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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을 왜 장군의 바다라고 하는지
걸음에 걸음을 더하며, 마음으로 알아집니다.
그대 없는 이 바다에
아릿한 그대 향기는
어찌 이리도 깊고 진할까요?!
그대 없는 이 바다에
보고픈 이내 마음을
어찌하면 전할 수 있을까요?
그대를
잠시 스치기만 했었더라도
나 그대를 깊이 연모했겠지요.
오랜 세월 지나
그대 흔적만으로도
나 그대가
궁금한데... 그리운데...
그대 없는 이 바다에
보고 싶은 그리움으로
잊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다리가 하나 놓여졌습니다.
그 다리 앞에
나 이렇게 서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대를
조용히 그려봅니다.
많이 고맙습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우리 모두의 이순신 장군님~
_그대 없는 이 바다에(이순신대교), Jiri-깽이 아름다운 나의 이야기_
남해안1구간
(부산 오륙도~창원시 진해구 명동) 85km
남해안2구간
(창원시 진해구 명동~마산합포구 진동면) 94km
남해안3구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통영시 덕포리) 82km
남해안4구간
(통영시 덕포리~사천시 삼천포항) 158km
남해안5구간
(사천시 삼천포항~곤양면 석문마을회관) 59km
남해안6구간
(사천시 석문마을회관~하동 남해대교) 55km
이번 7구간 걸음은
경남 하동 남해대교에서부터 섬진강을 건너
경상남도 땅과 이별하고 전라남도 땅으로
임진왜란 7년의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던
노량해전의 그 하동~광양~여수 앞바다~
광양~순천~여수산업단지를 지나
여수시 오천동 모사금해수욕장까지 103km
1구간~7구간까지
누적거리 총 636km
경남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섬을 잇는
남해대교와 너머 노량대교의 모습이 보이고
저 다리를 지나고 너른 바다, 그 바다에서
1598년 11월 18일, 19일(음력)
7년 전쟁인 임진왜란 그 치열했던 마지막 전투가...
10월 01일(금) 밤 대전역에서 21시 11분 열차 탑승,
진주역에 새벽 00시 45분 도착입니다.
택시로 진주역에서 여수 남해대교 앞까지
젊은 기사님께서 본인이 영업 시작하고
가장 먼거리~ 장거리운전이라고 하네요.
"아니 일을 얼마나 하셨는데요?" 하고 물으니
ㅎㅎ 한 달 반 되셨대요^^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 사이 차는 남해대교 인근에 도착하고
기사님께서 장거리 기념~
차비 DC도 해 주셨습니다.
기사님의 응원 받으며 내리니, 깜깜~ 조용~
좁은 골목길을 돌아 내려가 남해대교 앞에서
남해안 7구간 걸음 10월 02일(토) 새벽 1시 30분~
길동무 솜주먹 아우님과 힘차게 뿜뿜~
시작합니다.
아~ 비릿한 바다 냄새~
제법 공기도 차고~
임진왜란은...
지금으로부터 430여년 전인 1592년 4월 13일
부산 동래성을 일본에 빼앗기며 시작된 7년 전쟁으로
20여일만에 한성이 함락
임금인 선조는 제1선발대였던 고니시에 쫓기며
평양, 의주까지 도망~
전국이 이렇게 유린당하는 상황에서
이순신과 전라좌수영의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사천, 당항포, 한산도대첩 등 일본의 바닷길 보급이 좌절
육지에서도 들불 번지듯 일어선 의병들 덕분에 겨우
전라도 땅인 호남만이 살아남았고.
전쟁 발발 2년 전인 1590년
일본에서 전국시대를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은
조선을 지나 명나라를 치는 것
동아시아 조선과 일본의 전쟁에
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명나라가
12월 4만3천이라는 병력을 파견하며 결국 개입을 하게 되고
1593년 다음해에 조선과 연합하여
평양성 탈환 후 일본과 협정
5년간 이어졌던 일본과 명나라와의 강화 결렬로
1597년 1월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범(정유재란)~
이순신장군은 나가 싸우라는 선조의 명에 불복~
백의종군하게 되고
7월 15일 원균의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패배하며~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굳게 지켰던 남해바다를 내주게 되고
고니시 등 진주 남원으로 육지 길도 내주게 됩니다.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1597년 9월 13척의 배로 300여척을 격파하며
명량해전 바닷길을 틀어쥐었고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몰려있었는데...
도요토미가 죽고 조선에 있던 일본군에
본국으로 귀환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순신과 조선수군이 지키고 있던 바다를 피해
살아 나갈 방법은 없었고.
