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셨더라면 작은 아버지가 되실 분이다. 연천지구에 초병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무장공비가 삼촌이 근무하고 있는 코앞으로 침투했다. 삼촌은 배운 대로 두 명은 그 자리에서 즉시 사살하였다. 그런데 세 번째 북한군이 삼촌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하루하루 삼촌이 무사 제대할 것을 고대하던 우리 집으로 삼촌의 전사통보가 날아들었다. 이 일로 형인 나의 아버진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평생을 술로 살다시피 하였다. 이로서 우리 집안은 아버지 혼자 대를 잇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진 내게 하루라도 빨리 색시 감을 데려올 것을 노골적으로 종용하였다. 내 나이 겨우 스물넷이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집이라고 찾아오는 날이면 아버진 나보다 내 뒤에 누가 함께 따라오지 않나 살피셨다. 그게 난 못마땅했다. 자식이 때가 되면 알아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법인 데 그게 아버지의 욕심대로 되겠는가 싶어서다.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다.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 살며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양가 어른들로 하여금 내 며느리 내 사위 하던 동창이 있었다. 그녀도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농심’이란 회사에 취직해 있었다. 어쩌다 명절에나 얼굴을 보는 정도라서 그녀가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난 도통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 어느 해 추석에 귀성길에 버스에서 그녀와 나란히 앉아가게 되었다. 어릴 적 순수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내 옆엔 어엿한 숙녀가 된 그녀가 진한 분내를 풍기고 있었다. 우린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서울 생활은 어떤지 무얼 하며 지내는지 등등 그러다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난 그녀에게 전활 했다. 고향 떠나 외롭게 직장 생활하는 처지에 만나서 뜨끈한 국밥이라도 함께 먹자고 했다. 그녀는 약속시간에 맞춰 나왔다. 내가 아는 곳이라야 겨우 사무실 근처 밖에 모른다. 내자동 뒷골목에 꽤나 유명한 닭곰탕 집이 있었다. 그녀와 거기에서 닭곰탕을 시켜 먹었다. 그녀나 나나 가난한 직장인이었으므로 어디라고 갈 곳도 없었다. 기껏해야 다방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홀짝홀짝 마시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키가 크고 가슴이 봉긋하게 나왔고 허리가 잘록해졌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그 뒤로 그녀와 종종 만나 커피도 마시고 서점에서 서성대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두툼한 점퍼 하날 사주었다. 없는 돈에 내게 그런 정성을 다하니 나 역시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를 향해 연정 같은 걸 갖지는 않았다.
후에 추석이 되어 다시 고향에서 그녀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무렵 딴엔 그녀를 나의 반려자로 어지간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추석 당일 오후에 난 그녀를 우리 집으로 초대하였다. 말하자면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할 셈이었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부모님께 먼저 인사를 하였다. 그녀와 난 다과를 앞에 놓고 사랑방에 마주 앉았다. 그녀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릴 줄 알았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현상이 내 몸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우리 집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난 그녀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졌다. 말하자면 러블리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녀를 바로 앞에 두고서 갑자기 그런 감정이 물밀 듯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하려던 말은 뒤로 하고 우린 그저 친구로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각자 가정을 갖고 난 후 나중에 그녀가 내게 왜 그날 프러포즈를 하지 않았냐고 따져 물었다. 그녀도 내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걸 그때서야 겨우 알았다. 그럼 넌 왜 그냥 지나갔는데 하며 우린 서로 농지거릴 하고 말았다.
그녀와의 연인사이는 불발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아버지가 내게 찾아와 넌지시 꿩대신 닭이라고 그녀의 동생을 데려가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난 그저 웃어넘기며 별스럽지 않게 여겼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러던 어느 날 우연찮게 그녀의 동생과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함께 보게 되었다. 그녀가 내게 먼저 연락을 취해 두 장의 티켓을 선물 받았는데 나와 함께 공연을 보자는 것이었다. 함께 공연을 보는 게 뭐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그녀와 멋진 공연을 함께 관람하고 밥 먹고 시내를 함께 걷고 하다 보니 이상하게 정이 들었다. 남녀란 좌우지간 만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정이 들게 마련인가 보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연애생활은 약 일 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난 여전히 모르겠다. 그녀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녀가 나를 오빠가 아닌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그래서 하루는 작심하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일주일 안에 답을 달라는 내용으로 말하자면 나를 연인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저 오빠로 생각하는지 밝혀 줄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하였다. 편지는 월요일 오전에 그녀에게 부쳤다. 삼일이 지난 수요일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들면서 그녀와 결혼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내일 답장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급하게 내가 먼저 그녀를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겠노라고 편지를 써서 등기로 부쳤다. 돌아오는 주말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나자고.
