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읽는 역사 이야기(23)
연산군의 스승으로 갑자사화 때 처형된 지족당 조지서
조해훈(고전평론가)
맑은 밤에 근심스레 앉아 누첨을 세다가(愁坐淸宵數漏籤·수좌청소수루첨)
아침에 장막을 걷고 산꼭대기를 마주하네.(朝來捲幔對山尖·조래권만대산첨)
꾀꼬리는 새벽빛을 띠고 깊은 나무에서 울고(鶯銜晩色啼深樹·앵함만색제심수)
제비는 엷은 그늘을 스쳐 짧은 처마에 드네.(燕掠輕陰入短簷·연략경음입단첨)
누워야 편안함은 실로 몸 게을러 습관된 탓이고(臥穩正因身慣懶·와온정인신관라)
집이 가난하나 내가 청렴한 까닭은 아니네.(家貧非是我爲廉·가빈비시아위렴)
평생의 장한 뜻이 모두 다 사그라졌으니(平生壯志消磨盡·평생장지소마진)
거울을 들고 늙은 수염을 비추기 부끄럽다네.(羞把菱花照老髯·수파릉화조로염)
위 시는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1454~1504)의 「언심견투彦深見投」로,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돼 있다.
수련은 밤에 근심이 많아 잠 못 들어 시간이나 세다가 아침에 일어나 산을 마주한다는 말이다. 함련에서는 꾀꼬리는 깊은 나무에서 울고 제비는 처마 밑에 드는 계절(여름)을 읊고 있다. 경련에서는 눕는 게 편한 건 게으름이 몸에 밴 탓이고, 집이 가난한 이유는 내가 청렴해서가 아니라고 예를 차리고 있다. 그만큼 깨끗하게 살았다는 의미이다. 미련에서는 젊어서 꾸었던 장대한 꿈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이제는 다 사그라들어, 거울에 비치는 늙고 못난 얼굴 보기가 스스로 부끄럽다는 말이다. 하지만 위 시를 읽는 독자는 조지서가 맑은 뜻을 가지고 대과에 급제한 인재답게 나라를 위해 열심히 해보려고 했으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되고 늙어버렸음을 짐작한다. 후일 사람들은 위 시를 두고 조지서가 앞으로 일어날 화禍를 예감하고 지은 것이라고 평가한다.
첫 행의 ‘누첨漏籤’이란 시간을 알리는 누수(漏水·물시계)를 헤아리는 줏대(籤)이다. 즉 밤의 시간을 계산하는 기구를 말한다. 경첨更籤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위 시를 지은 조지서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보자.
그는 조선 전기인 1454년(단종 2)에 지금의 경남 하동군 옥종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당·충헌忠軒이다. 5대조 할아버지는 문하지후門下祗侯 조순趙淳이며, 고조할아버지는 문하시중을 지내고 가흥백嘉興伯에 봉해진 조석견趙石堅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전중殿中 조익趙益이며, 할아버지는 사온시직장司醞寺直長 조민원趙敏原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조찬趙璨이며, 어머니는 생원 정삼鄭參의 딸이다. 전처는 사정司正 정보민鄭保民의 딸인 해주 정씨이며, 후처는 생원 정윤관鄭允寬의 딸인 영일 정씨이다.
조지서는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었다. 1478년 통신사 이계동의 군관軍官이 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승문원저작으로 있던 1479년(성종 10) 다시 중시重試에 1등으로 합격하여 형조 정랑을 제수받고 홍문관 교리와 응교를 역임하였다. 1479년 이조좌랑이 되었고, 어유소魚有沼가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할 때 서정종사관으로 차출되었다가 명을 잘못 전달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 뒤 1481년 “문학에 뛰어난 인물이니 서용하라.”는 성종의 특지에 따라 관직에 복귀하여 홍문관의 부교리와 교리를 거쳐 형조정랑, 홍문관의 부응교와 응교 등을 지냈다. 세자시강원의 필선弼善과 보덕輔德으로 세자(후일의 연산군)의 스승이 되어 그를 엄격하게 교육하였다. 이에 세자가 심히 못마땅해 원수처럼 여겼다고 한다. 연산군에게는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 당대 촉망받는 학자인 허침許琛과 조지서였다.
조지서는 연산군이 즉위하자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창원부사의 자리를 청하여 외직으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인 하동 옥종 동곡桐谷으로 돌아가 초막을 짓고 은거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조지서는 임금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압송되었고, 국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이후 능지처참되어 강물에 버려지고 가산은 몰수되었다. 이후 조지서의 직계가족과 방계가족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의 시와 문장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망실되고, 위에서 소개한 시 한 수만이 남아 있다.
갑자사화 이후 후처 영일 정씨는 초야를 떠돌았다. 당시 둘째 아들 조침趙琛은 포대기에 있었고, 셋째 아들 조리趙理는 뱃속에 있었으나 손수 나무열매를 주워 오지사발에 삶아서 아침저녁으로 제전祭奠을 올렸다. 이에 중종 조에 정려문을 세워 포상하였다.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오천 정씨 정려각이 그것이다. 맏아들 조정趙珵은 금부의 옥사에서 두 번이나 고문을 당해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남아 남해로 귀양을 갔다.
그러면 조지서와 그 가족을 몰락시킨 갑자사화가 어떤 사건인지 알아보겠다.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 갑자년에 훈구사림파가 궁중 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이다. 즉 연산군이 생모 윤 씨의 폐비와 사사賜死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후 관련된 인물들과 그 가족들까지 가혹하게 처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궁중 세력과 사림파 중심의 부중府中 세력 간의 싸움의 성격을 띠며, 중종반정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윤 씨의 폐비와 사사賜死 사건에 대해 조금 더 들어가 보겠다.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비妃 윤 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 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하였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이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그는 이 사실을 임사홍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 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 묘에 배사配祀하려 했는데,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이 반대하다가 권달수는 죽고 이행은 귀양 갔다. 그 뒤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윤 씨 폐위 및 사사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죄를 묻게 되었다. 윤필상·이극균 등 10여 인이 사형되었다.
이미 죽은 한치형·한명회·정창손 등은 부관참시 되었다. 이 밖에도 홍귀달·이심원·이유령 등 수많은 선비들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 사화는 표면상으로는 연산군의 생모 윤 씨의 폐위, 사사 사건으로 인한 연산군의 포악하고 잔인한 복수심에서 폭발한 사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조정 신하 간의 암투가 이 사건을 조장하고 격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연산군은 일찍이 학문을 싫어해 학자를 멀리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낭비 또한 극심해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이를 메우기 위해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 공신들에게 나눠준 공신전功臣田과 노비까지도 몰수하려 하였다. 평소 왕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신하들은 왕의 처사에 더욱 반발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연산군의 방종을 충동질하며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 한 신하들도 있었다.
이 사화의 결과는 궁중 세력이 승리해 정권을 잡고, 신진사류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무오사화가 기성 훈구 세력과 신진사류 세력의 정치 싸움이었다고 하면, 갑자사화는 궁중 세력과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과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지서의 묘소는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삼장골에 있다. 필자는 2024년 12월 25일 오후 1시쯤 그의 묘를 방문했다. 묘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표지판이 없어 초행자는 찾기가 쉽지 않다. 마을 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 대밭을 지나야 한다. 후처인 영일 정씨의 묘는 그의 묘 100m 전쯤에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대곡리 삼장三壯마을이다. 조지서가 세 번이나 장원 급제한 데서 유래한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