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상당산성
방문기(전/후편)
위 치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 28-1
그렇다면 밀풍군 탄은 어찌 되었을까? 본인은 아무 관련이 없어도 왕으로 추대되었기에 당연히
영조
는 자결을 명한다. 왕조 시대에 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은 자신은 조용히 지내려고 하여도 언제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이 날아갈지 모를 일이다. 역모를 꾀하는 자들로서는 명분이 있어야 하기에
종
실의 왕자중 누군가를 끼어 넣으려 하는데, 실제 사전에 추대하려는 왕자와 아무런 내통이 없이
이름만 들고 나와도, 그 역모가 실패하면 그 왕자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왕자가 너무 똑똑하고 주위에 따르는 자가 많으면 똑똑치 못하고 시기심 많은 왕은 무슨
꼬투리만 있어도 그 왕자를 제거하려드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양녕대군(세종의 형)이나 월산대군(성종의 형) 같은 경우는 일체 정치권과는 발길을 끊고 오직 풍류만 즐기며
세월을 낚지 안았던가.
밀풍군 탄은 소현세자의 증손자이다. 본인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지만 증조할아버지 소현세자도 소현세자를 시기한 인조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인조로서는 언제 청나라가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할지 몰라
불안해 했었다. 인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며느리 강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손자 3명 모두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고. 첫째와 둘째는 풍토병으로 죽고, 셋째 경안군 석견만 겨우 살아남다. 그러나 석견도
겨우 22살에 죽고, 석견의 두 아들임창군 혼과 임성군 엽도 1679년 역모에 휘말리나 다행히 목숨은
건지고 5년간 제주도 귀양살이를 한다. 이중 임창군 혼의 아들이 밀풍군 탄인데, 결국 탄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32살에 목숨을 잃는 것이다. 권력이란 그런것인가.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이 왕도
하나?. 인간의 권력욕심은 지금도 마찬 가지지만
말이다.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영조를 제거하려고 한 것일까? 이들은 세제로
있던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믿은 것이다. 실제로 영조는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리게 했고, 이를먹은 경종이 고통을 호소하자 이번에도 어의들의 심한 반발을
무릅쓰고 인삼과 부자를 올리게 하였다. 결국 경종은 다음날 새벽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승하하였다. 그렇기에 반군들은 경종의 죽음을 애도한다며 흰색 군복을 입고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곡까지 했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그 후에도 경종의 독살설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나돌았고, 이로 인해 영조의 의심증은 깊어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남문으로 향하는 앞은 상당산성을 복원, 정비하면서 넓은 풀밭으로 깨끗하게 조성하여놓았다.
원래부터 풀밭은 아니었을 것이고, 원래 이곳에는 작은 밭뎅이와 야산으로 기억 되는데. 아무튼 휴일이면이
풀밭에는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산성의 기운을 느끼리라.
다시 올라와 공남문 앞에 섰다. 안내문을 보니 상당산성은 그 명칭이 백제시대 상당현과 역사적 맥을같이하고 있으며, 둘레가 4.1Km, 내부면적이 726,000평방미터에 달하는 전형적으로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석축산성이라고 적혀있다. 이곳에는 백제 때부터 토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래서 청주읍성에 병마절도사가 있지만, 그 배후인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다는것.
치성에서 바라본 남문의 전경
.
그런데 상당산성을 돌 때에는 모르고 지나쳤지만, 이곳 공남문 오른쪽 성벽에는 양덕부라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숙종 46년(1720) 당시 산성 개축공사 책임자였다는데, 공사 실명제로
자기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인가? 무순 의미일까?. 이내 궁굼해진다. 암튼 양덕부는 또한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청주성을 점령하려고 할 때, 기생 월례와 함께 성문을 열어 반란군이 손쉽게 성내로 들어올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남문 서쪽 치성과 산성의 여장
.
남문에이어 계속 서쪽으로 이동 거의 다 올라서서 보면 작은 문이 하나
나타난다. 이것이 비밀통로격인 암문이다. 오늘날로 치면 비상구와 같은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시에 외부와 연락을
취하고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특수 미밀 통로인 셈이다.
