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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극본 - 주찬옥, 노유경, 박언희, 고은님, 구선경, 김현종
연출 - 유정준, 김도훈, 박홍균, 박재범
1, 2회(주찬옥)
3, 4회(노유경)
5, 6회(박언희)
7, 8회(고은님)
9, 10회(구선경)
11회(김현종)
12, 13, 14, 15, 16(주찬옥)
< 현재 >
인물
이수현 - 여. 28. 정신과 의사.
선배가 하는 정신과 병원의 공황장애 클리닉 담당의사다.
이 드라마의 화자로 나레이션을 담당한다.
기범과 사귀고 있는 중이며 두 사람은 약혼을 앞두고 있다.
강정화 - 여. 25. 커피 전문점에서 알바를 하고 저녁에는 음악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을 한다.
기수와 사귀고 있는 중인데 기범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민기범 - 남. 30. 외과의사. 기수의 형. 침착하고 따뜻한 성격이었으나
정화를 만난 후 격렬한 운명적 사랑에 빠져든다.
민기수 - 남. 26. 인디밴드의 리더.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인데 음악을 할려면
집 나가라는 아버지 말에 두 말 않고 집을 나왔다.
음악이 좋고 친구가 좋다.
자신은 순수한 음악을 고집하고 싶었으나 다른 친구들의 경제 사정을
고려, 라이브 카페에서 연주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그 카페라고 하는 곳이 부천에서도 변두리,
촌스런 실내장식의 카페로 불륜커플 아저씨 아줌마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자신이 이끄는 밴드가 수수하고 고급스런 음악을 하고
침착한 형 기범과 달리 밝고 덜렁대는 성격.
정화를 사랑한다.
줄거리
정화는 병원 지하 일층에 있는 커피 전문점에서 알바 하는 아가씨.
어느날 병원으로 출근하는데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호흡장애가 왔다.
숨이 막혀오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지럽다.
참고 참는 정화. 그러나 끝내 못 참겠다. 역에 멈춰서자 뛰쳐나가는 정화.
그 지하철 옆문에서 같이 뛰쳐나오는 남자.
두사람은 급히 지상으로 올라가 심호흡을 한다.
정화의 커피전문점에 자주 오는 닥터에게 아침 지하철에서의 그 느닷없는 공포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러자 공황장애일지도 모른다며 정신과에 가보라고 한다.
정신과라는 말에 놀라고 거부감을 보이는 정화.
그러나 한편으론 아닌게 아니라 정신과에 가봐야 되는 거 아닌가싶다. 최근 들어 부쩍 불면증이 심해진 까닭이다.
그날 저녁 정화는 정신과 얘기를 꺼냈다가 기수에게, 음악하는 동료들에게 내내 놀림만 받는다
그날 밤 정화는 또다시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든다.
그리고 깊은 물에 한없이 떨어져내리는 꿈을 꾼다.
울며 잠에서 깬 후에도 한참을 흐느꼈다.
애절하고 슬픈 느낌. 사무치게 누군가가 그립다는 느낌.
그 그리움의 대상은 아무래도 현재 사귀고 있는 기수는 아닌 것 같았다
다음날 정화는 병원 커피점에 들어온 기범을 보자 놀란다.
지하철에서 같이 튀어나온 남자였다.
그냥 커피만 주고 돌아서는데 가슴이 몹시 두근거린다.
그래서 다시 그에게 아는 척을 한다. 그 남자도 정화를 기억했다.
정화는 그에게 당신이 지하철에서 뛰쳐나온 것은 공황장애일수도 있다고 얘기해주는데
웬일인지 그 남자 웃고 있다. 자신은 그날 속이 불편했을 뿐이라고 한다.
알고보니 그 남자는 새로 온 닥터라고 한다. 정화는 기범과 그렇게 만났다.
기범과 정화는 묘하게도 서로 닮은 점이 많았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호도 비슷했고
물을 아주 싫어하고 두려워해서 수영을 전혀 못한다는 점도 같았다.
심지어는 어느 순간 둘 다 똑같이 기시감(데자부)을 느끼는 정화와 기범
두 사람은 걷잡을 수 없이 서로에게 끌린다.
친한 닥터가 와서 정신과 상담을 다시 권한다.
정화는 그 닥터가 권해준 정신과 병원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정신과에서 여의사 수현을 만난다. 수현과 정화는 처음부터 서로 묘하게 마음이 끌린다.
수현은 정화의 불면증 치료 방법 중 하나로 최면요법을 적용해보자고 한다.
최면을 통해서 긴장이완과 집중력을 강화시키킬 생각인데
그 병원 특수 클리닉에 최면요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최면에 들어가는 정화. 그런데 갑자기 정화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무의식이었다.
다섯 살 시절 정화는 오빠의 장난으로 개울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두려움과 순간의 공포를 기억해내는 정화.
정화는 수현에게 최근 갑자기 나타난 남자에게 끌리고 있는 것을 거의 충동적으로 고백한다. 자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운명을 느낄 때가 있다고. 수현은 그런 정화에게 철이 없다는 느낌도 받고 자유롭다는 느낌도 받는다.
수현은 기범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의과대 선후배로, 오랜 동료로 친밀해진 두 사람이지만 수현은 한번도 미칠 것같은 감정을 느낌 적은 없었다. 수현은 자기도 모르게 기범이 과연 자기 운명의 상대인 것일까를 생각하다가 피식 웃는다.
정화네 밴드에 내부 분란이 있었다.
기수는 좀 더 진지하게, 순수하게 음악을 하고 싶어서 시시한 레스또랑 라이브 카페 연주 따위는 하지 말자고 하지만 반발이 생긴다.
너는 부잣집 놈이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너는 여흥으로 음악을 하지만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음악을 하는 놈들이라고.
술을 마시고 취했고, 취한 자리에서 빠져 나온 정화는 자기 방 키지갑을 병원 커피점에 두고온 것이 생각난다. 병원으로 가는 정화. 그러나 취기가 올라 병원 로비에서 잠이 든다.
밤교대를 하고 돌아가던 기범이 정화를 발견한다.
기범은 취한 정화를 데리고 자기 아파트로 간다.
술이 깬 정화는 기범의 아파트에서 새벽까지 얘기하는데 어느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원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화와 기범은 모두 혼란에 빠진다.
기범에겐 결혼을 앞둔 여자가 있었고 정화 역시 사귀고 있는 애인이 있다는 자각이 든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말없이 헤어진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서로를 잊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화는 그를 만나고 싶다는 강한 바램을 품는다.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나를 헤픈 여자로 생각하진 않을까 두려워서 그를 꼭 찾아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느 순간은 왜 나를 안았느냐고 묻고 싶었고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더 이상도 아니고 꼭 한번만 더 만나보고 싶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것은 다만 강한 그리움일 뿐이었다.
기범 역시 수현에게 혼이 반쯤 나가있는 사람 같다는 핀잔을 듣는다.
기범과 수현은 결혼식 준비를 한다.
그런 기범에게 기수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온다.
기수는 형이 결혼한다는 말을 듣자 자기 여자친구와 형 형수 넷이서 저녁을 먹자고 한다.
기범은 기수에게 애인이 있다는 말을 듣자 기뻐하며 흔쾌히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
수현은 다시 병원을 찾아온 정화에게 최면치료를 시작하는데..
정화는 뜻밖의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전생이었다.
수현 역시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최면으로 전생을 볼 수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직접 경험하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정화는 자기가 말한 그 운명의 남자를 보고 있다는 말을 한다.
역시 전생에 그와 함께했다고.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 전생 속에 선생님도 있다는 정화의 얘기였다.
< 전생 1화 >
인물
영혜 - 현생의 정화.
기방 ‘옥잠화’의 대표 기생.
영혜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기방동문으로 혈연과도 같은 정을 나눈다.
타고난 미모와 함께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지녔으며, 취기가 좀 올랐을 때 시조 한 수를 읊으면 양반들의 애간장을 녹이지만, 영혜는 도통 관심이 없다.
한낮 기생이면서도 노류장화로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만드는 도도함과 대범함이 반가의 남성들을 더욱 애타게 한다. 그러나 영혜는 그 누구에도 마음을 주는 법이 없다.
해가 저물면 ‘기방 어머니’의 눈을 피해 사냥을 다니면서 가슴 속 열정을 쏟아낸다.
활달하고 강인한 성격이지만, 사랑 앞에서는 무한히 헌신적이다.
어느 날 그녀 앞에 나타난 광혜에게 운명적 사랑을 느낀다.
설희와의 애증 사이에서 번민하며 결국 광혜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 한다...
설희 - 현생의 수현.
영혜와 함께 기방 ‘옥잠화’의 기생 가운데 가장 인기가 많다.
특히 가야금, 퉁소 등 악기와 춤에 능하다.
영혜와 달리 선이 고운 외모를 지녔으며 눈물, 웃음 많고 눈가와 목소리가 늘 촉촉하다.
기방을 찾는 남정네에게 쉽게 마음을 주었다가 상처받기를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영혜에게 의지하고 위로 받는다.
남자에도, 세상에도, 인생에도, 약하디 약하면서도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끝내 욕심을 버리지 못 해 늘 내면 갈등이 많으며, 그러면서도 천성이 선량하고 모질지 못 하다.
괜찮은 양반 하나 나꿔채서 칠보장식 두르고 대가댁 마님 소리 들으며 사는 게 꿈이다.
어느 날 그녀 앞에 나타난 무빈이 왕이 될 사람이라니...
무빈이야말로 설희가 찾던 남자다. 죽어도 놓칠 수가 없다...
그것이 영혜를 배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무빈 - 현생의 기범.
왕의 셋째 아들. 영민하다. 학문 또한 높고 기골이 좋다.
