 그로 인해 형성된 식민지 반봉건사회의 성격을 지니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치는 모든 소설가들과 여류소설가들의 관심은 바로 ‘빈궁’과 반봉건 사회체제의 ‘모순에 대한 항거’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빈궁’과 ‘반봉건체제에 대한 항거’가 식민지 조선의 특수한 처지에서 본다면 민족 내의 제 모순보다 제국주의와 제국 자본계급의 외부적 모순이 더 심각하였다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탈 역사적인 인식이 반영되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실제로 ‘무라다’(村田)가 쓴 『조선의 생활과 문화』를 보면 “반도인 스스로를 구하려는 것은 결코 자유도 아니요, 독립도 아니다. 근면과 노력이다. 그들은 헛되이 반도의 독립을 외치기보다 먼저 정신의 독립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이를 일제의 저강도 ‘문화 정책’과 관련해 봤을 때 지식인들에게 정치, 산업, 교육, 결사, 자치운동과 물산과 같은 운동을 보장해 줌으로써, ‘합법적인 통치 내의 운동’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식민지 통치 정책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북한은 『조선문학개관』을 통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의 소설문학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비판적 사실주의’의 작품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조명희, 리기영, 강경애, 엄홍섭, 리북명은 ‘프롤레타리아 소설 작가’로 그리고 채만식, 심훈, 리효석은 ‘비판적 사실주의 작가’로 분류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1920년대 전반기 소설문학의 특징이란,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와 착취사회현실에 대한 울분과 반항의식을 주로 개별적이며 자연발생적으로 보여주었지만, 1930년대의 소설은 일제와 지주, 자본가들을 반대하는 로동자 농민들의 투쟁을 목적의식적이며 조직적인 대중적 투쟁 형태로 반영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그 어디에도 백신애와 관련된 평가를 볼 수 없다. 이는 백신애의 오빠 백기호의 남로당 활동의 정치적 영향일 것이라는 추측과 백신애 작품의 리얼리티를 평가 절하했기 때문이라고 추측 가능하다. 비록 1930년대는 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의 대립이 무너지면서 문학의 난맥상을 보였지만 이러한 난맥상 속에 오히려 여류문인들이 문단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여성의 문학적인 불균형을 해소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3. 언론이 주도한 빈궁문학의 전개 양상
식민지하 언론이 친일적인 성향을 띄게 된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언론은 제국주의에 의해 발생하는 민족 내, 외부의 문제를 단순히 민족 내부의 문제로 호도하고 나아가 독립을 위한 정치나 무장봉기를 사회변혁운동으로, 즉 차선적인 행태로의 전환을 꾀하는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다. 또한 당시 사회적 관심이 가장 집중된 ‘빈궁’과 ‘절대빈궁’ 사이에도 심각한 괴리가 발생한다. ‘절대빈궁’이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절대로 ‘빈궁’을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으로 빈궁할 수밖에 없는 외부적 모순이었지만 ‘빈궁’을 ‘나태’와 ‘무능력’ 그리고 ‘민족내부의 문제’만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인식의 기저를 형성하게 된 이유로 기존 언론의 호도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리얼리즘의 중요 제재가 되는 것은 바로 ‘밥’, 즉 ‘빈궁’에 대한 사실주의적 접근이다. E.M.Poster가 “인간사란 ‘출생’, ‘밥' , ‘잠’, ‘애정’, ‘죽음’ 등 다섯 가지 제재로 이루어진다”고 분류한 바 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한국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절대빈곤’을 소재로 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울러 1930년대 문단에서 탈 이데올로기적인 ‘순수문학’을 표방하던 쪽에서조차 ‘빈궁’은 다루기 좋은 문학적 소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7년 최재서는 「빈곤과 문학」『조선일보』(1937. 2. 27- 3. 3) 에서 “우리는 작품의 취재에 있어서 도회보다는 농촌, 지식인보다는 농민, 부유보다는 빈곤, 소비보다는 생산, 향락보다는 수난이 늘 우세함을 가리켜 현대 조선 문학의 경향이 실재적이라고 본다”고 설파 했다. 이러한 사실은 언론이 식민지의 제 모순을 드러내고 그 원인을 밝히는 문제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식민지내의 민족 모순을 단순히 빈궁문학 쪽으로 회유했다는 기록으로 지적할 수 있다.
