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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째 날(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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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땅 월산의 황토집
한밤에 그를 따라 들어선 황토집의 실내는 아직 미완성 상태였다.
밤중이라 바깥의 분위기는 알 수 없으나 숙박하며 미팅(meeting/회의, 토의)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는 물론 시공까지 그가 심혈을 기울였다는 집이다.
그는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이 마을 태생이라는 58세 월산 신태중(月山愼太重)이다.
많은 세월에 걸쳐 사상적 방황을 했다는 그.
구도(求道)와 만행의 나날 끝에 생명 존중에 이르게 되고 9번 구워 만드는 죽염, '(유)
한국로하스식품' 을 탄생시켰으며 이 황토집은 회사의 세미나용 건물이란다.
깊은 밤, 월산이 나를 위해 너른 방 한 쪽에 새 침구를 깔아놓고 나간 후 폭신한 자리에
누워 하루를 곰곰히 돌아다 보았다.
충분한 준비 없이 목표를 무리하게 설정하고, 결국 밤길 걷기를 반복하고 있다.
따끔한 맛을 아직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지만 이틀간 연속해서 걷는 밤 길의 끝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마치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이 전개되었다.
특히 이 밤의 황토방은 곰소항의 기사식당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다.
오직 믿을 때 비로소 확증되는, 사도 야고보의 마드리드 길에서 연속적으로 체험했던
여호와 이레(Je-ho'vah-Ji'reh/그 분께서 준비하신다)의 재연이다.
바칠 제물도, 편히 쉴 자리도.....
부안의 곰소항에서 고창의 선운산록까지 곰소만을 도는 40여km.
육안으로는 지호지간인데도 먼 하루길이다.
평택 ~ 당진 사이 아산만의 7.310m 서해대교처럼 교량이 건설되어 있다면 아마 2시간
이내의 거리일 것이지만 낮시간만으로는 모자라 밤 길까지 걸었다.
내 나라땅이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길보다 더 불리한 조건에서 걷고 있다.
휴대가 편한 빵 구하기가 용이하므로 식사의 애로가 없는 그곳과 달리 우리 해안에서는
야영을 포기하고 밤길을 걷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식사의 애로다.
배낭이 무겁다는 이유로 충분히 예비해 다닐 수도, 도중에 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5월 27일 일요일의 먼동이 터올 때 집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펴보았다.
갯벌보다 1층쯤 높은 도로, 도로보다 2층 이상 높은 (유)한국로하스식품, 그보다 1층 더
높은 위치에 황토집이 있다.
질마재를 넘어 미당 시문학관으로 가는 질마재 길가다.
갯벌에서 4~5층 이상 높은 산록(山麓)이므로 3면의 전망이 일품인 위치다.
장기판처럼 나뉘어진 간척지의 좁은 둑길, 붕괴된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길들을
칠흑 속에서도 용케 지나온 것이 신기롭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이라 해도 그냥 떠날 수 없었다.
월산을 깨우는 결례보다 무심히 떠나오는 무례가 더 무겁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월산은 죽염의 생산과정을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죽염제품들을 선물하고도 미진하다고
느껴졌는지 아침 식사를 하고 떠나기를 권했다.
이 사람이 내게 극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까.
그와 나의 공통점은 형태가 어떠하던 만행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는 점 뿐이다.
그에게 만행을 통한 내공의 힘으로 사람을 통찰하는 힘이 있는가.
특정 늙은이와의 거역할 수 없는 인연일까 통상적 자선일까.
후자라면 그의 황토집은 숱한 나그네의 한국판 알베르게가 될 것이다.
생태문화와 문화생태, 학습체험과 체험학습
월산의 선운산죽염에서 내려와 주진천(인천강)에 놓인 용선교를 건넜다.
부안면과 심원면을 이어주며 22번국도가 통과하는 다리다.
주진천은 내륙 깊숙이 침투한 곰소만과 만나는 하구로 고창의 명물 풍천장어의 산지다.
풍천(風川)은 지명이 아니고 기수역(汽水域/河口域/estuary)을 의미한단다.
기수란 바닷물과 민물이 섞여 염분이 적은 물을 말하며 기수생물인 뱀장어를 비롯하여
재첩, 빙어, 숭어 등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 기수역이란다.
고창의 인물답게 인촌 김성수(仁村金性洙)의 생가와 미당 서정주(未堂徐廷柱)의 생가,
시문학관 등의 안내판이 도처에 있고 도로이름 인촌로도 있다.
민족자본, 민족교육, 민족언론 등 민족지상주의자였던 인촌이 선(先) 항일 후(後) 친일
인사로 지목되고 친일인명사전에 오르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대다수의 항일 인사가 친일 또는 협일(協日)로 변절된 것은 장기 강점에 따른 체념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는데 인촌도 그 중 하나란다.
