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천도교동부산교구 원문보기 글쓴이: 포덕
천도교(동학)의 발생
천도교는 온 누리에 한울님의 덕을 펴고 널리 창생을 건지는 동방의 빛으로 태어났습니다. 낡은 선천(先天)의 시대가 무너지고 새로운 후천(後天)의 문화를 열어 나가는 개벽(開闢)의 운수를 맞이하여 천도교가 나왔습니다.
천도교가 한국에서 나오게 된 배경은 한국 고유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정신적 토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 민족은 아득한 옛날부터 천신(天神)을 믿고 숭배하여 오던 경천(敬天)의 고유한 신앙을 바탕으로 제천 문화(祭天文化)를 형성하고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을 이루어왔으며, 나아가 풍류도(화랑도)라는 민족 신앙을 성립하여 유,불,선 삼교를 포용하는 동방 문화의 원류가 되었었습니다. 그 후 삼국 시대에 이르러 유교, 불교, 선교 등의 종교가 대륙으로부터 들어와 상류 사회에 퍼지면서 재래의 소박한 민족 신앙은 고려 ·조선 시대에 걸쳐 햇빛을 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민족 신앙의 뿌리는 민중 속에 자리잡고 외래문화를 극복하여 한국화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라, 고려에 걸쳐 불교 전성기를 나타내고 다시 조선 시대에 유교 전성기를 이루어 왔으나 어디까지나 우리의 민족 문화는 외래문화에 동화되지 아니하고 한국적인 독자성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조 말기에 유교가 쇠퇴하고 사회 모든 부면에 부패가 극심하여 민생이 도탄 속에 헤매일 때 서양으로부터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한편으로 서구 열강의 동양 침략으로 민심이 불안 하고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이무렵 민심은 갈 길을 못 찾고 혹은 「정감록」이라는 「참위사상」에 사로잡히고 혹은 천주교에 쏠리기도 하고 한편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퍼지면서 도적떼가 날뛰고 민란이 일어나는 등 각자위심(各自爲心)으로 사회가 극도의 혼미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고전에 가까운 기성 종교는 세상을 건질 만한 힘이 없고 이미 그 존재 가치가 상실되었으며, 따라서 유구한 역사의 문화 바탕 위에 새로운 종교 문화 교체의 대전환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당시 서구 문명의 충격을 민족 주체적인 슬기와 역사 감각으로 극복하고 오랜 민족 전통 사상의 바탕 위에 세계의 모든 종교 사상을 수용한 한국 특유의 정신적 토양 속에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 배태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천도교는 한울님의 계시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천도교는 도의 이름을 「천도(天道)」라 하고 학으로 말하면 「동학(東學)」이라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동학 즉 천도교는 옛날에도 듣지 못 하고 오늘에도 듣지 못하고 옛날에도 비할 수 없고 오늘에도 비할 수 없는 새로운 가르침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
갑오동학혁명
조선 왕조 말기에 부패한 정부 당국은 동학을 이단(異端)으로 몰아 닥치는 대로 잡아 처형하는 극심한 탄압을 가하였습니다. 이에 동학은 비폭력으로 저항하여 대신사의 신원(伸寃) 요구를 통해 신앙의 자유와 아울러 정치의 개혁과 외세 배격 등을 주장하는 집단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습니 다.
한편 고부에서는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이 극심하여 마침내 동학 접주 전봉준이 앞장서서 포 덕 35년(1894년) 갑오년 1월 10일(음)에 수천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고부 군아를 습격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를 평정하기 위해 당도한 안핵사(按 使) 이용태는 무고한 백성을 동학당으로 몰아 잡 아 매질하고 민재를 약탈하며 불지르고 부녀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마침내 동학은 혁명의 기치를 올리고 고부의 전봉준을 비롯하여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금구의 김덕명 등 각지의 접주들 주도 하에 고부 백산에 동학군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갑오년(1894년) 3월 21일(음) 드디어 동학혁명의 횃불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동학군은 격문, 창의 문, 행동 강령 등을 내세우고 동도대장(東徒大將) 전봉준을 선봉으로 오색의 각 포별 군기를 휘날리며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를 표방하고 일제히 궐기했습니다.
동학군이 고부로 진격하자 안핵사 이용태는 도망가고 동학군은 고부 백산을 본거지로 대오를 정 비하여 태인과 부안을 점거한 후 도교산으로 이동하였다가 4월 7일(양 5월 11일)에 황토현에서 대승을 올리고 10여일 만에 정읍, 흥덕, 고창을 점거하였습니다.
동학군은 무고한 백성에게 피해가 없도록 12개조 군률을 세워 군기를 엄하게 하였으므로 가는 곳 마다 민중의 호응을 받고 그 세력이 날로 증가하여 연이어 무장, 영광, 함평을 점거하고 4월 23일 에는 장성의 황룡촌(黃龍村) 접전에서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을 대파하였습니다. 드디어 동학군은 4월 27일 전주를 점거함으로써 호남 일대를 장악하여 서울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관군은 병력 부족을 조정에 호소하고 나약한 조정 대신들은 청국에 원병을 청하는 민족 반역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청국군 2천여 명이 5월 5일과 7일에 아산에 상륙하고 일본군 또한 7천의 군사가 5월 6일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주했습니다. 이 때 동학군은 전주에 입성하여 호남 일대를 제압하고 서울로 북상하려다가 청·일 양국군 개입 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하여 북상을 중단하는 동시 관군과 협상을 개시한 끝에 폐정개혁안 실행과 동학집강소(執綱所)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성립시키고 5월 8일에 전주성 을 관군에게 양도하였습니다.
당시 동학군의 12개조 폐정개혁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도인과 정부 사이에 오래 끌어온 혐오의 감정을 씻어 버리고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일일이 엄중하게 징계할 것.