특히 동아일보는 1923년 10월 26일자「빈민에게로 가라」라는 사설을 통하여 “문사야 예술가야 문학을 지을 지어다. 빈민의 예술을 지을 지어다. 조선은 빈민의 나라이니 조선의 문학예술은 빈민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농민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어려운 문학 값비싼 예술은 빈민국의 조선에서는 감상할 사람이 없다”고 선동함으로써 1920년대와 1930년대가 오직 ‘빈궁’만이 소설의 주요 소재여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는 ‘빈궁문제’를 문학적으로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언론이나 국가가 특정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주도하는 것은 언제나 부정적이다. 그것은 제국주의 지배와 식민자본이라는 문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궁’의 문제가 소설 속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을 수는 있었지만 임종국이 『한국문학의 민중사』(1986. 실천문학사)에서 밝힌 것처럼, ‘빈궁’의 문제가 조선조 말엽의 부패한 관료들의 가렴주구와 일제 식민지 정책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세태의 반영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내재하고 있었다.
개화기와 일제시기의 신문기사를 보면 주로 ‘여성’과 ‘결혼’에 대한 인식변화를 다룸으로써 식민지의 모순보다 사회문제에 대중의 관심을 돌리고자 했다. 주로 ‘교육’, ‘자유혼의 필요성’과 ‘조혼의 금지’등 주로 ‘가정사의 폐단’이 주류로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20년 6월 2일자 동아일보 사설「여자 해방의 문제」에서는 “연즉 여자해방문제의 본질은 그 정신적 생명을 충분히 발휘케 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케 함이니 그 제일 방법은 교육의 진흥이라”라고 하여 교육의 진흥을 첫째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또한 同 1922년 1월 8일자 사설「조선여자여 태양에 面하여 立하라」에서는 노예적 노고와 인습에서 벗어나라고 부추기고 있다. 특히 이광수의 ‘자유연애론’은 당시 전통 성윤리에 억압되었던 여성들에게 ‘사회적 해방론’을 대두하게 만들고 전체적인 운동으로 퍼져나게 했다. 同 1930년 11월 5일자 「성도덕을 논함」이라는 사설을 통해 “여자의 지위의 향상을 위한 일 수단으로서 ‘이혼의 자유’는 충분한 사회적 필연성을 가진 개혁인 것을 認코자 하는 자다”, 同 1938년 10월 19일「조혼과 부모의 의무」라는 사설에서는 ‘이혼의 폐해’가 ‘강제결혼’에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1917년「의심의 소녀」로『청춘』에 당선되었던 김명순, 1925년「추석전야 」를『조선 문단』에 발표한 박화성, 1935. 2월에「이혼고백서」를『삼천리』에 쓴 나혜석, 남성과 부모로부터의 해방 및 기존 가정의 윤리로부터 해방을 부르짖었던 김일엽, 그 외 최정희, 김말봉, 이선희, 임옥인, 강경애 등의 작품 속엔 빈궁과 더불어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윤리에 대한 반감이 신랄하게 작품에 반영시키게 됐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자극 받은 것이었다. 실제로 케이트 밀레트는 ‘성의 정치학’을 통하여 “가부장제는 카스트와 계급, 봉건제와 관료제 등 어떤 형식을 막론하고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을 포괄한다. 물론 역사적 시기와 장소에 따라 유형은 다르지만 원리는 같다” 고 말한다. 여성을 억압하는 힘은 가부장제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모든 가부장제는 사회관계에 내재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일제의 문화정책에 편승하여 『신생활 』,『여자시론』,『신가정』,『부녀지광』,『부녀세계』,『현대부인』등의 잡지와「조선여자 기독 청년회」,「조선여성동우회」,「근우회」등 각종 여성단체들이 생기고 급속하게 ‘신여성’이라는 새로운 여성상이 정립된다. 그러나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의 지적처럼 여성의 문제가 단지 여성만의 문제에 그쳐서는 안 되며 가부장제, 자본, 국가라는 삼중의 질곡을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문제를 단순히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남성의 ‘성적 폭력’에만 주목한 것은 당대 여류들의 한계라고 비판 받을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 셈이다. 1920년대가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이라는 문제에 직면함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궁핍한 시대였다면, 1930년대는 이러한 토대 위에 일제의 문화적인 정책 아래 다양한 ‘사조‘와 ‘형식’들이 백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여파로 일부 문인들의 ‘전향’과 ‘지하화’를 가져왔으며 일부는 ‘문인보국회’처럼 적극적으로 일제에 참여하게 된다. 그 분기점에 바로 KAPF의 붕괴와 해체가 있었다. 제국주의가 문화적인 유연성을 가지고 저강도 식민지 정책으로의 진행을 모색했을 때, 억압받는 개인과 집단은 정치적으로 무력해 진다. 제국주의가 제공하는 문화적 토대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안정적으로 수용,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문제에만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즈음 문단은 탈 이데올로기를 선언하게 된다. 따라서 문학의 개인주의적 지향이 결국 민족전체의 현실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 여지를 박탈당하게 된다.