그렇게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과
한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조선군과의
1598년 11월 18일~19일의 마지막 싸움이었던
노량해전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순천왜성에 머물고 있던 제1선발이었던 고니시를 도와
일본으로 가기 위해
사천 등 남해안 왜성에 머물고 있던
왜선 500여척 일본의 장수들이
노량 앞바다로 시커멓게 몰려 들어오게 되었지요.
명나라 진린과 이순신 등 조선수군에 쫓기며
남해를 돌아 나가려던
일본군은 관음포에 갇히게 됐고.
본인을 구하겠다고 와서
긴박하게 싸움이 전개될 때
순천왜성에 있던 고니시는 도주해서 일본으로~
적선 350척 이상을 격침시키며 5만명 가량이 사망~
조선 수군도 이순신 장군님과 수군200명 가량이 전사하며
7년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은 이렇게 이곳에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앞바다가 얼마나 불꽃이 튀며 귀가 먹먹했을지...
말 그대로 지옥불구덩이 바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23전23승의 우리 이순신 장군님과 수군들
밤공기에 취해 걷다가
고포마을 입구쪽에 정자가 있어서
어둔 새벽 잠시 누워 쉬었다 갑니다.
어느덧 날은 조용히 밝았고
운동하는 분들 지나가는 소리에 일어나 채비~
침낭을 가져왔어도 이제 밖은 꽤나 춥습니다.
이 추운데 모기는 아직도 윙윙~
독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인근 고포수변공원 캠핑장
깨끗한 화장실 애용좀 해주고~
이렇게나 많은 장화 본건 처음인 거 같아요.
한밤중에 봤었다면 좀 섬뜩하기도 했을거 같은 모습으로.
섬진강변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멀리 섬진대교가 배알도 광양국가산업단지로 연결되고
삼봉산이 우뚝~
우측의 망덕포구쪽에서
배알도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도 보입니다.
그 사이 둥근 조그만 섬도 앙증맞게 자리하고.
솜주먹 아우님 감 좋아하나?!~
떨어진 감 살피며 먹을만한가~ 들여다보며^^
ㅎㅎㅎ
위쪽에는 도둑가시며 웃자란 풀이 한가득이라~ 못 걸어가고
섬진강변 돌둑으로 내려와서 붙어서 걸어가는데
물이 닿았던 부분은 미끄러워
꽤나 좀 조심스럽게.... 진행.
근디, 솜주먹 아우님
그 커다란 은박돗자리는 어디갔을까나?!
어디에 흘리고 온지도 모르고는 열심히 걷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잠시 머물렀던 고포 정자에 놓고 온듯.
우리가 건너게 될 남해고속도로(순천-부산)의 섬진강교
그 뒤쪽으로 폐다리^^
선답자 방장님께 익히 들었던...
전국구님과 대영호지부장님은
폐다리로 위험해서 안가고
부득이 섬진대교로 건너 진행하셨다~또한 들었었습니다.
우리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솜주먹 아우님 안전줄도 준비해 왔습니다.
이번 구간에서 가장 걱정되면서도
기대되는 그곳으로 지금 갑니다.
경찰차가 한대 지나가는데...
나쁜 짓, 하지 말아야 할 짓 해야하는 우리들
뜨끔~ 눈치 괜시리 보며ㅎㅎㅎ
(가지 말라고 막아놓은 곳으로 가야하니...)
다리 초입 부분
통행 못하도록 다리를 싹뚝~ 절단해 놨네요.
아래로 기어내려갔다가 잘린 다리 옆쪽으로 의쌰~ 올라갑니다.
다행히 사람 다닌 흔적이 있긴해요^^
차량, 오토바이, 자전거는 진입 불가~
녹색의 철조망 울타리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방장님 후기 보니 위에 철조망까지 있어서
좌측 난간을 잡고 간신히 건너셨더라고요.
방장님, 노송님, 희야고문님 세 분이서^^
그런데 가운데 쪽문 자물쇠로 닫혀 있긴 했는데
가방 벗고 아주 간신히 빠져나갈만큼만~
살짝 열리도록 닫혀 있더라고요.
너무 쉽게 빠져나오니 대략 싱거워서
쪼매 실망도 해가며 첫번째 문을 통과해 가고.
다리 위에는 낚시 하는 분이 계셨구요.
이곳 방해하는 사람들 없어서
낚시하러 오면 조용히 세월 낚기 아주 그만이겠어요.
낚시꾼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사람 다닐 정도로만
길이 나져 있는 듯.