③ 횡포한 부호들은 엄징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은 징계할 것.
⑤ 노비 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⑥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량갓은 벗겨 버릴 것.
⑦ 청춘과부의 재가를 허용할 것.
⑧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할 것.
⑨ 관리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왜적과 간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⑪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돌릴 것.
⑫ 토지는 평균하게 나누어 경작케 할 것.
이 폐정개혁안은 우리나라의 주체적 근대화의 시발로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전라도 53개 군에 동학집강소가 설치되어 민정이 실시되면서 봉건적 낡은 제도의 과감한 쇄신을 보였습니다. 이와 같이 근대화의 제개혁이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한반도를 무대로 청·일전쟁이 일어났습 니다. 전세는 일본군의 우세로 기울어지고 일본군은 재빨리 고종을 사실상의 포로로 하여 일본의 괴뢰 내각을 출범시켜 소위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군의 침략 사실이 동학군에 전해지자 동학군은 무장을 다시 가다듬고 전주를 재점령 하고 북상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9월 18일 해월신사는 전국의 동학교도들에게 충청도 옥천 청산(靑山)으로 모이도록 하여 대일 항전의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이리하여 동학군은 전국에 걸쳐 339지방의 포(包)가 동원되고 수십만의 대군을 형성하여 삼남 일 대와 충청도 동남부를 장악했습니다. 10월에 이르러 논산에 동학군 주력 부대가 집결하여 공주를 향해 북상하였습니다.
동학군은 목천(木川) 세성산 싸움에서 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주력 부대는 공주 이인역 옥녀봉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봉황산에 이르러 10월 22일부터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대혈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공주 우금티 전투는 무려 사오십 차례나 우금티 고개를 뺏고 빼앗기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대혈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동학군은 일본의 막강한 신무기와 화력을 당할 수 없어 11월 11일 우금티 고개를 시체로 메우고 천추의 한을 남긴 채 처참하게 패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학을 뿌리째 없애려는 의도로 악착 같이 추격하여 무차별 토벌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동학군은 충주·홍천·하동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 상원 등 도처에서 줄기차게 일어나 싸웠으나 처절한 전투 끝에 무려 30여만의 무참한 희생을 내고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포덕 39년(1898)에 해월신사가 체포당하여 72세의 고령으로 교수형을 받으실 때 "나 죽은 후 10년 안에 장안에 동학의 주문 소리가 크게 울리리라." 하시니 비록 갑오동학혁명은 왜병의 총칼 앞에 무참히도 좌절되었지만 그 정신은 끊이지 않아 10 년후 갑진년(1904)에 동학의 개화혁신운동이 일어나고 다시 기미년(1919) 3월 1일에는 항일 독립 운동의 함성이 방방곡곡에 울려퍼졌던 것입니다.
이 동학혁명은 반봉건 반침략주의의 기치 하에 거사한 근대적 민주화의 혁명이었으며 근대적 통 일 민족 국가를 추구하는 위대한 민중 혁명으로서의 근대적 민족사의 시발로서 새로운 역사의 장 (章)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학혁명의 횃불은 꺼지지 아니하는 불길로서 당시 좌절당한 것 같지만 그 정신은 계속 살아서 동학의 후예들이 연이어 일어나 독립 만세의 함성을 울리게 되었습니다.
갑진개화혁신운동
갑오동학혁명 이후 한국은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의 예속을 벗어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한반도 안에서 각축전을 벌이는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에 외유하여 체류 중이던 의암성사는 노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그대로 앉아서 나라가 전쟁에 휘말려 망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조직을 동원하여 먼저 정부를 개혁하는 동시에 개화혁신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인숙으로 하여금 먼저 정부에 건의하여 정치를 개혁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패, 무능한 정부 당국은 나라의 운명이 이에 달린 줄은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이 글을 올린 이인숙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포덕 45년(1904년) 2월에 드디어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의암성사는 사태가 급박함을 보고 동학 의 간부들을 일본으로 불러 민회(民會)를 조직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본국에 돌아온 간부들은 민회의 이름을 대동회(大同會)라 하고 비밀리에 각 지방에 조직을 펴나갔습니다.
이어 4월에 박인호, 흥병기 등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의암성사에게 그 동안의 국내 사정을 보고하자 의암성사는 이르기를 "그대들은 본국에 돌아가 도인으로 하여금 일제히 상투머리를 잘라 단발(斷髮)케 하라. 단발의 목적은 첫째, 세계 문명에 참여하는 표준이요, 단결을 굳게 하여 마음과 뜻을 일치케 하는 것이니, 우리가 단발을 한 후에라야 기대하는 일이 성공하리라"고 하였습니 다.
이 지령에 따라 7월부터 「대동회」를 「중립회」로 명칭을 바꾸고 각 지방에 조직을 하려고 하였는데 이 때 관헌의 탄압이 극심하여 뜻대로 안 되었습니다. 일이 여의치 못하자 의암성사는 권동진, 오세창, 조희연 등과 상의하여 회명을 다시 「진보회」로 바꾸고 다음과 같은 강령을 발표케 했습니다.
첫째,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 기초를 공고히 할 것.
둘째, 정부를 개선할 것.
셋째, 군정·재정을 정리할 것.
넷째, 인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할 것.
이와 같은 강령을 발표하면서 종래의 산발적인 모임을 지양하여 백만 도인이 8월 30일 일시에 개회(開會) 궐기하도록 지령을 내렸습니다.