문학운동이 사회변혁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했던 임화는 고리키, 함슨, 기싱과 같이 가난한 생활체험이 어떻게 무산문학을 낳았는가에 대한 이해를 심화 시키고 더불어 지식인 출신이 무산자 의식을 그리는 작품도 훌륭하다는 논리를 편다. 그 예로 마르크스, 엥겔스,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을 든다. 하지만 식민지 현실에서 지식여성의 선택의 폭은 아주 좁았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문학을 통해 당대의 고민을 피력한 바와 같이 당시 여류들도 민족 내외의 제 모순을 고발하는 도구로써의 ‘문학’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열정적으로 피력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성문학은 처음부터 하나의 ‘운동적 성격’이 내재될 수밖에 없었다. 백신애도 여성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문학을 선택했으며 경향은 바로 ‘비판적 사실주의’였다. 그러나 ‘비판적 사실주의’ 계열의 작가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약점은 당대 사회의 사회악의 근원이, 부조리한 사회제도 자체의 모순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했다는 점이며 , 이는 결국 식민지 치하의 환경에 대한 인식 부족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셈이 됐다. 즉 당대 현실의 모순을 식민지제도 자체의 모순과 결부시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작품에 반영된 모든 모순이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모순관계로 보거나 필연적인 파탄만을 그려놓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4. 백신애 작품 속에 나타난 타자의 논리
페미니즘이 ‘여성해방’이라는 실천명제를 전제로 한다면 ‘문학행위’도 운동론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패러다임이 형성된다. 최근 논의의 경우 ‘여성해방’은 곧 ‘인간해방’이다는 관점을 취하는 기존의 페미니즘의 경우와 달리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닌, 여성과 남성이 공존, 화해, 조화를 이루는 ‘에코 페미니즘’의 전개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타자로서 체험하는 ‘타자논리’ 즉 ‘자아’와 ‘타자’ 간 분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합치시키는 ‘타자를 향한 욕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열망에 대하여 “타자에 대한 열망은 타자를 타자로서 열망할 뿐이지 타자를 통합시키거나 동화시키는 구조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하여 지크문트 프로이트나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경우처럼 “타자는 또 다른 나 자신의 얼굴일 뿐”이라는 지적은 결국 타자를 병리학적 현상과 관련시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식민지의 제 모순과 함께 가부장적 사회의 문제를 혁파하려는 백신애의 문학 활동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타자지향의 운동적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백신애의 타자지향은 자전적 소설(autobiographical fictoin)의 밑바닥에 깔려있다. 백신애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를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고의적인 픽션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신의 내면적 갈등과 대립적 요소들을 작품 속에 반영시켜 혁신적인 자아를 나타냄과 동시에 이러한 자아가 좌절을 겪는 내용을 작품화하였다.「나의 어머니」,「낙오」,「혼명에서」등의 소설 속에 나타나는 모든 주인공들이 모두 ‘사회혁신의 의지를 지닌 여성’들이란 점에서 곧 ‘주인공의 의지’가 ‘백신애의 의지’로 전이를 꾀한다. 백신애의 자전적 소설인「나의 어머니」의 경우 ‘나’와 ‘절대 타자’의 위치로 설정시킨 ‘어머니’의 세계관을 통해 ‘혁신성’과 ‘보수성’으로 전제하고 대립의 틀로 제시한다. 또한 그 대립의 틀에서 ‘타자로서의 자신의 인식’을 보여 줌으로써 소설이 가진 ‘허구성’보다 ‘기록성’에 더 많은 효과를 보았다. 보통학교 교원이었던 자신 즉 ‘나’는 실제로 ‘여자청년회’를 조직한 이유로 학교로부터 권고사직 당한 자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어머니는 나의 모든 사회적인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갈등을 드러내는 인물이며 가부장적 질서를 요구하는 사회인습의 대변자로 노출시키고 있다. 그러나 백신애는 ‘절대타자’로서의 ‘어머니’를 특히 외아들 (백기호)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입장에서 적극 수용한다. 사회주의적 경향을 지닌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혈육애로 받아들임으로써 백신애의 타자논리는 ‘이중적 성격’을 갖게 된다. 즉 자신의 어머니를 구시대적인 여성의 전형이라 단정하고 모계중심 서사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도 스스로 함몰된 것이다.
