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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칙 평상시도平常是道
南泉, 因趙州問: “如何是道。” 泉云: “平常心是道。” 州云: “還可趣向否。” 泉云: “擬向卽乖。” 州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 不屬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己, 若眞達不擬之道, 猶如太虛, 廓然洞豁, 豈可强是非也?” 州於言下頓悟。
남전南泉에게 조주趙州가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평상심이 바로 도다.”
“어떻게 닦아 나가야 하겠습니까?”1
“향해 나가려고 하면 그르친다.”
“향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도는 안다거나 모른다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다고 하면 망각妄覺이요, 모른다고 하면 무기無己다.2 진실로 헤아리지 않는 도에 이르렀다면 허공처럼 텅 비고 툭 터져 있을 터인데 억지로 시비할 것이나 있겠느냐?”
조주는 이 말에 즉시 깨달았다.
無門曰: “南泉被趙州發問, 直得瓦解氷消, 分疎不下。趙州縱饒悟去, 更參三十年始得。”
무문 화상 평하기를,
남전은 조주에게 질문을 당하여, 기와가 부서지고 얼음이 녹아내리듯 답하여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하였다.3 조주가 이때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삼십년은 더 참구해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頌曰,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게송으로 가로되,
봄에는 온갖 꽃, 가을에는 달,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에는 하얀 눈.
어떠한 일에도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면, 인간사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않은가!
I. 배경
남전보원南泉普願4 선사는「제14칙 남천참묘南泉斬猫」장에 나왔다. 남전은 당대唐代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제자로, 서당지장西堂智藏, 백장회해百丈懷海와 함께 마조 문하門下 3대 선승으로 꼽힌다. 남전은 육긍대부陸亘大夫, 조주종심趙州從諗5, 장사경잠(長沙景岑, ? ~868) 등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는데, 그중 조주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조주가 남전을 처음 뵈었을 때의 일화가『전등록傳燈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주종심은 조주曺州 학향郝鄉 사람으로 성은 학郝씨이다. 어릴 때 그곳 호통원扈通院에서 스승을 따라 머리는 깎았으나 계는 받지 않았다. 지양池陽에 가서 남전南典을 만났는데, 남전이 누어 쉬다가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瑞像(瑞像院)에서 왔습니다.”
“그래 서 있는 서상(상서로운 형상)은 보았겠지?”
“서 있는 서상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누워 있는 여래如來를 보았습니다.”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냐 없는 사미냐?”
“주인이 있는 사미입니다.”
“그래 주인은 어디 계시느냐?”
“한 겨울이라 날씨가 차갑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화상께서는 건강에 유의하시옵소서.”
남전이 법기로 여기고 입실을 허락하였다.6
그렇게 하여 14세의 조주는 남전의 제자가 되는데, 어느 날 조주가 남전에게 도道에 대해 물은 내용이 본칙에 보이는 <평상시도平常是道> 공안公案이다. 조주는 道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남전은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대답한다. 조주는 그럼 그렇게 알고 수행하면 되겠습니까? 또는 어떻게 닦아 나가야 하겠습니까? 어떤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라는 뜻으로 다시 물었고, 남전은 ‘도달하겠다며 생각하는 순간 이미 빗나간 것이다’7라고 대답한다.
평상심은 선악시비 분별이 없는 고요한 마음이다. 선악시비로 마음이 들끓을 때는 평상심이 아니다. 아무 일이 없어 고요할 때가 평상심이다. 평상심은 평소 마음이다. 도는 원래 그렇게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헤아림이다. 도는 그런 생각조차도 없다.8
남전은 조주의 멱살을 잡거나, 몽둥이를 집거나, 딴전을 피우지 않고 온건하게 타이른다. “진리는 평상심에 있다. 피곤하면 주저앉고, 배고프면 식당을 기웃거리며, 슬픔에 눈물짓고 기쁨에 웃음 짓는 너의 그 일상적 반응 거기에 존재의 비밀이 있다.” 조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진리와 더불어 하나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상심이 진리라면 대체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는가. 조주의 의혹에 스승은 찾거나 도달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충고한다. 의심을 내거나 의욕을 보이는 순간 진리의 화살은 서역 저편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9
남전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수행하면 어긋난다는 뜻이다. 그대들이 만약 마음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여 안으로 마음의 적정함을 간看하거나, 마음을 일으켜서 밖을 비춰 보려고 하거나, 마음을 수습하여 안으로 맑게 하려고 하거나, 마음을 응집시켜 선정에 들려고 하는 것은 모두 조작된 행위인 것이다[爾若住心看靜 舉心外照 攝心內澄 凝心入定 如是之流皆是造作].10
그렇게 의도된 마음은 도하고는 멀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목적을 가지는 순간 이원적 분별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도를 이루려는 목적을 마음에 품거나 혹은 도의 경지에 나아가려고 마음먹는 것은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견해이다. 정성본 스님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깨달으려고 좌선을 하거나 혹은 교학을 버리고 선만을 고집하는 것 또한 이원적 분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지향하려고 하는 목적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자기와 목적이 둘로 나누어지는 이러한 입장은 두 가지의 상대적인 분별과 차별적인 견해를 떨쳐버리지 못한 소승선적인 정신이다. 이미 유마경에서 유마힐이 사리불의 좌선을 비판하고 있고, 신회의 남종선이 북종선을 비판하고 있다. 대승선은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을 동시에 텅 비워버리고 초월하는 실천 정신이다. 흔히 한국불교에서 일부의 사람들이 교학을 던져버리고 선수행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하는 捨敎入禪이라는 주장은 소승적인 견해이다.11
부처가 되려고 좌선하는 마조도일에게 벽돌을 갈아보였던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의 충고와도 맥을 같이 하는데,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무심無心으로 생활하는 것을 <평상심시도>라고 본 것이다. 그럼 좌선하지도 않고 이루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도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수행해서 그곳에 이르지 않고서 어떻게 도를 알 수 있는가.
선가에서는 세상의 모든 일이 모두 도 아닌 일이 없다고 한다. 매일매일 전개되는 일상이 모두 부처의 지혜묘용이다. 그렇다면 노력하지 않아도 그대로 <평상심시도>다. 그러나 사실 하는 일 없이 무심히 생활하는 것이 말은 쉽지만 실재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실상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호하기까지 하다. 과연 그 경지는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다시 의혹에 빠져든다. 남전의 제자이며 ‘백척간두게百尺竿頭偈’로 유명한 장사경잠(長沙景岑, ?~868)에게 한 납자가 물었다.
“평상심이란 무엇입니까?”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
“그 뜻을 좀 더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더우면 부채질 하고 추우면 화롯불을 쬔다.”
물어도 물어도 의문은 끝이 없다. 임제가 ‘내 앞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그대들이 바로 조사와 부처인데, 이러한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밖에서 불법을 찾아 헤맨다[是爾目前用底 與祖佛不別 秖麼不信便向外求].’고 누누이 열변을 토해도 말이다.
조주의 의문에 남전은 말한다. 도는 아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그렇다고 모르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의도적인 생각을 갖고 찾는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도 아니요, 논리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린다고 해서 가려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참으로 생각 없는 도에 이르렀다면 허공처럼 텅 비고 툭 터져 있어 그런 의심 따위는 애당초 없을 것이라고. 참된 도는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에서 도에 통달한 사람을 만나면 절대로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路逢達道人 第一莫向道]12는 이유이다.
남전은 어떻게 해야 <도>를 알 수 있는가는 말하지 않고, 다만 도를 깨쳐 안 다음의 결과에 대해「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을 뛰어넘어 일체를 볼 수 있게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도>의 <초월성>을 암시한 말이다. 만일 <도>가 평상시의 마음 바로 그것이라면 이 평상심은 참으로 대단히 특별한 것임에 틀림없다.13
평범한 마음이 오히려 대단하다? 무문은 노래한다. (도에 이르면) 봄에는 온갖 꽃, 가을에는 달,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에는 하얀 눈이 내린다고. 깨달은 이에게나 깨닫지 못한 이에게나 자연 현상이야 똑같겠지만 그것을 대하는 마음은 판이하게 다르다. 자연 현상 뿐이겠는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세상만사 의혹도 근심도 없어진다.
여러분! 시간을 소중히 아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엉뚱한 옆길에서 분주하게 선을 배우고 도를 배운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의 이름이나 언어분자를 인정하고 집착하여,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하며, 선지식의 설법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천착하고 있다. 그르치지 말라.