이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단발흑의(斷髮黑衣)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정부 개혁과 국정의 쇄신을 부르짖으니 당시 상투를 자른 사람이 하루 사이에 만명을 넘고 며칠 사이에 근 20만 명이 참가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진보회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진보회는 360여 군에 지방 조직을 설치하고 정계에 큰 바람을 일으키며 민폐 제거와 무명잡세 혁파, 나아가 부패한 정부를 탄핵하며 교육과 산업의 부흥 등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보회의 정체가 과거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동학당의 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정부는 당황한 나머지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는 한편 일본군과 교섭하여 지난날 갑오년 때와 같은 동학 토벌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각 지방에서는 충돌 사건이 빈발하고 발포, 구타, 살상 등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특히 평안도 태천에서는 수백 명의 교인이 한꺼번에 쫓기어 「고치강」에 빠져 익사당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 때 친일 단체인 「일진회」는 일본의 보호 밑에 겨우 간판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진보회」가 크게 일어남을 보고 진보회장 이용구에게 「정부에서 갑오년 동학당 토벌 때와 같이 일본군과 합세해서 진보회를 소탕할 방침인 듯하니 진보회가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일진회와 합동하는 길뿐」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이에 이용구는 동학을 배신하고 일진회 요구대로 이해 10월 13 일 「진보회」를 「일진회」와 합병, 친일 단체 「일진회」로 둔갑시켰습니다.
이용구의 배신을 뒤늦게 알게 된 의암성사는 포덕 46년(1905년) 12월 1일을 기해 동학을 <천도교>라 선포하는 동시 「천도교」와 「일진회」간의 일체 관계를 끊게 하고 이용구 등 친일파 일당을 천도교에서 출교 처분하였습니다.
갑진년의 이 개화혁신운동은 이용구의 배신으로 비록 좌절되었으나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있어서 놀라운 민권의 신장과 문화 혁명의 개혁 의지를 보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3.1독립운동
천도교는 경술년(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근10년 동안 힘을 기르면서 여러 방면으로 독립 운동을 거사할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하여 왔습니다.
① 교단 안에 민주적인 의사원(議事院) 제도를 새로 두고 지방 대표를 중앙에 상주케 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습니다.
②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 수도원을 설립하여 지방 대표 약 500명을 뽑아 7차에 걸쳐 수련을 실시, 독립 정신을 기르게 하고 이들이 지방에서 독립 운동 거사에 주동이 되게 하였습니다.
③ 비밀히 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 신축 기금의 명목으로 자금을 마련토록 하였습니다.
④ 전국의 교도로 하여금 기미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광복 특별기도를 행하게 하였 습니다.
이와 함께 전국 교구에 등사기를 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 전민족의 이름으로 독립 운동을 거사할 방침을 세워 나갔습니다.
이리하여 포덕 60년(1919년) 1월에 의암성사 자택에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여러 차례 모여서 회합한 끝에 다음과 같이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① 각계의 분산적 독립 운동 계획을 단일화하여 각계의 중진들을 망라한 「민족 대표」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을 할 것.
② 독립 선언서를 다수 인쇄하여 전국에 살포하고 전 민중과 더불어 대중적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토록 할 것.
③ 일본 정부와 의회 및 조선 총독부, 그리고 파리 강화 회의 각국 대표와 특히 미국 윌슨 대통 령에게 독립 의견서를 제출할 것.
④ 독립 선언서 및 서면의 작성 의뢰와 각계 섭외 활동 등의 계획 실행을 최린이 담당할 것.
그리고 이 운동의 방법으로
① 거족적 운동으로 대중화할 것이며
② 분파적으로 하지 않고 일원화하되
③ 비폭력적 무저항주의로 할 것
등 세 가지 원칙을 확정지었습니다.
그 후 최린은 2월초 자택에서 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과 회합을 가지고 앞서 세운 독립 운동 계획에 찬동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4일후 다시 계동 중앙학교에서 네 사람이 재차 회합하여 숙의 한 결과
① 구한국 시대 요로 인물을 설득하고 기독교와 함께 민족 대표 수십 인의 명의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하고
② 독립 선언서 및 의견서 등 서면 기초는 최남선이 담당하도록 합의하였습 니다.
이어 최남선과 송진우는 구한국 시대 요인을 찾아 각각 교섭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한편 최남선은 기독교와 교섭하기 위하여 정주의 이승훈을 만나고자 현상윤으로 하여금 상경하도록 전언을 의뢰하였습니다. 현상윤은 다시 정노식 집에 유숙 중이던 정주 사람 김도태에게 부탁, 김도태는 2월 8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9일에 정주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은 선천에 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박현환에게 상경하도록 말을 전하게 한 결과 이승훈은 2월 11일에 급거 상경하였습니다.
한편 이무렵 재일 동경 유학생들이 독립 선언과 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국내에서 일본 관헌의 경계가 자못 심하여졌습니다. 이 때 최남선은 지목을 피하기 위하여 이승훈과 직접 만나지를 못하고 송진우로 하여금 만나 상의하게 하였습니다.
송진우는 이승훈에게 천도교측의 독립 운동 계획을 말하고 기독교에서 같이 합류하기를 권하자 쾌히 찬동하였습니다.
이승훈은 다음날 선천으로 내려가 기독교의 이명룡외 세 사람과 회합하여 찬동을 얻고 다시 14일 에는 평양에 가서 길선주·신흥식 등과 만나 찬동을 얻었습니다. 그 후 이승훈은 재차 상경하여 기독교 청년회에 있는 박희도와 상면하여 기독교측의 독자적인 독립 운동 모의에 참석하였습니 다. 2월 20일 모의한 결과는 ①일본 정부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되 ②경성 및 지방에서 청원서에 서명할 동지를 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하여 기독교계의 함태영, 안세환, 이갑성 등을 중심으로 별도의 독립 운동 모의가 있었습니다.