‘이중적 타자 논리’는 다시 작품 「낙오」의 ‘경순’의 행태를 빌어 나타난다. 작품 「낙오」에서는 주인공인 ‘정희’와 ‘경순’은 같은 학교 교원이며 사회운동가로의 정진을 위해 결혼보다는 유학을 꿈꾸는 인물로 설정됐다.「낙오」의 시점은 ‘경순’에게 맞추어져 있다. ‘정희’가 자신의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동경유학을 떠나버리는 적극적인 성격을 부러워하면서도 ‘경순’은 ‘정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하지만 ‘정희’를 자신의 의지를 대신하는 인물로 인정함에 따라 ‘정희’는 오히려 ‘경순’을 ‘낙오자’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러한 플롯은 다분히 작자의 인물 성격과 배치가 의도적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백신애는 홀로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바 있으니 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논리가 오히려 자신의 논리를 대변하는 ‘내재적 이중 타자’ 가 된 셈이다. 서간체형식을 빈「혼명에서」는 이혼한 신여성이 ‘S’라는 사회운동가(남성)를 만나 토론하고 서로 혁신의지를 북돋우는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연한 만남을 세 번이나 강조함으로써 ‘우연적인 만남’보다 ‘필연적인 만남’이었음을 설정시킨다. 그러나 ‘S’가 사망한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불굴의 신념을 불어넣던 ‘S’가 돌연한 사망에 이르는 것은 ‘S’가 현실인물로 설정되었기보다 자신의 의지를 북돋우는 의지의 대체물(절대 타자)로의 설정인물이라는 해석이 가능해 진다. 또한 ‘S’가 죽음으로 처리된 것은 역시 백신애의 ‘이중적 타자논리’를 강화시키는 장치가 된다. 이는 심훈작품「상록수」의 경우 ‘채영신’과 ‘김동욱’과 같은 관계의 인물설정과 같은 맥락이다. 대화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주제는 그의 어머니의 딸에 대한 끊임없는 인습의 강요요, 자신의 병(위병)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만큼 백신애는 자신의 삶에 있어 ‘어머니’와 ‘병’은 그녀의 전체 삶을 지배하는 요소가 된다. 그것은 바로 백신애를 ‘자아’와 ‘타자’로서의 이중적 삶을 강요하는 중요한 억압으로 작용한다. 결국 ‘타자’를 ‘자아’ 안으로 끌어 들이려는 의지가 강하게 반영 된 것처럼「나의 어머니」,「낙오」,「혼명에서」작품에서 제시되는 신여성상도 다분히 개인적인 의지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작품 속에 나타난 비판적 리얼리티
리얼리즘이란 ‘재현성’에 주목한다. 따라서 리얼리즘 작가들은 마치 거울에 사물을 비추듯이 삶의 모습을 모방하고 재현한다. 비록 그 ‘재현성’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예술가의 주관성과 격변하는 삶의 양태가 고정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리얼리스트들처럼 ‘삶의 실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이들은 없을 것이다. 부하린은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을 설명하면서 “내용은 확실히 사회적 환경에 의하여 결정된다. 일정한 순간, 일정한 시간에 인간의 심장을 움직이는 것이 예술적 형상을 빌어 표현된다”고 말한다. 결국 작품의 내용은 작품 속에 반영된 ‘계급적 현실’이라는 뜻이다. 1920∼1930년대의 민족현실의 내부적 관심은 ‘궁핍’에 쏠려 있었다. 식민지하의 궁핍한 현실을 묘사하라고 선동한 언론과 문학은 유화적인 자세를 보인 식민정책에 의해 알게 모르게 민족 내부의 궁핍한 현실만을 다루게 된다. 그리고 궁핍한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성적 착취’와 ‘윤리적 파탄’, 그리고 전통 가부장제에 의한 모순들이 무능한 남성들의 인식과 봉건적인 잔재에 의한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유도되었다. 빈궁문학의 일단을 보여줬던 김동인조차도 『한국근대 소설고』를 통해 이광수 소설은 ‘도덕주의’와 ‘계몽주의’ 일변도의 문학적 지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신동욱의 견해처럼 소설 속에 나타나는 일개인의 ‘성격’이나 ‘행태’를 통해 집단이나 전체 사회를 암시하고자 했을 경우, 한 작품의 주제를 전면에 노출시키는 것 보다 훨씬 세련된 우회적 표현일지 모른다. 