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학부 차민영 학생이 일본의 후세 다츠지 변호사에 대한 좋은 발표가 있었고, 관련하여 그가 작성하였던 건국 헌법 초안에 대한 설명도 있었습니다.
후세 다츠지가 우리 민중을 위한 변호에 그치지 않고, 헌법안까지 작성하게 된 것은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로 천황 폭탄 투척 음모로 체포 수감되었던 박열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박열은 1926년 투옥된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내내 감옥에 있으면서(사형판결 이후 종신형 감형) 해방이 되면 '헌법안'을 가지고 귀국하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는 것입니다.(무정부주의자가 헌법? 어울리지 않지요? 후에 박열은 무정부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사상을 바꾸었답니다.)
적지 일제 본토에서 고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민족지사가 귀국의 염으로 '민주 헌법'을 말하였다니.... 참으로 헌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새겨보게 됩니다.
수업 시간에는 박열보다도 그의 부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에 대하여 더 강조를 하였는데요, 어떻게 보면 박열보다도 더치열하게 무정부주의적 자유를 갈구하였던 가네코는 종신형으로 감형된 이후 의문의 죽음(자살?)으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가네코 후미코, 그녀는 일찍이 9살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고모가 있는 한국으로 보내져 16살까지 '남의 집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7년 동안 가네코는 '버려진 아이'로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학교도 가정도 나에게는 하나의 지옥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회상합니다.
오로지 충북 부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한 조선인만이 그녀의 위안이었습니다. 가네코가 유일하게 인간애로 감동하였던 것은 고모한테 꾸중을 듣고 아침을 굶었다는 말을 듣고, "아, 가엾게도! 보리밥이라도 괜찮다면 먹지 않겠어요? 보리밥은 많이 있으니까"라고 한 한 조선 여인의 한 마디였다고 합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가네코는 동경으로 상경하여 신문팔이, 노점상, 남의 집 허드렛일 등 온갖 궂은 일은 하면서 야학에 힘씁니다. 의학전문대학을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회의 냉혹함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아니 자신의 비겁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고학 따위 하는 게 아니야, 나는 무엇인가 해야할 일이 있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있어. 그래서 나는 지금 그 일을 찾고 있어...모든 꿈에 불탔던 나는 고학을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분명히 알앗다.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따위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을. 남들한테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데 무슨 가치가 있을까? 나는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신의 참된 만족과 자유를 얻어야만 되지 않을까? 나는 나 자신이어야만 된다"
결국 가네코는 사회주의 그리고 이어서 무정부주의로 기울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동병상련의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가네코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만나고는 "특히 그들이 조선인이라는 것에 그리움을 느겼다. 친한 친구를 오랜 만에 만난 즐거운 마음이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가네코는 조선인 유학생을 통해 본 월간잡지에서 한 편의 짧은 시를 보게 됩니다. 제목은 '개새끼'였습니다. 그 시를 본 순간 가네코는 "황홀해질 정도였으며, 피가 약동했고, 어떤 강한 감동이 내 전 생명을 높게 쳐들고 있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 시의 저자가 바로 무정부주의자 박열이었습니다.
가네코는 조선인 친구에게 그 시를 쓴 사람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하였고, 박열을 만나게 된 날, 가네코는 마침내 새로운 빛, 새로운 삶을 보게 됩니다.
"그래, 내가 찾고 있던 것, 내가 하고 싶어하고 있던 일, 그것은 분명히 그의 마음 속에 있다. 그야말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가 할일을 가지고 있다. 이상한 환희가 내 가슴 속에서 동요했다. 흥분해서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가네코는 박열과 동거하게 되고, 조선인 무정부주의 및 사회주의 그룹인 '흑도회'의 결성과 기관지 <흑도>의 발행에도 기꺼이 참여합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 나고, 일제의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과 좌절감은 조선인 및 사회주의자등에 대한 폭력으로 분출됩니다. 그 와중에 박열과 가네코도 '천황 폭사 음모'의 죄로 체포됩니다.
가네코는 자신이 인류의 가장 큰 죄악으로 지목하였던 권력의 야만과 무도함과 정면으로 대결하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가네코는 재판과정, 수감생활 그리고 마침내 사형판결에서 오히려 보람과 희열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자신의 생명을 새롭게 일깨워 준 영혼의 동반자와 함께 악의 권력의 심장에서 장렬하게 순교하는 날을 벅찬 감동으로 기대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다른 형무소로 이감된 가네코는 얼마 후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아래는 가네코가 전율을 느꼈던 박열의 시 '개새끼' 전문, 그리고 가네코가 박열과 함께 수감 생활 중 (그들을 심리한 판사의 동정 혹은 일제의 음모에 의하여 누렸던) 행복했던 한 때의 모습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 하늘을 보고 짖는 / 달을 보고 짖는 / 보잘 것 없는 나는 / 개새끼로소이다 /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 나도 그의 다리에다 /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http://img.hani.co.kr/section-kisa/2003/03/28/00910000312003032800639849.jpg
위의 설명은 주로 노영희, "가네코 후미코의 조선체험과 사상형성에 관한 고찰 :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던가>를 중심으로", 일어일문학연구, 제34권 1호, 1999, 207-230쪽에 의존하였습니다.
참고로 MBC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다고 하여 찾아 다시보기를 하였는데, 아 실망입니다....
첫댓글 발표하면서 참조했던 정종섭 교수님의 논문이 한국의 헌법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논문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나머지 그분의 의견에 맹목적인 동조를 했던 제 자신을 반성합니다. 후세 다츠지의 사상이라는 측면이라던가 그 작성배경에 더 초점을 맞추어서 논문에 접근했더라면 더 좋은 발표문이 나올 수 있었을텐데 너무 단순하게 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그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분은 관동대지진과 연결하여 발표시간에 이야기 할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시간이 부족했던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
차민영님 반가워요. 자책할 일 전혀 없습니다. 그 부분이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차민영 님 탓이 아니고, 정종섭 교수의 관점 자체가 안이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민영님의 발표는 저로서는 매우 흡족하였답니다. '개념 일본인'이 있듯이, 우리도 '개념 한국인'이 되어 더 많은 공부를 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