그 후 2월 21일에 최남선은 이승훈을 만나 그와 함께 최린을 방문하여 의견을 교환하게 되었는데 최린은 기독교측의 독립 청원서 제출 계획을 듣고 독립 청원보다 독립 선언이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교파가 다르다 하여 서로 다르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합류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에 이승훈은 다른 동지와 협의하여 회답키로 약속하는 한편 독립 운동비조로 자금을 마련하도록 요구하고 헤어졌습니다. 이에 최린은 의암성사에게 운동 자금 융통에 대한 승인을 얻어 5천원 을 22일 이승훈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후 이승훈은 함태영과 함께 기독교측 대표로서 천도교측 섭외 대표인 최린과 여러 차례 협의 한 끝에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독립 운동 방법을 합의하였습니다.
① 독립 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 낙원동의 탑골공원에서 행합니다.
② 독립 선언문을 민중에게 살포하는 동시 학생단과 민중으로 하여금 만세 시위행진을 감행토록 합니다.
③ 각 지방 거사는 중앙을 모방토록 하고 선언서 발송등 지방 연락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각기 지방 조직을 통해서 분담합니다.
④ 독립 선언서의 기초, 인쇄, 서명 등은 천도교측이 담당합니다.
⑤ 일본 정부와 의회에 대한 서류 제출은 임 규, 안세환에게 서면을 주어 2월 27일 서울을 출발케 합니다.
⑥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 회의 각국 대표에 대한 서면 제출은 기독교측에서 담당합니다.
⑦ 민족 대표로 연서할 사람은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 10여 명으로 정하기로 하고 불교측 대표 는 최린이 한용운을 만나 약간인 참가키로 합니다.
이리하여 민족 대표 33인이 정해지고 2월 28일 저녁 의암성사댁에 민족 대표가 회동하여 다음날 3월 1일의 거사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합의한 결과 독립 선언서 낭독을 태화관에서 하기로 변경한 것 외에는 모두 당초 계획대로 재확인하였습니다.
드디어 3월 1일이 왔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평화적 독립 운동의 빛나는 시범의 기원이 될 이 날 민족 대표들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불렀습니다. 때맞추어 탑골공원에서는 남녀 학생단이 모여 일반 민중과 더불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드높게 외치면서 시가로 쏟아져 나와 시위행진을 감행하였습니다.
같은 날 평양과 해주, 의주, 길주, 원주, 서산, 전주, 진주 등지에서 거사하고 연이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성난 파도와 같이 남녀노소가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으로 민족 대표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투옥당하고 이름 없는 많은 애국지사가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국내에서 독립 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해외에서는 망명 지사를 중심으로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우게 되고. 숭고한 3·1정신은 그 후 대한민국 건국 정신 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신문화운동
천도교는 정신 문화면에 치중한 민족 신문화 창달에 자못 눈부신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주로 3· 1운동 후 일어난 신문화 운동은 청년운동· 출판문화운동· 농민운동· 어린이운동·여성 운동 기타 여러 방면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개요를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 청년운동
천도교는 3·1운동 후 교역자들이 대부분 체포·투옥당하여 한때 공백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때 젊은 청년 교인들 중심으로 선열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자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민족의 신문화 창조·계발과 새로운 사상·교리의 연구 보급을 목적으로 청년 교인 중심의 「천도교 청년 교리 강연부」가 포덕 60년(1919년) 9월 2일자로 발족되었습니다. 이 청년 조직은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설치 확대하면서 다음해 3월에는 「천도교 청년회」로 이름 을 바꾸고, 편집부 사업으로 「개벽사」를 설치하여 월간 「개벽」을 발간하는 한편 순회강연을 실시하고, 또 체육부 사업으로 야구단을 조직 활동하였으며 신체조를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포덕 63년에는 청년회 소년부 사업으로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소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후 포덕 64년 9월에는 청년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천도교 청년당」의 창립을 보았습니다. 청년당은 급속도로 발전되어 포덕 66년에 지방당부 120여에 당원수 3만여 명을 확보하였고 7개 부문 운동을 전개하여 농민 운동, 노동 운동, 소년 운동, 여성 운동, 학생 운동, 청년 운동, 상민 운동 등 각 계층 부문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면서 매년 12월 1일을 포덕의 날로 정하여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청년당은 포덕 67년 5월부터 「신인간 자학(自學)」제도를 창설하였으며 포덕 68년 12월에 는 「조선정형(情形)연구소」를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그 후 청년당은 포덕 72년(1931년) 2월 16일에 그 동안 별립해 왔던 「천도교 청년 동맹」과 합동하여 「천도교 청우당」으로 개칭하여 더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포덕 73 년에는 당학(黨學) 제도를 창설했는데 다음해에는 이를 발전시켜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 대학 강좌로서 「자수대학(自修大學)」강의를 실시하고 포덕 75년에는 기관지 「당성(黨聲)」을 통한 계몽 교육에 힘썼습니다.
나. 개벽과 출판문화운동
천도교는 3·1운동 이후 「개벽」지 발간을 비롯한 출판 ,문화 활동에 치중하여 당시 우리나라 의 출판문화운동을 단연 주도해 나갔습니다.
「개벽」지는 포덕 61(1920)년 6월에 창간, 포덕 67년(1926) 8월까지 통권 72호를 내고 일제의 강압으로 폐간 당 하였습니다. 당시 잡지계의 왕자적 위치를 점한 「개벽」지의 발간 정신은 그 제호 가 말하듯 천도교의 개벽 사상을 의미한 것이며, 천도교의 이념 구현에 뜻을 두면서도 종교적 색 채를 나타내지 않고 사회 대중 계몽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개벽」지는 민중지로서의 특성을 보이고 민중을 위한 민중의 잡지임을 자처하였습니다. 또 한편 「개벽」지는 항일 민족 저항 잡지로서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창간호 가 압수당하여 임시호를 낸 것을 비롯, 발매 금지 34회 외 삭제, 벌금, 정간 등의 탄압이 잇따르고 초기 4년 동안 발행 권수 43만4천여 권 중 무려 4분의 1에 해당되는 11만2천여 권이 압수당하였습니다.