실제로 김동인은 ‘선동-선전’에서 다시 ‘암시’로의 문학적 변화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 밖에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가난’과 ‘죽음’과 ‘혼란’을 다룬 작품은 무수히 많다. 1920년대 궁핍의 문제를 작품화한 나도향, 현진건, 죽음의 문제를 병적이고 종말론적으로 그린 김동인, 전영택, 현진건, 염상섭, 나도향, 1930년대 혼란과 부정적 이미지와 풍자를 주로 했던 채만식, 유진오, 이효석, 농촌 문제의 리얼리티를 보여줬던 이무영, 박영준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소설가 박화성의 경우 이러한 암시적 소설기법보다 직접적인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여성문학의 긍정적인 면은 바로 식민지의 문화적인 지배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이 바로 ‘현실 원리(reality principle)’를 적극 수용한 것이다. 목포의 여직공들이 겪는 노동의 문제와 생활의 피폐성을 묘사한 「추석전야」, 실업자들의 노동쟁의를 그린 「하수도 공사」, 영산포 농민들의 문제를 직접 취재해서 쓴 「한귀」등, 궁핍의 현장에 대한 직접적인 실태 묘사를 통해 자연이든지 권력이든지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 강한 작품을 그려냈다.「의심의 소녀 」를 쓴 김명순은 죽음으로 남존여비 사상에 도전하는 여성상을 리얼하게 그려냈으며, 김일엽도 「어느 소녀의 死」를 통해 전통적 혼례관에 자살로 반기를 들고 있다. 나혜석도「이상적 부인」을 『학지광』(1914)을 통해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여성의 문제와 억압 없는 ‘성의 문제’를 피력하기도 했다는 것은 남성 소설가들의 현실 인식보다 더 훌륭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백신애는 작품「적빈」,「악부자」,「호도」의 경우, 궁핍한 삶에 의한 ‘파탄’을 「소독부」와 「광인수기」는 ‘성 윤리의 파탄’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궁핍의 문제는 ‘절대 빈궁’의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신애는 ‘빈궁’을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 1930년대의 농촌의 피폐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백신애 작품 중 가장 리얼리티가 뛰어난 「적빈」,「호도」의 경우, 김동인의 「감자」에서 제시한 것처럼 ‘궁핍에 의한 파탄’을 그리고 있다. 「적빈」내용 중 ‘매촌댁’은 가문과 문벌을 중시했던 송시열의 후손으로, 그리고 ‘옥계댁’은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집안의 딸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옥계 댁의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로 매촌 댁의 아들은 ‘돼지’라는 별명이 암시하는 것처럼 탐욕스럽고 게으른 ‘무위도식자’로 그려냄으로써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부정적으로 그렸다. 작품「악부자」의 경우 1930년대의 식민지 농업정책에 의한 농촌의 피폐를 말하기보다 ‘경춘 부부’가 이름 탓에 가난하게 되었다는 엉뚱한 빌미를 잡는다. 방천 공사장에서 임금을 더 받기 위해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병과 기아에 처한 아내를 구하고자하나 아내는 끝내 죽고 만다는 아이러니는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과 그 귀결이 비슷하다. 작품「호도」에서는 옥계 댁의 비극이 더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마을 상동식에 쓰일 음식을 무의식중에 먹은 죄로 동네사람에게 맞아죽게 되는데, 그녀는 당시 임산부였다. 특히 옥계 댁이 옛 구애자 김문서의 농장의 봄무우의 고랑에서 봄무우 하나를 뽑아먹고 해산을 하는 장면은 가히 살인적인 궁핍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위의 두 작품이 궁핍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적빈」은 빈궁의 문제를 노출시키면서도 매촌 댁이 겪는 며느리의 ‘해산’을 통하여 희망적 메시지를 보이기도 한다. 큰며느리 벙어리의 해산장면을 통해 기아와 살인적인 노동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의 문제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남성 부재’를 고발한 작품이었다.