(중략)
여러분! 또 중요한 것은 일상의 생활에서 이것저것 조작하고 흉내 내어 억측부리지 말고 평상심으로 사는 것이다. 요즘 좋고 나쁜 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출가인들이 있다. 그들은 있지도 않은 귀신이나 유령을 보았다고 헛소리하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면서,「야! 좋은 날이다. 혹은, 야! 비 오는 날이다.」라고 중얼거린다. 이러한 무리들은 모두 반드시 염라대왕 앞에서 뜨거운 쇳덩어리를 삼키는 과보의 고통을 받고, 시주의 빚을 갚게 될 날이 올 것이다.14
다행히도 조주는 남전의 말에 이내 깨달았고, 바로 숭악崇嶽의 유리단琉璃壇에 가서 계를 받고 돌아온다. 이로써 조주는 마조에서 남전, 조주로 이어지는 평상심시도의 심법을 계승하게 되었으며,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그의 모든 일상에 녹아들어가 조주의 정신과 육체가 되었다. 이때가 조주의 나이 18세 때로 이후 조주는 남전이 입적할 때까지 40여 년을 남전의 곁에 머문다.
어느 날 (조주가) 남전에게 물었다.
“있는 줄 아는 사람(知有底人)은 어디서 쉽니까?”
“산 밑에 소가 되느니라.”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지난밤 삼경에 달이 창에 훤하게 비추더라.”15
먼저 ‘지유저인知有底人’은 누구인가? 여기서 “知有”는 ‘有를 안다, 有를 깨닫는다, 있음을 깨닫는다.’16는 뜻이고, ‘궁극의 실체 혹은 순수 존재를 깨쳐 안다는 뜻’17이다. 그러므로 ‘知有底人, 있음을 아는 사람’은 도를 아는 사람, 불법을 아는 사람, 혹은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18 즉, <평상심시도>를 실현한 사람은 궁극에는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이 된다. 간단히 말해 깨달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뜻일 것이다. 이 질문에 남전은 ‘산 밑에 소가 된다.’고 대답한다.
보통 불가에서는 깨달으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다고들 한다. 혹자는 자유자재하여 원하면 다시 태어나고 원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도 한다. 사실 갔다 온 사람이 없으니 그 진위를 알 길은 없지만, 반면에 알 길이 없으니 모든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소가 된다고 했을까?
도를 아는 사람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까? 여기에 대하여 남전 스님은 사람들의 소가 된다고 말한다. 소는 주인을 위하여 묵묵히 일한다. 밭을 갈고, 수레를 끌어 물건을 나른다. 소는 말이 없고 힘들어도 불평이 없다. 불평이 없고 말이 없기 때문에 없는 것 같지만 없어서 안 될 것이 소이다.
공부가 깊어질수록 수행자는 한낱 평범한 소처럼 산다. 권위가 없고 형식이 없으며 따로 불교라는 테두리도 두지 않는다. 몇 명이나 도움을 받을지 생각하지도 않고 묵묵히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헌신할 뿐이다.19
사실 소면 어떻고 사람이면 어떻고 부처면 어떠랴. 또한 돌이면 어떻고 나무면 어떻고 물이면 어떠랴. 우주만유 두두물물이 전체가 화장세계요, 청정법신 비로자나인 것을.20
말인즉슨 여우로도 ‘풍류의 오백생[風流五百生]’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무문관』제2칙「百丈野狐백장야호」). 물론 깨달았다면 말이다. 깨달은 이에게는 봄이 오니 꽃이 필뿐이다! 조주는 바로 알아차리고 가르침에 감사하였고, 남전은 그런 제자를 보고 너무 기뻐 운치 있게 “지난밤 삼경에 달이 창에 밝았다”고 아름다운 시로 인가하고 있다. 자네는 이미 거기에 도달했네!
장사長沙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남전南泉이 세상을 뜬[遷化] 뒤에 어디로 가셨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동쪽 집의 나귀가 되고, 서쪽 집의 말이 되었느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타려면 타고 내리려면 내리라.”21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마조록馬祖錄』에는 <平常心是道>에 대한 마조의 그 유명한 설법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대중에게 설법하셨다.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물듦인가? 생사심, 즉 나고 죽는 마음으로 괜스레 만들어서 무언가를 하려하는 것 모두를 물듦이라 한다. 지금 당장 도를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 즉 평범한 마음이 바로 도이다. 무엇을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想이 없으며, 범부凡夫도 성인聖人도 없는 것이다.
경전에서 말한다.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현의 행도 아닌, 그것이 바로 보살행’이라고. 지금 하는 가고오고 앉거나 눕는 일상생활[行住坐臥]과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다루는 일[應機接物] 모두가 도이고, 도는 곧 법계法界이니 갠지스 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오묘한 작용 또한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할 수 있으며, 다함없는 법등法燈이라 말하였겠는가!
(중략)
근본은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러므로 새삼스레 도를 닦거나 좌선할 필요가 없다. 닦거나 앉지 않아도 지금 즉시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인 것이다. 이제 이 이치를 진실로 알았으면 모든 업을 짓지 말고 자기 분수에 맞게 일생을 보내라. 한 벌의 누더기로 앉으나 서나 항시 따르면, 계행戒行은 더욱 그 향기를 더하고 더욱 더 청정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깨닫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무엇이냐. 듣느라고 수고하였다. 몸조심하라.”22
도道에 대해『능가경楞伽經』『유마경維摩經』『금강경金剛經』『열반경涅槃經』등 경전들을 동원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핵심은 ‘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 않은[道不用脩 但莫汙染] 평범한 마음[平常心是道]이라는 것’과 ‘새삼스레 닦거나 좌선할 필요가 없다[不假脩道坐禪 不脩不坐]’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심법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선종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개념이 ‘심불기心不起’의 무심無心과 무념無念이다. 선종 초기 승조僧肇는 광범위하게 ‘유무有無’에 대해 논하였고, 달마는 ‘심불기心不起’의 벽관壁觀을, 그리고 3조 승찬(鑑智僧璨, ? ∼606)은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一心不生 萬法無咎]’23고 하였다. 그리고 3조 승찬과 4조 도신(四祖道信, 580~651)의 대화에서는 ‘무심無心’으로 표현된다.
無心은 5조 홍인(五祖弘忍, 602~675)에 이르면 ‘수심설守心說’로, 그리고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과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의 ‘무념無念’ 사상으로 발전하는데, 정중무상淨衆無相24 선사에 의해 ‘염불기念不起’의 ‘삼구설법三句說法’25으로도 이어진다. 다시 말해 무심, 무념(남종선南宗禪)이나 이념離念(북종선北宗禪) 등 생각을 제어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최근 들어 일본 승려 코이케 류노스케의『생각 버리기 연습』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현재에도 살아 숨 쉬고 있는 영원한 명제命題인 것이다.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직 차별하고 간택하는 분별심이 없으면 그대로가 도이다(至道無難 唯嫌揀擇)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평상심이란 근원적인 우리들의 청정한 본래의 청정심이며, 진여자성, 불성을 말한다. 조사선에서는 이러한 평상심을 번뇌망념이 없는 無心이라 하고,『동산록』에서는「도는 무심한 사람에 계합되고 사람은 무심해야 도를 이룬다(道無心合人 人無心合道)」라고 주장하고『완등록』에서도 「無心이 바로 道(無心是道)」라고도 설하고 있다.26
무심 ․ 무념 사상은 마조도일에 이르면 앞서의 관념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던지고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일상사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따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무념을 실천하는 <平常心是道>로 개념화한 것이다. 종래의 형이상학적인 논리나 신비에서 벗어나, 물 나르고 땔감을 운반하는 일상사에서 찾게 된 것이다. 실재로 일상에서 전적으로 무념일 수는 없겠지만, 생각을 최소화하고 번뇌煩惱 망념妄念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말하는 몰입(flow)27의 개념과도 일치한다.
그들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현실생활에 밀착해 있었다. 혜능이 고전적인 문자의 교양을 갖지 못했고, 땔나무를 팔아 생활을 꾸려나간 일이나 師匠의 아래에서 미천한 노동일에 종사했다고 말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시대의 선종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조의 가르침을 받은 재가의 거사인 龐蘊(?~815)은 “神通과 妙用, 모두 물을 짊어지고 땔나무를 운반하네.”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우주의 신비를 보는 것이다. 神足通이나 天眼通의 기적은 이제는 산중의 명상보다도 누추한 거리의 생활 속에 바로 존재한다.28
이후 <평상심시도>는 변용이 이루어져, 황벽희운(黃壁希運, ?∼850)은 “종일토록 모든 일에서 떠나지 않고 모든 경계에 미혹하지 않는 사람을 무사인無事人이라고 한다(『전심법요傳心法要』).”29거나 혹은 위산영우(僞山靈祐, 771~853)의 ‘허다한 나쁜 지견과 망상 습기가 없으면, 맑고 고요한 가을 물처럼 청정할 것이다. 맑고 잔잔하여 아무 할일도 없고 막힐 것도 없으리니, 그런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부르기도 하고 일 없는 사람[無事人]이라고도 한다.’30는 무위무사無爲無事의 사상으로 전개된다.
