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문화·체육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여성들의 활동이 돋보이는 분야다. 위계적인 조직 문화가 덜한 데다 남녀 차별 없이 감수성과 창조력, 대중적 인기와 기록만으로 능력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문화·체육계에서 성공한 여성들은 의심스런 존재였다. 소수의 여성 스타들이 과연 여성들의 의식과 정체성을 대표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화와 체육 산업도 조직적인 경영과 마케팅으로 이뤄지다 보니 ‘재주는 여성이 부리고 돈은 남성이 챙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술가 혹은 선수의 생물학적 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먼파워’를 주장할 수 없음은 너무나 분명해졌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은 뚜렷하다. 2003년 ‘바람난 가족’을 기획하고 제작한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39)와 심보경 이사 자매는 문화와 산업의 양면을 가진 영화 제작에서 진정한 ‘우먼파워’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장화, 홍련’ ‘스캔들’을 만든 봄 영화사의 오정완 대표(40)도 같은 이유로 2004년이 더욱 기대되는 여성 영화 제작자다.
심대표와 오대표는 같은 ‘386세대’로 여성의 시선을 담은 영화를 기획, 제작해왔다. 동시에 매년 한 영화잡지가 선정하는 ‘충무로 파워 50인’의 남성들 사이에서 계속 순위 상승 중인 파워 ‘맨’이다.
사실 이전에 여성적 시각으로 영화를 만든 여성 제작자나 감독이 없진 않았지만 그 앞에는 늘 ‘비상업적’ ‘독립’이란 단서가 붙어 있었다. 심대표와 오대표는 한국 사회와 여성 사이의 긴장감을 여성의 시각에서 형상화함으로써 문화적 담론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상업적인 성공도 거둔 첫 번째 여성 제작자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대중과 직접 만나는 홍보 마케팅에서 영화 일을 시작해 ‘본능’적인 감으로 흥행 가능성을 정확히 집어내기로 유명하다.
특히 2003년 남성 제작자들이 쏟아낸 저질 코미디물 사이에서 더욱 돋보이는 성과를 거둔 두 영화 제작자는 새해에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2004년 명필름은 ‘안녕 형아’ 등 8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봄 영화사는 ‘쓰리2’ 등을 제작할 계획이다.
연예계는 스타 메이킹의 ‘기획’이 중요한 분야라 2004년 또 어떤 여성 스타들이 만들어질지 예상하기 어려운 분야다. 그러나 이곳에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우먼파워가 있으니, 여성 가수 ‘렉시’(24)의 2004년을 기대하는 연예부 기자들이 많다. ‘렉시’ 역시 혜성처럼 나타났지만 효리의 섹시 코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렉시’는 럭셔리+섹시란 의미라고 한다)했다는 평을 듣는다. 남자들을 유혹하던 ‘텐 미니츠’에서 ‘인물이 없다’고 남자들을 조소하는 ‘애송이’의 노랫말도 그렇고, ‘가창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듣는 효리에 비해 렉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양현석이 이끄는 YG엔터테인먼트의 실력파 가수들 ‘세븐’ ‘휘성’ ‘빅마마 시스터스’ 등 사이에서도 음악적 실력을 인정받은 가수이기 때문이다.
박세리·박지은·김미현 등 골프 여군단 맹활약 예고
여자 배우로는 ‘대장금’ 열풍의 주인공 이영애(32)와 ‘걸어다니는 광고 기업’ 전지현(22)의 활동을 기대해볼 만하다. 남성 팬 일변도에 ‘드라마에 약하다’는 평을 받은 이영애는 ‘대장금’으로 폭넓은 팬들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보여줬는데, ‘대장금’이 끝나자마자 영화 촬영에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4인용 식탁’에서 무거운 역을 소화하느라 고전한 전지현은 2004년 ‘엽기적인 그녀’의 곽재용 감독과 다시 손잡고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좌충우돌 여경찰로 출연, 제2의 엽기녀 선풍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두 여배우 모두 ‘신비주의 마케팅’으로 엄격하게 이미지를 관리해 불확실한
요소를 제거한 것도 2004년을 기대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광고모델로는 2004년에도 이미연이 남녀 모델을 통틀어 최고의 대우를 받을 것이 확실해 보이며 설에 개봉할 ‘효자동 이발사’에 출연하는 문소리는 충무로의 ‘의리 있는 여배우’로 올해도 빡빡한 촬영 스케줄을 이어간다.