셋째 아들이지만, 아버지(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일찍이 왕이 될만한 재목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위로 두 형의 견제와 공격을 의식해 늘상 긴장하며 무사히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노론과 손을 잡는다. 선왕대에 좌의정을 지냈던 노론계의 거목 이중원을 비호세력의 핵심으로 둔다. 그 아들인 도형을 믿고 신뢰하며 우정을 나눈다.
그러나 왕이 되고난 후, 노론이 득세하자 이중원을 귀양보내므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이 과정에서 도형과 적대관계로 대립한다.
영혜에게 운명적인 끌림을 느끼지만, 설희로 인해 영혜에 대해 오해를 품게되고, 결국 설희를 후궁으로 맞아들인다. 끝내 영혜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 하다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영혜를 붙들고 울부짖는다.
도형 - 현생의 기수.
대대로 재상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무빈을 깊이 존경하며 왕이 되도록 돕는다.
충과 의리를 중시하는 남자.
이후 무빈이 배신하자, 무빈을 향해 대적한다.
무빈을 사랑하는 영혜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한다.
줄거리
때는 조선 중기.
한양의 내로라 하는 양반들이 기웃대는 당대 최고의 기방 ‘옥잠화’의 화려한 외경..
어린 소녀인 영혜와 설희는 ‘기방’의 어머니를 친어머니로 여기며 악기, 노래 춤 등 엄격한 기생수업을 받고 자란다.
어려서부터 기방에 버려진 어린 두 소녀에게는 기방이 세상이고, 기생이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혜와 설희는 천진난만한 소녀들이다.
엄한 어머니 몰래 개울물에서 장난을 치다가 혼나기도 하고, 뭐가 그리도 그저 좋은지 나란히 이불을 덮어쓰고 소곤대다가 혼찌검이 나 울기도 하지만, 영혜는 설희의 눈물을 닦아주고 웃겨주며 어느새 둘은 손을 꼭 잡고 노래도 부르고 소꿉놀이도 한다.
바늘과 실처럼 꼭 붙어다니며 서로가 전부인 듯 아끼고 의지하며 자라나는 두사람.
어느덧 세월은 흘러 두사람은 꽃다운 처녀로 성장한다.
대범하고 도도한 영혜와 애교많고 상큼한 설희...
한편 무빈은 임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신임을 듬뿍 받으며 세자책봉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고있을 무빈이 아니다. 두 형의 측근과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노론계의 우두머리 격인 좌의정 이중원을 비호세력의 핵심으로 둔다.
또한 이중원의 손자 도형과 무빈은 막역지우 사이이다.
공부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던 두 청년은 이따금 사냥을 하며 넘치는 젊음과 혈기를 발산하는데...
노루 사냥에 나섰던 무빈과 도형은 잡은 노루를 향해 달려갔으나, 누군가 노루를 날렵하게 나꿔채는 바람에 부딪치고만다. 강렬히 바라보는 세사람.
이내 말을 타고 사라져간 그를 무빈은 넋을 잃은 듯 바라보는데.
그 현란한 사냥솜씨는 물론 말을 타고 사라지는 아름다운 자태가 남자의 그것이라기엔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남장을 한 영혜였다...
돌아서던 무빈은 그만 오래된 덫에 걸려 쓰러지는데, 어느새 나타난 영혜가 무빈을 도와 다리를 덫에서 빼내고 찔린 부분의 피를 빨아낸다.
무빈과 영혜, 두사람은 운명적 끌림으로 바라보는데...
영혜는 기방 생활의 시름을 한탄하기보다는 사냥을 취미삼아 산으로 들로 다니곤 했다.
물론 기방 어머니 몰래 다니는 것이며, 영혜가 기방을 비웠을 때 둘러대는 몫은 설희가 맡는다. 사냥터에서 홀린 듯 내려오는 무빈...
무빈은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냥터에서 만났던 모습과 너무도 닮은 영혜와 스치듯 만난다. 이번에는 곱게 꽃단장한 여인네의 모습이다... 그 옆에는 곱게 단장한 설희와 함께이다.
지체할 것 없이 영혜의 뒤를 따른 무빈은 영혜가 들어간 곳이 ‘기방’임을 알고 적잖은 충격을 받는데... 설희는 무빈을 눈여겨 본다.
무빈과 도형은 그 기방에 드나들게 되고, 자신을 향한 무빈의 마음을 느끼며 영혜는 사냥터에서 느꼈던 무빈에 대한 그 느낌이 무엇일까 혼자 되뇌인다.
기생으로 살아갈 운명이라면 남자 따위에 매이지 않으리라 내 인생의 한 따위는 차라리 들로 산으로 말을 타고 달리며 풀어버리라 일찍이 마음먹었었다.
영혜는 태어나 처음으로 어찌할 수 없이 끌리는 마음의 가닥을 느낀다.
그것은 오로지 무빈에게 향해있었다...
설희 역시 무빈에게 한 눈에 반한다.
영혜는 설희도 무빈을 사랑하고있음을 알게되고 깊이 상심한다.
무빈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고 영혜를 정식 후궁으로 명하여 데려오고자 한다.
그러나 영혜는 무빈에게 한낱 노류장화로 살 지언정 누구의 여자로는 살고싶지 않다고 당돌하게 말한다. 왕이라는 이유로 명령한다 해도 내 마음은 가질 수 없을 것이라며.
무빈은 왕이기 이전에 한 남자로서 영혜에게 안타깝게 사랑을 구한다.
그러나 차갑게 내치는 영혜.
무빈은 영혜에게 진정 누구의 여자로 살면 행복할 수 없는지 묻는다.
정말로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흔들리는 영혜의 눈길...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않난다고 답한다..
영혜는 설희를 위해 무빈의 사랑을 내치고 가슴깊이 눈물을 흘리는데...
무빈은 궁으로 떠나는 마지막 날 밤만큼은 영혜에게 함께 하고싶다고 말하고 쓰러지듯 만취해 눕는다. 영혜는 그 방에 설희를 들여보낸다...
얼마후 설희는 영애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무빈은 영혜에 대한 원망과 절망으로 설희를 후궁에 명해 궁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한다.
너무나 행복해하는 설희...영혜는 되새긴다.
“그래 내가 잘 한거야... 난... 보고싶어도 참을 수 있어.. 아무리 그리워도 참을 수 있어.
하지만, 설희는 사랑을 얻지 못 하면... 죽을거야... 그래. 난 괜찮아...”
한편 도형 역시 영혜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고, 무빈이 설희만 궁으로 데려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설희를 설득해 둘이 자매처럼 자라왔으니 영혜를 설희의 몸종으로 데려가라고 종용한다. 무빈 역시 그렇게 해서라도 영혜를 곁에 두고싶은 마음이고.
설희는 마다할 수 없어 마지못해 영혜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간다.
영혜는 도형의 사랑은 무빈의 강렬한 그 무엇과 달리 따스하고 깊다고 느끼지만, 영혜는 단 한 남자 무빈 만을 사랑하기에 도형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이제 설희의 몸종이 된 영혜.
자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무빈과 설희가 방으로 들어가 불이 꺼지는 모습을 보아야만 하는 영혜의 심정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질 듯 하다.
무빈은 이래도 이래도 날 쳐다봐주지 않을래.. 하는 어쩌면 악의적인 심정으로 설희의 방을 자주 찾게되고. 영혜는 자신의 감정을 삭이고 또 삭이며 참아낸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두사람을 위해서.
한편 무빈은 왕이 된 후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비호세력인 노론과 반대세력이었던 소론까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필요에 따라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고, 동시에 어느 쪽도 왕권을 좌지우지하지 못 하는 방패막이로 이용한다.
그러던 중 무빈이 노론의 기를 꺾기위한 방편으로 좌의정 이중원을 귀양 보내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중원은 귀양지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임을 당한다.
이중원의 가문은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아버지를 잃고만 도형에게 이제 왕(무빈)은 더 이상 죽마고우도 충성을 바쳐야할 임금도 아니다. 무빈에 대한 배반감에 치를 떠는 도형...
무빈은 도형에게 점점 더 위기감을 느끼게되고...
설희는 영혜의 존재가 궁에 들어온 지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눈에 가시같기만 하다.
설희에게 영혜와 자신의 혈연과도 같은 정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런 영혜의 마음을 살피기에는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 상처받고 있다.
무빈과 영혜가 처음부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설희는 알고있었다.
어려서부터 늘 그랬다. 기방의 어머니며 동료들, 그리고 기방을 드나드는 양반에게 설희는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늘 영혜 다음이었다.
영혜의 설희에 대한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처럼 무한대의 그것이라면
설희의 영혜에 대한 마음은 자식의 어머니에 대한 마음 같은 거였다.
영혜를 사랑하지만, 이제 벗어나고싶다.
더 이상 영혜 다음이고 싶지 않다. 무빈에게 있어서만큼은.
설희는 궁에 들어오면서 영혜와의 애와 증을 끝내고 싶었다. 거기까지라면 영혜와의 관계가 아름다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궁에까지 영혜와 같이 들어온 이래 설희는 단 하루도 마음 편이 잠든 날이 없다.
무빈의 눈길이 순간이라도 영혜에게 머무를 때면, 설희의 마음은 천길 만길 나락으로 흩어져야만 했다...
달빛이 아름답게 흐르는 밤.
설희는 영혜를 부른다. 모처럼 설희는 영혜에게 기방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던 친구로서 대한다. 그래 우린 서로에게 혈연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너와 나의 인연은 무엇일까... 그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지않았을까...
문득 설희는 영혜에게 내 마지막 청을 들어달라고 간곡히 말한다.
그것은 도형을 죽이라는 명이다. 니 칼 솜씨면 가능하다면서.
놀라 설희를 바라보는 영혜.
설희는 도형의 영혜에 대한 사랑을 알고 있다.