無事는 마음에 번뇌망념 쓸데없는 이것저것 사량분별 차별심이 없는 것. 즉 마음에 조작이나 작위성이 없고 본래심 그대로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臨濟錄』에는「無事」「無事人」「無事是貴人」「平常無事」「隨處無事」등이란 표현으로 많이 주장하고 있다.
승조의 작품으로 주장하는『보장론』에는「道는 無事해야 만이 古今 어느 세상이라도 존귀하고, 道는 無心해야만 일체의 만물이 원만하게 진행(구족)된다. 그러므로 道는 無相이며 無形이고, 無事, 無意, 無心인 것이다(唯道無事, 古今常貴, 唯道無心, 萬物圓備, 故道無相無形, 無事無意無心).」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조당집』제5권 덕산장에「그대들이 단지 마음에는 무사하게 하고 일에 있어서는 無心하게 하라. 이것이 텅 빈 가운데 묘한 작용이 있다(汝但無事於心, 無心於事, 乃虛而妙矣).」라고 설하고, 唐代의 선승들의 어록에 無事, 無心을 강조하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은 조사선의 실천정신을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31
‘무사인無事人’은 平常心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사인은 임제에 이르면 번뇌煩惱 망념妄念이 없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대자유인大自由人 “무위진인無位眞人” 또는 “무의도인無依道人” 으로 구체화 된다.32 진인眞人33이란『장자莊子』에서도 많이 보이는 도가道家의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예로부터 붓다Buddha의 번역어로도 쓰였는데, 무위진인이란 차별 없는 참사람으로, 지위나 단계 가계家系를 중시하던 당시 중국사회에서는 혁명적이며 매우 혁신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임제 당시 하북 지방에는 도교道敎가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의 귀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34
조주의 평상심平常心
조주는 마조와 남전의 <평상심시도>를 이어 받아 ‘도道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말라’고 지도하였다. 수행하는데 있어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말 것도 주문하였다. 마음은 닦아야 할 물건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그의 실재 일화들을 몇 개 거론해 본다.
어떤 이가 물었다.
“화상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道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말라’고 하신다는 데, 어떤 것이 오염시키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하였다.
“안팎을 점검(단속하고 가르친다)해야 한다.”
“스스로도 점검하십니까?”
“점검한다.”
“몸소 어떤 허물이 있어 점검하십니까?”
“자네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35
<평상심시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이냐? 조주는 안팎으로 검교檢校(대조하여 확인하다, 검사하여 대조하다)하라고 한다. 오염시키지 않으려면 쉼 없이 매일매일 열심히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 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고치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자 다시 묻는다. 그럼 스스로도 점검하느냐, 그리고 어떤 잘못이 있어서 점검하느냐고. 그러자 조주는 되묻는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냐고. 나는 지금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을 점검하고 있는데, 너는 네가 하고 있는 일을 점검하고 있는가. 남의 허물을 묻지 말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부터 파악하라.
육조 혜능의 선법은 깨달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닦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즉, 육조단경에서 나오는 오인돈수悟人頓修이다. 깨달으면 그 자체가 닦음도 마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수행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깨달은 자가 수행하는 것은 수행불행修行佛行이다. 부처의 행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육조 스님은 제자 법달에게 “네가 이제 깨달았으면 불행佛行을 수행하라.” 하고 분명하게 당부하였다.
여기 <조주록>에서도 조주 스님은 남전 스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100여세가 넘은 노화상이지만 아직도 점검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즉 돈오보림頓悟補任이다. 깨달은 자도 수행하지만 그 수행은 부처가 되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의 길을 잘 가려고 수행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현재 한국에는 이 선법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36
절에 가면 신발을 벗어놓는 마루 토방에 ‘조고각하照顧脚下’37라고 써 놓은 곳이 종종 있다. 발밑을 잘 살피라는 말이다. 신발을 벗을 때 제 자리에 잘 놓았는지, 나갈 때 바로 신을 수 있게 해 놓았는지 살피라는 말이다. 신발하나 벗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깨달음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 순간순간 점검하는 방법 밖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평상심입니까?”
“여우나 이리 같은 들짐승이다.”38
우리는 통상 ‘평상심은 선악시비 분별이 없는 고요한 마음이다. 선악시비로 마음이 들끓을 때는 평상심이 아니다. 아무 일이 없어 고요할 때가 평상심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조주는 여우나 이리 같은 들짐승 같은 것이라고 대답했을까?
평상심에 대해서 조주 스님은 여기서 확실하게 여우처럼 사량계교에 능하고, 늑대처럼 거칠고 이기적이며, 온갖 들짐승 같이 다듬어지지 않는 보통의 마음이 곧 평상심이라고 하였다. 조주 스님은 남전 스님에게 “평상심이 곧 도이다.”라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 조주 스님이 평상심을 이해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담이다.
사람이 비록 지금 마음이 거칠고 망상이 가득하다하여도 모두 진심眞心에서 나온 것이다. 마음은 그렇게 무한히 자유로운 변화를 짓는다. 따라서 분노라 하여도 부처의 마음에서 나온 작용이다. 슬픔이라고 하여도 부처의 마음에서 나온 작용이다. 계교모사라고 하여도 부처의 마음에서 나온 작용이다. 이 평상심이 바로 불교에서 지향하여 가는 도道의 경지인 것이다.
다만 스스로 부처인 것을 깨달은 자는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이것을 사용하지만, 깨닫지 못한 자는 어리석은 이기심을 위하여 사용될 뿐이다.39
사람은 보통 ‘평상심’하면 일상적인 마음, 인간 본래의 편안한 마음 상태를 떠올린다. 특히 공부한 스님이라면 마조가 말하는 평범한 마음, 즉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가 없고, 단상이 없으며, 범부도 성인도 없는’ 평상심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번뇌 망념이 없는 無心한 마음을 평상심이라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스님은 평상심은 근원적인 우리들의 청정한 본래의 청정심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주는 기대와는 달리 그런 선입견을 일시에 깨버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조작이고, 시비이고, 취사이고, 단상이다. 번뇌 망념이나 조작된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청정하고 조작 없는 행위도 “청정清淨”이라는 업장이 된다[所以有漏有為 無漏無為 為清淨業]40. 그래서 조주는 일갈한다. 평상심은 그런 것이 아니라 여우나 늑대나 들짐승 같은 것이라고.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없다고 대답한 것과 같은 구조이다.
한편 이렇게도 볼 수 있다. 평상심이란 선입견이 없는 본래면목의 청정한 경지이다. 생각이전의 경계, 들리면 들리는 대로 보이면 보이는 대로,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가 나타나고 한인이 오면 한인이 나타나는[胡來胡現 漢來漢現] 경지이다. 물론 그렇게 드러난 경지가 바로 <평상심시도>이다. 그러면 조주 선사가 왜 평상심을 ‘여우나 이리 같은 들짐승’ 이라고 했을까? 여우나 이리가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놈! 너를 보자 하니 여우나 늑대 같구나.”
선가에서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단도직입單刀直入, 요점이나 문제의 핵심에 곧바로 들어가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그르친다. 한 쪽으로 치우쳤어!” 조주는 모두가 일상으로 접하는 상식의 틀을 깨려는 의도로 그렇게 대답한 것은 아닐까? “다르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해!”
참고로 서양철학에 있어서는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기 때문에 계약이 필요하다고 본 사람이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이다. 그는 인간의 자연 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 (bellum omnium contra omnes)’, 서로 물어뜯는 이리떼와 같다고 하였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인간의 불평등은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사회체제에서 비롯된다고 하면서, 문명이 사악한 것이지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지 않다고 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동양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지 않는다.『중용中庸』은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天命之謂性], 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率性之謂道], 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修道之謂敎].’로 첫 장을 시작한다. 여기서 ‘천명天命’은 하늘의 명령이 아니다. 도올은 天命은 절대자연의 보편적 이치로, 절대자연이 나에게 명한다는 의미는 바로 인간의 본성은 천지자연과 끝없이 교섭하며 형성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본성은 근원적으로 선하다 악하다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규정성은 모두 종교적 구원론을 전제로 한 픽션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자사子思는 인간의 성性에 대한 모든 규정성을 거부했다. 인간의 성은 천지와의 끊임없는 교섭의 과정일 뿐이다.41
인간의 본성도 그렇지만 평상심 또한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면 어찌 평상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학승이 질문하였다.
“바르게 수행을 하는 사람도 귀신이 알아차립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알아차린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무언가 구하려는 데에 있다.”
학승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수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수행해야 해.”42
귀신이 알아차린다는 질문은 “참선수행과 저승사자”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이야기가 전하지만『직지심경直指心經』염관제안(鹽官齊安, ?∼842) 선사 장을 인용한다.