‘남성의 부재’는 곧 작가의 ‘역사성 부재’를 더불어 생각하게 한다. 백신애는 ‘남성 부재’의 코드를 남성의 ‘무지’와 ‘무능’, ‘게으름’ 그리고 ‘성격파탄’, ‘성적착취’ 통해서 나타내고자 한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부’와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계급은 바로 친일의 문제와 결부된다는 것을 영천의 거상이며 친일파였던 아버지의 경우를 통해 잘 알고 있는 백신애를 생각한다면 ‘남성의 부재’나 무지’, ‘무능’, ‘게으름’으로는 ‘궁핍’의 코드가 다 설명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생산기능을 담당했던 가족과 가정의 해체를 상징하는 대표작인「적빈」에 나타나는‘돼지’라는 매촌 댁의 큰아들의 경우, 개인적인 무능력으로 장치된 인물인 ‘돼지’는 술에 대한 탐닉, 그리고 며느리 해산약이라고 속인 양식까지 먹어버린 파렴치한 행동을 보인다. 즉 행위는 있으나 남성 부재의 원인은 작품 어디에도 암시 되지 않는다.「호도」에 나타나는 옥계 댁의 남편 ‘최가’ 역시 성격파탄으로 그려진다. 옥계 댁이 낳은 여자아기를 발로 차 죽이는 장면은 극단적인 인물의 배치에 따른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악부자」에 나오는 경춘은 ‘사드락병’이라는 지병을 가진 사람으로 제시되고 있다. ‘사드락병’은 결국 완치 불가능하여 전 가족이 병사하는 문제로 귀결시켰다. ‘사드락 병’을 가족사의 비극적 현실로만 장치되었을 뿐 ‘병’은 곧 ‘빈궁의 문제’로 다시 식민지 사회의 ‘구조악’의 문제로 확산되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작품이 리얼리티 묘사에 충실했다 하더라도 백신애 작품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5-2 작품 속에 나타난 백신애의 여성성에 대한 인식
전통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가족의 연대 속에서 자리를 차지한다. 가족의 혈연적 기초란 곧 ‘결혼 관계’를 의미하는데, 당시는 농촌생활이 궁핍한 탓으로 15세 미만의 여성들이 ‘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표면적으로는 ‘조혼’이었지만 매매혼에 가까운 것이었다. 빈농의 경우 나이 차이가 너무 커서 이를 극복하지 못한 어린 신부들이 남편들을 살해하는 경우가 빈번했다는 당시 기록이 많다. 백신애는 빈궁에 의한 ‘매매혼’ 문제를 ‘성적 핍박의 문제’로 전면에 내세운다. 「소독부」의 경우 14세에 최서방에게 시집을 온 ‘소녀’가 그녀를 좋아하는 ‘갑술’에 의해 독살된 남편의 죽음을 여자라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 쓴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것은 ‘갑술’이지만 그 죄는 ‘어린 신부’가 받는다. 여성을 ‘惡’의 근원으로 보는 당시의 시각이 잘 나타나있다.「광인수기」는 남편의 외도에 미쳐버린 한 여인이 다리 밑에서 하늘을 향해 저주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특히 20년 가정을 지켜왔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신여성에 끌려 20년 가정사는 아무런 가치를 보호받지 못한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집으로 가던 중, 비 오는 다리 밑에서 저주를 퍼붓는 여성은 광인이다. 여성의 현실이 거의 광인에 가깝게 만들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고발한다.