한편 개벽지의 성격은 종합 교양지이면서 문학지적 특성을 돋보이고 우리나라 근대 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개벽」지가 포덕 67년 발행 금지를 당한후 「별건곤(別乾坤)」 (포덕 67∼75, 통권 103호),「혜 성(彗星)」 (포덕 72, 통권 13호),「제 1선(第 1線)」 (포덕73, 통권11호) 등을 연이어 발간하고 이 밖에 「학생」 (포덕 70, 통권 12호),「중성(衆聲)」 (포덕 64, 통권 18호),「새벗」 (포덕 70, 통권 49호) 등 수많은 정기 간행물을 발행하였습니다. (어린이지와 여성지, 농민지 별도 간행)
(농민 운동)
천도교의 농민 운동은 주로 포덕 66년 10월 29일 설립한 「조선농민사」를 통하여 전개되었습니 다.
「조선농민사」는 처음에 「사우제(社友制)로 조직하였다가 포덕 69년 2월 14일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에 농민사 본부를 두고 각군에 군농민사와 그 밑에 이동(里洞) 농민사를 두는 계통 조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각 지방 농민사는 포덕 69년 현재 23개였던 것이 포덕 74년에는 150여 개로 증가하였고 사원 또한 2O만 명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조선농민사」는 우리 나라 최초의 농민 잡지로서 「조선농민」(포덕 66∼71, 통권 30호)「농민 」 (포덕 71-74, 통권 42호) 등의 월간 잡지를 보급하는 한편 「대중독본」「대중산술」「비료제 조법」「양잠법」 등 농촌 계몽 문고본을 보급하여 농업의 근대화에 주력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농민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농촌 문고본의 보급은 당시 문화의 불모지였던 한국 농촌 사회에 농 민 문화 보급의 선구적 계몽 역할을 다하고 버림받았던 농민의 인격 해방과 농촌의 경제적 파탄 을 구제하는 농민의 의식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농민의 자주·근면과 협동 의식을 고취하고 나 아가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동시에 과학 영농과 기술을 계도하고 일상 생활에서 비과학적 전근 대적 태도를 탈피하도록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심어주었으며 농촌의 문맹 퇴치와 한글 보급 등 크나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연회 개최와 농민학교 및 야학(夜學) 운영에 앞장서서 전국에 3천여 개소에 달하는 「농민 야학」을 실시하고 또 「농민의 날」을 제창하여 농민의 권 익 옹호와 계몽에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농민공생조합」을 포덕 72년에 별도로 조직하여 포덕 74년에 지방 공생조합의 수가 180 여개소에 조합원수 5만여 명, 조합 총자본 30여만 원에 달하였습니다. 특기할 것은 농민공생조합 평양 지부에서는 포덕 72년에 농민 고무신 공장을 설립, 매일 1,500 켤레의 고무신을 염가로 쟁산 공급하고 그 밖에 공동 경작 운동을 전개하는 등 우리 나라 농민 주도의 민주적 농협 운동의 원 조가 되었습니다.
(어린이 운동)
천도교는 어린이 운동을 위하여 포덕 62년 5월 1일 「천도교 소년회」를 설립하고 전국 순회 강 연을 전개하여 유소년의 해방을 제창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5월 1일에는 첫 「어린이날」행 사를 하고 이를 범사회적 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하여 포덕 64년 4월 17일 다른 종교의 소년 단체 와 연합하여 「조선 소년 운동 협회」를 조직, 협회 본부를 천도교당 안에 설치하여 매해 5월 1 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는 동시 세계 최초의 「어린이 헌장」이라 할 수 있는 「소년 운동의 기초 조항」을 선포하였습니다.
한편 이 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지를 월간으로 발간 보급하였는데 「어린이」지는 포덕 64년 (1923년) 3월 20일에 창간하여 포덕 75년 7월까지 통권 122호까지 내고 정간되었다가 해방 후 통 권 137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습니다.
이 「어린이」지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자유를 이념 으로 하여 어린이를 민족 장래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고 어린이에 대한 재래의 비인간적 폐습을 혁 신시키는 동시 아동 문학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여성 운동)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은 교조의 시천주(侍天主) 및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남녀 동권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만큼 여성 운동에 각별한 열의를 나타냈다.
천도교는 포덕 65년(1924년)에 「천도교 내수단(內修團)」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단체를 조직하였 는데 그 후 「내성단(內誠團)」「부인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나 6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천도교의 여성 단체는 전국에 지방 조직을 두고 주로 생활 혁신과 신여성상(新女性像)의 정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는 한편 「부인」과 「신여성」이라는 월간 여성 잡지를 통하여 우리 나라 여성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부인」 잡지는 「내수단」이 조직되기 앞서 포덕 63년(1922년)부터 천도교 청년회 여성 부문 운동의 일환으로 발간하기 시작하여 포덕 64년 9월까지 통권 16호를 발행하다가 그해 9월부터 「 신여성」으로 이름을 바꾸어 포덕 75년 8월까지 통권 38호를 발간하였습니다. (포덕 67년-포덕 71년까지는 별건곤에 통합)
「부인」지 또는 「신여성」지는 ①생활개선 ②가정의 낙원화 ③도덕과 미풍의 조장 ④자녀의 교 양 ④고상한 취미 고조 등에 힘쓰고 낙후한 한국 여성의 교양을 높이고 사회 진출과 여권 신장 및 의식 계발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교육 운동)
보수적 민족주의가 한학(漢學) 위주의 구학문에 집착하면서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신교육을 외세 에 추종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고루한 태도를 보인 데 반하여 천도교의 진보적 민족주의는 신교육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천도교 제3세교조 의암성사는 일본 망명시 64명의 국내 젊은이를 일본에 유학시킨 바 있고 「황 성신문」(광무 10년 2월 14일자)에 「사손병희씨 열의교육(謝孫秉熙氏熱意敎育)」이란 논설이 실 린 것만 보아도 천도교가 신교육 운동에 얼마나 열성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천도교는 보성학교(普成=현 보성중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와 동덕(同德)여학교를 비롯하여 용산에 양영학교와 선덕여학교, 마포에 보창학교와 삼호보성소학교, 청파동에 문창보통학교, 청주에 종학 학교, 안동에 봉양의숙, 선천에 보명학교, 전주에 창동학교, 대구 교남학교와 명신여학교 등 31개 학교 운영에 기여하고 전국적으로 야학 강습소를 통한 문맹 퇴치 등 민중 교육 내지 민족 교육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기타. 신문화 운동과 그 의의)
이상에서 천도교의 신문화 운동을 주로 청년 운동, 출판 문화 운동, 농민 운동, 어린이 운동, 여성 운동으로 나누어 개관해 보았으나 이 밖에 신인간 창조 운동 그리고 언론 활동과 사상의 연찬과 그 전개에 많은 활동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신문화 운동의 특성과 그 의의를 살피면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습니다.