2004년을 빛낼 여자 스포츠 스타로는 프로복서 이인영(32)과 여자 프로농구의 신혜인(19)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물론 박세리 박지은 김미현 한희원 안시현 등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코리아 낭자’들도 빠질 수 없다. 특히 천재 소녀 골퍼 미셸 위는 언제든 미국 골프계를 뒤흔들 ‘태풍의 눈’이다. 여류 바둑계에선 조혜연 4단이 2003년의 돌풍을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인영은 2003년 9월 열린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플라이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칼라 윌콕스(미국)를 KO승으로 꺾고 챔피언에 올랐다. ‘바르게 살고 싶어서’ 링에 선다는 그는 “여자가 무슨 복싱이냐?”는 주위의 비딱한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복서의 길을 걸어왔다. 40세까지 권투만 열심히 하고 은퇴한 후엔 시골에 전원주택을 지어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싶다는 게 2003년 세모에 1차 방어전을 치른 그의 소박한 꿈이다.
신혜인(19)은 침체된 한국 여자농구를 다시 일으켜 세울 기대주다. ‘얼짱’으로 더 유명한 그는 신세계와 연봉 3000만원에 5년간 계약했다. 고교 랭킹 5위권 안에 드는 기량과 빼어난 외모로 벌써부터 ‘누나부대’를 달고 다니는 그는 키 183cm, 체중 64kg으로 신체조건도 뛰어나다.
흥행 참패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여자프로농구연맹(WKBL)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 겨울 리그가 시작되는 1월 말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학계에서는 90년대 이후 새로운 문학사조를 이끌어온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등 여성 작가들이 다소 침체한 반면, 여성 출판인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47)는 남편 대신 출판사를 맡아 인문·사회과학 중심이던 사계절출판사에 ‘반갑다, 논리야’ ‘역사신문’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 등 어린이·청소년 책을 도입해 출판계의 영역 자체를 확장하는 힘을 보였다.
박사에서부터 주부에 이르기까지 학계의 ‘외인부대’ 60여명이 소속돼 있는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고미숙 공동대표(43)는 열린 연구를 통해 대학과 학맥이라는 엄격한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다양한 형태의 학제연구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 분야에서는 꾸준히 국제무대 진출의 그림을 그려온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부관장(40·기획)과 이불(38·작가) 등이 2004년의 우먼파워로 기대를 모으는 인물들이다.
현대미술 작가 이불 “국내는 좁다” … 세계로 무대 확대
보통의 남성보다 훨씬 더 강한 친화력과 일에 대한 정열로 국제적 네트워킹을 형성해온 김선정 부관장은 2003년 상하이에서 한국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했는데, 2004년에도 아시아권에서 국내외 작가들을 교류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신인작가를 발굴하고 마케팅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기획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현대미술의 여전사’라는 별명과 함께 미술계에선 드물게 대중적 스타가 된 이불은 왜곡된 여성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1999년 아시아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 무대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작가 중 한 명. 덕분에 2004년에도 국내에서 그를 만나기는 어려울 듯하다. 2004년부터 2005년 말까지 영국 웨일즈내셔널 갤러리와 뉴욕 다이츠 프로젝트 등 해외에서 무려 9개의 ‘이불 전’이 열린다.
끝으로,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계속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며, 사진작가 구본창씨와 함께 2004년의 ‘문화달력’을 펴낸 한국 문화계의 대모 박완서(72)씨를 빼놓을 수 없다. 최근 박씨의 소설 ‘옥상의 민들레’가 만화로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