너라면 도형의 의심을 받지 않고 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너만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설희는 도형의 존재가 무빈에게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있음을 덧붙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만약 니가 도형을 죽이지 않는다면 언젠가 무빈은 도형의 손에 죽고말 것이라고...
굳은 듯 설희를 바라보는 영혜.
영혜가 도형을 죽인다면 영혜 역시 더 이상 궁에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혜와 도형, 설희와 무빈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셈이다.
소론의 모함에 의해 도형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신하들은 입을 모아 도형을 벌할 것을 명한다.
무빈은 도형을 택할 것이냐 신하들을 택하여 왕권을 공고히 할 것이냐의 기로에 놓이고.
무빈은 결국 도형을 버리기로 한다.
도형, 말없이 무빈을 바라본다.
그 날 밤.
무빈의 숙소에 침입해든 도형...
도형, 잠든 무빈을 향해 칼을 빼드는데
순간, 무빈의 앞을 막아서는 영혜. 도형의 칼은 영혜를 찌르고.
도형은 영혜의 칼에 맞는다....
도형, 마지막 순간 영혜와 눈이 마주친다.
도형, 영혜를 바라보는 애절한 눈길... 그토록 사랑했던 당신이었는데...
영혜... 회한으로 도형을 바라보다가 쓰러진다.
얼어붙는 무빈...
그들을 바라보는 설희...
영혜가 죽기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막상 영혜의 죽음을 바라보자 울부짖으며 주저앉고.
피흘리며 쓰러진 영혜를 붙들고 절규하는 무빈...
마지막 순간 무빈을 바라보는 영혜...
눈을 감는 영혜...
< 현재 >
정화는 울며 최면에서 깨어난다.
슬픔과 서러움이 목끝까지 잠겨서 깨어나서도 한참을 울고 있는 정화.
충격 받기는 수현도 마찬가지였다.
최면요법을 오랫동안 사용했어도 한번도 전생을 경험해본적이 없었다.
전생요법에 대한 얘기는 익히 들었으나 사술이라고 생각해온 수현이었다.
마음이 이상해지는 수현.
수현은 동료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전생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전생을 보는 것은 무의식이 꾸는 꿈은 아닌지 회의한다.
그러다가 그렇다면 자기도 자기 전생을 보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고
동료의 도움으로 깊은 수면에 잠겨 전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단편적인 몇장면을 보던 수현은 기함을 하며 깨어난다.
자신의 전생에도 분명 자신과 정화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화의 운명의 연인이란 다름 아닌 현재 자신의 애인인 기범씨가 아닌가
더구나 기범씨 동생 기수도 등장하고..
수현은 몹시 놀라고 몹시 당황한다.
그러자 동료의사는 최면을 그만두자고 한다.
그러나 수현은 계속 보겠다고 결심한다.
내 운명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야겠다고.
< 전생 2화 >
일제 강점기
1. 등장인물
1)허무영(28) - 의열단 단원
낭만파 음대생이었지만 시대의 격랑 속에 냉소적인 킬러로 변한 테러리스트
2)송여진(25) - 첼리스트
대표적인 친일파 송강현의 딸.
친일은 부끄러워하지만 친일파 아버진 부정하진 못한다.
3)박우창(28) - 경찰 과장
일본 유학을 마친 친일파의 아들.
여진을 얻기 위해 조국을 버린 남자.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갈등을 지우기 위해 철저히 여진의 아버지 송강현의 구미에 맞는 인간으로 처세한다.
4)차석란(25) - 의열단 단원
친일파에 의해 부모를 잃은 아픔에 단신 만주로 찾아가 의열단에 입단했다.
무표정 과묵한 성격의 차가운 여성 킬러로 무영을 사랑한다.
5)송강현(50) - 여진부
메이지대학 유학 후 일제 기관지의 논설위원을 하다 현재 경성방송국의 고위직으로 있다.
맹목적인 친일파라기보다 최적의 생존을 위해 친일을 선택한 스타일로 주류에 편입하기 위한 동물적인 본능이 발달한 카멜레온 같은 인물.
6)서필원(50대) - 의열단 고문
무영의 아버지 허인규와 동문수학했던 사이로 무영을 독립운동으로 이끌어준 정신적인 아버지다.
7)강덕수(30대) - 의열단 선배
그 외 의열단 동지 여러분...
2. 줄거리
소문난 친일파 딸 여진과 명망있는 독립투사의 아들 무영은 시대가 만든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00대학 음악도인 두 사람은 애써 그들의 배경을 외면하고 음악과 서로를 향한 사랑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친일파의 밀고로 독립군에 군자금을 제공해온 무영의 아버지가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일어나면서 두 사람 사이엔 본격적인 시련이 닥친다.
아버지의 죽음 후 무영의 집은 하루아침에 영락해버리고 무영 또한 일경에 연행될 위기에 처하자 무영은 만주로 피신을 하게 된다.
여진이 그토록 기대했던 청혼 콘체르토를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해방이 되기 전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상 결별선언을 하고 떠나는 무영.
천신만고 끝에 만주에 도착한 무영은 아버지의 친구 서필원의 권유로 독립군에 가담하게 된다.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의열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는 무영. 피아노 건반을 치던 무영의 손엔 권총과 폭약과 비수가 들려졌고 여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던 무영의 가슴엔 조국독립을 위해 처단해야할 자들에 대한 증오가 쌓여간다.
일본요인 암살, 일제관련 시설 폭파...
치열한 대일 항쟁의 소용돌이 속에 조금씩 변해가는 무영.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하고 일본군에 잡혀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그 끝에 무영은 자신의 손에 죽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는 냉혹한 킬러로 변해버린다. 그런 무영을 해바라기 하는 여자 석란. 그녀는 암살과 테러가 일상이 된 광폭한 전장에 핀 야생화 같은 존재였다. 친일파에게 부모형제를 잃은 원한에 의혈단의 여성킬러가 된 차석란. 일경을 피해 중국으로 도망 온 열아홉 처녀 석란의 손에 총을 들게 만든 것이 무영이었다. 무영과 함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가면서 무영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석란. 하지만 무영의 마음속엔 여자를 향한 사랑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고 있다고 해도 그 자리의 임자는 석란이 아닌 송여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경성의 친일단체 폭파임무가 떨어지고 서필원은 무영을 지목한다. 해방이 되기 전엔 조선땅을 밟지 않겠다는 무영의 고집을 꺾고 서필원은 무영을 경성으로 잠입시킨다. 혹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해 서필원은 은밀히 석란을 딸려보낸다. 무영의 임무지원과 감시라는 두 가지 지령이 석란에게 내려졌지만 석란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해방되는 날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무영의 여자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5년이 지났지만 여진은 여전히 무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주로 건너간 무영이 아편쟁이가 됐다는 소문도 들었고,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에게 잡혔다는 소문도 들었지만 그녀는 믿었다. 언젠가 조국이 해방을 맞으면 무영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콘체르토를 완성해 자신에게 청혼할 것이라고.
일본 유학을 마치고 일경 고위직에 있는 박우창의 끈질긴 구애가 있었지만 여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여진 때문에 친일을 선택한 박우창의 깊은 사랑을 알고 있는 여진의 아버지는 여진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와의 약혼을 정략적으로 공표해버린다. 완력이 아닌 진심의 사랑을 원했던 우창은 결혼식 땐 여진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지게 만들겠다 공언하고 여진은 그 약혼을 피할 수 있는 방법찾기에 골몰하는데...
한편 경성으로 돌아온 무영은 첫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다음 임무를 기다리던 무영은 여진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려고 두 사람의 아지트를 찾아가고 그 바닷가에서 운명적으로 여진과 재회하게 된다. 우창과의 약혼을 앞두고 절망적인 심정이었던 여진은 때맞춰 나타난 무영이 너무도 반갑다. 하지만 무영은 여진을 차갑게 밀어낸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테러리스트의 인생에 여진을 끌어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무영의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여진은 무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출을 결심한다. 그때 지나가던 일경의 불신검문에 걸리는 무영. 하지만 친일부호의 딸 여진의 재치로 무영은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넘기게 된다. 그런데 석란이 일경의 불신검문에 걸린다. 그제야 석란이 자신을 뒤따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무영. 위기에 빠진 석란을 외면할 수 없었던 무영은 능숙하게 일경을 해치우고 여진은 그제야 무영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진은 고집을 꺾지 않고 무영과의 야반도주를 계획하는데...
친일부호의 딸을 사랑하는 무영에 대해 실망과 분노와 질투를 느끼는 석란. 아주 잠시 여진과 함께 하는 미래를 꿈꿨었던 무영은 석란의 원망어린 눈길에 테러리스트의 운명을 새삼 깨닫는다. 피묻은 손으로는 첼로가 인생의 전부인 여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었다. 여진은 석란처럼 전장 속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는 류의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는 무영.
약혼식날 새벽 은밀히 집을 빠져나온 여진은 약속한 장소에서 무영을 기다린다. 그러나 무영은 나타나지 않았고 여진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떠오르는 아침해를 혼자 맞는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우창은 그들의 정혼을 공고히 하기 위해 결혼식 못지않은 성대한 약혼식을 준비한다.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초대된 그야말로 화려한 약혼식이다. 하지만 화려한 약혼식보다 더 빛나는 존재는 여진이었다.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여진의 등장에 우창은 자신의 오랜 기다림이 이제야 보상을 받는 듯한 기분이다. 아버지에게 잡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앉아있던 여진은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무영과 눈길이 마주친다. 드레스 입은 자신을 보기 위해 호랑이 굴에 뛰어든 무영을 바라보며 여진은 눈물을 쏟는다. 그 순간 사라져버리는 무영. 여진은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를 무영을 쫓아 끝내 약혼식장을 박차고 나간다.
술렁이는 하객들...