다리 반대편도 사람 통행은 가능^^
여기는?? 하하하 옆에 쪽문이 있어요.
다리 끝부분 앞에 가니 이곳도 절단 되어 있어 순간 당황했는데
이리저리 살피니 다리 끝부분에 사다리가 설치~
사다리 없으면 여기 저는 못내려가요.
그냥 다리를 싹뚝 잘라먹어놔서.
자~ 이번 7구간의 복병이었던 다리를
너무도 쉽게 모두 지나왔습니다.
지금 이 아래로 흐르는 물은 구례, 곡성으로 연결되는 섬진강
경남 하동땅에서 이제는 전남 광양땅으로~
섬진강 물줄기가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거
다들 알고 계셨겠죵^^
임진왜란의 배후기지 역할을 했던 전라도 땅인 호남
명과 일본의 오랜 휴전 재협상이 결렬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
원균의 칠천량에서 남해안 재해권을 일본에게 내주며
일본의 고니시, 모리, 가토, 구로다
14만 대군이 북진
일부는 뚫린 남해바다를 통해 섬진강을 타고
구례~남원으로 북상
7월 일본군이 5만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전라도로 가고~
명나라 양원이 이끄는 병력 3천+이복남의 병력1천이 더해져
남원성 안에는 백성들 포함 조명연합 1만이
소식을 듣고 전쟁에 대비.
1597년 8월 12일 남원성에 도착 후
다음날부터 싸움이 총5일간 전개됩니다.
경사가 꽤 가파른 요새인 교룡산성으로 가서 싸우자는
조선 장수들의 말을 무시한 명나라 장수 양원
낮은 성벽 평야 한가운데에 지어진 남원성을 택한 그를 보며
왜 양원에게서 신립장군의 모습이 겹쳐져 떠오르는지...
ㅠㅠ
5만6천의 고니시, 시마즈, 우키타 외
일본의 이름난 장수와 병력이 남원성을 에워쌌고
명나라의 양원 3천 병력포함
이복남(전라도 병마사)의 1천 병력 외 백성 1만의 싸움
"지키는 1만 대 공격하는 5만"
8월13일 일본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명나라 양원과 일본과 남모를 뭔가 협약을 맺었던지..
4일 만에 일본군에 의해 성이 뚫리며
남원성 안에 살아있는 남녀노소 모두 죽이고
일본은 그 시신들의 코를 모두 베어 전리품으로
ㅠㅠ
민관군 1만여명이 죽었던 처참했던 남원성전투
그 와중에 살아나간 사람들이 있었으니
양원과 그 휘하 50여명
명나라에서도 살아 돌아온 양원이 치욕이라 여겼던지
당시 양원의 목은 베어져 조선에 보내졌고
그 수급은 남대문에 걸려 효수 되어졌습니다.
남원이 뚫리고 전주성에 있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도 그대로 줄행랑~
전주성마저 싸움없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맙니다.
죽을 자리인줄 알면서도
끝까지 남원성에서 싸우다 간
이복남 장군과 조명연합군을 이렇게나마 잠시 기려보며...
남원에서의 전투는 1593년에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맞먹을 만큼
군, 관, 민이 함께 싸우다 희생한 전투로
죽었던 장수들을 기리는 충렬사(광해군4년 1612년)며
이곳에서 죽은 조선군, 명군, 남원 백성들의 시신들을 모아
"만인의총"도 세워졌습니다.
2차 진주성 싸움의 격전지도 쉴 때 살짝 다녀왔는데
조만간 별책부록으로 담아보기로 하고^^
섬진강에 왔는데... 그냥 갈 수야 없죠.
인근 살펴가며~
열린 식당이 딱 1곳 있더라고요.
아주머니께서 신랑분이 일찍 일 나가서
가게 문을 열어두셨대요.
이제 아침 8시 조금 넘은 시간~
식당의 메뉴는 달랑 재첩국 1가지만.
^^
아주머니랑 여기 섬진강에서 잡히는 새우가
그렇게 맛있다는 이야기며...
짭짤한 재첩국 한그릇씩 뚝딱~
섬진강표 재첩국 먹을만 합니당.
망덕의 특산물인 전어~
망덕포구가 앞쪽에 자리하고
뒤로는 망덕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나무데크길이 꽤나 위험하더라고요.
나무들이 들뜨기도 했고 중간 중간 구멍도 보이고
그 위를 걸으면서 내내 불안불안~
보수중인 구간도 있고...
그래서 옆쪽 도로로 내려가서 걸었어요.
여기 그러고보니 두 번째로 와본거였어요.
