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0. 지산동 터줏대감 중화양씨, 학산재·효자각
글·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시 남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지산동과 범물동. 1980년대만 해도 대구의 변두리를 넘어 오지로까지 불렸던 지역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구 대표 신도시 중 한 곳으로 2021년 현재 인구수가 7만 명이 넘는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 고사를 제대로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범물동 초입에 있는 지산동은 남쪽으로 대덕산, 북쪽으로 무학산을 끼고 있다. 이 무학산 남쪽에 360년 내력을 지닌 한 문중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바로 중화양씨(中和楊氏) 지산문중(池山門中) 학산재와 효자각이다.
대덕산하활만인(大德山下活萬人), 무학산(舞鶴山)
무학산 자락에 처음 마을이 들어선 것은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쯤이라고 한다. 이중 중화양씨가 터를 잡은 것은 360년 전쯤 일이다. 중화양씨 지산 입향과 관련해 흥미로운 전설 하나가 전한다. 지산동 중화양씨 마을을 다룬 ‘매일신문’ 1978년 6월 18일자 ‘취락(聚落)’이라는 연재물에 소개된 내용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360년 전 쯤 중화양씨 14세 양시진과 그의 아들 양달화는 후손의 번영을 기약하며 지금의 범물동에 집터를 닦고 주춧돌을 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금강산 유정사에서 왔다는 ‘일이’[一耳·귀가 한쪽만 있어 일이라 했다] 스님이 집터를 살펴보고는 “대덕산하활만인이라. 여기보다 지산동이 낫다”고 했다. 이 말에 양씨 부자는 다시 집터를 옮겨 지금의 무학산 남쪽 지산동에 터를 잡게 됐다. 그 뒤 양달화의 묏자리를 잡을 때도 일이 스님의 도움이 있었다. 지금의 양달화 묏자리는 본래 타성(他姓)의 묏자리였는데, 터가 좋지 않다해 이장한 파묘 터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예전 좌향 그대로 쓰면 12세손에 황후가 난다”는 일이 스님의 조언에 양달화 부부는 지금껏 그 자리에 묻혀 있다.
지산동은 무학산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무학이란 산명은 풍수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산의 모습이 마치 학이 날개 짓하며 춤을 추는 형국을 닮았다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인터넷 지도검색을 해보면 무학산은 정말 학을 닮았다. 중화양씨 종당(宗堂)인 학산재 뒤편 산봉우리가 학의 머리, 경찰청이 있는 서쪽 산자락이 오른쪽 날개, 무학터널이 있는 동쪽 산자락이 왼쪽 날개, 북쪽으로 두리봉을 거쳐 연호동으로 길게 이어지는 산줄기가 학의 등줄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지산동은 처음에는 신덕(新德)으로 불리다가 조선 중기에 와서 꿩이 많이 산다고 해 치산(雉山)이 됐다. 하지만 인근에 꿩의 천적인 매를 닮은 매봉산이 있다는 이유로 치산이 다시 지산(池山)으로 바뀐 것이다. 지산이란 지명은 이 지역에 못이 많은 것에 유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과거 이곳에는 둔덕지·당외지·마산지·조일지 등이 있었다. 이중 제일 큰 못은 지금의 녹원맨션과 교통연수원 자리에 있었던 둔덕지[지산못]로, 우복 정경세가 대구도호부사로 재임 시 조성한 것이다. 현 녹원맨션 남쪽 수성아트피아가 자리한 언덕은 영파정(影波亭) 혹은 영파대(影波臺)라 불렸던 곳이다. 과거 이곳에 우복 선생 공덕비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지산동은 중화양씨를 비롯해 김해허씨·경주김씨·벽진이씨·영천최씨·포산곽씨·밀양박씨 등이 600년 세월을 세거해온 유서 깊은 지역이다.