이외에도 남성들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정현수」,「학사」,「어느 정원의 풍경」,「일여인」등의 작품을 통해 백신애의 여성성과 관련시켜 볼 수 있다. 작품 「정현수」는 치과의사로 세상 사람들에 대한 ‘허위의식’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혼란스럽게 내리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혼란은 결국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으로 나타났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원인인지 정확히 드러내지 못한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식인 이병환이 주인공으로 나오는「학사」에서는 식민지에서 ‘고등 놈팽이’가 되어 가는 자신을 끝내 알지 못한다. 이 작품은 당대 지식인들이 어떻게 현실에 부적응했는지를 잘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지식인들의 사회 부적응이 개인의 욕망으로 귀결 된 것은 백신애의 의식 한계를 드러낸다. 19세기 전반 러시아 문학에 많이 등장하던 잉여인간형과는 성격상 판이하게 다른 오히려 믿을 만한 사람들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당하는 지식인으로 그려진다.「어느 정원의 풍경」은 부농 김상렬의 이야기다. 이혼을 원하는 아들의 청을 들어주고 보증의 문제로 진 채무도 변제할 요량으로 법률을 자문을 구한 친구 이정환에게 오히려 전 재산을 빼앗길 처지에 이르는 내용이다. 「일여인」은 신여성에 대한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있다. 신여성을 추구하는 구여성의 이중적인 행동의 허위를 그리고 있다. 백신애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여성성은 스스로 신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전통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에서 신여성에 이르기 까지 동정과 비판이 혼재되어 이중적인 시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5-3 식민지 수탈과 유이민에 대한 백신애의 현실의식
자전적 소설류와 절대 빈궁의 현실 반영류의 작품들에 비해 식민지 수탈과 유이민에 관련된 작품에서는 백신애의 현실 인식이 돋보인다. 식민지하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당시 국경의 문제가 애매했던 만주와 시베리아로 떠나게 된다. 따라서 일본의 토지 수탈정책에 의해 절대 빈궁에 처했던 소작농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나서는 ‘유이민’들의 비애를 그린「꺼래이」,「멀리 간 동무」,「 가지 말게」등이 백신애 작품에 나타난다.「꺼래이」의 경우 ‘소작농’이 아닌 ‘자작농의 몰락’도 다루고 있으며 노정에 가족은 죽음으로 해체된다. 백신애가 인식하는 유이민의 모습은 ‘토지 수탈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가지 말게」의 경우 소작농으로 30여 년을 지내왔던 순삼이가 생명과 같은 땅을 떠나가기로 한 것은 바로 과중한 ‘토지세’와 식민지 ‘수탈정책’이다. 그러나 국경을 넘는 유이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고 있는 백신애는 참담한 현실묘사에 집중함으로서 ‘특정한 의도’에 의한 ‘특정한 상황‘의 제시와 묘사라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된다. 시베리아에서 죽은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순이 가족이 시베리아에 왔다가 불법 입국자로 추방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꺼래이」는 토지 수탈에 대한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준다. 순이의 가족은 아마 '자작농'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토지를 빼앗기고 새로운 토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의문 없이 순이의 아버지와 같은 ‘꺼래이’들이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는 수용소의 실태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추워서 울고 있는 ‘쿨리의 모습’ 등이 그려진다.
1862년 「삼등열차」를 그렸던 화가 도미에는 도덕적이고 특정한 가치를 특정 대상을 통해 변호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한 의도성을 가졌던 밀레와는 달리 그림 속 노파와 자신을 합치시키고 다시 그 자신을 역사 현장으로 속으로 肉化시켰다. 이는 쿠르베의「돌 깨는 사람들」처럼 채석장의 현장이 경직되게 그려진 것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측면에서 백신애가 그려놓은 유이민들의 실상은 ‘전경(자신)’과 ‘후경(유이민의 고통)’을 조합시킨 듯 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한계는 파산 농가의 문제가 ‘탐관오리들의 부패’와 ‘일제의 수탈’이 전면에 부각시키지 못하는 고로 ‘유이민의 양산’에 대한 역사적 조망을 피력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 비록 작자 자신의 시베리아의 방랑체험에서 나온 작품이었지만 그 체험적 진실이 당대 인식으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비판은 백신애가 왜 시베리아로 갔는가에 대한 의문처럼 분명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6. 백신애의 현실 인식의 한계와 문학적 성과에 대한 재 이해