직지심경 149 /염관제안 선사 /저승사자도 못 찾다
염관 화상 회하에 사중의 일을 맡은 어떤 주사승主事僧이 있었다. 그가 임종하려할 때 저승사자가 와서 데려가려고 하였다. 그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사중의 일만 맡아서 하느라고 수행을 하지 못하였다. 7일간만 기다려 줄 수 있겠는가?” 저승사자가 말하였다. “기다리시오. 저승의 왕에게 여쭈어보겠습니다. 왕이 만약 허락하신다면 7일 후에 다시 올 것이고 허락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곧 돌아오리라.” 그 말을 마치고 돌아가서 7일 후에 비로소 돌아왔다. 그 스님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예컨대 우두 선사가 4조 도신 선사를 친견한 뒤에는 온갖 새들이 꽃을 물고 선사를 찾았으나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다.]43
항간에는 저승사자가 7일 만에 돌아와 스님을 찾았을 때, 스님이 분명히 방안에 앉아있었지만 저승사자는 스님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귀신은 사람의 형체를 보고 식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식별하는데, 스님이 무념무심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면 귀신은 즉시 알아차릴 텐데, 스님이 무념무심에 들어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저승사자가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논리이다.
조주는 이런 신비적인 논리 구조를 부수고 있다. 만일 귀신이 있었다면 무념무심의 상태라도 알아차리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르게 수행하던 안하던 알아차리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귀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저승사자가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함도 아니다. 귀신이니 저승사자니 하는 것과 수행은 무관하다. 그렇다고 죽지 않으려고 수행한다고 하면 도하고는 천리만리 멀어진다. 신통은 그런 것이 아니다.
14-11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
“그대들이 ‘부처님께서는 여섯 가지 신통이 있으시니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하는데, 여러 천신들과 신선과 아수라와 힘센 귀신들도 역시 신통이 있다. 이들도 마땅히 부처님이겠구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착각하지 말아라. 아수라들이 제석 천신들과 싸우다 지게 되면 팔만 사천의 권속들을 거느리고 연근 뿌리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하니, 이들도 성인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예를 든 것은 모두가 업의 신통이거나 의지한 신통들이다.”
“대저 부처님의 육신통44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물질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물질의 미혹함을 받지 않고, 소리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소리의 미혹함을 받지 않으며, 냄새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냄새의 미혹함을 받지 않고, 맛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맛의 미혹함을 받지 않는다. 감촉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감촉에 미혹함을 받지 않고, 법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법의 경계의 미혹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색․성․향․미․촉․법 이 여섯 가지가 모두 텅 비었음을 통달하고 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무의도인을 속박할 수 없다. 비록 오온의 번뇌로 이루어진 몸이지만 바로 이것이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地行神通]이니라.”45
학승은 말한다. “그렇다면 수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통도 생기지 않는데 수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선가에서는 수행하는 것을 ‘생사를 근본적으로 초월하여 자유자재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또한 그렇게 의도하는 순간 그르친다. 하물며 아무리 올바르게 수행한다고 하여도 부처가 되려고 수행한다면 그르치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주는 말한다. 그러나 그래도 수행하라고. 무문도 깨달았다고 해도 ‘다시 삼십년은 더 참구해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평하고 있지 않은가. 알았다면 이제 철저히 수행에 임해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것은 그때 가서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마조의 법은 남전을 거쳐 조주에서 꽃을 피우게 되는데, 조주는 남전의 가풍을 이어 받아 부드러운 말로 제자들을 제도하였다.『조주록趙州錄』에는 일상의 간결한 언어로 구성된 약 520여 가지 일화가 실려 있는데, 독특한 비유와 절제된 언어, 고준한 뜻이 담긴 최고의 어록으로 평가 받고 있다.
임제(臨濟義玄, ~867)의 할喝이나 덕산(德山宣鑑, 780~865)의 방棒에 비견하여 조주의 선풍禪風을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하는데, ‘구순피’는 입과 입술을 가리킨다. “조주趙州의 입술에선 광채光彩가 난다[趙州口脣皮上放光]”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툭툭 던지는 말의 선기禪機가 워낙 뛰어나 붙여진 이름으로, 그는 말로 수많은 수행자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다. 다만 불가사이하게도 그 직계에는 법을 이은 제자가 없다. 워낙 뛰어났기 때문일까?
조주는 이런 棒喝과 같은 어색하고 치사한 짓을 하지 않는다. 조주는 조용히 말로 타이를 뿐이다. 방할棒喝과 같은 물리적 수단에 호소하는 뭇 선사들의 단수보단 역시 조용한 조주의 위트가 윗길이다.46
II. 사설
국제도시로서 번영을 구가하던 당唐나라는 두 번의 큰 전란, 즉 절도사 안록산과 그의 부장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安史의 난亂(755∼763)과 전국을 전장 속으로 몰아넣었던 농민반란 황소黃巢의 난(874∼884)을 겪으면서 서서히 몰락한다. 특히 안사의 난 이후 잦은 민란으로 극심한 혼란이 야기되었고 사회 불안이 가중되어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반대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새로운 조치나 제도들이 도입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 새로운 변혁의 시대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폐쇄적인 귀족사회가 허물어지고, 노예나 소작인의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비단과 면포가 교환수단이던 실물경제가 화폐경제로 전환됨에 따라 상공업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고, 문학, 음악, 예술 면에서도 귀족풍에서 서민풍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이때는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를 비롯하여 산문의 한유, 유종원, 서도의 구양순, 안진경, 그리고 송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의 주희,『자치통감』의 사마광, 구양수, 소동파 등 수많은 인물들이 나와 과히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다. 8세기 후반에서 10세기에 이르는 당말, 오대, 송초의 시기는 당송변혁이라고 부를 만큼 혁명적인 시대였다.
불교계에서도 변혁이 이루어져 수隋에서 초당初唐에 이르는 동안 성립된 학파 불교가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따라 실천불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47 사상적 ․ 교단적 재편성이 이루어지고, 종래의 귀족불교에서 서민불교로, 상층으로부터 중하층으로, 수도권으로부터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한마디로 말하면 6~7 세기 이전의 중국불교는 인간의 깊은 악과 번뇌를 응시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다. 그러나 8 세기에 들어오면서 중국불교의 성격은 크게 변한다. 그 이후의 불교는 화엄華嚴과 선禪을 바탕으로 강력한 불성찬미佛性讚美와 함께 번쇄한 이론적 논의를 거부하고, 오직 인간존재의 심층을 파고 들어간 선불교는 인간존재의 절대적인 긍정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의 화엄과 선은 인도산印度産의 불교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정리와 중국적인 가치기분을 설정해 주는 동시에 불교의 긍정적인 인간관을 깊이 보여 주는 것이었다.48
종래의 수도권 중심의 고전적인 불교가 쇠퇴하고, 사람들의 생활과 밀착한 현실적인 새로운 종교가 일어난다. 예컨대 새로이 인도로부터 전해진 밀교가 전통불교의 양식을 어지럽게 다시 물들이는가 하면, 집단에 의한 소리를 내는 염불을 중심으로 하여 일반 민중을 지반으로 하는 정토신앙이 각지에서 토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49
이렇게 된 데에는 안사의 난이 있고 80여년이 지나 일어난 대규모의 회창폐불會昌廢佛(845∼847) 사건도 한 몫을 하게 되는데, 회창폐불은 당 무종武宗이 도사 조귀진趙歸眞의 말을 듣고 일으킨 대대적인 불교 탄압사건이다. 파괴된 사원이 약 4만5천에 이르고 환속된 승려는 26만 여명에 달했다 하니, 도시 지역에 뿌리를 두었던 교종계열의 종파들은 이 법난法難50을 비껴가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보면 보령 성주사聖住寺 성주산문을 일으킨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梁도 유학중이던 회창會昌 5년(845) 외국 승려의 귀국 명령을 받고 돌아와야 했고,『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體行記』로 유명한 일본 승려 엔닌(圓仁, 円仁, 794~864)도 환속 명령을 받고 귀국길에 오른 내용이 그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와중에 도시 불교가 아닌 산악 불교의 성격을 지닌 선종만이 그 법맥法脈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선종은 교학을 중시하는 다른 종파의 쇠퇴를 틈타 오히려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혁신적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은 것이 조계의 혜능을 조사로 하는 남종선이며, 그 운동의 주력은 사천 출신의 마조의 제자들이었다.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의 폐불정책閉佛政策으로 인한 교단적 ․ 경제적 수난은 불교교단의 붕괴에서 오는 뼈저린 종교적 ․ 사회적 박탈감을 승려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시대의 문제는「정법正法이란 무엇인가」라는 체제 초극적인 반성이었으며 선불교는 그 체제 초극의 독자적인 체험과 역사적 배경으로 주체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51
이 시기는 조주나 임제가 살다간 시기와도 맞물리는데, 당대 선종의 거목이었던 이들이 폐불 사건에도 불구하고 계속 세력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지리적은 요건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제가 활약하였던 곳은 하북지방인 하북성河北省 진주鎭州(후일 진정부眞定府로, 지금은 정정현正定縣)였고, 조주가 주석하였던 곳도 하북성河北省 조주趙州 관음원觀音院(지금의 조현趙縣 백림선사柏林禪寺)으로 이들 지역은 현재 불과 1시간 거리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원래 토착적이고 민중적인 고승들이 활동한 유서 깊은 지역으로, 위진魏晋 때에는 불도징(佛圖澄, 232~348), 도안(道安, 312~385)이 활약하였고, 후에는 신행(信行, 540~594)이 활동하였던 곳이다. 안사의 난의 주역인 안록산과 사사명 등 역신逆臣들이 나온 지역이기도 한데, 이를 보면 그 성향이 애초에 중앙하고는 달랐다. 부연하면 이들이 활동한 하북河北 지방은 불교가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면서 파불破佛의 여파가 비껴간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색외호족塞外胡族 세력의 거점이었던 하북의 진주 지방은, 회창會昌의 파불破佛이 행해지던 때에도 여기서 만은 철저한 파불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중략) 당시 이 지역의 유력자들은 불교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중앙정부의 억압정책에 대한 적대적 태도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중략)
호족이 지배하던 하북 지역에서 두타행頭陀行의 실천으로 출발했던 초기의 중국선은 중국의 학파불교가 빠져들었던 체제교학에의 타성을 깨뜨리고 개혁을 실행했었던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그들은 왕조나 귀족, 부호들로부터 재정적인 원조나 정치상의 보호를 기대하지 않는 종교적 편력자로서 삶을 당당하게 꾸려 나갔으며, 늘 하층의 민중들과 접촉하고 민중의 정신세계 속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사실 왕실, 귀족과 같은 지식인들과의 교제를 떠나서 항상 하층의 민중 측에 서 있었던 초기의 선승들은 귀족불교의 철학자들이 표방하는 번쇄한 교리체제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관제불교의 학승들이 해내지 못했던 민중들을 위한 설법을 몸소 해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선적 개안開眼을 바탕으로 일상의 구어口語나 속어로써 당당히 불법을 설파해 냈으며 본래 차별 없는 참사람의 종교, 선禪을 실천해 나간 것이다.52
임제의 임제종臨濟宗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마조의 <평상심시도>의 가르침은 남전, 황벽 등으로 전해져, 한 맥은 마조도일→백장회해→황벽희운→임제의현(임제종)으로, 다른 한 맥은 남전보원→조주종심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번성하게 된 데에는 지리적인 이점도 있었는데, 두 맥 중에 <평상심시도>를 이론화하는데 성공한 이는 임제이다.
