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동동(大阜東洞)
-대부동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대부동 관할이다-
대부동동은 대부도(大阜島)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대부도는 삼국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하였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한주(漢州)에 속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소속이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남양(南陽) 소속이었다. 1709년(숙종 35) 대부도에 진(鎭)이 설치되어 대부첨사가 관할하기도 하였으나 1895년(고종 32)에 대부진(大阜鎭)이 혁파될 때까지 존폐를 거듭하였다.
대부도는 조선후기 면리제가 실시된 이후 대부면이 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 1914년 3월 1일 남양군(南陽郡)에서 부천군(富川郡)으로 이관되었고, 1917년 6월 20일 경기도고시 제28호에 의해 대부면은 동리ㆍ남리ㆍ북리ㆍ선감리ㆍ풍도리로 편제되었는데, 동리(東里)는 영전동(營田洞)과 하동(下洞) 일부 지역이 합쳐진 것이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법률 제2597호)으로 대부면이 옹진군(甕津郡)에 편입되었으며, 1994년 12월 26일 다시 행정구역 개편(대통령령 제14434호)으로 안산시에 편입될 때 대부면 동리가 대부동동(大阜東洞)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대부면사무소는 하동(下洞)에 있다가 1934년 상동(上洞)으로 신축 이전하여 1982년 신청사가 마련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다.
①고유지-동1리
대부도의 중심지에 위치한 마을로 예부터 땅이 기름져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라고 하여 고유지(古油地)라고 불렀다. 조선왕조 세종 때부터 염밭이 있었다. 고유지는 평택 임씨(林氏) 집성촌으로 현재 12~16대손이 살고 있다.
• 비선거리
대부도가 남양부에 속했을 때 수군첨절제사·감목관(監牧官) 등의 선정비를 세워 놓았던 곳이다. 도로확장공사로 대부동사무소 마당으로 이전하였다.
⦁활터
고유지에 면사무소가 있을 당시(1910~33년)에는 마을 앞에 활터가 있었다. 1934년 면사무소가 상동으로 이전한 후 활쏘기 행사가 없어지면서 활터도 없어졌다.
• 계로당
현재 마을회관 자리에 있었던 서당 이름이 계로당(啓勞堂)이다.
• 고유지 우물
물 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하여 식수는 물론 가뭄에는 농업용수로도 사용하였다. 심한 가뭄에도 지상까지 물이 넘쳐흘렀다고 하는데 현재도 잘 보존되고 있다. 각종 토지 측량시 이 우물이 기점이 된다.
• 주막거리
비선거리 밑에 주막이 있었고 누룩술이 맛이 좋기로 유명하였다.
• 염벗
고유지 마을 앞의 염전은 조선 초기 세종 때부터 있어 왔다. 옛날에는 가마솥에 불을 때서 소금을 만들었으나 근래에는 천일염전이다.
⦁안개(만아들)
염벗으로 들어오는 갯고랑으로 말부흥포와 신당포 사이에 있었으며 나무배·소금배 등이 드나들던 곳이다.
⦁까치섬
마을 남쪽에 있는 조그만 동산으로 소나무가 많고 까치가 많이 살았다.
⦁공마루
고갯마루가 공처럼 둥글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② 갈마지-동2리
대부도 중앙에 위치해 있어 해안선이 없는 마을이다. 마을 중앙에는 말 머리 모양의 작은 산이 있고 그 앞에 작은 우물이 있는데, 목마른 말이 이 우물물을 먹고 갈증을 면했다고 해서 갈마지(渴馬地)라고 불러 왔다.
⦁큰화개재
갈마지 마을 북쪽의 황금산 산줄기 내림이 마을 뒷산이다. 산 모양이 큰 뚜껑을 덮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화개재
약우물에서 두우현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진묵골
마을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참나무가 유난히 많다고 하여 진목골(참나뭇골)이라 불러 왔는데, 이것이 언젠가부터 진묵골로 불려지고 있다. 도로명은 ‘지무안길’이라고 붙여놓았다
⦁섬배기우물
마을 앞 말머리재에 있는 우물이다. 수량이 많아 마을의 식수는 물론 농업용수로도 써 왔는데 몇섬지기 논물도 댈 수 있다 하여 섬배기우물이라 불렀다.
⦁말머리재
마을 앞산이자 동사무소 뒷산으로 말머리처럼 생겼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안악갈마지
동쪽에 있는 동네로 안악갈마지 혹은 아랫갈마지라고 부른다.