첫째, 개벽 사상을 배경으로 낡은 문화의 청산과 새로운 민족 문화의 창조를 추구하여 낡은 사상 과 제도와 인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과 인간관의 정립으로 문화 혁신을 도모하였습니다.
둘째, 「인내천」사상을 배경으로 한 인간 주체의 신문화 창조를 추구하여 인간이 물질이나 정신 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인간 회복 내지 인격 해방에 앞장섰습니다. 따라서 전근대적인 봉건 사 상을 배격하고 배금주의에 빠지는 자본주의 내지는 유물 사관의 사회주의를 다같이 부정하는 입 장을 나타냈습니다.
셋째, 보국안민 사상을 배경으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민족 전통 문화를 살리는 민족 주체성 에 투철하면서 동시에 서구의 문물을 진취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넷째, 민중을 대상으로 민중을 위하고 민중을 바탕으로 하는 민중 문화 운동으로서의 특성을 나 타냈습니다.
오심당 운동
1920년대 후반부터 천도교 청년당은 대중속에 파고들기 위하여 7부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개벽지를 통한 「언론활동」과 「소년회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1924년 3월에는 여성 단체인 「내성단」을, 1924년 6월에는 「천도교 학생회」를, 1925년 10월에는 「조선농민사」를, 1931년 5월에는 「조선노동사」를 조직하였 고, 1928년 4월에는 「천도교 청년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한편 천도교 청년당은 우리의 독립 운동을 위하여 1922년 가을에 김기전, 박사직, 박내홍, 조기간 등 6명(2명 미상)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비밀결사조직인 불불당 (不不黨)을 조직하였습니다. 1926년 말에 이르러 국내외 사정이 급변하여 오심당 (吾心黨)이라 개칭하고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습니다.
당원은 각 군에서 지도력이 있는 청년당원 중에서 엄선하였습니다.
1929년부터는 더욱 활동을 강화하였으며 1935년과 6년에 걸쳐 예상되는 일본의 국제적·정치적 위기가 도래할 기회를 포착하여 대대적인 대중적 독립 운동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1926년부터 천도교 청년당 중앙간부는 국내의 종교 단체 및 유력한 인사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정세 교환을 시도하였고 특히 조기간은 소련에, 김기전은 중국에, 박사직은 일본에 파견하여 국제정세의 추이를 광범하게 검토분석하여 왔으며, 당내 중견간부들에게는 전문분야를 하나씩 맡아 검토분석하 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오심당 당원들은 전 교인중에서 엄선된 유수한 일꾼들이었으며 당원들은
① 절대로 비밀을 엄수함은 두말할 것도 없고
② 1인당 1년에 5원의 운동 기금을 부담하였으며 (검거 당시 운동 기금은 2,300 여원이 있었다.)
③ 매일 당을 위하여 대중 운동을 다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당은 모든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매일 암송하도록 하였습니 다.
▲ 오심즉 여심
▲ 육능자= 스스로 분발할 것, 스스로 새로워질 것, 스스로 활동할 것, 스스로 굳세게 나갈 것, 스스로 판단할 것, 스스로 담당할 것
▲ 한울님을 모시고 한울님과 합일하는 신앙생활을 인식하고 체험할 것을 서원한다.
▲ 각계각층의 대중 조직을 강행한다.
▲ 소속되어 있는 대중 조직의 훈련을 담당한다.
▲ 궁극적 목표 달성을 위해 정진할 것을 잊지 않는다.
오심당은 강인한 결사적 조직을 하고 비밀리에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포덕75년 (1934) 9월19일부터 21일까지 오심당 당원의 일부인 230명이 일제히 검거되었습니다. 일본 식민 통치하에서 평남경찰부는 「나리도미」라는 고등과 과장의 진두지휘로 평양 경찰서의 협력을 받아 형사대를 총동원하여 19일 새벽을 기해 검거 에 나섰습니다. 이 때 검거된 당원은 노출된 지방에 한해서 행해졌으며, 서울, 평양, 강동, 중화, 성천, 순천, 은산, 양덕, 강서, 안주, 맹산, 진남포, 경기지방, 선천, 의주, 정주, 구성, 영변, 곡산 등지에서 검거되었습니다. 함경도 일대와 기타지방에서는 노출되지 않아 검거되지 않았습니다.