마음은 상했지만 차분하게 하객들을 안정시킨 우창은 여진의 뒤를 쫓아 나온다. 본능적으로 여진을 지금껏 기다리게 만들었던 누군가가 그들의 약혼식에 나타났음을 직감한 우창은 부드럽게 여진을 설득한다. 떠나가는 사람은 잡는 것이 아니라고...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가 가는 길을 막아서는 이기적인 여자는 되지 말라고. 무영은 우창의 손에 이끌려 약혼식장으로 들어가는 여진을 아프게 바라본다. 그런 무영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눈길. 질투와 걱정과 실망이 교차된 표정의 석란이다.
석란은 거사일정을 재촉한다. 하루라도 빨리 여진이 있는 이 땅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영은 예정된 날짜보다 일찍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다. 해방이 되기 전엔 두 번 다시 경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거사현장을 빠져나오던 무영은 그 건물을 들어서는 여진을 발견하곤 아연실색한다. 무영은 본능적으로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가고 영문도 모른 채 그 뒤를 따르려던 석란은 그만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굉음을 내며 터지는 폭탄. 일경이 출동하고 석란은 무영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경성을 떠나게 되는데...
폭발의 순간 온몸으로 여진을 감싸안았던 무영은 큰 부상을 당한다. 대수술 후 며칠만에 의식을 되찾는 무영. 하지만 깨어난 무영은 여진을 알아보지 못한다. 여진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무영. 여진은 무영의 기억을 되찾게 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무영은 아무런 기억도 되찾지 못한다. 아버지 송강현에게 폭발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은인으로 무영을 소개한 여진은 무영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송강현은 무남독녀 외동딸의 목숨을 구한 무영을 칙사대접한다. 하지만 여진의 약혼자 우창은 그를 반길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그를 대하는 여진의 손길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무영은 의욕상실 상태에 빠진다. 그런 무영을 안타깝게 보던 여진은 무영을 피아노 앞에 앉힌다. 오랫동안 잊었던 피아노였지만 무영은 본능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총 대신 피아노를 되찾은 무영을 보는 여진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그 순간 드는 생각, 이대로 영원히 기억을 되찾지 못하게 된다면...?
기억을 되찾게 되면 무영은 여진을 떠날 것이다. 이미 여러번 여진 대신 조국을 선택했던 무영이었다. 미안하고 무책임하지만 여진은 지금의 행복이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되길 기도하는데...
한편 석란은 지도부에 무영의 죽음을 보고한다. 무영과 꼭 같은 옷차림을 한 사망자를 무영으로 오해한 석란은 애통한 눈물을 흘린다. 시신도 없는 장례식이 치러지고 석란은 사랑한단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무영을 보낸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무영을 잃은 분노로 미친 듯이 암살현장을 누비는 석란.
우창이 무영의 정체를 밝혀낼까 노심초사하던 여진은 아버지에게 무영과의 결혼선언을 한다. 무영이 아니었음 이미 죽었을 목숨이라며 우창과의 파혼절차를 밟는 여진. 우창은 정체불명의 피아니스트에게 약혼자를 빼앗기게 된 현실에 자존심이 상한다. 여진이 무영과의 유학을 서두르고 있음을 알게 된 우창은 무영의 신원파악에 박차를 가한다. 여진은 그런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무영은 피아노로 인해 생의 활기를 조금씩 되찾아가는데...
어느날 여진의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시내로 나왔던 무영은 독립군과 일경간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가지를 우연히 지나치게 된다. 그 순간 무영은 그 현장이 전혀 낯설지 않음에 당황한다. 바로 그때 사건현장을 빠져나가던 석란과 마주치는 무영. 자신을 보고 당황하는 석란을 붙잡으려 하지만 끝내 그녀를 놓쳐버린 무영은 또다시 혼란에 빠진다.
나는 누구일까?
도대체 나는 무얼 하던 인간이란 말인가?
그날부터 시작된 환청같은 총성이 무영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런 무영을 보며 마음이 다급해진 여진은 아버지에게 해외유학을 독촉한다. 하지만 특별한 루트로 무영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던 송강현은 갈등에 빠져 있었다. 의열단의 킬러를 자신의 집에 기거시킨 사실을 총독부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자신은 허무영을 일본의 고관대작에게 소개시키기까지 했던 것이다. 허무영은 피라미 독립군도 아니고 불량선인의 대표급으로 분류된 소문난 테러리스트였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사면초가의 현실에 전전긍긍하는 송강현. 하지만 그때 본능처럼 떠오른 시나리오가 있었다. 미래를 위한 보험. 그는 언젠가 일본이 이 땅을 떠나는 날을 대비할 카드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음악가 무영을 낙점한다. 손해볼 것 없는 장사라는 계산에 송강현은 하루빨리 딸과 무영을 미국으로 유학보낼 결심을 한다. 둘을 외국으로 보내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 현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한편 죽은 줄 알았던 무영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석란은 의열단원들과 그의 행방을 추적한다. 하지만 친일파의 딸 여진과 여유자적하고 있는 그를 발견한 단원들은 충격에 빠진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변절로밖에 볼 수 없는 명명백백한 현실 앞에 서필원은 고민에 빠진다. 결국 무영을 단죄하라는 결정이 내려지고 그 임무가 석란에게 맡겨진다.
한편 우창은 송강현이 여진과 무영을 해외로 보내려고 하고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분노를 느낀다. 그럴 수는 없었다. 20년 넘게 품었던 여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알고 있으면서, 그녀를 얻기 위해 조국을 버리고 친일을 선택했던 자신의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자신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지...!
우창은 송강현을 찾아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처사를 따진다. 하지만 담담하게 듣고 있던 송강현의 대답이 우창의 가슴에 피멍을 들인다.
“그 긴 세월 동안 어떻게 여자 마음 하날 못 얻었단 말인가? 생명의 은인을 사랑한다는데 어떡하는가?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데 나더러 뭘 어쩌란 말인가?”
첩보에 의하면 무영은 곧 친일파의 딸 여진과 미국유학을 떠날 예정이란다. 사랑대신 조국을 선택했던 남자 무영에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이 그를 변절시켰을까? 송여진...그 여자밖에 없었다. 바위보다 더 단단한 무영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석란은 이제 자신의 첫사랑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해야 하는 비극적인 운명의 여인이다.
변절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기 위해 공공장소에서 그를 암살할 것을 지시받은 석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무영을 겨냥한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다. 공원을 산책하는 다정한 연인같은 두 사람. 환하게 웃으며 무영의 팔짱을 끼는 여진에 대한 순간적인 질투로 석란의 총구가 잠시 여진을 향한 순간 어딘가서 날아온 총탄이 석란의 어깨에 박힌다. 무영의 뒤를 밟던 우창이 석란을 발견한 것이다. 피 흘리며 뛰쳐나가는 석란과 그녀를 뒤쫓는 일경의 무리를 목격한 순간 기적처럼 일시에 무영의 기억이 되돌아온다. 본능처럼 그 뒤를 따라뛰는 무영. 무영을 한편으로 착각한 우창은 한쪽 도주로를 무영에게 맡긴다. 막다른 골목에서 석란을 발견한 무영. 그러나 그를 발견한 석란은 변절자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결을 하겠다며 단도를 꺼내든다. 하지만 우창의 무리를 자연스럽게 따돌린 무영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자 석란은 그제야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데...
한편 추적현장에서 돌아온 우창은 무영이 의열단의 핵심단원이란 충격적인 정보를 접하게 된다. 혼란에 빠지는 우창. 그럼 오늘의 저격사건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의열단의 내분? 여진으로 인한 무영의 변절? 갖가지 추측으로 마음이 바쁜 우창.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일이 있다면 무영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조금 전 헤어진 그의 행보를 알아내기 위해 연신 전화기를 돌려대는 우창.
그 시간 석란이 일러준 의열단의 아지트를 찾은 무영은 그동안 있었던 사실을 설명한다. 하지만 석란과 달리 아무도 만화같은 그의 고백을 믿어주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서필원은 무영에게 결백을 밝히기 위한 임무를 주겠다고 한다.
‘여진의 아버지 송강현을 암살하라. 만약 그게 여의치 않으면 송강현을 협박할 인질로 그 딸 송여진을 잡아오라’
무영은 그 일만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서필원은 여자 때문에 대사를 그르치는 인간은 필요없다며 하든 말든 양단간의 선택을 하라고 강요한다. 무영은 고통 속에 빠진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여진의 아버지 송강현을 죽여야 하는가? 아니면 변절자라는 누명을 감수하고 평생 동료들을 피해가며 살아야하는가?
어떤 선택이 됐건 자신의 험란한 인생에서 여진만은 안전하게 도피시키고 싶은 무영. 하지만 어디에서도 묘수를 찾을 수 없는 사면초가의 현실이 무영을 답답하게 한다.
운명의 연설회장.
송강현의 연설이 시작되자 무영의 손이 젖어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을 보고 웃고있는 여진 앞에서 그의 아버지를 암살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연설이 끝나갈 즈음 어딘가서 날아오는 총탄에 송강현이 쓰러진다. 석란이었다. 이번에도 무영을 감시하고 지원할 임무를 띠고 왔던 석란은 송강현을 저격하고 여진에게 총구를 돌린다. 순간 여진의 앞을 막아서는 무영. 두 사람 사이엔 팽팽한 긴장이 돈다. 무영을 잡기 위해 우창과 일경이 들이닥친 혼란을 틈 타 무영은 여진을 데리고 연설회장을 빠져나간다. 석란도 재빠르게 두 사람을 따라잡고 그 세 사람을 우창과 일경이 추적한다.
