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욱수동(旭水洞),
물이 맑고 빛났던 욱수천변 마을
개관
욱수동은 수성구 고산1동의 법정동으로 대부분이 유건산·안산·성암산 일대 산지이며, 북쪽 극히 일부가 아파트 단지다. 남쪽에는 성암산(472.3m), 안산(471.4m), 유건산(453m) 등 400m 이상의 높은 산이 있다. 이들 깊은 산골짜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르는 욱수천 상·중류 일대에 욱수동이 있다. 욱수골은 약 6km에 달하는 깊은 계곡인데 계곡 동쪽에 느리, 참새, 명인골, 선돌 등이 있고, 서쪽에 까꾸랭이, 범둔골, 망월골 등이 있으며, 남쪽 산골짜기 깊은 곳에 봉암 마을이 있다. 봉암골에는 ‘자양산(紫陽山)·자산(紫山·子山)·안산(案山)’이라 부르는 산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욱수동 출신 의병장 박응성이 자산성 정상에 산성을 쌓아 왜군을 막았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옛 성터가 자산성(욱수산성)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성암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낮은 산줄기는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욱수동은 일찍이 마을 동쪽에 있는 서낭당과 서쪽에 있는 사직단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신제를 지냈다. 그래서인지 다른 마을과 달리 욱수동에는 ‘마마’ 같은 질병이나 잡귀가 없었다고 한다. 욱수동 자연부락으로는 상동, 샛터, 삼산동, 봉암 등이 있다. 욱수동은 지리상 신매동 위쪽(남쪽)에 있어 상동이라고도 불렀다. 샛터(신계)는 지금의 신매시장 일원이며, 삼산동은 집이 세 집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봉암은 욱수골 남쪽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있었던 마을이다. 지금은 3-4호가 옛 마을 흔적으로 유지하며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지명 유래
욱수동은 15세기 초 ‘경원’이라는 선비가 처음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전한다. 처음에는 욱수천 상류에 있어 ‘상동(上洞)’이라 불렀다. 욱수동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산군 경계 및 명칭을 변경할 때 욱수동(旭水洞)과 봉암동(鳳巖洞)을 합쳐 만든 지명으로168), 빛이 날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란 뜻에서 ‘욱수동’이라 이름 지었다. 경산현읍지(1785)에는 욱수동리(旭水洞里), 「호구총수」(1789)에는 욱상동(旭上洞)과 욱하동(旭下洞)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이후 경산현읍지에는 욱수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봉암동은 1850년대 경산현읍지 이후부터 나타난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예부터 10리나 되는 깊은 골에서 맑은 물이 마을 앞을 흘러서 그 물이 맑고 빛나므로 욱수동이라고 칭하게 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욱수동은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 마을이란 뜻에서 붙인 동명으로도 볼 수 있다. 욱(旭)은 ‘우묵하게 깊게 들어간 형상’을 표기한 것이며, 수(水)는 지형에 맞게 차용한 지명 어사다.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은 욱상동, 골짜기 바깥쪽에 있는 마을은 욱하동으로 불렀다. 봉암동은 욱수골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봉암폭포 아래 봉바위골에 있었던 마을이다. 욱수동이 분동(分洞)되어 욱상동은 봉암동, 욱하동은 욱수동이 됐다고 추정된다.
망월산 아래에 있는 망월지는 두꺼비 산란지로 유명하며, 욱수천 중류에는 공룡 발자국 화석이 남아 있다. 욱수동과 봉암 사이로 대구·부산고속도로가 통과하며, 인근에 유니버시아드로와 욱수천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주요 유적과 유물로는 청동기시대 주거유적과 분묘를 비롯해 삼국시대 성곽인 자양산성과 삼국시대 고분, 토기, 가마터, 주거유적, 생활유적, 조선시대 생활유적, 욱수천 공룡 발자국 화석 등이 발굴됐다.
168) 조선총독부경상북도고시 제24호(1911.9.21)
망월지(望月池)·망월골·망월들·광월들·문등골
망월지(욱수동 417)는 욱수동에 있는 저수지로 1929년 준공됐다. 유건산(453m), 안산(471.4m), 성암산(472.3m) 등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아래에 있다. 현재 망월지는 전국 최대 도심 내 두꺼비 산란지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또한 망월지는 대규모 주택 단지와 인접해 있어 주변의 노변동 사직단, 욱수천 공룡발자국 유적지, 고모동 철새도래지 등을 연결하는 관광자원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 망월지와 지금은 매립돼 사라진 두리지와 건천지(일부가 남아 있다), 욱수 마을이 보인다. 망월지, 두리지, 욱수 마을 사이에 논농사를 짓는 ‘광월들(망월들)’이 보인다. 건천지가 일부 매립된 자리에는 현재 대구시시지노인전문병원이 들어섰다. 욱수동새마을공원에서 남쪽 욱수천 길이 아닌 서쪽 골짜기로 접어들면 먼저 만나는 골이 망월골이고, 재를 넘어 봉암골 직전에 문둥골이 있다.(‘욱수동 일대’ 사진 참조)
봉암골(鳳巖谷)169)
봉암골은 욱수골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 봉암이란 지명은 봉암마을 앞에 있는 노적봉이 알을 품는 봉황의 모습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됐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산 모양이 봉황의 머리를 닮았고 더욱이 마을 앞 노적암이라는 바위 위에 봉황이 앉았다는 데서 봉암동이라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거 욱수골에 거주하던 일부 주민들은 농사로 생계유지가 어려워지자 솔가지를 채취하거나, 문중 선산을 관리하고 그 대가로 농지를 받아 생활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봉암골 주민들은 산림과 관련된 지식을 서로 공유하며 산 아래 욱수동 주민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생활환경을 구축하며 살았다. 과거 15-20여 가구가 살았던 봉암골 주민들은 산촌 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세대를 거쳐 전승하고 주민들끼리 공유하며 살았다. 그 내용은 솔가지 채취에 관한 지식, 바위 설화에 관한 지식, 약초 복용에 관한 지식 등이었다.