미당은 언어의 마술사, 시어(詩語)의 창조자라는 화려한 찬사와 함께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았다.
뿐만 아니라 5.16군부와 유신독재,5공치하에서의 경솔한 처신으로 문학적 명성과 달리
역사적 평가는 극히 부정적이다.
잠시 22번국도를 따라 당도한 좌치나루터에서 해안로를 택했다.
하나의 길을 두고 환경부는 '국가생태문화탐방로'라 하고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생태
탐방로'('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길'중 '질마재길')라 하는 길이다.
지자체(고창군)는 부처와의 이해관계 때문인지 공평하게(?) 두 이름 다 사용한다.
그러나 '생태문화'와 '문화생태'는 혼란스럽게 각기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문화' 와 '생태',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두 단어가 위치를 앞뒤로 바꿀 때 복합단어 역시
전혀 다른 뜻이 되는데 동일한 길에 왜 두 개의 이름을 붙인 것일까.
뭐하는 짓들인지 머리까지 늙었나 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꿩이 앉아있는 형국이라는 좌치(坐雉) 나루는 심원면 용기리와 부안면 선운리를 연결
하는 인천강 하구의 뱃길 나루였단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심원, 해리, 상하 등 고창 서부는 물론 멀리 영광 법성포인들까지
내륙으로 이동할 때의 교통 요충이었다는 곳.
그러나, 1995년에 용선교가 개통됨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이름만 남게 되었단다.
끝 없이 펼쳐지는 갯벌의 서해안에는 갯벌체험장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용기와 상전 마을을 지나 당도한 하전 마을에도 드넓은 갯벌학습체험장이 있다.
해양수산부가 지정한 아름다운 어촌100곳에 들었으며 전국 최대의 바지락생산지(연간
4.000톤)라는 광활한 갯벌을 경운기를 개조한 갯벌버스들이 누비고 다닌다.
썰물따라 바다 깊숙이 나가 머드(mud) 칠을 즐겨 하는데 아이 어른이 따로 없다.
갯벌이 굴뚝 없는 산업이라는 관광상품으로 각광을 받게 될 줄이야.
서해안 농어촌의 새로운 소득원인가 즐거운 비명이다.
풍천장어가 주진천 기수역에서 나온다 해서 그곳에 머물러 있겠는가.
장어 굽는 냄새가 전국으로 퍼져 있는데 제 고장에서 홀대받겠는가.(고향에서 홀대받는
것은 오직 예언자들뿐?)
해안 길 곳곳에도 고장의 명품답게 대규모 장어집들이 있으며 학년과 반 표지판이 걸려
있어 초등학교 교사(校舍)로 착각하게 하는 '장어학교'라는 기상천외의 이름도 있다.
애호가들의 지갑을 덜 가볍게 하기 위해 하나같이 셀프 서비스(self-service) 방식이라
는데 나는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솔로인데다 즐기지도 않아서.
월산리 해변은 백제때 소금을 채취했던 곳이라는데 근사한 건물, 소금전시관도 있다.
남쪽 선운산 자락의 선운사(禪雲寺)를 창건한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곳을 근거로 한
도둑과 해적들에게 소금 제조술을 가르쳐 교화했다 해서 검단소금전시관이란다.
한남금북, 한남, 금북 3정맥의 분기점인 칠장산, 칠현산과 낙동정맥의 칠성산 이름들과
흡사한 전설이다.
도둑들은 검단선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소금을 만들어 절에 바쳤단다.
보은염(報恩鹽)이다.
한데, 일요일인데도 왜 폐문상태일까.
문화재와 각종 박물관, 전시관 등 관람대상들의 휴일은 월요일이건만.
지근에 있는 조선 최초의 여창 진채선(陳彩仙)의 생가터(월산리 사등마을)를 지났다.
고창은 판소리의 성지, 동리 신재효(桐里申在孝/1812~1884)는 판소리의 성자.
판소리 박물관까지 있는 고창인의 자부심이란다.
신재효의 문하생이며 35년의 연령차를 극복한 연인 사이였다고도 전해오는 여류 명창
진채선이 판소리에 입문하기 전에 살던 집이었다는데 해설판 하나만 달랑 서있다.
무당 가계 남자들의 창조물이며 남자 전유물인 판소리를 여자가 부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인 점으로 미루어 진채선은 천하디 천한 무당의 후예였을 것이란다.
판소리는 무당에서 나오고 무당은 천민이라면 소리꾼은 당연히 천민이었다.
작금에는 판소리 하나 가지고 문화재로 등극하며, 고공행진하는 판소리의 인기로 보아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람사르 습지는 만돌(萬突)갯벌학습체험장 한하고 이어진다.
앞뒤를 바꾸는 것은 고창인의 기질인가 정부 부처를 닮아가는가.