중국불교는 당當 무종武宗의 회창폐불會昌廢佛 이후 경전經典과 문물의 파괴가 몹시 심해짐으로 말미암아 각 종파가 모두 쇠퇴하게 되었고, 오직 많은 경전과 의궤儀軌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선종만이 법맥法脈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선종은 당 말기부터 오대五代 말기에 다시 “하나의 꽃에 다섯 잎이 펼쳐진 것[一花開五葉]”과 같은 ‘오조분등五祖分燈’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위앙종潙仰宗은 당唐말에 창립하여 오대五代까지 번영하였고, 가장 먼저 개종하여 가장 일찍 쇠망하였다. 전후가 겨우 4대代이며, 앙산혜적仰山慧寂 이후의 법계法系가 분명하지 않다. 법안法眼은 다섯 종파 가운데 창립이 가장 늦으며, 오대 말에서 송宋초까지 흥성하고 송 중엽에 이르러 쇠망하였다. 운문雲門은 오대五代에 발흥하여, 송초에 크게 떨쳤으며, 설두중현雪竇重顯에 이르렀을 때 종파의 위세가 가장 성하였다. 조동종曹洞宗은 운거도응雲居道膺 이후부터 추세가 쇠미하다가 부용도해芙蓉道楷 이후 종파의 위세를 다시 떨치고, 단하자순丹霞子淳 이후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나와 ‘묵조선黙照禪’을 제창하였는데, 이것이 조송趙宋 일대 선학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임제臨濟는 다섯 종파 가운데 전해져 내려오는 기간이 가장 길며 영향도 가장 커서 “임천하臨天下”라는 말까지도 있었다.
임제종은 석상초원石霜楚圓 아래로부터 황룡黃龍과 양기楊岐 두 계열이 갈라져 나와 송 중엽에 크게 성하였고, 불과극근佛果克勤에 이른 이후 대혜종고大慧宗杲가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하여 일대를 풍미하였고, 후세에 대한 영향이 가장 깊고 크다.53
임제는『임제록』에서 그때까지 거론된 선종의 이론들을 정리하고 개념화하고 있는데, 마조의 <평상심시도>는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 구체화된다. 무위진인이란 위계位階나 가문家門에 구애 받지 않는 차별 없는 참사람으로, 당시로서는 과히 혁명적인 사상이다. 부처도 다름 아닌 사람이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 또한 같다는 평등사상으로 그 핵심에는 인간[人]이 있다. 빈부귀천, 노소남녀, 유식무식, 동서고금, 그 어떤 사람들도 모두 평등하다는 선언이다. 경계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있으나 사람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境即萬般差別 人即不別].54 그의 자유정신은 거기서 출발한다.
1) 혜능(慧能 638~713) : 견성見性을 역설한다.「본성이 바로 불佛이니 성性을 여의고 달리 불은 없다[本性是佛 離性無別佛]」「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깨닫고 부처를 이루게 한다[直指人心 見性成佛]」등의 본체론적 의미를 갖는「성性」자를 많이 사용한다. 혜능선慧能禪의 가장 큰 특색은 인간의 본마음을 청정淸淨하다고 설파하는 데 있다. 청정이란 바로 공空이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본래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중략)
「선지식들이여, 우리의 이법문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근본으로 한다. 잘못 생각하여 선정과 지혜가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선정과 지혜는 한 몸이며 둘이 아니다. 선정은 공 지혜의 주체요, 지혜는 곧 선정의 작용이다.」(돈황본《육조단경》)
2) 신회(神會, 670~?) ․ 종밀(宗密, 780~841) :「지知의 한 글자는 모든 묘용妙用의 문이다[知之一字衆妙之門]」와 같이「지知」자를 강조한다.「성性」자보다도 인식론적 동태성動態性이 강조되고 있다.
3) 마조(馬祖, 709~788) ․ 백장(百丈, 749~814) ․ 황벽(黃壁, ?∼866) :「즉심즉불卽心卽佛」「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역설한다.「성性」자 보다도 작용의 뜻이 있는「심心」자를 사용한다.
4) 임제의현 (臨濟義玄, ~867) :「인人」자를 많이 사용한다. 성性, 지知, 심心보다는 구체적이고 행동적이다. 임제의 스승 황벽의 즉심즉불卽心卽佛은 임제에 이르러 인人이 되는 것이다. 달마로부터 시작된「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선불교의 슬로건은 고전古典이나 범람하는 잉크 문화에 압살당하지 않고 각자의 마음을 근본으로 하는 자유정신의 표현이다.55
마조 ․ 백장 ․ 황벽의 <平常心是道>의 “心”이 임제에 오면 “人”으로 바뀌는데, 임제는 평상심을 실천하는 사람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임제는 거기에도 묶이지 않았다. 스스로 그것마저 깨버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대 자유인인 ‘무의도인無依道人’이었던 것이다.
무위진인이라니, 그 무슨 마른 똥 막대기냐[無位眞人 是什麼乾屎橛]!
III. 참구
진리라고 하면 심오深奧하여 우리 범부로서는 엄두도 못 낼 정도의 미묘하고 난사의難思議한 것으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남전은 ‘평상심’을 진리라고 하였다.56 그러나 막상 평상심이라고 하고 보니 그 실체가 모호하다. 그래서 평상심시도의 경계는 쉬우면서도 어렵다. 일상생활 모든 것이 도 아닌 것이 없겠지만 그래서 경계로 제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많은 수행과 실천의 과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무문이 삼십년은 더 참구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꾸준히 게으르지 말고 평상심(?)을 실천하면서 익숙해지기를 기다려 볼 일이다.
IV. 감상
산은 산! 물은 물!
모두 제 자리에 있다.
그뿐이다.
비가 내리더니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다.
팅!
풍경소리
풍경소리는 어디서 났는가?
V. 참고한 책과 글
1) ‘趣向’은 “취하여 향하다”란 뜻의 複合動詞로 “무언가를 지향해 가다”이다. 즉 일정한 목표를 정하여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는 이상주의적 행위를 말한다. 단지 이상주의적 노력은 본래 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秋月龍珉 · 秋月眞人 著, 慧謜 譯, 『선어록 읽는 방법』 p. 132.