솔가지는 소나무 가지를 일컫는 말로, 솔가지를 채취해 내다 파는 것은 산촌 마을 봉암골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봉암골 주민들은 소깝(솔가지)을 모아 땔감으로 사용하거나, 대량으로 모아 가까운 경산장이나 연호동 기와 공장에 내다 팔았다. 소깝을 모아 가로 2m, 세로 1.5m 직사각형 형태로 쌓아 새끼줄로 묶은 것을 ‘소깝삐까리’라 불렀는데, 이를 지게나 우마차에 실어 산 아래로 내려가 판매했다. 약초 복용에 관한 지식으로는 봉암골 주민들은 자귀나무, 윤동초(인동초), 제피나무(초피나무), 두릅, 물포구(산에서 나는 머루의 한 종류)와 돌에 붙어 자라는 하얀 색 약초 등 대여섯 가지 재료를 함께 끓여 약을 만들어 먹었다. 물의 색깔이 검기 때문에 ‘감주’라고 부르기도 했고, 통증에 효과가 좋아 ‘약탄술(약단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약탄술은 허리나 무릎 등의 관절과 근육이 아플 때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됐으며 특히 허리 통증에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169) 수성구청,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무형문화유산, 2021, 267-269쪽.
봉암골 장림 오형제 설화170)
욱수동 봉암골 장림에 살았던 오형제는 원래 경산 임당동에서 태어났다. 장림은 땅이 척박해 농사를 짓기 어려운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5형제는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서로 힘을 모으고 양보하면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결국 많은 재산을 축적해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실제 대대로 마을에 거주하면서 선영을 조성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170) 수성구청,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무형문화유산, 2021, 225쪽
소바우(소바위)·눈물바위·빤돌바위·넙덕바위·붓돌바위
소바우(욱수동 산 81-1)는 욱수골에 있는 방 8칸 크기의 커다란 바위다. 지명 유래에 따르면 옛날 이 바위에서 소싸움이 일어나 소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소바우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옛날 한 농부가 이곳에서 소에게 먹일 풀을 베고 있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농부를 해치려고 했다. 농부는 겁이나 소에게 달려갔고 소는 풀 먹기를 중지하고 호랑이와 싸우기 시작했다. 농부는 소를 응원했고 결국 수 시간 싸움 끝에 소가 호랑이를 이기고 주인을 구했다고 한다. 그 후 소와 호랑이가 싸운 자리에 큰 바위가 하나 생겼는데, 이 바위를 ‘소바위’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171) 또 다른 유래설도 있다. 옛날 욱수골에 살던 한 여성이 소바위 근처에서 소 풀을 먹이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였다. 소가 바위 아래의 암소를 보고 설쳐대며 떨어지려 했다. 여성은 소를 구하기 위해 고삐를 당겼는데 그만 소와 함께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소바위 맞은 편에 여성의 무덤 형태가 남아 있었으나 1970년 새길을 내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참고로 욱수골에는 골짜기를 따라 재미있는 이름의 바위가 여럿 있다. ‘눈물바위’는 평평한 바위 표면으로 계속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바위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빤돌바위’는 골짜기 길을 사이에 두고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다섯 개 바위로 다섯 바위가 공기놀이를 일컫는 ‘빤돌놀이’ 공기돌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음바위는 고개를 넘다가 지겨울 때쯤 나타난다고 붙은 이름이다. ‘넙덕바위’는 바위가 넓적해서, ‘붓돌바위’는 바위가 불이 잘 붙어서 마치 부싯돌 같다고 붙인 이름이다.172) 이외에도 봉암 북동쪽에 ‘효자바위’가 있다.
171)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대구, 1988, 354쪽.
172) 대구시 수성구, 수성구의 무형문화유산, 2021, 271-273쪽.