한 지역의 갯벌을 학습체험장과 체험학습장으로 달리 표시하고 있는 안내판들.
'학습체험'과 '체험학습' 역시 언뜻 같은 뜻인 듯 하나 전혀 다르다.
학습을 체험하는 장소와 체험을 학습하는 장소가 어찌 같단 말인가.
'학습'은 배워서 익힌다는 뜻이며 심리학에서는 경험의 결과로 나타나는,비교적 지속적
행동의 변화나 그 잠재력의 변화 또는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을 말한다.
'체험'은 몸소 겪거나 그런 경험을 말하며 심리학에서는 특정 인격이 직접 경험한 모든
심적 과정을 말한다.
오호, 한심한 관계자들이여.
서해안 지도그리기가 더 편해져야 한다
만돌갯벌을 포기하고 지근인 심원면 소재지 길을 택했다.
일요일 11시가 임박하는데 심원(?)교회의 십자가가 어필(appeal)해왔기 때문이다.
"모든 길에서 일요일 11시 전후에 시야에 들어오는 교회(종파에 관계없이)의 문을 연다"
는 스스로의 룰이 여전히 유효하니까.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그랬다.
의식과 교리 위주의 미사적응에 실패하면 되레 손해볼 수 있는데 반복이야 말로 최고의
학습이다.
심원면사무소에서 간척지 둑길을 통해 고창컨드리클럽, 만돌갯벌체험장 끝지점인 바람
공원으로 직행한 후 간척지 둑을 타고 돌고돌아 배수갑문을 통과했다.
'애향갯벌로'라는 편한 직선로를 두고 무슨 고생이냐고?
갑문 다리를 건너면 삼양염업사(三養鹽業)가 1977년 4월 5일에 세운 간척지준공기념비
(干拓地竣工紀念碑)와 삼양정(三陽亭)이 있다.
삼양염업은 삼양정의 한자표기를 회사이름 '三養'이라 하지 않고 왜 '三陽'이라 했을까.
역겨운 공치사 세상이기에 이색적으로 보인 것일까.
부안과 고창의 서해 간척사업은 이 지방 갑부인 삼양사가 독점했단다.
현대그룹이 이룩한, 이른바 정주영공법의 서산방조제는 먼 훗날의 일이다.
무력한 정부를 대신하여 시행한 큰 역사(役事)를 치하하면서도 간척범위를 더 과감하게
확장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하며 걸었다.
간척과 개간, 농장 경영 전문인 삼양사와 경성방직은 인촌 김성수가(家)의 기업이다.
토호(土豪) 여부는 논외로 하고 민족학교, 민족신문, 민족자본이라는 기치와 달리 형제
(性洙,秊洙)가 친일인사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지만 그들의 공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달과 부의 축적을 위하여 매국배족(賣國背族)의 친일행각을 벌인 무리와 달리 악랄한
일제에 협조하지 않고는 기업의 생존이 불가능했던 점도.
열혈 항일인사들도 날로 더 극악해 가는 압제의 장기화에 자포자기하고 변절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의 전쟁 후유증을 치료한 것은 상황윤리다.
우리도 단선적 이분법으로 재단하기 보다는 상황윤리로 이해해야 되는 것 아닌가.
썰렁하기는 동호항(冬湖港/해리면)도 다를 것 없다.
이름처럼 얼어붙은 겨울 호수처럼 을씨년스러우며 호남의 서해 어항들은 페닉(panic)
상태라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새만금방조제는 이처럼 많은 희생을 빨아먹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에게 지워지는 짐(책
임)이 그만큼 날로 더 무거워가고 있다.
변산반도 모항(?)과 동호항 사이, 곰소만 남북을 잇는 부창대교 건설을 계획중이란다.
교량의 위치로 보아 곰소만 어민을 위한 다리가 아니라 국가어항으로 개발중인 구시포
항과의 연계를 위한 계획인 듯 한데 차제에 아예 방조제로 바꾸면 어떨까.
이미 언급했듯이 장차 우리에게 절대선(善)은 람사르 협약이 아니고 농지일 것이니까.
어찌 되건, 서해안 지도 그리기가 한 결 더 편해져야 한다.
해안선이 끊긴 전북과 전남 도계
썰물 따라 바다 깊숙이 나아가 갯벌을 뒤지는 아마추어 조개잡이들만 신이 나있다.
내가 감촉좋은 모래와 바위를 밟고 동호해수욕장으로 나아가게 된 것도 썰물 덕이다.
'명사십리'라는 닉이 붙은 10리 백사장이 일품인 해수욕장이다.
한반도의 대표적 명사십리는 동해안 원산 해변의 해금강이다.
고성의 통일전망대에서 돌을 던지면 맞힐 듯이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갈 수 없는 북한땅.
금강산 자락의 물맑은 동해 해변과 평야지 서해의 갯벌 해변은 비교 자체가 무리지만 제
철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인기있는 해변임은 분명하다.