백신애의 작품은 ‘자아 반영-타자화’가 기본적인 베이스다. 이 외에 내적 갈등을 드러내는 작품류 「낙오」, 「나의 어머니」, 「혼명에서」와 모든 사건의 파멸적 귀결을 쓴 「호도」, 「소독부」, 「광인수기」, 「악부자」, 「적빈」작품류 그리고 시대의 패러디류인 작품「일여인」, 「학사」,「정현수」, 식민지 현실의 제 모순을 다룬 작품 「꺼래이」, 「멀리 간 동무」, 「가지 말게」류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 속에는 ‘자아를 타자화한 억압’과 ‘민족사적 수난’을 대립적으로 연결시킬 접점이 보이지 않는다. 비록 작가 자신을 작품 속에 타자화했다고 보더라도 계몽적인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타자논리의 이중성’은 극복하기 힘든 굴레였을 것이다. 말년에 쓴 작품 「아름다운 노을」은 여성의 ‘성적 욕망’을 다룬 전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순수한 ‘예술적 충동’과 ‘모성’, 그리고 ‘성욕’을 발현하는 작가의식의 궤적을 일 수 있는 작품이다. 영천 출신 백신애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여성운동’과 오빠 백기호를 통해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사상성’이 과연 작품의 리얼리티적 성과를 높이는 외연적 배경이 되었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만드는 탓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풍속적인 소설류에 다름 아니라는 평가에 봉착하게 될 수 있는 「아름다운 노을」은 그녀의 ‘태생적 한계’와 ‘역사인식의 부재‘까지도 드러난다는 비판의 여지가 강하게 남긴다. ‘1인칭 시점’의 빈번한 사용과 ‘전형적인 플롯’과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의도적인 결말’이란 점에서 문학적 성과가 폄훼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신애는 당대 남성 문필가의 ‘변절’ 및 ‘전향‘이라는 부정적인 평가에서 자유로운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작가 백기만이 “경북 대구 지방에서 친일 하지 않은 작가는 안동의 이육사와 영천의 백신애 뿐이다 ”는 평가를 주목해야 한다. 작가의 창작 원천은 분명 ‘정신’이다. 그 정신의 근원은 ‘민족적인 자각’이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작품의 ‘사회적 의의’를 말함이다. 벨린스키가 고골리의 의의를 강조한 것도 고골리의 부정적인 형상창조가 부정적인 현실인식과 비판을 통해 더 높은 이상향의 추구와 맞물려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백신애에게 있어서 ‘여성운동’은 교직을 권고사직 당할 정도로 적극적인 사회운동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도’는 상당히 관념적인 형태로 소설에 반영되었다. 그 이유는 당대 이슈인 ‘궁핍’이나 ‘여성문제’에서 발생하는 리얼리티적 요소가 작가의 뛰어난 ‘현실감각’에 의한 ‘작가적 안목’을 작품화하는데 전형적인 소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백신애 소설에는 적극적이고 도발적인 저항의식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 할 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빈궁 문제’에 있어서나 ‘여성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태생, 즉 부유한 경제적 여유를 누린 백신애 입장에서는 ‘절대 빈궁’이나 ‘구조악’에 대한 몰이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절대 빈궁’의 문제를 ‘성적인 핍박’과 연결함으로써 이중적인 억압에 시달리는 여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나, 작품 속의 ‘남성’은 ‘여성’을 핍박하는 장치로 제시된 것은 문학 사회학적 측면에서 여성의 존엄성이나 자존의식을 회복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다. 이는 사적 이해를 극복하고 자신이 처한 당대의 현실을 규명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에서 보면 한인간의 복잡한 체험을 형상화한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아울러 ‘여성의 문제’를 ‘폭력적인 가족관계’나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전환기의 식민지 문학으로서 ‘정치적 이슈’와 ‘사회적 이슈’를 분리한 이중적 태도라고 지적 할 수 있다. 식민지 제 모순을 내부로 돌려버림으로써 일제의 ‘지배 논리’, 즉 ‘문화적 지배논리’와 상응했다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을 묘사한 것만으로는 작가의 올바른 인식을 보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당시 계몽적인 단선적 운동의 문학이 진정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에 직접적인 타당성을 주기 힘들다는 사실은 여전히 지식인의 삶은 문학적 외피에 숨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백신애문학의 ‘비판적 사실주의’의 성과는 ‘여성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Female Literature)을 쓴 작가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백신애가 활동했던 1930년대가 일본 군국주의의 강화시기로 문학적 활동이 가장 탄압 받았던 시기며 카프마저 해체되었던 시대였다는 점 둘째, 소부르주아의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민족모순’과 ‘여성문제’ 그리고 ‘계급적 문제의식’을 작품에 반영하고자 했던 열의의 연장선상에서 문학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현장 없이 단순히 해석적이고 관념적인 세태를 그리던 일부 지식 문인들과는 분명 다른 입장을 보여주었다는 점 셋째는 33세에 요절함으로써 그녀가 전 생애를 통해 작품 속에 그녀의 의식이 반영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점이다. 또한 「적빈」, 「꺼래이」,「멀리 간 동무」등 지방의 한 여류의 작품이 이룬 성과가 당대 문학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남성 편향의 문학이 탈 역사적이고 사적 결핍으로 인해 식민지의 제 모순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고 친일문학으로 경도된 점만 보더라도 백신애의 ‘비판적 리얼리티’는 별개의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봐야 한다. 백신애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여성문학의 한 축을 이룬 백신애 문학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도 작품에 관련된 다양한 연구와 생애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시점이다.
향토사료집 골벌(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