<오심당 운동의 의의>
오심당 운동은 경신년(1860년) 동학의 창도 이후 계속된 후천개벽을 위한 동학군의 활동으로서, 일제하의 우리 민족에게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킨 애국 운동의 하나입니다. 오심당이 목적하였던 1935년과 1936년에 조선 독립 운동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그 비밀 조직이 1922년에 발족하여 1934년까지 근 11년간에 걸쳤다 는 점에 비추어 보아 비밀 조직이 얼마나 잘 되었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핵심이 되어 유년·소년·학생 운동을 비롯하여 청년·여성 운동과 농민 ·노동·상민운동 등을 대대적으로 벌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당원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으며 앞장 섰었는가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특히 당시 사회단체는 재정 문제에 언제나 곤란을 당한 것이 보통이었으나 오심당은 검거될 때 2,300여원이란 자금이 확보되어 언제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원들의 자발적인 의무도 훌륭했지만 간부들이 죽을 고비를 넘어가며 소련, 중국 등에 비밀히 잠행하여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의 활동 상황을 탐문하는 동시에 국내외에 걸쳐 정세 분석에 심혈을 기울여 역량을 십 분 발휘했다는 점입니다.
무인멸왜기도운동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는 일제가 만주를 유린하고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에게 더욱 가혹한 식민 통치를 심화시켜 나갈 때 일제의 패망과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 운동과 유사시에 대비한 자금을 모금하는 무인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때 송죽과 같은 정절로 일관하여 온 천도교 제4세대도주 춘암상사는 포덕 77년(1936년) 8월 14일 교내의 주요 간부들을 불러 민족정신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패망을 기원 하는 기도 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령을 내렸습니다.
춘암상사는 간부들에게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온다는 것을 말씀하면서 경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아침·저녁 정성껏 기도하라고 밀령을 내린 것입니다.
"무궁한 내 조화로 개 같은 왜적 놈을 일야 간에 멸하고서 한의 원수까지 갚겠습니다."
이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제의 패망을 기원함과 아울러 유사시에 대비, 독립 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특별 성금 모금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이 특성금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이 전쟁으로 인하여 주권을 회복할 기회가 포착될 것으로 믿고 그 경우 필요한 자금을 미리 마련하기 위하여 전국을 네개 구역으로 나누어 비밀히 모금 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운동의 후반에 는 일본 경찰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일제 패망」이라는 문구 대신 「동양 평화의 기초 가 하루빨리 확립되도록 기원 한다」는 내용으로 위장케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포덕 79년(1938년) 무인년 2월 17일에 이 사실이 황해도 신천 경찰서에 적발되어 전국적으로 교역자의 검거 선풍이 일어났습니다. 황해도 연원 대표 홍순의에 이어 장로 최준모를 비롯하여 간부급 교역자들이 수백 명 체포 투옥당하고 춘암상사는 노환으로 병상 심문에 그쳤으나, 투옥된 많은 교역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 심한 고문으로 인하여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사망한 분이 장흥의 김재계, 논산의 손필규, 해남의 이강우, 신천의 김정삼 등 4명이나 되고, 그 밖의 여러분이 악형으로 인하여 고질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왜경은 수백 명의 피검된 교역자들에게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여러 번 쓰게 하고 수십 번 혹은 백회 이상 종일 밤새도록 고성으로 낭독케 하였다고 합니다. 경찰서 안에서 일제 패망의 기도문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자 오히려 왜경들 스스로 놀라서 안색이 초췌해지고 검어졌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정신적 패망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사변하에 지하 활동」「극비의 불온 계획」「조선 독립을 몽상」「천도교의 대음모」「특별 희사금도 모금」등의 제목으로 보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제는 이 사건이 크게 확대가 될 경우 중일전쟁 수행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일반 교역자들은 모두 석방시키고 최준모, 김재계, 한순회, 김경함, 홍순의 등 5인만 구속 송치하였다가 5인마저 70일 만에 석방하였습니다. 왜경이 이 사건의 성격과 죄질이 3·1운동 때보다 더한 대음모라고 하면서도 전원 석방으로 매듭짓게 된 것은 전시하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의 충격파를 미연에 막으려는 고등 책략에서였던 것입니다.
이 무인독립 운동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역사의 그늘에 가리어 있었으나 우리나라 독립 운동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민족 수난기에 민족 말살의 위기에서 우리의 민족혼을 되살리고 불굴의 독립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큰 것입니다.
남북통일운동
8·15 해방 후 우리나라는 일제 치하에서 벗어났으나 미·소 양국군에 의해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외세 추종 세력이 득세하면서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근대적 한국 민족주의의 정통 주류인 천도교는 남북 분열을 저지하기 위하여 3·1재현운동을 전개하였습 니다.
포덕 86년(1945년) 8·15 후 소위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 통치 결의에 이어 포덕 87년(1946년) 부터 다음 해까지 한국의 통일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놓고 미·소 공동 위원회가 두 차례에 걸쳐 열렸으나 끝내 결렬되고 포덕 88년(1947년)에 유엔 총회에서 「남북 자유 총선거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을 가결하자 북한에서 이를 반대하는 한편 김일성 중심의 공산 정권 수립이 단독으로 진행되고 남한에서는 북한이 자유 총선거를 거부함에 따라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케 되어 남북이 각기 정부를 따로 세우게 될 경우 한국은 완전히 남북으로 분열되어 동족상잔의 비운을 면치 못할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1) 3·1재현(再現)운동)
이 때 북한의 천도교 교역자들은 남북 분열을 저지하기 위하여 3·1정신을 계승한 제2의 3·1운동을 전개할 것을 여러 차례 서울의 천도교 중앙총부에 호소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는 포덕 89년(1948년) 1월초부터 동 20일경까지 원로 간부들이 모여 몇 차례의 밀의를 거듭한 끝에 3·1절을 계기로 북한의 2백만 교도와 일반 민중이 합세하여 통일 선언과 시위운동을 전개 하도록 지령을 내리기로 결의하고 이를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는 「통일 선언문」과 거사의 비밀 지령 문서를 북한 천도교에 전달할 밀사를 북송하게 되었습니다. 밀사로 박 현화와 유 은덕 두 사람이 2월 7일 각기 길을 달리하여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였습니다. 두 밀사 중 박 현화는 2월 14일 평양에 도착하여 김 일대(당시 청우당 평남 도당 위원장)를 거쳐 김 덕린(당시 북한 천도교 연원회 상무)에게 밀서를 전달하였습니다.