나는 걷는 동안에 여간해서는 시장기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먹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
그래도 1주일에 한번 꼴로 육식으로 포식을 해야 한다.
의사들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체질이다.
어제 밤에 월산 덕분에 돼지, 닭, 해물 등으로 포식했으므로 며칠은 등한해도 된다.
그럼에도 해수욕장의 즐비한 횟집중에 내게 맞는 메뉴의 식당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법성포 찜질방을 목표로 가고 있지만 도중에 천막집을 지어야 할 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모처럼 들른 식당은 손님을 사절하겠단다.
가족 중 누가 교통사고를 당해 급히 가야 한다나.
오늘의 유일한 식사가 될 수도 있으므로 밥 한 그릇과 김치를 산 후 라면을 끓였다.
늦은 아침겸 점심겸 이른 저녁인 셈인 식사를 마친 후 해안으로 나갔으나 전북수산시험
연구소가 길을 막았다.
전남 영광과의 경계인 고창의 끝 구시포로 가는 해안길은 거의가 포장된'명사십리로'다.
상하면 구시포항은 원래(1800년대) 소금을 생산하던 포구였는데 염전을 일구기 위하여
세운 수문 모양이 쇠구시통(구유)처럼 생겼다 해서 구시포라 부르게 되었단다.
지금은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선'에 들어있는 국가어항이다.
구시포해수욕장은 여느 서해 해수욕장과 달리 갯벌이 전혀 없는 금모래 십리길이란다.
해수염도가 인체에 알맞는 3도로 해수욕의 최적지라는 명성과 다양한 효능을 인정받은
해수찜목욕탕의 전국적인 인기가 날로 높아가고 있단다.
구시포항의 주 어종은 주꾸미, 새우, 꽃게인데 주꾸미 철(3월하순)에는 성시를 이룬다.
그 무렵, 나도 산소(省墓)길 귀로에 몇번 들른 적 있는데 이즈음은 '주꾸미 없는 주꾸미
명품 마을'이 되고 말았단다.
이 까닭은 새만금방조제의 축조때문이 아니고 지근(영관군 홍농)에 있는 원자력발전소
5. 6기가 쏟아내는 온배수 때문이란다.
방조제 때문에, 원전(原電)과 화전(火電) 때문에, 임해공단 때문에 등등, 자연을 거스름
으로 인하여 날로 더 심각해 가는 어족자원의 격감현상에 대책은 커녕 한반도의 해안은
미구에 대규모 발전소와 공장으로 채워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고기가 자랄 틈을 주지 않고 저인망, 쌍끌이로 치어까지 잡아들임으로서 미래가
없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원양 외의 모든 어업에 종언을 선언하고 방조제 축조를 더 과감하게 하는 것 말이다.
방조제 축조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생태계 파괴다.
그러나 방조제로 인한 파괴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 세월과 더불어 서서히 복원된다.
따라서 피해도 어떤 공장, 어떤 발전소 보다 적다.
구시포(九市浦)에서 영광땅으로 가려면 해안에서 멀어져야 한다.
홍농 해안을 점유한 영광원자력발전소 때문이다.
한데, 지명의 유래와 전혀 생뚱맞은 한자 표기 '九市'에 대한 해명을 끝내 듣지 못했다.
상하면과 홍농읍, 고창군과 영광군,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잇고 가르는 동아방조제를
건너 홍농읍으로 가는 논길 지방도로는 차량의 왕래가 적어 걸을 만한 길이다.
홍농읍 입구에서 만난 1톤트럭 운전자는 법성포의 찜질방이 문을 닫았다며 자기네 마을
(홍농리?)회관에서 유숙하기를 권했다.
재작년, 함평 교통사고때 묵었던 찜질방인데 불황을 극복하지 못한 듯.
태안반도 고남면 영목항 한 마을의 이장과는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인심이다.
(메뉴 서남동길 7회 글 참조)
다만 인성의 문제일 뿐.
문득, 석존탄일(음력4월 8일) 이브(Eve.)에 한국 최초의 불교 도래지(법성포) 옆 숲쟁이
꽃동산의 꽃밭에서 보내는 것도 한 이벤트(event)일 듯 하여 사양했다.
그는 어두워가는 시간임을 감안해 꽃동산 앞까지 자기 차로 태워주고 돌아갔다.
꽃밭 옆 간이정자 안에 지은 내 집에 막 입주할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편하다면 당장에 데리러 가겠다고.
마을의 등산애호가들을 이끌고 전국의 명산 순례를 하고 있다는 고마운 중년 최중태(?)
님은 이후에도 내 진행상황을 확인하는 전화가 왔다.
불행하게도 그의 전화번호가 내 휴대폰에서 증발해 회복할 방법을 강구중이다.<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