잠깐 위기를 벗어나자 무영은 테러리스트의 인생에 여자는 없다며 여진을 돌려세운다. 함께 했던 지난 두 달이 두 사람 사이에 허락된 마지막 시간이라며 등을 돌리던 무영이 잠깐 비틀한다. 연설회장에서 입은 총상이 너무 심해 더 이상 숨겨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놀란 여진이 무영을 부축한다. 하지만 이제 그를 숨길 수 있는 안전지대가 없었다. 다시 시작된 추적에 여진은 할 수 없이 두 사람의 아지트였던 바닷가로 무영을 데리고 간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석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송강현을 암살하지 못했으니 그 딸 송여진을 납치하라고 다그치는 석란. 하지만 무영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결국 석란이 여진에게 총구를 겨냥한다. 어쩔 수 없이 무영은 석란을 겨냥하고...마지막까지 여진을 그냥 보낼 줄 것을 애원하는 무영. 하지만 민족적 과업에 사감은 금물이라고 했던 무영의 훈시를 되뇌며 석란은 총구를 거두지 않는다. 하지만 무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발견한 석란은 총을 버린다. 바로 그때 들이닥친 우창은 무영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 무영을 지키려던 여진이 그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숨을 거두는 여진을 안고 울부짖는 무영. 자신이 한 짓을 믿을 수 없는 듯 부들부들 떨고만 서 있던 우창이 석란을 남겨놓은 채 돌아서버린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무영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석란도 두 사람 곁을 떠나려하는데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다. 의혈단 단원들이다. 그들의 등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챈 석란이 그들을 막으려는 순간 의열단의 총구가 불을 뿜는다. 변절자 아닌 변절자를 향한 처절한 응징...총상으로 너덜너덜 해지면서도 여진을 감싸 안는 무영. 마지막까지 여진을 꼭 끌어안고 숨을 거두는 무영과 그런 무영을 향해 마지막 미소를 지어보이는 여진의 얼굴 위로 음악이 덮힌다.
무영이 그날 아침에야 완성한 5년전의 콘체르토다...
< 현재 >
자신의 전생에 들어가 자신과 정화 그리고 기범씨와 기수씨를 보고난 수현은 착잡하고 허탈했다. 혼란스러웠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수현에게 기범은 동생 기수가 자기 여자 친구와 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한다는 말을 전한다. 수현은 거절했다가 곧 다음에 하자고 약속을 미룬다.
다음날 정화가 다시 찾아온다.
자기의 다른 생애도 확인하고 싶다고.
그 남자와의 인연이 그 생애뿐이었는지 거듭되었는지 알고 싶다고.
수현 또한 내심 알고 싶었다.
그들의 인연은 어디까지였는가. 그와 내가 맺어진 생애는 없는가.
어찌해볼 수 없는 운명인가. 알아보고 싶기는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임상일지를 적는 수현.
그들의 생애는 거듭되었다. 만나지 못한 생애도 있었고 바람으로 나무로 만난 생애도 있었다. 그들은 만남은 천년의 기다림이었으나 시간이 약간 어긋나며 태어난 생애도 있었다.
< 전생 3화 >
조선시대
인물
다인(11) ... 현생의 정화
장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세도가인 송대감댁 고명딸. 이쁘고 총명하고 야무지다. 당쟁의 와중에 집안이 멸문지경에 이르고 어머니의 기지로 다인만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 살아난다. 종 술이의 손에 발견돼서 술이를 따라 도피길에 오른다. 귀염받고 총애받던 대갓집 아기씨에서 하루아침에 유랑객신세가 된 다인. 뭣도 모르는 종놈이라고 구박을 했지만 하늘 아래 의지할데라곤 술이밖에 없다. 이젠 술이 없인 살 수가 없다. 술이가 엄마고 집이고 고향이다.
술이(27) ... 현생의 기범
송대감댁 사랑채 머슴. 누대로 내려오는 종이다. 글도 모르고 제 이름도 쓸줄 모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저 우직하게 일만 하며 살아왔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관노로 팔려가도 그저 운명이려니 체념하고 살았다. 그게 자신의 운명이고 팔자였다. 그런데 주인댁이 사화로 풍비박산 나면서 주인댁아기씨 다인과 둘만 남겨진다. 얼결에 아기씨를 데리고 길을 나서는데 처음엔 귀찮아서 어디 떼어버릴까도 했지만 하루 이틀 지나며 정이 들고 만다. 작은새처럼 여리디 여린 이 아이를 어쩌랴. 세상이란 바람앞에 작은 촛불처럼 위태롭기만한 이 아이가 한없이 애틋하고 또 애틋하다.
다래 ... 현생의 수현
화적떼의 일원.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오빠를 따라 화적떼에 들어왔다. 시커먼 남자들틈에 산에서만 자란탓에 사낸지 계집인지 구분 안가게 괄괄하고 거칠다. 바위 타고 칼 쓰며 선머슴같이 사는게 이상하지도 않고 당연했는데 술이를 만난 다음엔 제 시커먼 얼굴도 싫고 투박한 손도 부끄럽다. 여자처럼 보이고 싶다. 가슴이 쿵쿵 뛰는 이 기분이 처음이라 묘하고 묘하기만한데 술이옆엔 웬 말도 안되는 꼬마 계집애가 붙어있는게 아닌가. 저앨 질투할 수도 없고 놔둘수도 없고... 나중엔 질투에 눈이 멀어 술이를 다치게 한다.
완보 ... 현생의 기범
화적떼의 두목. 무리를 이끌고 이곳저곳 약탈하며 돌아다니던 중 빈 농가에서 다인을 발견한다. 양반아녀자임을 알고는 관기로 팔아버리려다가 좇아온 술이와 만나게 된다. 손재주 좋은 술이가 산채 생활에 쓸모 있겠다 싶어 술이와 다인을 받아준다. 양반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양반이라면 무조건 이를 가는 냉혈한.
줄거리
때는 조선중기.
다인은 장안의 세도가인 송대감댁 막내딸이다. 이제 조신하게 규방 수업을 받을 나이라고 어머님이 누누이 이르건만 어린티 가시지 않은 다인은 오늘도 유모 몰래 곳간에 쌓아놓은 가마니 위에서 미끄럼 타기에 바쁘다. 발 동동거리며 말리는 몸종 말도 안 듣고 놀이에 열중하다 결국 무너진 가마니에 깔려 사랑채 머슴 술이가 와서 가마니를 들어내고서야 간신히 구해진다.
힘 좋고 일솜씨 좋은 사랑채 머슴 술이는 이 집안데 누대로 내려오는 충직한 종이다. 말도 없고 웃지도 않고 늘 소처럼 일만 하는 탓에 힘든일은 모두 도맡아하면서 이리 저리 채이기만하는 우직한 머슴 술이. 유일한 즐거움은 나무 하러 갈때마다 뒷산자락에 혼자 앉아 불어보는 피리. 그나마 상것이 광대까지 될 셈이냐고 하도 구박을 당한 탓에 혼자 숨어있을때나 꺼내보는 피리다.
그 무렵 항간에는 서인측이 모반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소문이 돈다. 남인의 거두인 송대감은 그런일이 있을리 없다며 일축하지만 어린 시절 사화로 옥고를 치루는 친척을 보고 자란 다인의 어머니는 불안해진다. 혹시라도 내 딸에게 해가 갈까... 손에 낀 가락지를 빼 실에 꿰어 다인의 목에 걸어준다. 언제나 지니고 있거라. 내가 내 어머니로부터 그 어머니는 그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가락지다. 널 지켜줄게다.
다인의 생일 전날. 태어나 열살까지는 수수팥떡을 해줘야 명이 길다며 떡쌀을 담그던 어머니. 다인은 감주에 식혜도 해달라며 어머니 치마폭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데 사랑채로 심상치 않은 전갈이 온다. 되려 남인이 역모를 일으킨 것으로 상소가 올라가고 그 거두로 송대감이 지목되어 의금부에서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어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순간, 벌써 득달같이 의금부 사령들이 들이닥친다.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다인의 어머니는 급한김에 다인을 뒤주안에 숨긴다.
이리저리 몰리는 사람들 소리, 마루를 울리는 발소리, 아비규환의 비명만 들리는 어두운 뒤주안에서 다인은 제대로 울지도 못한채 공포감에 떠는데...
송대감의 심부름을 다녀와 뒤늦게 들어온 술이는 난장판이 된 집안을 보고 놀란다. 대감마님, 아씨마님! 이리저리 집안식구들을 찾으며 뛰어다니다 뒤주안에서 초주검이 된 다인을 발견한다. 아기씨? 그러나 살필 겨를도 없이 다인을 업은채 의금부 사령의 눈을 피해 무작정 뒷산으로 도망친다. 이미 주검이 된 송대감과 다인모의 시신을 뒤로한채...
새벽녁. 가까스로 뒷산 폐가에서 정신을 차린 다인은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버틴다. 난처해진 술이는 차마 부모가 죽었단 말을 못하고 두분 어르신께서 피해있으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정말이지? 날 어디 버리거나 험한데로 데려갈 생각이라면 아예 말아라. 내가 속을줄 알고.
몸을 피하고자 외삼촌댁을 찾아 나선 다인.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걸어 당도했건만 외삼촌 집에선 혹시나 자기네 화가 미칠까 두려워 문도 열어주지 않은채 모른척한다. 문전박대 당하고 돌아서는 길, 저자거리엔 역모세력의 일가붙이 종놈들까지 소탕한다며 포졸들이 쫙 깔렸다. 이들을 피해 무작정 배를 타고 강을 건넌 다인과 술이는 간신히 산사에 당도해 그날밤을 보내게 된다.
대갓집 남부러울것 없는 아기씨에서 하루아침에 거렁뱅이 유랑걸인 신세가 된 다인. 술이가 간신히 먹을것을 구해오자 이런것을 어찌 먹느냐며 개다리 소반을 걷어찬다.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히기만 한데. 한두번 참아넘기던 술이도 그럼 굶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며 퉁명스레 굴고 나가버린다. 저게 감히 나한테? 서러워 눈물이 그렁거리지만 이 앙다물고 참는 다인.