우린 조용한 이층 다방 구석에 앉았다. 난 가슴 설레지도 미안한 맘도 안 들었다. 그저 내 안의 어떤 것이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내게 말하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답장을 주지 않은 것은 가족들의 의견을 충분하게 수렴하고 결과에 따를 것이라 하고 결론을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나와 결혼하는 걸 찬성해 내게 모정의 회신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나에게서 뜻하지 않은 내용의 편지를 읽고 적잖이 놀랐다고 하였다.
난 몹시 미안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찬바람이 부는 데 어쩌란 말인가 사랑하는 맘이 들지 않는데 격식 차린다고 염치 때문에 결혼한다고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남매와의 애매한 상태로 끝나버린 첫 연애의 교훈은 내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하였다. 요즘 세대들에겐 꼰대 같은 말이라고 하겠지만 난 내가 배우고 생각하는 기준이 잘 못 됐다고 생각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결혼하면 안 된다. 는 공식은 변함없는 결혼의 법칙이다. 그 뒤로 누구와 사귀더라도 확실한 단계가 아니면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함부로 상대를 건들지도 않았다. 한 번은 막내여동생 친구를 사귄 적이 있다. 그녀와 사귈수록 난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사는 마을에서 모퉁이만 돌아가면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그곳에 여전히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 그녀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러자 그녀가 대뜸 하는 말이 자기는 부모님의 허락 없인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빠가 대신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난 그러마 하고 그녀의 집에 당당하게 찾아가 장래의 장모님이 되실 분을 우리 집으로 초대를 하였다. 부모님께는 미리 앞서서 언질을 해놓았으므로 그쪽 집안의 승인이 허락된다면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어르신께 정중하게 절을 올리고 따님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였더니 갑자기 사색이 된 얼굴로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내게 자신의 딸을 절대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얼마나 단호하게 말씀하시던지 나와 우리 부모님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 말 한마디 하고 그녀의 어머닌 휑하니 가버리셨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그녀를 만나 그날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였다. 그녀의 얼굴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내심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굴 가지고 노는가 싶었다. 사내자식이 그래도 한 번 칼을 들었으면 찔러 는 봐야 할 것 아닌가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그녀의 자취방으로 찾아갔다. 우린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난 일부러 그녀에게 오늘 밤은 너와 함께 자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도 흔쾌히 그러라 했다. 그년 이미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그녀와 한 방에서 한 사람만큼의 틈 사이로 갈라진 채 각자의 요에서 누웠다. 잠이 올 리 만무하다. 불 꺼진 창으로 바깥의 가로등 불빛이 거꾸로 방 안으로 비껴 들어왔다. 손 내밀면 그녀의 몸에 닿을 거리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별의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말대로 이참에 도장을 찍어버릴까도 싶었다. 그러자 내 가슴 한쪽에서 거센 저항이 일었다. ‘ 명색이 넌 기독교인 이 아니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놈이 세상 사람들이 쓰는 수법을 그것도 네 욕심에 이끌려 맘대로 저지른단 말이냐 이 나쁜 놈...’ 우린 그렇게 서로를 의식한 채 밤을
지샜다. 아침에 일어나자 우리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난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모일에 나와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그러고 그녀에게 모일 몇 시까지 모역으로 나와 줄 것을 당부하고 헤어졌다. 드디어 그날이다. 난 미리 약속 장소에 나와서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예상대로 그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난 부산행 새마을호에 몸을 싣고 홀로 여행을 떠났다. 그 뒤로 그녀완 만나지 못했다. 어쩌다가 막내 여동생을 통해 소식을 접할 뿐이다.