김덕린과 김일대는 2월 15일 강동 수도원에서 천도교 수뇌급 주요 간부들이 회동한 자리에서 서울의 지령에 따른 거사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북한 천도교 청우당 대표 김달현이 이를 반대하므로 표면상 거사를 중단키로 하였으나 김덕린과 김일대는 따로 모임을 가지고 청우당이 모르게 별도로 천도교 연원 조직을 통해 거사하기로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김 명희(북조선 종무원 신도부장)와 함께 각 도별 지방 연원을 움직일 수 있는 박용완, 주명득, 배의찬, 지성률 등 두목들이 각 지방에 급파되어 각 시군별로 거사 동원 체제를 펴나갔습 니다.
이처럼 북한의 전체 천도교 연원을 동원하여 총궐기 하려던 극비의 거사 계획은 끝내 북한 공산 당국에 탐지되어 2월 24일 밤부터 1만7천여 명의 간부급 교역자가 투옥당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밀사 가문데 유은덕은 해주에서 체포당하여 희생되고 수많은 검거자 중에 서 주모자 87명은 평양 감옥으로 압송당하여 터무니없는 죄를 씌워 최고 사형에서 최하 4년형까지 중형을 받았습니다.
이 거사로 인하여 당시 북한에서는 3·1절 행사가 전면 중지되고 군중집회는 완전히 봉쇄당하였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영변, 희천, 개천 등지에서는 당국의 발포·제지에도 불구하고 상당 한 규모의 민중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통일 운동으로서의 큰 의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이 때 시달된 지령 문서에서 3·1운동 당시 독립 선언문을 발표한 바와 같이 이번에는 「통일선언문」을 발표하도록 하였는데 그 중 통일 공약 5개장 만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약 5장〉
1.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의거치 않는 어떤 정치 체제, 어떤 경제 구조도 단호히 이를 배격합니다.
2. 우리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국토 통일과 민족 단결을 저해하는 모든 세력의 준동을 봉쇄합니다.
3. 우리는 유엔의 결의를 성실히 준수하여 유엔 한국 위원단 입국을 환영합니다.
4. 우리는 남북통일 정부가 수립되기 최후 일각까지 이 운동을 계속합니다.
5. 우리는 이 운동을 비폭력·무저항주의로 일관합니다.
(2) 영우회(靈友會) 운동
3·1재현운동이 좌절되고 많은 교역자가 체포, 투옥당하자 남은 천도교인들은 당초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재거사의 기회를 대비하기 위하여 「영우회(靈友會)」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 착수하였습 니다. 이 조직은 포덕 89년(1948) 5월 1일 평양에서 7인의 조직이 기초가 되어 북한 전지역에 파급 확대되어 수십만의 조직망을 확보하였으나 포덕 91년(1950년) 4윌경 공산 당국에 그 비밀이 탄로되어 무수한 교인들이 희생당하였습니다.
이 때 평양 감옥에서 주모자급이 165명 처형당하고 해주 감옥에 47인, 수안에 44인, 곡산에 74인, 양덕에 48인, 성천에 79인, 순천에 37인, 중화에 21인 그리고 동평양, 대동, 강동, 맹산, 안주, 태천, 운산, 삼등, 연천, 이천, 평강, 원산, 함흥, 정평, 혜산 기타 여러 지방에서 그 수와 전모를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무수한 교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하였습니다.
이 영우회 조직 활동은 주모자 165인에 대한 처형 판결문에서 밝하진 바와 같이 3·1재현운동의 연속이었고, 「남북 통일 정부가 수립되기 최후 일각까지 이 운동을 계속한다」는 그 정신은 계속 살아서 오늘의 통일 문화 창조의 의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근대적 민족 사상 백여 년의 민족사적 시련 과정에 가장 심각한 민족적 위기인 남북 분단과 민족 분열 위기에 항거 궐기했던 천도교인들의 3·1재현운동은 통일 운동으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지닙니다.
천도교는 근대 백년 역사상 ① 왕조 사회 해체기에 갑오동학혁명과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일으키고 ② 국권 상실기에 3·1독립운동을 일으켰는데 당시에는 그 운동이 모두 실패했지만 그 정신은 계속 성장·재현(再現)되어 결국은 성공으로 이어진 것과 같이 ③ 민족 분열기의 3·1재현운동과 영우회 조직 활동은 당시의 상황만 고려한다면 큰 성공을 보지 못한 듯하지만 민주적 통일 운동으로서의 그 정신은 끊이지 않고 다시 살아서 후일 통일의 그날에 더욱 높이 평가될 수 있는 역 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운동은 근대적 민족주의 운동의 일관된 정통성을 계승한 근대적 통일민주국가 형성의 추구와 천도교 본연의 숙원인 「보국안민」과 나아가 「후천개벽」운동의 일환으로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통일은 4강의 외세가 가져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통일은 한국의 한국화에 있습니다. 한국화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는 공산화가 아님은 물론 서구화가 아닌 민족 주체 철학 에 의한 한국 민주주의의 실현입니다, 그것은 남북의 양극 이념을 극복함을 말합니다, 천도교는 바야흐로 한국 민주화의 열망을 통일에의 열기로 승화시키고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통일 문화 창조에 앞장서야 할 역사적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