전에 추산대장님 섬진강행 할 때
일부 끝구간 같이 걸었었습니다.
이곳에 오니 그때 기억이 나더라고요.
여기서 사진도 찍었었는데.
그때는 길 개념도 없이 그냥 쫓아서 걷기 바빴었지만
이제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어떤 곳인지
이렇게 조금 들어다봐지며 걷고 있습니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고 되어 있길래
뭘까? 뭐지? 싶었었는데...
정병욱(1922.4.22)은
경남 남해군에서 출생, 하동에서 학교를 다녔고
글쓰는 걸 좋아했었던가 봅니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조선일보에 발표(1940년)되었던 글을 보고 선배였던 윤동주가
기숙사 방으로 찾아와서 만남이 이루어졌었대요.
후에 윤동주와 같이 하숙도 했고
윤동주로부터 자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증정받고
본인의 어머니께 잘 보관해달라~ 이것을 맡기고,
징병에 끌려갔었다고 합니다.
윤동주(1917.12.30)는
만주 길림성에서 출생했고
소학교때 급우들과 함께 잡지를 만들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났던 인재.
1938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기숙사 생활을 했으며~
윤동주도 조선일보에 산문과 시를 발표(1939년)했었구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자선시집 출간의 뜻이 좌절되자
육필로 3부를 작성~
그중 1부를 정병욱에게 증정하게 됩니다.
그 뒤 학교 졸업을 하고
도쿄 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했다가
독립운동 죄목으로 검거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만27세로 순절~
1948년 정병욱의 노력으로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이 세상에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윤동주와 정병욱
이정도 되면 운명적인 만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글이 맺어준 인연~
오랜 세월 알고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 깊이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이 두 사람~
앞으로는 윤동주를 생각할 때
정병욱도 함께 생각날 듯 싶어요.
비록 나이는 달랐지만 서로를 알아봤던 벗.
자신을 알아주는 벗 하나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었을까 싶습니다.
북간도에서 나고 자란 윤동주(만주)와
남녁 바닷가에서 꿈을 키웠던 정병욱(광양 하동 남해)
운명의 선처럼 자리한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의 그 길~
호남정맥 자료 찾아봤을 때
이곳 망덕포구에서 사람들 단체 사진 찍으며 졸업하는 모습~
호남정맥의 날머리인 망덕산과 망덕포구
^^
이곳 정병욱 가옥에 계셨던 분들이 알려줘서
윤동주 시정원 보러~
왔던 길 되돌아 잠시 다녀옵니다.
배낭 놓고 으쌰으쌰 뛰어서~
손으로 직접 썼던 육필원고 3부 중
1부는 지도교수 이양하에게 증정~
1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증정~
정병욱의 어머니가
이 망덕포구 가옥 마루 밑 항아리에 숨겨 보관했던
윤동주의 육필시고와 강처중이 보관한 12편을 묶은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이렇게 탄생~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 윤동주~
"동주야~"
윤동주가 말했던 "나한테 주어진 길"이란 어떤 길이었을까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던 윤동주
어린 나이에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던 그 감성이며...
부끄럼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소년" 시를 읽고 있는 솜주먹 아우님~
그 고운 마음 그 소년 감성
늘 지키며 살길 바라며...
윤동주 시공원에서 한 편 한 편
시집 한 권 넘기듯 읽으며
시공원을 거닐어 봅니다.
망덕포구쪽에서 배알도수변공원이 있는 섬으로 이어지는
물고기 모양 다리.
저 조그만 섬 뒤로 광양산업단지가 넓게 펼쳐지고~
호남정맥할 때 건너게 된다는
천왕산쪽에서 망덕산쪽으로 이어지는 다리
언젠가 건널 날 오겠지요^^
수어천교로 진입해서 건너가야하는데
어떻게 진입할 것인가...
일단 수어천교 아래까지 갔는데
어디로 진입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되돌아 걸어나오다 보니 남해고속도로 다리 아래로
사람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암튼 개구멍 내기 선수들~이라니까요^^
이렇게 길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찾아보질 않아서 그렇지!!
차들 씽씽~ 달리는 수어천교를 건너며~
수어천 좌측으로 천왕산이 자리하고
그 뒤로 망덕산이 빼꼼~
드러난 갯벌에는 작은 갯골이 길을 만들어 그림처럼 보입니다.
자연이 만든 작품... 아름답죠?!~
수어천교 다리 건너자 마자 끝부분
요로코롬 다리 끝부분에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는 사람들만 알아유~ 고급정보^^
물 빠진 수어천~
이곳에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숨구멍 열리는 소리가 딱딱~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뚝방길~ 풀숲을 걸어가 볼까요.