괘씸한 마음에 술이한테 냉랭하게 굴며 처마밑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토막을 집어다 엄마 시키고 아기 시키고 혼자 소꼽을 논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술이. 다음날 나무를 깎아서 제법 근사한 목각인형을 만들어준다. 너 재주가 좋구나. 그럼 주발도 만들고 경대도 만들어줘. 술이를 앉혀놓고 소꼽놀이를 하는 다인.
근데 니 이름은 무슨 술이니? /술이가 아니고 수리에요. 상수리 나무 밑에서 낳았다고. /그럼 이름을 어떻게 써? /... 다인은 하늘천 따지도 모르는 술이한테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생전처음 제 이름을 제 손으로 써보고 묘한 기분이 드는 술이.
술이는 다인을 위해 나무에 그네를 매준다. 양갓집 규수가 치마 펄럭이는거 아니라고 어머니가 한번도 못타게 했던 그네다. 신나서 발을 구르는 다인. 날아갈듯 햇살인듯 환하게 웃는 모습에 술이도 슬그머니 따라웃는다.
제법 살림 살듯 갖추고 살던 산사에 어느날 화적떼가 들이닥친다. 마구 짓밟고 뒤집어 엎으며 행패부리던 놈들은 목수 노릇하라며 술이를 산채로 끌고 가고 다인은 울며울며 술이를 따라온다. 화적떼 두목 완보앞에 끌려온 술이와 다인.
완보는 매서운 눈초리로 다인을 훑어보며 양반 계집이 아니냐고 다그치고 술이는 얼른 제 여동생이라고 둘러대고 그날부터 완보가 시키는대로 산채 짓는 일을 하게 된다. 그 뒤로 겁을 먹고 술이의 뒤만 졸졸 좇아다니는 다인.
한편 완보 동생 다래는 술이한테 자꾸만 눈길이 간다. 산 타고 짐승 잡으며 거칠게 살아온 산(山)계집이었는데 술이앞에선 왜 이리 가슴이 뛰는것인지...
며칠뒤 함께 저자거리에 나갔다가 자신의 부모가 죽었음을 듣게 된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울부짖는 다인. 다인을 달래다 달래다 못한 술이는 나도 부모가 없노라고 그리고 어린시절 여동생과 생이별했노라고 그렇게 떼어놓은게 바로 네 아버지라고 소리를 질러댄다.
그날밤 다인은 악몽에 시달리다 그만 이불에 실수를 한다. 술이한테 들킨게 부끄럽고 자존심 상해 이만 앙 다물고 있던 다인. 실이 끊어진 어머니의 옥가락지를 만지작거리며 마침내 울음을 터뜨린다. 그날밤 칼에 맞은 어머니를 봤다고 꿈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울고 또 우는 다인. 그런 다인을 안고 다독이고 또 다독이는 술이...
다음날 술이는 다인에게 어머니의 가락지를 넣을 비단주머니를 만들어건넨다. 우연히 그 모양을 본 다래는 오누인지 연인인지 싶게 다정한 술이와 다인의 모습에 묘한 질투감을 느낀다. 나한텐 한번 쳐다봐주지도 않던 남잔데...
한편 다인이 송대감댁 딸이란 사실을 알게 된 화적떼 두목 완보는 다인을 납치해 팔아넘길 음모를 꾸민다.
다음날 술이가 없는 틈을 타 다인을 보쌈해 달아나는 화적떼. 그러나 때마침 달려온 관군에 놀라 다인을 산채에 버려둔채 달아나버린다. 관군의 불화살에 산채는 불타고...
아기씨!! 산채로 달려온 술이는 불길에 놀라 이리저리 목타게 다인을 찾는다. 불길속에서 가까스로 다인을 발견하고 구해내는 술이. 불똥이 튀어 눈을 다치면서도 품안에 다인을 꼭 껴안고 불길을 뚫고 나온다.
완보의 음모에 반대했던 다래는 다인을 구하러 왔다가 이 모습을 본다. 저 아이 때문이라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구나... 섭섭하고 또 섭섭해져 돌아서는 다래.
다른 곳으로 또 거처를 옮기는 술이와 다인. 이제 의지할데도 믿을데도 없이 하늘 아래 단 둘 뿐이다. 다인이 악몽에 시달리는 밤마다 술이는 술이는 밤새 다인을 업어재우며 서성이고 다인은 술이의 등에 기댄채 날 떠나지 말라고 부탁한다. 가면안돼, 알았지? /예, 아기씨. /가면 안돼. /예. 잠결에 되뇌이고 또 되뇌이는 다인. 대답하고 또 대답하는 술이.
그러던 어느날 술이는 송대감댁의 무죄가 밝혀져 역모의 누명을 벗었다는 말을 듣고온다. 마땅히 아기씨를 모셔가야할텐데 어쩐지 내키질 않는다. 이대로 이렇게 둘이 살았음 싶다. 그러나 그럴수는 없는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뛸듯이 좋아하는 다인을 보며 어쩐지 섭섭해져오는 마음을 누르고 마침내 고향집으로 돌아갈 길을 나선다.
옛집으로 돌아오니 다인은 다시 하늘같은 아기씨요 술이는 천하디 천한 상머슴이다. 그게 속상해 술이한테 과자도 갖다주고 피리도 불어달라고 찾아갔다가 큰어머니한테 크게 혼나고 만다. 더 큰 일은 제가 그럴때마다 술이가 매타작을 당하고 혼난 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다인. 그런데 술이는 당연하다는듯 소처럼 일만 하고 있는게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한편 집안에서는 다인의 혼담이 오고 간다. 아직 이른 나이지만 시집을 가야한단다. 새로이 득세한 가문의 도령과 혼인을 시켜 집안을 보존해야한다는 말에 다인은 시집 가는 일이 죽기보다 싫은데...
그무렵 행랑채 술이의 방으로 다래가 숨어든다. 같이 도망가자고 오라버니한테 화전할 밭도 얻기로 했다고 둘이 어디든 가 알콩달콩 살자고... 그러나 완강한 술이. 이미 그는 어디도 갈 수가 없다. 불이 난 날 다친 눈이 점점 멀어져 오고 있는 탓이다. 그저 안된다고만 하는 술이한테 싸늘해져 돌아서는 다래. 은신처로 돌아간 다래는 관군에 밀고한 자가 술이인 것처럼 완보에게 흘린다.
혼인 전날밤. 다인은 술이방을 두드리며 운다. 술이야, 나 시집 가기 싫어. 나랑 도망가자. 다인의 눈물 어린 하소연에 술이는 매정하게 대꾸한다. 아기씨때문에 더 혼나고 고생하기 싫다고 아기씨는 양반이고 나는 종놈이라고 그건 세상이 뒤집어져도 바뀌지 않는다고...
다인의 혼인날. 술이는 먼발치서 다인의 녹의홍상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아기씨 부디 행복하셔야합니다... 그러다 다인이 놓고간 반지 주머니를 발견한다. 아기씨한테 갖다드려야하는데 찾으실텐데... 황망히 가마를 따라나서는 술이.
다인을 태운 가마는 바닷가 길을 굽이 굽이 따라간다. 그 뒤로 보이지 않는 눈을 비비며 다인을 따라가는 술이. 그때 등뒤로 화살이 날아와 꽂힌다. 원수를 갚으려는 화적떼 완보의 화살.
가마안의 다인은 술이의 편지를 읽으며 가마에 기대어 울고 또 운다.
다인이 가르쳐준 글귀 그대로 ‘伏慕區區(복모구구:엎드려 그리워하는 정이 그지없나이다)...’로 시작하는 편지. ‘아기씨. 저는 못 갑니다. 쓸모없어진 종은 쓸모없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부디 아기씨 행복하시기를 빌고 또 비옵니다...’
멀리 다인의 가마는 멀어지고 술이는 비칠거리며 쓰러진다. 반지가 든 주머니를 손에 꼭 쥔채...
< 전생 4화 >
고려의 몽고 항쟁 시기
인물
순녀 - 현생의 정화
아해 - 현생의 수현
카사르 - 현생의 기범
김응서 - 현생의 기수
줄거리
몽고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고 평양 순별초관 김웅서는 간신히 목숨만을 건져 성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순순히 나라를 내줄 수는 없다. 그는 흩어진 장수들과 백성들로 이뤄진 민군까지 모아 호시탐탐 평양성을 장악한 적장의 목을 베어올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그런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스레 수발을 들고 있는 젊은 몸종 순녀.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웅서 가문의 종이었다.
그러나 순녀는 타고난 운명이 한스러울 만큼 빼어나게 아름답고 명석하였다.
그런 순녀를 대하는 웅서의 마음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어느날, 눈에 띄는 미모로 적의 무리로부터 욕을 당한 순녀.
순녀는 치욕감에 몸을 떨지만 나라를 빼앗긴 고려의 장수들은 하늘이 준 기회라고
입을 모은다. 순녀를 이용해 적장의 목을 베어오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웅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애국에 불타는 부하들에게 일개 몸종인 순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 설령 순녀가 장래를 약속한 정혼자라 할지라도, 적장의 목과 사사로운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고려 최고 명장의 도리가 아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벙어리 냉가슴만 앓는 웅서 앞에 순녀가 나선다.
짐승같은 몽고놈들에게 욕을 당하고서 치욕감에 어차피 목숨을 끊으려 했었다며
하찮은 목숨, 죽기 전에 큰 일 한번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웅서는 그것이 난처해진 자신을 위한 순녀의 용기라는 것을 안다. 알지만, 알기 때문에
보낼 수가 없다. 절대 안된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순녀도 만만한 처자는 아니다.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대신 청이 하나 있단다.