2) 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번뇌망심으로 지해知解의 분별적 착각이고, 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지혜작용이 없는 멍청한 것이다. 무기無記는 범어 avyakrta의 한역으로, 붓다가 외도로부터 14가지의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받고 침묵으로 대답하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단순히 무자각無自覺으로 멍청하여 지혜의 작용이 없는 백지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이다.『구사론』제2권에「무기」를, 본성은 善惡 상대의 言句로 기록할 수가 없다. 言詮不及이기에 無記라고 한다고 함. (무문혜개無門慧開, 정성본鄭性本 역주譯註,『무문관無門關』 p. 179) ‘망각妄覺’은 반야(prajñā)의 지혜인 무분별지가 아닌 분별지(vijñāna)를 말하고, ‘무기無記’는 본래 善도 아니고 不善도 아니어서 記錄할 수 없다는 뜻이다.
3) ‘분소불하分疎不下’의 分은 나누는 것이고, 疎는 疏와 같이 물을 유통시킨다는 뜻으로, 分疎는 변명辨明하고 변해辨解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分疎不下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해명할 수도 없다는 의미이다.
4)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는 당대唐代 남악하南岳下 선승으로 성은 왕王씨다. 하남성河南省 정주鄭州 신정新鄭사람으로, 지덕至德 2년(757) 대괴산大槐山 대혜大慧에게 출가하였고, 대력大曆 12년(777, 30세) 숭악嵩岳에 가서 수구受具하였다. 처음에는 성상性相, 삼론三論 등 교학을 공부하다가, 현기玄機는 경론經論 밖에 있다는 의지意旨로 마조문하에 참예하여 법을 이었다. 정원貞元 11년(795) 안휘성安徽省 지양池陽의 남전산南泉山에 선원을 짓고 스스로 ‘왕노사王老師’라 칭하였다. 30년간 하산하지 않고 논밭을 일구며 住하니, 학인이 항상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태화太和 초년에 전태수前太守 육긍陸亘의 귀의를 받았고, 조주종심趙州從諗, 장사경잠長沙景岑, 자호이종子湖利蹤 등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태화 8년 12월, 87세로 시적示寂하였다. 남전은 학인을 접화接化하는 방편어方便語가 뛰어나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수고우南泉水牯牛> <남전목단南泉牧丹> 등 많은 공안들을 남겼다. 남전 문하에는, 28세 때 유학留學길에 올랐던 신라승新羅僧 철감도윤(澈鑒道允, 797~868) 선사가 있었는데, 남전이 여러 제자들 앞에서 “내 가르침의 핵심核心은 해동海東으로 돌아간다(오종법인吾宗法印 귀동국의歸東國矣)”고 언명言明했을 정도로 몹시 아꼈다고 전한다. (『송고승전』11,『조당집』16,『전등록』8,『회요』4,『회원』3)
5)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은 당대唐代 선사로 호는 조주, 법명은 종심, 속성은 학씨郝氏다. 조주曹州 학향郝鄕(지금의 산동성山東省 하택荷澤) 사람이다. 어려서 고향 용흥사龍興寺로 출가하였으며, 숭산 소림사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안휘성安徽省 귀지현 남전산南泉山 남전보원 문하에 입문하여 그의 법인 홍주종洪州宗을 이었다. 남전 사후 지방을 순례하며 여러 고승을 찾아 다니다, 80세 때부터 조주성趙州城 동쪽 관음원觀音院에 머물러 호를 조주라 하였다. 검소한 생활을 하며 시주를 권하는 일이 없어, 고불古佛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897년 120세로 입적할 때에는 제자들에게 사리를 수습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시호는 진제眞際이고 탑호는 <진제선사광조지탑眞際禪師光祖之塔>이다. 송대에 형성된 선종오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화두를 많이 남겨 후대 선승들의 수행 과제가 되었다. 그의 어록『조주록趙州錄』은 선가에서 널리 참구되고 있으며,『벽암록』에 전하는 화두 100개 가운데 12개가 조주의 것이다. 그 중 <조주무자趙州無字>와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가 특히 유명하다.『조주진제선사어록병행장』『경덕전등록』『조당집』『속고승전』등에 생애와 일화가 전한다.
6) 従諗禪師曹州郝鄉人也。姓郝氏。童稚於本州扈通院従師披剃。未納戒,便抵池陽參南泉。偃息而問曰: “近離什麽處。” 師曰: “近離瑞像。” 曰: “還見立瑞像麽。” 師曰: “不見立瑞像,只見臥如來。” 曰: “汝是有主沙彌,無主沙彌。” 師曰: “有主沙彌。” 曰: “主在什麽處。” 師曰: “仲冬嚴寒,伏惟和尚尊體萬福。” 南泉器之而許入室。齋 (『傳燈錄』 卷十「趙州従諗」)
7)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 128.
8) 무불선원無不禪院 선원장禪院長 석우石雨 스님의 <조주록 강의>에서 인용.
9) 한형조 지음,『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p. 119.
10)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임제어록臨濟語錄』 pp. 158~159.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 670~)의 말이다.
11)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 178.
12)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임제어록臨濟語錄』 p. 165.
13)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 129.
14)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임제어록臨濟語錄』 pp. 99~100.
15) 異日問南泉: “知有底人向什麽處休歇。” 南泉雲:“山下作牛去。” 師雲: “謝指示。” 南泉雲:“昨夜三更月到窗。” 知
(『傳燈錄』 卷十「趙州従諗」).
16) 도올 김용옥 지음,『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 p. 86. 도올은 ‘知有底人’에 대해 ‘“知有”란 무엇인가? 有를 안다, 有를 깨닫는다,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조주가 말하는 知有란 존재에 대한 단순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如如한 모습에 대한 궁극적 깨달음이다. 다시 말해서 知無, 무를 깨닫는 것은 쉽다. 어설픈 선승들의 객끼가 증명하듯, 무를 깨닫고 무를 운운하고 무를 실천 하기는 쉽다. 허나 有를 깨닫고 유를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知有! 그것은 知無를 초월하는 것이요, 理事無碍法界를 초월한 事事無碍法界인 것이다. 그것은 평상심의 구극적 표현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한편 선가에서는 知無와 知有는 그렇게 차별의 대상은 아니다. 無나 有처럼, 또는 노자가 ‘有無相生’이라고 한 것처럼 동등하여 하등의 차이가 없다.
17) 오경웅吳經熊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 129.
18) 무불선원無不禪院 선원장禪院長 석우石雨 스님의 <조주록 강의>에서 인용.
19) 무불선원無不禪院 선원장禪院長 석우石雨 스님의 <조주록 강의>에서 인용.
20) 무비스님, 동국역경원장, 무비스님의『直指』「남전보원 선사 ④ -죽은 후 검은 소가 되다」.
21)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5』「497. 천화遷化」 p. 40. 長沙因僧門, 南泉遷化, 向什麽處去. 師云, 東家作驢, 西家作馬. 僧云, 未審意旨如何. 師云, 要騎便騎 要下便下.
22) 示衆云, 道不用脩, 但莫汙染。何為汙染。但有生死心, 造作趨向, 皆是汙染。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經云, 非凡夫行, 非聖賢行, 是菩薩行。只如今行住坐臥, 應機接物, 盡是道。道即是法界, 乃至河沙玅用, 不出法界。若不然者, 云何言心地法門, 云何言無盡燈。(一切法皆是心法, 一切名皆是心名。萬法皆從心生, 心為萬法之根本。經云, 識心達本源, 故號為沙門。名等義等, 一切諸法皆等, 純一無雜。) 譬如月影有若, 真月無若干。諸源水有若干, 水性無若干。森羅萬象有若干, 虛空無若干。說道理有若干, 無礙慧無若干。種種成立, 皆由一心也。建立亦得, 掃蕩亦得。盡是玅用, 盡是自家。非離真而有立處, 立處即真, 盡是自家體。若不然者, 更是何人。(一切法皆是佛法, 諸法即是解脫, 解脫者即是真如, 諸法不出於真如。行住坐臥悉是不思議用, 不待時節。經云, 在在處處, 則為有佛。佛是能仁。有智慧善機性。能破一切眾生疑網。出離有無等縛。凡聖情盡。人法俱空。轉無等倫。超於數量。所作無礙。事理雙通。如天起雲。忽有還無。不留礙跡。猶如畫水成文。不生不滅。是大寂滅。在纏名如來藏。出纏名淨法身。法身無窮。體無增減。能大能小。能方能圓。應物現形。如水中月。滔滔運用。不立根栽。不盡有為。不住無為。有為是無為家用。無為是有為家依。不住於依。故云如空無所依。心生滅義。心真如義。心真如者。譬如明鏡照像。鏡喻於心。像喻諸法。若心取法即涉外。因緣即是生滅義。不取諸法。即是真如義。聲聞聞見佛性。菩薩眼見佛性。了達無二。名平等性。性無有異。用則不同。在迷為識。在悟為智。順理為悟。順事為迷。迷即迷自家本心。悟即悟自家本性。一悟永悟。不復更迷。如日出時不合於暗。智慧日出。不與煩惱暗俱。了心及境界。妄想即不生。妄想既不生。即是無生法忍。) 本有今有, 不假脩道坐禪。不脩不坐, 即是如來清淨禪。如今若見此理真正, 不造諸業, 隨分過生。一衣一衲, 坐起相隨。戒行增薰, 積於淨業。但能如是, 何慮不通。久立諸人珍重。)『江西馬祖道一禪師語錄』.