도둑가시 녀석들~ 떼며 걷느라 애좀 먹으며~
이 정도 풀은 그래도 양반측 비단길에 들어요.
벌~ 안쪽 강가에서 한가로움 즐기는
강태공 분들 모습도 보이고.
강 건너 천왕산 능선 자락의 모습~
얼마나 빠질지 벌에 발 살짝 담궈보고도 싶지만,
이번 구간은 열심히 걸어보기로 한 만큼~
100km이상 걸어서
소아암돕기 하려고 작정하고 나선길^^
인근 도로 안쪽으로 편의점 찾아가서
물품 구입좀 하고~
도요새 한 마리는 홀로~ 먹이 찾아 콕콕~
산길은 멧돼지들이 낸 길이라는데...
벌의 길은 누구의 작품인지~
갯골 길이 무슨 암호 같기도 하고.
참 평화로워 보이죠~
새들이 날아와 머무는 이곳
바닷길 건너 광양제철 중.고등학교며 주택단지들
보며 솜주먹 아우님과 걸어가고.
같이 걸음하며 이야기 나눌 벗이
제게도 이렇게 옆에 있습니다.
도촌포구, 와우포구 해안길을 지나며
이쪽 광양에서 광양국가산업단지쪽으로 해서 연결된
이순신대교가 보이기 시작.
전남 여수시 묘도 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마금호수공원 언덕 위에 잠시 올라
소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 펴고 김밥 먹으며
잠시 쉬었다 갑니다.
호수공원 데크길 내려서니...
공사중이래요.
어떡하지? 길 건너자니 에라이~ 귀찮고~
일단 눈치 살살~ 보며 그냥 한쪽으로 걸어가 봅니다.
요로코롬 걷기도 하고~
보도 통행차단 안내~ 우린 그냥 걸어왔어요.
이날도 부지런히 공사하고들 계시더라고요.
뭐라고 하면 길 건너서 가려고 했는데
한쪽으로 잘 걸어서 오니까 뭐라고 하는 분들 없어서^^
이럴 땐 눈 마주치면 절대 안되고.
선샤인해변공원(달빛해변) 및
이순신대교 해변관광 테마거리 조성사업
2020년 06월~2022년 05월까지 공사~
드러난 갯벌에서 시간 보내며
한창 수확중인 아주머니~
이런 모습들 만날 수 있다는 게 어찌나 흐뭇한지...
시간이 지나고나면
이런 모습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겠지요.
이순신대교는 광양국가산단과 여수국가산단을 연결하는
총길이 2,260m의 현수교
순수 우리 기술로 건설한 국내 최장, 세계 4위 규모
주탑과 주탑 사이 거리 1,545m
1,545년 4월28일(음3월8일)~
이순신 장군 탄생연도네요.
양쪽 주탑은 남산(262m)이나 63빌딩(249m)보다 높은 270m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이
안정적으로 양방향 동시 통행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광양항 해안공원
뒤로 이순신대교가 병풍처럼 자리하고.
이모습은 영화 명랑해전의 모습^^
영화속 주인공들 곁에서 같이 사진도 찍어보며 갑니다!
이곳 광양만은 광양과 순천, 여수 사이의 바다
섬진강의 경계 부분
이순신 장군과 이곳 광양의 인연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1591년 2월부터.
전라좌수사의 관할 지역이
광양, 순천, 낙안, 보성, 흥양 5관과
방답, 여도, 사도, 발포, 녹도의 5포 수군진
광양현감으로 있던 어영담은
전라도와 경상도 수로를 잘 알고 있던 인물로
이순신의 측근에서 해전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
광양항해양공원을 지나
중마교~ 광양컨테이너터미널 직선도로 땡볕 5.5km
잠시 건물 그늘이 보여, 쉬었다도 갑니다.
직선길 걷는 우리는 늘 그늘에 목마르다!!
아스길에서의 이 그늘이 어찌나 반갑던지~
띠용~ 이런 곳에 편의점이 있었어요.
이런 지루한 길은 그냥 가면 절대 앙돼요.
시원한 얼음물 하나씩 목 뒤에 넣고~
아~ 스원하다~
지루한 직선길도
시원한 음료 쪽쪽~ 빨며 걸으면
찡그린 얼굴에도 반짝 방긋 해가 뜨고.
만사ok~
앗싸~
큰 트럭들이 컨테이너를 싣고 줄지어 항구를 빠져 나오고
좀 위험하기도 해요.