욱수농악173)
욱수농악(대구시무형문화유산)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에서 자생적으로 전승되는 풍물놀이다.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 마을 제사 때 동제당에서 신내림을 축원하는 ‘천왕받이굿’과 이어서 놀던 ‘판굿’, 대보름 때의 ‘지신밟기’, 달불놀이 때의 ‘마당놀이’가 하나의 틀이 되어 전승되어 왔다. 특히 욱수농악은 욱수동이 경상북도와 대구 경계에 있어 두 지역 농악 특징이 함께 나타나며, 경상도 특유의 단순하면서도 박력 있는 가락과 정교한 쇠가락이 어우러지는 복합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 다른 지역 풍물놀이에는 없는 ‘외따기놀이’가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욱수농악이 언제부터 연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는데,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에 지내던 천왕받이굿에서 전래되었다고 한다.
욱수농악은 쇠(상쇠·종쇠), 징, 북, 장구, 소고, 목나발, 기수(농기·영기), 잡색(양반·색시·포수) 등으로 편성된다. 마을에서 정월 초사흗날 동제를 지낼 때는 풍물패가 질메구(길굿)를 치며 천왕당으로 이동하여 당나무 주변에 도열한다. 천왕받이굿이 끝나면, 풍물패는 신을 모신 단기를 앞세우고 제관의 집으로 향하여 제관 집 지붕에 단기를 걸쳐 두고 마을 사당으로 향한다. 사당에서 판굿을 진행한 후, 온종일 지신밟기를 한다. 욱수농악의 놀이 과정은 입장, 인사, 방향 전환, 동글레미, 호호굿, 마당놀이, 외따기놀이, 십자진, 오방진, 덧배기(춤굿), 덕석말이, 인사, 퇴장으로 진행된다. 외따기는 참외따기의 줄임말인데, 참외 서리를 놀이화한 독특한 연행이 특징이다. 욱수농악은 1963년 2월 25일 주민들이 조직한 친목회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현재는 ‘욱수농악보존회’가 욱수농악의 전승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욱수동 마을 제사였던 동제는 1970년대 도시화 과정에서 중단됐고, 달불놀이는 산불 위험으로 금지됐다.
173) 향토문화전자대전.
욱수동(자양·자산) 산성
수성구 욱수동 자양산(안산) 정상에 있는 고대 산성이다.(욱수동 산163번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박응성 장군이 성을 수축하고 왜적을 대항해 싸웠다고 전해온다. 자양산 정상부와 계곡을 감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둘레는 약 2㎞다. 유사시 다수 인원이 성안으로 들어가 전투할 수 있는 성곽으로 경산지역을 포함한 금호강 유역 전역을 관찰할 수 있는 거점성이다. 각종 경산현읍지에 기록된 우곡성(亏谷城)으로 추정되며, ‘자산성지·자양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성벽은 급경사인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며, 능선과 계곡을 따라 토석혼축(土石混築) 또는 석축(石築)으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은 경사면 한쪽을 깎아내고 바깥쪽에만 성벽을 쌓는 편축(片築) 성벽이 중심이며, 높이는 3m 내외다. 성 내부 시설로는 구릉 정상부에 있는 망대 시설을 비롯해 건물지로 추정되는 평탄지와 중앙 계곡부 집수시설 등을 들 수 있다.
욱수동 산성은 평지에 있는 북쪽의 성동 산성(고산 토성)과 넓은 들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성곽 주변인 노변동, 욱수동 일대에 고분군이 분포하며, 사월동·시지동·매호동에는 고인돌 같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산재해 있다. 성 내에서 5-6세기 토기편 등이 확인됐다.174)
174) 향토문화전자대전.
욱수천(旭水川)
욱수천은 욱수동 병풍산(屛風山, 571m) 북사면에서 발원해 사월동에서 남천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욱수천 바닥 퇴적암에는 중생대 백악기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인근 망월지는 우리나라 최대 두꺼비 산란지 및 군락지로 이름이 나 있다. 욱수천은 수질정화에 탁월한 장석반암류(맥반석)가 많아 물이 맑고 수질이 청량해 하천 이름을 ‘빛날 욱(旭)’에 ‘물 수(水)’를 붙여 욱수천으로 명명했다고 한다.175) 전체 길이는 약 6km인데, 상류는 전형적인 계곡(봉암골) 모습이며, 중류는 아파트 단지(욱수동·신매동), 하류는 들판(사월동) 사이를 관통하고 있다.
175) 국토지리연구원 지명 유래(대구광역시편).
욱수천 공룡 발자국 화석지
욱수천 중류 하천 바닥에 분포하는 중생대 백악기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다.(욱수동 694) 1억 만 년 전 공룡은 먹잇감이 풍부한 지금의 욱수천 일대를 비롯한 대구 여러 곳에 발자국을 남겼다. 욱수천에서 발견된 14개 발자국은 두 마리 공룡이 걸어간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발자국 모양으로 보아 중간 크기 초식공룡인 용각류 공룡 발자국으로 추정된다.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 주변에는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와 관련한 해설판과 모형 등이 설치되어 방문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176)
176)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