약속대로 적장의 목을 베어오면 천형처럼 이어지는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 달라 한다.
어미도,아비도,그리고 나의 아이도.. 더이상 남의 집 종살이를 하지 않게 해달라고.
그런 순녀의 간청과 부하들의 알력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러마- 약속은 했지만
웅서는 마음 한켠으로 서운함도 들었다.
어릴 적부터 줄곧 그녀를 남다르게 대했다 생각했는데, 그녀에게 자신은 그저 어쩔 수 없이 모셔야 하는 윗분일 뿐이었나 싶어서.
늙은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하게 집을 나선 순녀는,
적장과 그 무리들이 질펀하게 노는 술판에 기생으로 분하여 동석한다.
혈기왕성한 적장 카사르는 순녀의 고즈넉한 노랫가락과 춤사위에 넋을 잃어
그만 앞뒤 없이 덥썩 그녀를 자신의 말에 올려 태워 성 안으로 데리고 가버린다.
카사르는, 그녀에게 다른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저 예쁘게 꾸며놓고 가끔 들여다 보며 좋아라 웃고 노래와 춤이나 청하는 정도였다.
맛있는 것을 먹게 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걷게 했으며 가끔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시 전쟁의 피비린내를 잊기만 하면 좋았다.
그리고 그녀의 사정도 묻지 않고 냉큼 보쌈해 온 것을 진심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워 했다. 비록 적장이긴 하지만, 그는 신사였다.
그러나 카사르가 아무리 다정하고 신사답게 대해도 순녀는 목석처럼 차갑기만 했다.
아무리 자진했다 하더라도 납치된 처지도 무섭고 서럽거니와
자신이 모시는 분의 원수, 조국의 원수인 적장에게 거짓으로라도 교태를 팔기엔
그녀는 너무 고지식했다. 마음을 꽁꽁 닫아걸고 그저 적장의 심장만을 노릴 뿐이었다.
순녀는, 자신에게는 너무나 관대한 적장에게 하나 뿐인 오라비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이따금씩 성 밖으로 나가 웅서장군을 만나 새로 알게된 정보를 넘겨주곤 하였는데,
그렇게 잠시 만났다가 다시 호랑이굴로 순녀를 보내야 하는 웅서는 번번이 마음이 울컥하여 견디기가 괴로웠다. 조국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도, 신분차도 다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순녀의 여린 외모 뒤에 숨어있는 비장한 결의에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감격하였는데….
그런데 이상하다. 언제부턴가 그녀가 달라졌다고 느껴진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그렇다. 그녀가 점점 행복해 보이는 것이다….
순녀는 행복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보는 사람 대접에, 여자 대우에, 행복했다.
마음에 비수를 숨기고 의무적으로 걷던 카사르와의 산책이 기다려지고
그의 넓고 단단한 품에 안길 때면 훅 숨이 막히기도 했다.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그의 이마,눈썹,콧날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손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이러면 안된다,그는 적장이다, 몽골인이다, 나라의 원수다,나는 그의 심장에 칼을 꽂으러 왔다…. 하루에도 열 번, 스무번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움켜쥔 물처럼 ,모래처럼, 마음은
너무나 쉽게 흩어졌다.
그런 불안함을 눈치 챈 것일까. 어느날 카사르가 말했다.
가도 좋다.
납치해 온 주제에, 너의 조국을 짓밟은 적장인 주제에, 네 마음까지 원하는 것은 욕심이다.내가 싫다면 지금이라도 가도 좋다.. 보내주겠다...
순녀는 흔들린다. 그래, 정말 돌아갈까. 그의 가슴에 칼을 꽂을 자신도 없는데, 이대로
돌아가 들켜서 간신히 도망왔다고 거짓말하고 말까.... 아주 짧은 동안이지만 순녀는
천년의 세월처럼 고민하였다. 그리고...떠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심장을 원해서인가...
그런 두 사람을 시기하는 이가 있었다.
오래 전부터 카사르를 사모하여 이국만리 고려땅까지 쫓아온 여인, 아해.
길에 나서면 주변이 환해질 만큼 화려하고 눈부신 미모에 어릴 적부터 여기저기서 청혼도 많았으나 그녀는 오직 카사르.뿐이었다.
이제 전쟁을 끝내고 돌아가면 카사르와 혼인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갑자기 굴러 온 촌스러운 고려 여자가 카사르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그저 전쟁으로 심신이 지친 카사르가 쌀밥에 질려 보리밥 찾듯 잠시 노리개로 삼은 것이려니 생각하고 아량 넓은 척 했다.
그러나 그 계집에게 자운영이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그녀를 욕보이려 했던 부하장수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가슴에 불이 나 견딜 수가 없다.
저 여자는 뭔가. 고려 들판에 허다한 들꽃처럼 소박하기만 한데, 저렇듯 단숨에 카사르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뭔가.
아해는 마치 마녀사냥 하는 심정으로 순녀의 정체를 밝혀내려 혈안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순녀가 ‘오라비’ 라며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내가 바로 평양성의 순별초관이었으며 현재 평양성을 되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쾌재를 부른다. 자, 이제 카사르는 순녀가 꼬리 아홉 달린 요물이었음을 깨닫고 내 눈 앞에서 순녀의 목을 베어버리리라..
카사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순녀가, 아니, 자운영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가슴이 아팠다. 화도 났다. 그러나 그저 내버려 두었다.
처음엔 천하의 카사르가 고작 연약한 고려여자의 손에 가뿐히 죽겠는가- 하며 가소로워하는 마음에 그랬고... 이젠...그녀가 원한다면...심장을 내주어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거나하게 취한 어느날 밤. 잠든 자신을 하염없이 내려다 보는 자운영의 시선을 느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자운영의 시선이, 눈물이, 흔들리는 결심이, 격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이마가 움찔움찔했다.
“지금이다.. 찔러라..”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내 심장을 원하는가. 어차피 내 심장은 오래 전부터 너의 것이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몽고 최고의 명장, 카사르라 하더라도 술에 취해 무방비 상태로 누워있으니,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여자로서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운영은 카사르의 가슴 위에 비수 대신 눈물을 떨어뜨린다. 울음을 깨물며..
그러나 연정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치기엔, 자운영에겐 또다른 뜻이 있지 않은가.
애초에 이곳까지 제 발로 걸어들어온 이유.
날 때부터 낙인처럼 이마에 새기고 다녔어야 했던, 노비라는 신분. 그 천형에서 대대로
벗어날 길이 오직 그녀의 손에 달린 것이다.
자운영은 피눈물을 삼키며, 웅서와의 최종접선을 시도한다.
모월 모일, 조만간 열리는 연회에서, 카사르에게 독한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할테니
성내에 잠입해 있다가 자신이 사인을 보내면 바로 들어와 카사르의 목을 베라고 일렀다.
그날밤 성으로 돌아온 자운영은 카사르 품에 안겨 밤새 흐느껴 울었다.
고마웠다고..행복했다고..그리고 미안하다고....
버림받은 짐승처럼 흐느끼는 자운영을 그저 자꾸만 끌어안으며
카사르도 목이 메이고 가슴이 메어왔다.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만났는가..
연회 전날.
아해는 자운영의 계략을 카사르에게 알렸다. 그녀가 내일 널 죽일 것이다.
늘 그렇듯 표정에 변화라고는 없는 카사르. 심중을 알 수가 없다.
그저 “알았다.” 한마디 할 뿐.
연회에서 카사르는, 자운영이 권하는 술을 의심없이 넙죽넙죽 받아마시고 실컷 취했다.
불안한 아해가 옆에서 계속 만류하였지만 카사르는 오늘 유독 기분이 좋아보였다.
자운영을 보고 연신 이쁘다며 웃기만 한다. 그런 카사르를 서글프게 보는 자운영.. 그리고
그런 자운영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아해의 눈빛으로 연회는 어지럽게 흔들린다.
그날 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카사르에게 아해는 오늘 밤은 자신의 방에서 기거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카사르는 한사코 자운영과 한방에 들어섰다.
차라리 아해의 방으로 갔으면. 그래주기를. 자운영은 얼마나 빌고 또 빌었던가.
순녀 앞에 앞섶을 풀어헤치고 가슴을 드러낸 채 잠에 곯아떨어진 카사르.
약속한 시각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천천히 가슴팍에서 비수를 꺼내는 자운영의 손끝이, 입술이, 가슴이....부들부들 떨린다.
이윽고 닭이 홰를 치고..그것을 사인으로 장검을 들고 방으로 뛰어들어온 웅서.
그러나 자운영은, 아니 순녀는, 아직도 손에 비수를 든 채 적장의 가슴을 찌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뛰어든 웅서를 올려다 보는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다.
무엇인가, 저 눈물의 뜻은.
그렇게 두 사람이 시선을 맞추며 잠시 멈칫하는 사이, 카사르가 움찔 몸을 뒤척이며
깨어난다. 짧은 순간, 엇갈리며 부딪히는 세사람의 시선이 격렬하다.
카사르, 비수를 들고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자운영을 본다. 눈물 가득한 검은 눈망울..
그 틈을 타 웅서가 카사르의 목을 향해 장검을 내리친다. 웅서의 칼끝이 카사르의 뺨을 스쳤나 싶은데, 카사르, 어느새 번개같이 일어나 머리맡의 장검을 빼들고 웅서의 칼과 맞선다.
곧이어 두 사내의 예리한 칼끝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부딪힌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 순녀의 마음이 갈갈이 찢어지는데..
카사르, 아무리 명장이라지만 만취한 상태로는 역부족이다. 밀린다.
사력을 다해 웅서와 맞서던 카사르, 순녀를 본다. 그 눈빛..!
순녀는 그 눈에서 카사르의 마음을 읽는다.
“네가 찔러라. 나는 한 나라의 장수, 적국 장수의 손에 내 목을 내어줄 순 없다. 그러나.. 네가 원한다면, 너에겐 내어주겠다.”