⦁너머갈마지
안악갈마지 서쪽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웃갈마지
갈마지에서도 가장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안산
갈마지마을 앞산 이름이 안산(案山)으로 정월 대보름 때 달맞이를 하던 산이다. 수백년 묵은 소나무가 있어 단오 때면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고 뛰었다.
⦁독주골
뒷골 고개 아래의 외딴 골짜기로 매우 후미진 곳이다.
③ 당전동(당말)-동3리
황금산 남동쪽 퇴밑재 앞에 위치한 남향 마을로 예전에 황금산 중턱에 당(堂)이 있어 당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당전동(堂前洞;당말)이라 하였다.
⦁황금산
대부도의 주산으로 일제 때까지 금광이 있었다. 시화지구 간척사업 토취장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해발 172m.
⦁퇴밑재
당전 뒷산이 맷방석에 쌀을 쌓아 놓은 형상인데, 황금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툇마루같이 생겼고 이 마을이 그 밑에 있다 하여 퇴밑재라고 불렀다.
⦁하개재
황금산 서쪽 너머에 있는 고개로 두우현(뒤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지나무고개
황금산 동쪽의 고개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쉬었다 오는 고개라고 한다.
⦁뒷골고개
마을 뒷산 골짜기에 있는 고개로 여기에는 삼신우물이 있다.
⦁오소로지고개
오소리가 많은 고개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솔개바위산
영굴재에 있는 산으로 솔개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흑반재고개
고유지에서 당전동으로 넘어오는 고개이다.
⦁빈쟁이
황금산에서 퇴밑재산 남쪽으로 내려간 산줄기에 나무가 없고 잔디만 조금 있는 곳을 말한다.
⦁무쇠장군
당 옆에 무쇠로 만든 말과 말 위에 칼을 든 장군 형상이 있어 무쇠장군이라 했는데 한국전쟁 후 유실되었다.
⦁당번덩
당 옆에 있는 작은 옹달샘이 있던 습지를 말한다.
⦁새터말
당 앞 동네 아랫마을을 말한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④분지촌(분지내)-동4리
황금산에서 내여오는 물과 봉화산(峰火山) 불당골 물이 이곳에서 합쳐져 개울물이 많아졌다 하여 분지촌(汾之村) 혹은 분지내[汾地川]라고 하였다.
⦁방아작다리
봉화재산 북서쪽에 위치한 작달(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방아다리처럼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봉우재
마을 동쪽 불당골산을 말하는데, 봉화를 올리던 곳이라 하여 봉우재[峰火峴]라고 부른다.
⦁분지정
이 마을에서 제일 물 맛이 좋고 수량이 많은 우물이 분지정(汾之井)이다. 마을에서는 정초에 소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떼집거리
옛날 이곳에 떼로 쌓아 지은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서낭당 밑에 있었다.
⦁서낭당
마을 남동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목(神木)에 색색의 헝겊이 걸려 있고 돌무더기도 쌓여 있다.
⦁행낭골
한지락골 너머 마을이 행낭골[行廊谷]인데 6가구가 살고 있다.
⦁솔따배기
행낭골 남쪽 마을이다. 마을 뒤쪽으로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깻돌
대동초등학교 앞쪽에 따로 떨어진 마을로, 부근의 돌이 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행낭골 우물
우물 주위가 옛날부터 붉은 토질이다. 전설에 의하면 허씨 집 며느리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하다가 그만 관계를 끊자 하자 남자가 며느리를 칼로 찔러 죽여 우물에 빠뜨린 후부터 우물 주위가 붉어졌다고 한다.
⦁상재미
솔따배기 위에 있는 동네가 상재미[上場洞]이다. 현재 5가구가 살고 있다.
⦁불당골
봉화재산 밑 고을이 불당골[佛堂谷]이다. 예전에 불당이 있었다고 한다.
⦁불당골 개울
불당골(봉화재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황금산에서 내려오는 물보다 수질이 좋아 현재 상수원으로 쓰고 있다.
⦁한지락골
마을회관 뒤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함지박 모양으로 우묵하게 생겼다고 하여 함지박골이 되었는데 이것이 변음되어 한지락골이 되었다.
⦁숫벌
안깨에서 나오는 민물과 바다의 조수 영향으로 바닷가에 큰 모래펄 언덕이 생겼고 이곳에 바지락·굴·소라 등 해산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시화지구간척사업으로 매몰되었다.