중화양씨(中和楊氏) 지산문중(池山門中)
양씨(楊氏)는 조선씨족통보에는 53본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중화·청주·남원·통주·안악·밀양 정도가 남아 있다. 고구려 안시성 전투의 영웅 양만춘, 고려 초 양지·양신린·양연·양규 등의 인물이 있지만 이들의 계대(繼代)까지는 확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는 성씨 시조를 두고 성씨 간에 논쟁이 있는 예가 많은데, 중화양씨와 청주양씨도 그 중 하나다.
중화양씨 시조는 고려 23대 고종[1213-1259] 때 정승용호위상장군(政丞龍虎衛上將軍)을 지내고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진 ‘양포(楊浦)’라는 인물이다. 중화라는 본관은 당악군에서 유래된 것으로 당악은 평안남도 중화의 옛 지명이다. 현조(顯祖)로는 양포의 8세손인 대봉(大峰) 양희지(楊凞止)가 대표적이다. 그는 조선 초 이름난 문신으로 성종 때 문과 급제해 부수찬·대사간·도승지 등을 지냈으며, 대구 수성구 파동 오천서원에 제향된 인물로 중화양씨 지산파 중시조(中始祖)다.
중화양씨가 대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봉 선생의 현손(玄孫) 3형제가 지금의 대구 수성구 파동에 정착하면서부터다. 이후 대봉 선생 7세손인 지촌(池村) 양달화(楊達和·1694-1756)와 그의 아버지 양시진(楊時震)이 지산동에 터를 잡으면서 지금의 지산문중이 시작됐다.
학산재(鶴山齋)와 효자각(孝子閣)
학산재는 무학산 남쪽에 자리한 중화양씨 지산문중 종당(宗堂)이다. 학산재는 지촌 양달화 선생의 강학소였던 학산서당에서 시작됐다. 이후 1890년(고종 27) 후손들이 협소한 옛 서당을 넓혀 종당으로 중건한 것이 지금의 학산재다. 솟을대문에 흙돌담을 두른 학산재는 정면 5칸, 측면 3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에서부터 1칸 방, 2칸 대청, 2칸 방이며 건물 안팎에는 구한말 저명한 인물들의 귀한 필적이 담긴 편액이 여럿 걸려 있다. 해사 김성근·몽인 정학교·학남 양준발의 ‘학산재’, 팔하 서석지의 ‘혜재(蕙齋)’, 혜재 양재호의 ‘제광정(齊光亭)’, 경도재 우성규의 ‘학산재기문’과 ‘상량문’, 지촌 양달화의 원운시와 시암 이직현을 비롯한 여러 후손의 차운시판, 주자의 ‘무이도가’에서 가져온 여섯 폭 주련이 대표적이다.
한편 학산재 인근 지산1동 행정복지센터 옆 소공원에 아담한 정려각 한 동이 있다. 대봉 선생의 10세손 학산(鶴山) 양해일(楊海一)과 그의 아들 우산(又山) 양헌방(楊憲邦) 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효자 정려각이다. 학산공은 조부상(祖父喪) 때 부친과 함께 3년 시묘살이를 했으며, 부친이 위독할 때 단지주혈(斷指注血)을 해 부친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우산공은 부모의 병환에 직접 시탕(侍湯)하며 자신의 목숨으로 부모를 대신하기를 하늘에 기도했으며, 엄동설한에 잉어를 잡아 부모를 봉양했다. 이러한 효행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1891년(고종 28) 조정의 명으로 지금의 정려각이 건립됐다.
에필로그
앞서 잠깐 언급한 30여 년 전 매일신문 연재물 ‘취락’의 마지막 문장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세상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너무나 빨리 변했다.
···어쨌든 다른 산간벽지나 농어촌 취락과는 달리 도시인근에서 뿌리를 굳게 박고 있는 이곳 楊씨네 마을에도 과연 취락의 변화가 올지는 더 오랜 세월을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지산동 터줏대감 중화양씨. 그 옛날 ‘일이’ 스님 예언을 믿는다면 이제 황후장상이 나타날 때가 됐다. 한 번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기다려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