23) 一心不生 萬法無咎,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신심명信心銘』).『신심명』은 중국 선종禪宗의 제3대 조사인 감지선사鑑智禪師 승찬(僧璨, ?~606)이 지은 글로 146구句 584자字로 되어 있다. 사언절구四言絶句의 시문詩文으로 73개의 대구對句, 36게송偈頌 2구句로 구성된 이 글은 선禪의 요체要諦가 잘 나타나 있어 중국에 불법佛法이 전래된 이후 나타난 경문經文 가운데 ‘최고의 문자文字’라는 평가를 받는다. (네이버 백과사전)
24)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는 한국의 승려 중 최초로 중국에서 선禪을 배워 중국인을 교화한 고승이다. 성은 김씨. 호는 송계松溪. 성덕왕 때 막내 여동생의 출가에 감화를 받아 군남사郡南寺에서 중이 된 뒤, 728년(성덕왕 27) 당나라로 건너갔다. 선정사禪定寺에서 수도를 하고, 사천성四川省 자중資中으로 가서 지선智詵에게 선을 배웠다. 그 뒤 처적處寂을 찾아가서 선과 두타행頭陀行을 배운 뒤, 그로부터 무상이라는 이름을 얻고 마납구조의磨納九條衣를 물려받았다. 그 뒤 정중사淨衆寺, 대자사大慈寺, 보리사菩提寺, 영국사寧國寺 등을 짓고 정중사에 머물렀는데, 그 이름을 따서 그의 선종 일파를 정중종淨衆宗이라 부른다. 정중종은 남종선南宗禪의 일종으로 염불선을 주장했는데, 특히 무상은 독자적으로 인성염불引聲念佛을 주장했다.『송고승전 宋高僧傳』의 무상전에는 그가 신라 국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기록과 함께 그에 대한 신이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산 속에서 5일간 입정 좌선한 이야기, 맹수들에게 몸을 보시했으나 맹수가 머리부터 발까지 냄새만 맡고 간 일, 범과의 생활 등이 전하고 있다. (Daum 백과사전)
25) 무상의 삼구란 무억(無憶, 기억을 없앰), 무념(無念, 망념을 없앰), 막망(莫忘, 망각하지 않음)을 가리키는데, 마음에 지난 일들을 추억하지 않는 것이 무억이요, 미래의 영고성쇠에 염려하지 않음이 무념이며, 항상 지혜와 상응하여 어지럽지 않음이 막망이다.
26)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p. 177~178.
27)『몰입, FLOW』: ‘행복 추구’라는 인류의 오래된 문제를 흥미롭게 고찰하는 책.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열정에 관한 독창적인 의견을 들려주며, 인간 본성에 관한 날카로운 영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것은 행위에 깊게 몰입하여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는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될 때를 일컫는 심리적 상태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태를 플로우라 이름 붙이며, 즐거움에 몰입하는 것에 대한 열정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쳐낸다. 또한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저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학문에 대한 깊은 열정과 활발한 저술활동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이다. 40년 동안 시카고대학교 심리학/교육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9년 현재 클레어몬트 대학교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원 심리학 교수이자 삶의 질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긍정의 심리학(Positive Psychology)’ 분야의 선구적 학자라는 평가와 더불어 심리학과 경영학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심리학자로도 꼽힌다. 수개 국어에 능통해 소설과 시 등의 번역 작업과 함께 『뉴요커(New Yorker)』에 단편소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일찍이 창조성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그는 창조적인 사람의 3가지 요건으로 전문지식과 창의적 사고, 몰입을 제시한다. 아르키메데스의 창조적 발견 저변에는 그의 물리지식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창조 또한 지식이 기반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고 말하며, 떨어지는 사과로 중력 개념을 이끌어낸 뉴턴처럼 같은 사물을 다르게 보는 '창의적' 사고를 강조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일에 대한 ‘몰입’이 창조를 완성시킨다고 역설한다. 그의 이런 확신은 창조가 선천적인 요인보다는 스스로의 의지에 많은 부분이 좌우된다는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자신이 창조적이라고 믿으면 창조성이 발휘되고, 그렇지 않다고 믿으면 창조성은 위축된다. 이와 관련한 그의 연구업적은 많은 저서로 출간되었으며, 학계 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주목받고 있다. (출판사 책과 저자 소개)
28) 야나기다 세이잔/추만호·안영길 옮김,『선의 사상과 역사』 p. 124.
29)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임제어록臨濟語錄』 p. 81.
30) 선림고경총서 13, 백련선서간행회 편,『위앙록潙仰錄』 p. 25.
31)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임제어록臨濟語錄』 pp. 109~110.
32)『임제록臨濟錄』에 無位眞人은 4회 無依道人은 5회 보인다.
33) 『장자莊子』「大宗師」편에 나오는 진인은 다음과 같다.
3. 그러므로 진인(眞人,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있어야 참된 앎이 있습니다. 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의 진인은 모자란다고 억지 부리지 않고, 이루어도 우쭐거리지 않고, 무엇을 하려고 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실수를 해도 후회하지 않고, 일이 잘 되어도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어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앎이 높이 올라 도(道)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옛날의 진인(眞人)은 잠자도 꿈꾸지 않고, 깨어나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맛있는 것을 찾지 않았고, 숨을 쉬어도 아주 깊이 쉬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목구멍으로 숨을 쉬지만, 진인은 발꿈치로 숨을 쉬었습니다. 외적 조건에 굴복한 사람은 그 목에서 나오는 말이 토하는 소리 같습니다. 여러 욕망에 깊이 탐닉한 사람은 하늘의 비밀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5. 옛날의 진인(眞人)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습니다.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연히 갔다가 의연히 돌아올 뿐입니다. 그 시원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끝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다가, 잊어버린 채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를 일러 마음으로 도를 해치는 일이 없고, 사람의 일로 하늘이 하는 일에 간섭하려 하지 않음이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인(眞人)입니다.
6. 이런 사람은 마음이 비고, 모습이 잔잔하고, 이마가 넓었습니다. 그 시원하기가 가을 같고, 훈훈하기가 봄 같았습니다. 기쁨과 노여움이 계절의 흐름같이 자연스럽고, 모든 사물과 어울리므로 그 끝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오강남 풀이,『장자』 pp. 264~265) 且有眞人而後有眞知. 何謂眞人. 古之眞人, 不逆寡, 不雄成, 不謨士. 若然者, 過而弗悔, 當而不自得也. 若然者, 登高不慄, 入水不濡, 入火不熱. 是知之, 能登假於道者也. 若此古之眞人, 其寢不夢, 其覺無憂, 其食不甘, 其息深深. 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 屈服者,其嗌言若哇, 其耆欲深者, 其天機淺.古之眞人, 不知說生, 不知惡死, 其出不訢, 其入不距. 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不忘其所始, 不求其所終. 受而喜之, 忘而復之, 是之謂不以心損道. 不以人助天, 是之謂眞人. 若然者, 其心志, 其容寂, 其顙頯, 凄然似秋, 煖然似春, 喜怒通四時, 與物有宜而莫知其極.
34) 야나기다 세이잔/一指 옮김,『임제록』 p. 67.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임제어록臨濟語錄』 p. 39.
35) 問: “和尙有言, 道不屬修, 但莫染汚, 如何是不染汚。” 師云: “檢校內外。” 云: “還自檢校也無。” 師云: “檢校。” 云: “自己有什麽過檢校。” 師云: “你有什麽事。”
36) 무불선원無不禪院 선원장禪院長 석우石雨 스님의 <조주록 강의>에서 인용.
37) ‘조고각하照顧脚下’는 <삼불야화三佛夜話> 라는 선화禪話에 나온다, 중국 송나라 때 오조법연(五祖法演, ? ~1104) 선사 문하에 삼불三佛이라는 세 분의 제자가 있었다. 불감혜근(佛鑑慧懃, 1059∼1117), 불과원오(佛果圓悟, 1063~1125), 불안청원(佛眼淸遠, 1067~1120) 등이 그들이다. 어느 날 오조와 세 제자가 밤길을 멀리 갔다가 오는 길에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이 바람이 세차게 불자 불이 꺼지고 말았다. 어둠을 밝혀 주었던 등불이 꺼지자 칠흑같이 캄캄해서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때 법연이 세 제자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자 불감혜근은 ‘채색 바람이 붉게 물든 노을에 춤춘다[彩風舞丹宵]’고 대답하였고, 불안청원은 ‘쇠 뱀이 옛길을 건너가네(鐵蛇橫古路)’라고 대답하였다, 마지막으로 불과원오는 ‘발밑을 잘 살피라[照顧脚下]’고 하였다.