⑤ 신당리-동5리
조선왕조 말 육지로부터 이주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정자를 크게 지어 놓아 여기에서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놀았는데 이 정자의 이름이 신당(神塘)이었다. 그때 이후 이 마을 이름도 자연 신당리[新塘谷]가 되었다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에 안방죽·새방죽 등으로 불리는 방죽이 있어 당(塘)자를 ‘연못 당’이 아닌 ‘방죽 당’으로 읽으면 ‘새 방죽을 쌓은 동네’, 즉 신당리가 된다는 설도 있다.
⦁삼신우물
아기를 못 낳는 여인들이 아기 점지를 빌던 우물이다. 손과 발이 삐었을 때 이 우물에 담그고 있으면 낳는다 하여 일명 약수우물이라 부른다.
⦁고두메기
물이 외골로 들어와 외골로 나가는 물목이라 하여 고두메기라 불렀다.
⦁질마재
산의 형태가 소의 질마(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낭당고개
동4리와의 경계지역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벼랑산
나루개산으로 산이 워낙 벼랑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농바위
동5리 서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농짝 같다 하여 이렇게 불렀다.
⦁햄섬(해미섬)
동5리 남쪽 해안부리 밖에 있는 섬으로 큰햄섬·거북햄섬·가운데햄섬 등 세 개의 섬이 있는데 큰햄섬은 연륙(連陸)되었다. 해무(海霧)가 많이 낀다. 안개가 자욱히 끼면 섬 위의 소나무들만 겨우 보일 정도이다. 대부도 사람들은 해무를 ‘해미’라고 발음한다.
⦁장승백이
동5리 북쪽 오수로지 쪽으로 장승을 세웠던 곳이다.
⦁안방죽
새방죽 안쪽으로 갯벌을 막아 논으로 만들면서 쌓은 방조제로서 새방죽 안쪽에 있어서 안방죽이라고 부른다.
⦁새방죽
신당리 앞에 축조한 방조제이다.
⦁진두
나룻께를 진두(津頭)라고 한다. 옛날부터 대부도 관문이었으나 연육이 되었다. 현재 종현동으로 옮긴 김완수 면장의 공덕비가 있던 곳이다. 대부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을 기념하는 점정비(点灯碑)도 있었으나 대부동동 노인회관 앞으로 이전하였다,
⦁주막거리
나룻께에 옛날 주막이 있던 곳을 말한다.
⦁털미섬
고두메기 북쪽에 있는 작은 무인도이다. 간조시 연육되기도 하고 뻘로 걸어서 드나들 수도 있는 섬이었으나 현재는 방조제 공사로 바닷물이 없다. 섬 주위에 소라·바지락·가무락·낙지 등이 많았다고 한다. 소나무 우거진 모양이 마치 사람 머리털 같아 털미섬이라고 부른다.
⦁소펄
큰햄섬 동남쪽에 있는 갯벌로 바지락이 많았다.
⑥ 영전동-동6리
밭이 많고 또 땅이 기름져 대대로 영화를 누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영전동(榮田洞)이라 하였다고도 하고 군영의 둔전이 있던 곳이라하여 영전동(營田洞)이라도 한다.
⦁오수로지
북쪽으로 동6리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오소리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오소리지’가 ‘오수로지’로 변음되었다.
⦁고추장뿌리
고총(古塚)부리가 변음되어 고추장뿌리로 되었다고 한다.
⦁수상골 우물
영전동 앞에 있는 우물로 가운뎃말 우물과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데, 큰 이무기가 여기에 살고 있어 이무기가 몸을 한 번 뒤척일 때마다 물이 뒤집혀 가운뎃말 우물이 빨개진다는 전설이 있다.
⦁가운뎃말
영전 중심지의 큰 마을이다.
⦁건넝골
영전 남서쪽 마을로, 영전 건너편에 있다고 건넝골(건너골)이라고 부른다.
⦁ㆍ윗말
위쪽에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귓말(군말)
한쪽 구석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외지섬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섬으로 시화호 안에 있었으나 현재는 내수면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쌀섬
쌀을 부어 놓은 것처럼 생긴 섬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시화방조제 공사로 바닷물은 말라버렸다
⦁딴섬
쌀섬 앞에 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섬이다. 시화방조제 공사로 바닷물은 말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