웅서, 그 틈을 타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데,
그 순간, 순녀가 달려들어 카사르의 심장을 찌른다.
쑤욱-.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비수의 느낌.
자운영, 놀랍고 무섭고 서러워서 가슴이 터질 듯 한데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카사르의 눈빛은 오히려 그윽하기만 하다. 평화롭고..행복해 보이기까지 한다.
천천히 자운영의 품에 고꾸라지는 카사르.
다음 순간, 계획했던 대로, 웅서는 칼을 휘둘러 카사르의 목을 벤다.
넋나간 사람처럼 망연자실한 자운영의 하얀 얼굴 위로
카사르의 따뜻한 선혈이 몇방울 튄다..
한발 늦게 달려온 아해의 눈앞엔 (머리가 잘린)사랑하는 이의 싸늘한 주검 뿐.
그제야 온전히 카사르를 끌어안고 목놓아 우는 아해.
용서하지 않을거야....
졸지에 장수를 잃고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적군을 몰아내고 다시 평양성을 되찾은 웅서.
카사르의 머리는 평양성 입구에 높다랗게 내걸렸다.
적장의 모가지 아래에서 평양백성들은 나라라도 다시 되찾은 듯 만세를 부른다.
기쁘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순녀 뿐인 듯 하다.
몇날 며칠 산 송장처럼 먹지도 자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눈자위가 까맣게 타들어갔다.
약조한 대로 노비문서도 파기하고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건만,
그리고 드디어 가슴 벅차게 청혼까지 했건만,
순녀는 웃지 않는다.
언제였더라.. 그녀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던 게.. 그때가...
웅서는 입술이 탄다. 잠시 혹시나 했었지만... 순녀가 직접 적장의 숨을 끊지 않았나.
그것으로 확인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잠시나마 불안했던 것이 부끄러웠는데..
그게 아니었나.
웅서는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 적장을 사모한 것이냐..?
순녀는 대답이 없다. 대답 대신....
성 위에 걸린 카사르의 머리를 끌어내려.. 피눈물을 쏟으며 뺨을 부비다가...
보물처럼 가슴에 꼭 끌어안고 바닷가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다음 세상을 향해..
< 현재 >
임상일지를 쓰는 수현.
도대체 어떤 업보와 인연들이 있어 우리를 이렇게 질기게 끌고 다니는가..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인연과 업보가 시작된 최초의 전생, 시원의 그 생애로 가보기로 했다.
< 전생 5화 >
고대 분위기. 시대 불명.
고려라고 해도 좋음.
인물
매 - 현생의 수현
난 - 현생의 정화
국 - 현생의 기범
죽 - 현생의 기수
마촌장
소법사
고부인
줄거리
부족국가 시절.
마촌장은 주변의 부락들을 차례로 통합해가며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강인한 체력과 흉포한 성격의 마촌장은 부인에게 태기가 있다는 말을 전해듣자 아들을 날거라고 장담한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 같은 걸 낳는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없애버리겠다고 한다. 곁을 지키고 있던 소법사가 남몰래 한숨을 쉰다.
그로부터 열달 뒤.
고부인의 출산일이 다가오는데 소법사가 찾아온다.
뱃속의 아기는 딸이고 게다가 쌍둥이라는 얘기를 들은 고부인은 사색이 된다. 딸 쌍둥이를 낳았을 때 닥칠 비극을 생각하니 고부인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자 소법사, 은밀하게 방법을 일러준다.
천둥번개가 하늘을 때리고 비가 쏟아지는 밤.
고부인은 소법사의 예언대로 딸 쌍둥이를 낳는다.
출산이 끝나자 유모는 출산을 도왔던 하녀들을 극약을 먹여 살해한다. 이어 자신도 혀를 녹이는 비약을 마신다.
한편 법사는 마촌장에게, 전하께서 이제 천하를 얻으면 그 대업을 이어갈 아들이 필요한데 그 아들을 이제 나실거라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만족해하는 마촌장에게 덧붙인다.
그런데 그 아들의 양기가 너무 강해서 그 양기를 눌러줄 음기가 필요하다고. 천만 다행히도 아기는 아들 딸 쌍둥이라고.
그 자리에 고부인이 아들 딸 쌍둥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18년 후
동생으로 태어난 매는 남자 복장을 하고 남자로 자랐으며
언니로 태어난 난은 여자 복장을 하고 여자로 자랐다.
활솜씨 좋고 쾌활하고 잘생긴 청년 매가 사실 알고보면 여자라는 사실은 고부인과 벙어리 유모 그리고 자기 자신 뿐. 매 스스로도 자신의 근본은 여자라는 것을 잊고 살았다.
매는 때로는 자신이 남자로 길러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누나처럼 방안에서 수나 놓고 살아야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삶이겠는가.. 매는 활을 쏘며 전쟁터를 누비는 삶이 더 좋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부친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르게 되리라.. 조작된 운명이긴 하지만 매는 자신의 인생이 흡족했고 우월감마저 느꼈다.
그 무렵 주변국가는 마촌장이 이끄는 마촌과 현촌장이 이끄는 현촌 두 세력으로 크게 나뉘게 되었는데 두 나라의 세력은 비슷비슷했다. 오랜 세월동안 두 나라는 싸움을 해왔지만 이제 화평과 공존의 시대가 도래했다.
화평의 상징으로 현촌장의 아들 국과 마촌장의 딸 난과의 혼담이 있었고
그 때문에 국이 난을 만나러 마촌으로 왔다.
매는 현촌의 왕자 국을 보자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그와 활쏘기를 겨뤘던 날, 대회가 끝나자 국은 친밀감을 드러내며 매를 껴안았는데 순간 매는 질식할 것 같았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고 혼란이었다.
국도 매를 좋아했으나 그것은 사내끼리의 우정이었다.
국이 매를 대하는 태도와 난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이 달랐다. 국은 난을 만나자 맘에 들어했으며 곧 사랑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누나인 난과 사랑을 하는 국을 보는 매의 가슴은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남자로 길러진 것에 절망했다.
자네같은 여자가 있었으면 첫눈에 반했을거라는 국의 농담에 매는 나도 여자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아주 간절하게. 난을 사모하는 국을 옆에서 지켜보기란 고통스런 일이었다.
양국의 혼사를 위해 왔던 현촌의 일행중에 죽이라는 현의 왕자가 있었다.
그는 국의 배다른 동생인데 음침한 야심가였다.
난과 죽 그리고 매의 삼각관계를 즐기며 빙빙 돌던 죽은 서서히 매에게 접근, 사내놈이 여자처럼 곱상하다는 둥 매를 자극한다.
국이 난과 함께 현촌으로 떠나기로 한 전날 밤.
매와 국과 난은 밤이 깊도록 술잔을 기울인다. 매는 갈가리 찢기는 가슴을 감추며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준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죽을 만난다.
여전히 이기죽거리던 죽, 갑자기 매를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놀라 밀치는 매. 그러나 죽은 매의 웃옷 띠를 단도를 잘라버린다. 풀어헤쳐지는 가슴. 죽은 속삭인다 나는 니가 여자란 걸 알고 있다고. 충격받는 매. 매에게 전할 것이 있어 뒤따라왔던 국이 그 광경을 본다. 국은 국대로 매는 매대로 충격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그날밤을 하얗게 밝히며 매는 어쩌면 자기가 원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한다.
다음날 아침 소법사가 매를 찾아온다.
출산을 도왔던 하녀들을 다 없앤줄 알았는데 그 중 한 명이 기적적으로 소생해서 현으로 도망쳤고 죽의 모친에게 숨어든 것 같다고.
소법사는 죽은 야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마촌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의 미래를 위해서도 국과 죽을 죽여야한다고 말한다. 비밀이 퍼지면 포악한 마촌장의 손에 매도, 고부인도 살아남지 못할거라는 얘기도 함께.
매는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만난 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행동한다.
국도 밤새 고민했었다. 돌이켜보니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왜 그렇게 매의 눈빛이 슬프고 아련했었는지.. 그러나 국은 마음을 다스렸다. 어짜피 매는 남자로 길러졌고 촌장이 될 사람이다. 국의 그런 태도가 또 한번 매의 가슴을 후벼팠다.
국과 난은 매와 마촌장, 고부인 등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 후 말과 가마를 타고 떠난다. 매는 국에게 사랑을 느꼈고 집착을 느꼈고 원망과 슬픔, 비통, 애증을 느꼈다.
매와 난이 태어나던 날처럼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 행렬이 산길, 계곡을 지나가고 있을 즈음 언덕에 서서 활을 겨누는 매.
매는 활을 조준해서 국을 쏜다.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국.
매는 넋을 잃는다. 그런 매의 등뒤에 꽂히는 화살. 매를 쏜 것은 죽이었다.
죽은 이로써 양국의 태자를 제거한 것이었다.
죽은 칼을 빼들고 매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심장을 찌르려는 순간 번개가 칼에 맞으면서 죽을 관통한다.
매는 죽어가면서 국을 그리워한다.
계곡 아래에서는 비를 맞으며 죽은 국을 끌어안고 난이 울부짖고 있었다.
< 다시 현재 >
이제 정화는 전생의 그 남자, 천년을 기다려왔던 그 남자가 기범이란 확신을 얻었다.
이런 정화에게 기수는 갈데가 있다고 하면서 손을 잡아끈다.
형이 곧 결혼을 하는데 네 사람 모여 식사라도 하자고 했다고.
그날 저녁 모인 자리에서 정화와 기범은 충격을 받는다
정화는 기범이가 수현과 결혼할 사이라는 것에서.
기범은 하필 동생의 여자친구가 정화라는 것에서.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면서 수현은 절망적인 기분이 들고
기수는 어리둥절해하는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