차 안나올 때 후딱 지나가야 합니다.
길 끝이 보이십니까?
직선도로, 길 끝이 보이질 않아요.
가도가도 끝없는 죽일놈^^의 직선길.
항만대교인 고길천교를 건너고~
저 멀리 옆으로 건너 보이는 다리는 철도.
이렇게 들판이 누렇게 익어가는 때에
정유재란~ 전라도 땅이 유린 당하게 되었네요.
이순신장군의 수군들과 각지에서 일어났던 의병들에 의해
임진왜란에도 지켜지고 있었던 전라도 지역.
물이 마른 이런 때는 길 벌기 득템~
혹시나 했더니 이렇게 돌다리까지 놓여져 있더라고요.
초남대교 위로... 사면 기어 올라
초남대교를 건넙니다.
초남대교에서 바라본 현대체절 부두의 모습~
해가 넘어가려 합니다.
이글이글 불꽃의 그 경건함이
너른 들판을 가득 메우고.
가쟈 가쟈~
해가 떨어지면 금방 어둠이 내려앉을 거 같아요.
저는 솜주먹 아우님이 건네준 칼 하나 들고
"깽장군 나가신다~"
칼도 저 닮아서 쪼매 아쉽게 짧아유.
풀숲을 촥촥~
솜주먹 아우님~ 나를 따르라.
^^
제가 길 내고, 아우님이 뒤를 따르고~
자연이 키운 선물들이 들판에 가득~
세풍산업단지 논길을 지나.
빼꼼~ 햇님 귀엽죠?!~
들어갈까 말까~ 더 놀고 싶어하듯.
도로 공사중이더라고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두리번두리번.
요로코롬 길이 있었네요.
공사장 사람들 모두 퇴근한 듯
아무도 없어서 잽싸게 통과.
어둠은 빠르게 도로 위에 내려앉고
렌턴 밝히고 도로 한쪽으로 걷고 있는데...
길가에 어떤 남자분께서 홀로 서 있더라고요.
여기가 어디냐고 그러십니다.
사연인즉 현대제철부두로 배를 수리하러 오셨던 선장님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산책한다며 논길로 도로로 이리저리 걷다가는
깜깜한 밤이 되었고
되돌아가긴 해야 하는데, 어딘지도 모르겠고
^^
처음에는 설명을 못알아 들어서 어딘지 모르겠어서
택시 회사에 전화해드리고 그랬는데
순천 택시는 광양에 전화하라고 하고
광양 택시는 순천에 전화하라고 하고
나갈 기사분이 없다고 하고...
참말로 미치고 팔짝 뛰겠습니다.
선장님은 그런 택시 회사들과 통화하며
순간 격해져 말이 오가기도 했고요.
가만히 듣고 지도 살펴보니 조금만 걸어서 가면
바로 코앞인데
그걸 모르고는...
결국은 오겠다는 택시도 없었고
대충 위치도 같이 지도 보고는 알겠다며
혼자 걸어가셨네요.
우리보고 배 구경시켜준다며 같이 가자고.
하지만 우린 우리 갈길이 있어서
순천 왜성 방향으로~
선장님, 잘 가이소!!
늦은 밤, 충무사는 굳게 닫혀져 있었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정운, 송희립 장군님을 제향하는 사당
충무사(사적 제14호)
충무공 이순신이 1598년 2월 이곳에 고금진을 설치하고
전라도의 수군 8,000여 명을 모아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전열을 정비
노량해전에 출전, 대승을 거두고
7년 여에 걸친 임진, 정유 양란을 종결했던 유서 깊은 곳
순천 왜성의 모습이 그림으로 있어서...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네요.
지금은 왜성 앞바다로 산업단지 간척도 많이 되어졌고요.
예전 그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네요.
그냥 언덕 위에 돌로 된 성곽만 몇 곳 덩그러니~
반딧불이가 여기 저기 반짝~
이밤~ 아무도 없는 순천왜성을
어둠 속에서 한 바퀴 돌아 나옵니다.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왜성으로
1597년 9월 중순부터 11월말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쌓았다고 하구요.
1597년(정유년) 9월에 왜군은 경기도 부근 전쟁에서 패한 뒤
전라도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
이때 남해안쪽 각 지역 요충지를 찾아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
이곳에 성울 축조하였던 것은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했던 것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간에 걸쳐 이곳에서 펼쳐진
싸움이 왜교성(倭橋城)전투이며,
이는 조(朝)+명(明) 연합군과
왜의 고니시 유끼나가(소서행장)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했습니다.
