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완의 지구촌 포토여행 -필리핀 코딜렐라 특별구역
2009년 06월 23일 00시 00분 입력
험준한 산악도로 훼손되기 일쑤
굽이굽이 산 길돌아 원주민 마을
열악한 환경에도 천진스런 미소
코딜렐라(Cordillera Administrative Region) 특별구역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은 간을 밖으로 뛰어놓고 다녀야한다는 점이다.
좁은 산길을 다니다보면 오금이 저려오고 현기증이 생긴다. 더우기 6월부터 11월까지는 우기 철이다. 매일 비가오고 순간적으로 들어붓는 정도로 오는 경우가 무척 많다.
필리핀 동남부의 태평양은 태풍 생산지다(?). 성수기에는 2-3일에 태풍을 하나씩 생산해서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을 하는데 잘못해서 필리핀 내수로 가는 경우 막대한 영향을 준다. 태풍이 상륙하면 전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져 산골동네는 고요한 적막만이 흐른다.
이런 험난한 산길에서 태풍을 만나면 그야말로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본톡(Bontok)에서 바기오(Baguio)로 빠져 나오는 과정이 장난이 아니다. 굽이굽이 산길도로를 약 7시간정도 타고 오는데 그날 마침 태풍이 코딜렐라 산악지대를 정면으로 휩쓸고 지나가면서 엄청난 양의 비를 뿌렸다. 절벽 곳곳에 폭포가 형성돼 빗물을 토해 내는데 그런 장관이 없었다. 이편 절벽에서 쏟아내고 고개를 돌려 건너편 절벽을 바라보면 그 쪽 급경사면 또한 폭포수로 장관을 이뤘다.
험난한 길을 돌고 돌다 보면 곳곳에서 산사태를 만나기 일쑤다. 용케 적은 산사태라면 길이 비교적 빨리 뚫리지만 엄청난 양의 토사가 쏟아져 내릴라 치면 도로는 2-3일간 완전봉쇄 된다. 도로 복구가 불가능 할 정도로 훼손이 심하면 폐쇄하고 다른 곳으로 길을 내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이곳 산악지대는 흙산으로 산사태가 나면 한 마을이 통째로 사라져 버릴 정도인데다 벌쭉한 흙탕물이 그나마 얼기설기 만든 비포장 길을 점령해버린다.
그래 산사태가 나면 일정구간별로 중장비보관소에 있는 장비들이 도착해 보수를 해주지만 버스는 버스대로 가관이다. 시골버스로 천장 곳곳이 뚫려 빗물이 줄줄 새고, 어떤 자리는 창문이 잘 닫히지 않아 그 쏟아지는 빗물을 옴팍 뒤집어 써야한다.
그래도 그들은 낙천적이다. 오직 한마디 'mountain slide!' 뿐. 호들갑스럽게 버스기사나, 차장에게 묻지도 않는다. 그냥 덤덤하게 기다린다. 한 시간여 그동안 중장비 차량이 올라가고 또 다른 관청 차량인 듯 한 차량이 오르락 내리락 몇 차례 버스 안내원이 따갈로그어로 답변을 한다. 본톡에서 여기까지 요금을 제외하고 환불하여 준다. 아니 이 빗속 산중에서 어찌 하란 말인가. 그렇게 현지인의 꽁무니를 따라 산사태가 난 현장 안쪽으로 돌밭과 산길 1km정도를 겨우겨우 올라서서 건너편 길로 도착하니 그곳에서도 버스승객이 걸어서 우리 쪽으로 막 이동을 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속에 장대 빗속을 걸었던 것을 이제와 생각하니 즐거운 추억이었던 같다.
지난해 12월 초쯤으로 기억된다. 아톡을 다시 여행 하는데 해발 2천m가 넘는 지역에 숙박시설이 없어 안면 있는 식당 문간방에서 하룻 밤 신세를 졌다. 그날 하필 그곳에 우박이 내려 난리가 났다. 좀 있으니 두터운 오리털, 가죽잠바, 털 스웨터에 온갖 겨울 옷이 등장했다. 필자는 덤덤하게 얇은 재킷을 걸치고 사진촬영을 하려고 뛰어다녔는데 괜스레 씁쓰름했다. 다음날 바기오 숙소에서 TV를 시청하는데 전날 아톡근처의 우박 내린 사실이 보도됐다. 대단한 사건이었다.
'드 트 알 까' 등 된소리가 유독 많은 따갈로그어로 방송하는 내용의 무척 요란스럽게 들렸다.
본톡에서 원주민인 본톡족이 거주하는 마이닡(Mainit)지역으로 가기위해 지프니를 임대해 한 시간여 산길을 달려 올라갔다. 그 곳의 하늘은 비취색으로 압권이었으나 그 하늘 아래 녹슨 함석으로 지붕을 만들고 야자나무로 기둥을 세운 집에서 사는 그들의 주거 환경을 보고는 '괜히 왔구나' 하는 후회와 함께 절로 눈물이 났다.
한두 평 남짓한 비좁은 공간에서 온갖 취사 도구와 살이용 도구를 쌓아놓고 잠을 자면서 닭과 개까지 키우고 있었다.
한 지붕 아래서 부대끼고 살아가며 바로 문 앞에는 돼지까지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같은 환경에서 '위생'이란 용어는 차라리 사치고 허상이었다.
그들이 마시는 물의 위생 상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 곳으로 안내한 가이드는 필에게 산에 오르기 전, 선물을 산다며 얼마간의 돈을 달라해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 친구의 배려가 새삼 사려 깊었다. 몇 g의 설탕과 소금,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작은 성냥 2갑을 사서 가지고 가 작은 비닐봉지에 담아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달라고 야단이었다.
그들의 생활상은 너무도 열악했다. 필자가 필리핀에서 돌아다니던 오지마을 중 최악이여 환경으로 기억된다
작은 길목의 공간은 한발자국만 넘어서면 바로 돼지 축사였다. 사람살기가 힘든 그런 곳에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이곳 농촌에도 노인들만 남고 젊은이들은 모두 도회지로 일하러 가 보기가 힘들다. 버거운 삶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웃는 미소는 역시 친절 했다.
많은 소수부족들은 아직 종족집단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작은 움막에서 새카맣게 그을은 양은그릇에 뭘 끓어 먹으려는 지 노부부가 음식준비 중이었다.
바람은 어떻게 피할 수 있도록 비닐과 함석으로 얼기설기 둘러쳐 있었지만 맨바닥에 깐 잡풀 위로 눅눅한 습기가 차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생활은 바로 원시 그대로 인 것 같았다.
무등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