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항거한 여수현령 오흔인의 5년 반기로 조정에서는 그 죄 값으로 여수(麗水)라는 큰 고을을 1397년(태조5년)에 폐지시키고 돌산 나루터 구실만 하도록 순천부에 예속시켜 버리니 여수라는 지명도 500년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1차 복현운동: 숙종때 지역대표 4사람이 서울로가 신문고를 치고 고통을 아뢰었으나 상소가 무산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여수민은 끈질기게 추진하여 숙종의 윤허를 얻어 1696년 여수 도호부로 승격하게 되었다. 300년 만에 현을 찾았다. 그러나 여수현령 최극태가 암행어사에 끌려가 다시 순천부로 환속되었다.
2차 복현운동: 3년 뒤 순천 유생의 상소. 1725년 지평 이근의 상소로 영조 1년 여수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1년후 죄의정 홍치중 어영대장 이봉상 간계로 일 년도 넘지 못하고 혁파 되었다.
3차 복현운동: 1750년 (영조26)여수현은 여수 도호부로 세 번째 복현되었다. 24년 만에 복원된 것은 여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귀울려 왔는가를 알수 있다. 백성들이 상소 하였고 임금은 사리를 밝게 판단하여 승지 이형원에게 여수 도호부사겸 전라좌도 수군절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또 순천에 의해 1년도 못되어 여수현은 혁파되고 순천부로 환속하게 되었다.
1864년(고종원년)에 정종선(호는 운초. 병인양요 때 백의로 국란을 맞이하여 ‘남주종유’로 추앙받음. 율촌출생)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가 효시가 되어 501년이 지난 1897년에 담양군수 유기완의 차개비지운응시지고여(此豈非地運應時之古嶼)=‘이 어찌 땅의 운이 시대의 운을 따라가지 않으리오’라는 호소로 삼복삼파(3번 복현, 3번 폐현) 끝에 여수의 완전한 복현과 지명을 되찾았다.
이 과정 중 여수에 소속되어 있던 용두면 지역은 여수로 환원되지 않고 순천에 잔류 되었다가 1914년 군면폐합때 해촌면과 합쳐서 해룡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