이곳 순천왜성에 머물고 있던 고니시
본국에 있던 도요토미가 죽고
고니시를 구해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천등지에 머물고 있던 왜군들이
노량항쪽으로 한밤중에 배를 몰고 왔고
노량해전은 그렇게 살아서 돌아가려는 왜군들과
한놈도 살려보내지 않겠다던 굳은 의지의
이순신 장군님과 조선 수군
명나라 군의 뒤엉킨 절대 양보할 수 없었던 싸움
성곽 구조는 본성과 왜성으로 구성
본성에는 별도의 내성이 있고
내성과 본성의 성벽은 각각 2겹으로 축조
왜성은 1겹으로 축조
성곽 내에는 천수기단, 문지, 해자 등의
주요 건물지가 남아 있다는데
어둠속에서 둘러보는거라 잘 모르겠더라고요.
정상부근에 올라가니 의자가 있었고
의자 하나씩 차지하고 누워 하늘 올려다보며
잠시 한가로움 즐겨봅니다.
^^
여기 비박하러 오면 딱~ 좋겠더라고요.
순천왜성 그렇게 한 바퀴 돌아 내려와
신성교를 건너 현대제철순천공장
간척 산업단지쪽으로 건너와 걸어...
산업단지 끝쪽 해룡산업단지 옆길에 풀언덕
잠시 쉬었다 갑니다.ㅎㅎㅎ 졸려유~
누웠다~하면 순긴 잠에 폭~~ 레드썬
뱜 나오면 어쩔라구~
공항 옆의 편의점, 불이 켜져 있어서 신났다가는
문이 잠겨 있더라고요. 무인도 안되고~
그래서 배낭속에 라면 꺼내 끓여 먹었어요.
ㅎㅎㅎ^^ 물 아껴가며~
공항길에서 천변쪽으로 논길 따라 가다가는
분명 지도상에는 희미하게 길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이정도면 사람 다닌 길이라 충분히 여겨질 정도
물이 흐르고 한밤이라 가늠할 수도 없는 상태
풀들도 웃자라 있고.
도저히 건너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둑방길로 발길을 돌리고.
뚝방길 따라 걸어가는데 쪼매 아슬아슬
한동안 꽤나 걸었어요.
중간 중간 가시 나무가 웃자라~ 피해가느라 애좀 먹고.
어두울 때는 그냥 길로 가는게 답이쥬~
가다가 길 끊겼을까봐 걸어가는 내내 걱정도 되고.
뚝방길을 걷다가 다행히 탈출 구간이 생겨서 나와~
일반 논길 소로로 걸어갑니다.
안개가 자욱했는데...
이 안개가 진짜 안개인지~
아니면 바다 건너 산업단지쪽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인건지...
그래서 마스크 끼고 걸어가고.
어쩐지 이쪽 동네는 공기 좋지는 않을 듯.
화치동 GS칼텍스 여수산단주유소 옆 편의점~
아까 여수공항 지나서 논길 따라 왔을 때
지도상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면
바로 여기 앞으로 이어졌을껀데...
이렇게 둑길로 가시 찔려가며 멀리 멀리 돌아왔네요.
이것저것 사서 흡입~ 물도 넉넉히 사고.
좀 무겁더라도 쟁여둬야 해요.
ㅎㅎㅎ
여수국가산업단지 공장 직선길 가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데...
밤이 물러나고 도로에는 차들이 제법 다니기 시작
일어나 보니, 솜주먹님 완전 번데기 됐네요.
그러게 잠시 쉬더라도 침낭 꺼내서 덮으라니까
말도 징그럽게 안듣더니...
저는 무릎 담요 가져온거 있어서 덮었었는뎅...
뻑쩍찌근~ 기지개 켜고 일어나
여수산업단지쪽 바라보니
날이 밝았는데도 연기는 연신 뿜뿜 중.
징글징글~ 또 이어지는 공장 직선길 걸어갑니다.
가스며 메탄올, 경유, 등유 등... 기름 관련 공장들~
도로로는 연신 큰 트럭들이 쌩쌩~ 달리는데
갓길은 턱없이 좁고~
차가 보이면 도로 안쪽 풀가로 딱 붙어서 잠시 멈춤~
큰 트럭들 다니는 도로는 아무래도 위험천만이라~
코너가 나오면 큰 트럭이 언제 꺾어져 나타날까 조마조마...
그래서 철로로 걸어갑니다.
솜주먹 아우님 언제 기차가 올지 걱정되어서
귀를 쫑끗~
ㅎㅎㅎ
여기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표식들을 찾아보자고!!