38) 問: “如何是平常心。” 師云: “狐狼野干是。”
39) 무불선원無不禪院 선원장禪院長 석우石雨 스님의 <조주록 강의>에서 인용.
40)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임제어록臨濟語錄』 p. 158.
41) EBS 기획특강, 도올 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 제3강 천명天命이란 무엇인가?」. 자사子思는 공자의 손자이며『중용』의 저자이다. 서양은 불변의 절대성의 추구로부터 인간본성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인간본성이 악하다는 전제에서 근대사회로 이어지는 사회계약설이 나온 것과는 달리, 동양에는 불변이란 개념이 없다. 현상을 넘는, 현상과 구별되는 존재도 세계도 없다. 그러므로 도올은 ‘天命’을 하늘의 명이 아닌 천지자연의 명이라고 보았다. 인간 본성(性)은 천지자연과 늘 상호 교섭하는 과정에 놓여있어 변화하면서 그 안에서 항상성(인격)이 유지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性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만들어 가는 것이다.
42) 問: “正修行邸人, 莫被鬼神測得也無。” 師云: “測得。” 學雲: “過在什麽處。” 師云: “過在覓處。” 學云: “與麽卽不修行。” 師云: “修行。”
43) 무비스님의 직지심경 해설에서 인용.『직지심경 直指心經』「149 염관제안 선사, 저승사자도 못 찾다.」 鹽官和尙 會下에 有一主事僧이 將死할새 鬼使가 來取어늘 僧이 告云호대 某甲이 身爲主事하야 未暇修行하니 乞容七日得不아 鬼使曰待爲白王하야 王이 若許之면 則七日後來하고 不許則須臾便來리라 言訖에 去하야 至七日後에 方來하야 覓其僧하야 不得見하니라[如云 牛頭가 見四祖後에 百鳥가 含花覓不得 一般이라 /백운]
44) 육통六通은 여섯 가지 신비한 능력이다. 신족통神足通은 어느 장소든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능력, 천이통天耳通은 어느 곳의 소리든 들을 수 있는 능력, 타심통他心通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이해하는 능력, 숙명통宿命通은 전생의 운명을 아는 능력, 천안통天眼通은 내세를 투시하여 보는 능력, 누진통漏盡通은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켜 수 있는 능력이다. 앞 5통五通까지는 제천신선諸天神仙도 얻을 수 있지만 누진통은 붓다와 같은 완전한 각자覺者에게만 가능하다고 한다.
45)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14-11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 你道호대 佛有六通하야 是不可思議라하니, 一切諸天과 神仙阿修羅와 大力鬼도 亦有神通하니 應是佛否아. 道流야 莫錯하라 祇如阿修羅가 與天帝釋戰하야 戰敗에 領八萬四千眷屬하고 入藕絲孔中藏하니 莫是聖否아. 如山僧所擧는 皆是業通依通이니라. 夫如佛六通者는 不然하야 入色界不被色惑하며 入聲界不被聲惑하며 入香界不被香惑하며 入味界不被味惑하며 入觸界不被觸惑하며 入法界不被法惑하니라.所以로 達六種色聲香味觸法이 皆是空相이라 不能繫縛此無依道人하야 雖是五蘊漏質이나 便是地行神通이니라.
46) 도올 김용옥 지음,『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 pp. 91~92.
47) 야나기다 세이잔/一指 옮김,『임제록』 p. 20. 사상적으로도 7세기 이전의 중국불교를 개관한다면 쿠마라지바(350~409)의 반야계 경전을 토대로 하는 나가르쥬나(Nagarjuna, A.D. 150~250)의 대승불교가 주류를 이룬다. 6 세기 말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8)는 나가르쥬나의 반야공관 사상을 중국적으로 확립한 천태교학의 성립자이다. 그의 시대는 무주혁명(武周革命, 690) 등의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어 가고 있는 때였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공관불교空觀佛敎가 표면상 갖는 니힐리즘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악과 번뇌를 깊이 응시하는 경향이 짙다. 또한 6~7 세기경, 민중 속으로 널리 전파된 정토교淨土敎는 현세적인 것에 대한 절망과 말법末法에 대한 강한 의식을 바탕으로 미래의 정토淨土를 강조한다.(야나기다 세이잔/一指 옮김,『임제록』 p. 21)
48) 야나기다 세이잔/一指 옮김,『임제록』 p. 21.
49) 야나기다 세이잔/추만호·안영길 옮김,『선의 사상과 역사』 pp. 123~124
50) 법난法難은 국왕이나 정치권력이 불교를 박해하거나 탄압한 것을 불교의 입장에서 일컫는 말. 불교 자체의 말살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일시적으로 불교가 심하게 핍박받던 사건들을 가리킨다. 법난을 가해자의 입장에서 말할 때에는 파불破佛·폐불廢佛·훼석毁釋 등으로 표현한다. 불교의 역사에서는 숱한 법난들이 기록되어 있다. 인도에서는 BC 180년 무렵에 슝가 왕조를 창시한 푸샤미트라는 브라만교를 깊이 신봉해 불교를 박해했다고 하며, 굽타 왕조 치하의 6세기 초에는 북인도를 침입한 훈족이 불교를 적대시해 많은 불상과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티베트에서는 841년 다르마 위둠텐 왕이 승단에 대한 국가의 원조를 철폐하고 승려를 권좌로부터 완전히 추방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3무1종三武一宗의 법난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3무는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당의 무종을, 1종은 후주의 세종을 가리킨다. 초년에 불교를 옹호했던 북위의 태무제는 나중에 학자 최호崔浩와 도사 구겸지寇謙之의 권유에 의해 도교의 신자가 되어 440년에 불교를 배척하는 명령을 내려 승려들을 살해하고 사원·경전·불상 등을 불태웠다. 북주의 무제는 유교를 신봉해 불교와 도교를 탄압하고 많은 승려를 환속시켰다. 당의 무종은 사원이 소유한 장원의 증가에 따른 국가경제의 피폐와 승려의 부패·타락을 막기 위해 841~845년 4,600여 사찰을 폐지하고 수십만의 승려를 환속시켰으며 사원에 소속된 전답의 대부분을 몰수했다. 이 사건을 무종의 연호가 회창會昌이라 해서 '회창의 폐불'이라고 한다. 후주의 세종도 국가재정난과 승려의 풍기문란에 대처하기 위해 교단의 숙청을 요망하고 국력의 충실을 기했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에 법난이라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지속된 억불정책을 실행했으며, 1980년에 신군부세력이 사회정화라는 미명 아래 10월 27일 전국 주요사찰의 승려를 연행하고 승적을 박탈했는데 이를 10·27법난이라고 한다.(브리태니커)
51) 야나기다 세이잔/一指 옮김,『임제록』 p. 21. 한유가 그의 고문운동에서 제기한「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는 유교의 새로운 인간탐구의 과제로서 등장했으며 인간성의 근원에 관한 주제를 중국철학사에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유와 동시에 활동한 화엄華嚴과, 선의 대가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이 한유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인간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탐구를 시작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종밀의 초기 저작으로서 알려진『원인론原人論』은 한유의 새로운 인간상의 고양에 맞서서, 불교적인 인간의 근본 문제를 제시한다.(야나기다 세이잔/一指 옮김,『임제록』 p. 27) 한유(韓愈, 768~824)의 자字는 퇴지退之.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이다. 어려서 고아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 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다. 사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에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데 대해 끝까지 간諫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저우[潮州] 자사刺史로 밀려나 있었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내야 했다. 유학을 옹호하기 위해 그때까지 유학자들이 다소 소홀히 하던『맹자』『대학大學』『중용中庸』『주역周易』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기초개념을 이 책들에서 취했고 한유는 성리학의 기초를 놓은 셈이었다. 한유는 당시에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과 고사성어로 가득 찬 변려문騈儷文을 배격했고, 위의 책들을 만든 옛 학자들처럼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그가 쓴「원도原道」「원성原性」등은 중국문학의 백미이며 그가 주장한 고문체 문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시문학에서도 그는 기존의 문학적 형식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의 많은 부분은 실패로 끝났다.(브리태니커)
52) 야나기다 세이잔/一指 옮김,『임제록』 pp. 17~18.
53) 중국 宋代 看話禪 및 그 사상의 特質, 賴永海 /中國 南京大学 교수, 번역: 김진무(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출처; 보조사상 26집.
54)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임제어록臨濟語錄』 p. 151.
55) 야나기다 세이잔/一指 옮김,『임제록』 p. 37.
56) 無門 慧開 原著, 宗達 李喜益 提唱,『무문관無門關』 p.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