기독교인에게 순결은 양심이다. 정상적인 절차없이 서로의 순결을 범하거나 빼앗는 건 커다란 죄악으로 본다. 그래서 확실한 사이가 아니라면 절대로 상대를 더럽히지 않은 것이 원칙이다. 이런 원칙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이 얼마가 될지 난 잘 모른다. 아마 거의 드물 것이라 여길 뿐이다.
어느 날 청년예배 시간이었다. 난 기타를 목에 걸고 찬양리더로 앞에 섰다. 한참 찬양에 몰입하고 있던 중에 어느 한 여자 청년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완 평상시 거의 말을 주고받은 적이 별로 없다. 그저 나는 청년회장이었고 그녀는 문화부장 사이로 사무적인 말만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날 그녀가 마치 다른 피사체는 뿌옇게 흐리고 그녀의 얼굴만 클로즈업되듯 선명하게 내 눈으로 빨려 들어왔다. 예배를 마치고서도 계속해서 그녀의 얼굴이 잔상으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어쩌란 말인가. 난 그녀를 연인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여자로 보았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로 일주일 내내 그녀에 대한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좋아서 미칠 것 같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그게 아니라 찬양시간에 보였던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는 거였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건 분명 하나님의 어떤 싸인이다. 내가 하도 여자 때문에 속상해 있고 기도시간마다 합당한 배필을 허락해 달라고 졸라대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그런 나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께서 딱 이 사람이다 하고 점찍어 주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에겐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일주일 동안 기도에 집중하며 하나님께 그녀가 내 짝이라면 내가 그녀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하겠사오니 나머진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일주일 후 난 그녀와 단둘이 만났다. 그녀는 회장으로서 무슨 할 말이 있는 줄 알고 평소와 다름없이 다가왔다. 대뜸 그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고하고 나와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그녀는 즉답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이에 내겐 같은 교회 청년 중 한 여자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나를 무슨 난봉꾼처럼 바라볼 만도 했다. 앞서 사귀고 있는 여자 청년은 사실 결혼 상대가 못 된다고 나름 판단하고 그저 좋은 관계로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제안을 받고 돌아간 그녀는 일주일 기도해 보고 답을 주겠노라 했다. 결과는 예상 대로다. 우린 그렇게 연애를 시작하였다. 연애하고 한 십 개월쯤에 난 장래의 장모님 되실 분을 찾아뵙기로 하고 먼저 그녀의 큰 오빠로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준다는 분을 찾아뵈었다. 그녀의 오빠를 만나고 난 확신했다. 이런 집안이라면 결혼해도 좋겠다는 나름의 확신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의 어머니를 뵙고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그녀 역시 나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가끔 집사람이 따지듯이 말한다. 당신 집안이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인 줄은 몰랐다고 알았다면 결혼을 물릴 것인데 속았다고.
인연이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는다. 특히 결혼이란 하늘이 짝을 맺어 줘야 한다. 천생연분이라면 결혼을 향한 두 사람의 걸음은 서로가 미처 신경 쓰기도 전에 일사천리로 진척이 된다. 양가 집안과의 관계와 당사자 간의 정신적인 하나 됨에 이르기까지 놀라움의 연속이다. 이런 관계가 아니고 뭔가 삐걱대고 불협화음이 자꾸 이어진다면 그런 결혼은 뭔가 잘 못된 것이거나 일방적인 결혼일 가능성이 크다. 연애가 요즘 젊은 세대들과 우리 때완 하늘과 땅차이라고 말한다. 우리 땐 적어도 결혼을 목적으로 연애를 하였다. 연애 따로 결혼 따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넉넉한 형편이 아닐지라도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결혼을 하였다. 없으니까 힘들다 그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그 힘든 것 보다 더 행복한 부부사이의 사랑이 모든 걸 이긴다.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들지만 그렇다고 젊은 세대를 아니 자식세대를 향해 나무랄 것은 아니다. 세대마다 풍속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사랑이 아닌 금전에 치우쳐서 하고 말고 따지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나도 자식 둘이 있다. 녀석들의 대답도 요즘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자식들에게 넉넉하게 물려 줄 재산이 없기도 하거니와 세태에 휩쓸려 자신의 가치관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것이 더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