_중간중간 풀이 자라고 있고
_선로는 녹이 슬었고
.....
사실 기차가 다니지 않을거란 걸
짐작으로는 알고 있지만
기차가 오면 어느 쪽으로 피하면 될지
저도 나름 머리 굴려서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당
^^
빵 한쪽씩 먹으며 앉아 쉬었다 가고요.
순진무구한 우리 솜주먹 아우님~
웃는 것도 늘 해맑습니다.
위험을 보는 것이 안전의 시작이다.
문구에 공감도 해보며...
바다 건너 묘도 섬이 있어요.
길가에는 관들이 바다와 벽을 만들며 나란히 지나고 있고
저 하얀건 뭘까요? 소금 맞겠죠^^
낙포부두 검색해보니,
소금 하역~ 그런 뉴스들이 뜨던데...
원유인 석유는 대부분 수입 선박을 통해
원유부두라는 이런 곳에 배를 통해 들어오게 되고
원유부두에서 옮겨진 원유는 배에서 바로 연결되어진
원유저장탱크->탈염기->열교환기
->가열기->상압증류탑으로
순서대로 이동
상압증류탑에서 원유는 다양한 물질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LPG, 휘발유, 등유, 경유처럼...
커다란 선박이 이곳에서도 보이고~
길가에 승용차들이 서며
낚시꾼들이 바닷가로 걸어들 갑니다.
한구미터널 인근 이곳이
낚시꾼들에게 은근 소문난 장소인가보더라고요.
중국사람들이 만들었다는 한구미터널을 지나고
왼쪽 터널로 갈까, 오른쪽 터널로 갈까
사실 걷다보면 이런 것들도 순간 고민이 되고^^
우린 왼쪽 터널로~
차와 마주보며 가야 혹시라도 대비가 되니...
우리가 터널 안 지나가는데 차가 딱 1대만
이 터널을 통과해서 지나가더라고요.
옛날 남해 사람들이 건너와서 살았다는 한구미 마을
우리나라 최대 오일 허브가 들어서며
석유공사 석유 비축기지가 제석산 지하로 매설되면서
마을이 사라지고(당시, 보상 문제들이며...)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살았던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한구미고향비가 이렇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한구미고향비에 등 기대고
그 작은 그늘 아래서 잠시 쉬어갑니다.
그늘이 없어요ㅠㅠ
지금은 언제 마을이 있었나 싶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이곳~
한구미마을을 지나 옆동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덕마을
너무나 작은 폐교가 보이길래 구경 중입니다.
어르신 두 분이 어딜 다녀오시는지 댁으로 들어가며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학교가 너무 작고 신기해서 구경한다고 하며 인사드립니다.
참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닷가며...
이 아래가 신덕해수욕장이라는데
출입금지라고 써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놀러온 사람들이 꽤나 있더라고요.
육지와 연결된 섭도가 보입니다.
보물을 발견했어요.
우리 준희 오라버니의 시그널~
남해안길 걸음하며
이렇게 한번씩 만날 때마다 반갑고 신납니다.
솜주먹 아우님도 준희 오라버니 뵌 듯
사진 찍느라 정신없고^^
멀리 모사금해수욕장이 보이고~
원래는 여수엑스포역까지 가서 7구간 끝낼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애매~ 기차 시간 맞추려면 힘들듯.
모사금해수욕장까지 진행하기로 합니다.
모사금 해수욕장
'모사금'이라는 이름은
모래 해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살(모래)'과 '기미(해안)'가
합쳐진 지방사투리
수심이 얕아서 아이들과 가족들이 와서 즐기기 좋겠어요.
아담하고 물도 깨끗하니 조용한 모사금 해수욕장.
모래 곱죠?!~
^^
올해 마지막 바닷물 해수욕이 될 듯
씻을 곳도 없고~
물에 풍덩~ 들어가 봐야죵.
시원하게 입수하며~
모사금해수욕장에서 이번 남해안7구간 마무리 합니다.
남해안길...
부산 오륙도를 시작으로~
경상남도 창원~고성~통영~(다시 또)고성~사천~하동~
전라남도 광양~순천~그리고 이곳 여수까지
시작이 반이라고, 벌써 반정도 지나왔습니다.
나는 남의 길을 걷는 사람인지...
나는 나의 길을 걷는 사람인지...
살아있다는 것은
매순간 그 시간들을 통해 변화해 간다는 것
내가 잃고 사는 것은 무엇인지 들여다보며
나한테 주어진 길을 뚜벅뚜벅
멈추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걸어가야겠습니다.
이순신 장군님처럼~
윤동주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