따라서 암문은 비상시에 쉽게 폐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적군이 이를 눈치 채고 암문을 통해입성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암문은
남암문과 동암문, 두 곳에 설치되어 있다. 서문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남암문을 지나 서쪽 벽으로 꺾어돌아가니 청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청주는 물론 증평, 오창, 미원으로 이어지는 벌판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서문을 일컬어 미호문이라부른 것은 이곳의 지형이 호랑이처럼 생겨 이를 제압하기 위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쪽 성벽은
동쪽 성벽보다 훨씬 견고하다. 이로 보면 신라보다 오히려 백제,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듯하다. 율량동을 바라보는 북쪽 벽은 자연 지세가
워낙 험하여 성벽의 높이가 턱없이 낮다.어찌 되었던 원점 휘귀다. 이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시간을 보니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 된것 같다. 여유있는 시간으로 볼것 다보고 돌아온것
같다.
아래로 내려오니 산성 마을이 음식점으로 가득하고 유흥가로
전럭해 버린 모습이 안타 까웠다
남쪽의
암문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성내에는 구룡사, 남악사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자취가 없고, 성내에서 생산되는 쌀은 1만3천5백여 섬에 이르고 해마다 장을
담그는 것이 90여 단지에 1백 섬이며, 동서에 사는 주민이 50여 호에 이른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상당산성은 삼국초기서부터 후삼국,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청주지역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현재는 32가구가 모여 사는 산성 안의 한옥마을은 대부분
음식점을 경영하여 생활하고 있는데,
대체로 토종닭과 오골계ㆍ꿩요리 등을 전문으로 하고, 반주로 이곳 명산물인 대추술을 함께 내놓고 있다.
하여 평상시에도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역사의
산교육장이며, 시민의 대표적인 시민
휴식공간이다.
남암문
옆의 치성
.상당산성 일원은 봄철의 경치가 빼어나다. 특히,
5월에는 산 벚꽃이 주변에 만발하며 상당산성의 정문인 남문(공남문)에 이르는 도로 양옆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또
산성 입구의 넓적한 돌계단을 따라 공남문에 이르는 오솔길 주위에 펼쳐진 봄꽃들의 향연이
화려하다
서문으로 향하는
성곽길
.
그리고 산성과 연결되는 것대산에는 봉수대가 있는데, 이 봉수대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 있다.
것대봉수의 봉수지기 목씨 노인은 선이라는 외동딸을 데리고 봉화대를 돌보고 있었다.
선이는 자라면서 백룡 총각과 정혼을 하였으나, 홀로 남을 아버지 생각에 시집갈 날을 이리저리
미루고 있었다. 이 무렵에 이인좌의 난이 발생한 것이다. 이인좌는 청주성을 점령하러 오면서 우선
봉화를 올리지 못하도록 것대봉수를 습격하여 목노인을 죽인다. 이때 선이는 청주장에 나간 백룡을
기다리느라 고개마루에 나가 있었는데, 병사들이 집으로 가는 것을 수상히 여겨 돌아가다가 병사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목격한다.
.선이는 곧바로 봉수대로 달려가 불을 지펴 연기를 올리는데 병사들은 선이마저 죽인다. 이 때 장에서돌아오던 백룡은 봉수대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이상히 생각하고 달려왔다 선이의 죽음을
목격하고, 눈이 돌아 반군 병사에 달려가 격투 끝에 이들을 죽이고 봉수대에 불을 활짝 지펴 청주에
반란이 일어난 것을 알릴 수 있었단다. 이인좌의 난 때문에 이런 슬픈 전설도 있다.
상당산성 남 암문에서 서문을 향해
내려간다. 여기가 원점이다.
.
TIP>
상당산성 두배로 즐기기
1.
상당산성 등반 길
상당산에 위치한 상당산성은 오르는 길도 여러
갈래다.
(1) 주성대학이나 덕암리 버스종점에서
등반하면 산성의 북쪽길과 만난다.
(2) 청주장례식장에서 시작해 백화산을 거쳐 오르는
등반길은 서문과만난다.
(3) 우암어린이회관 뒤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서쪽 성벽과 만난다.
.2.
상당산성과 것대산 봉수터 걷기 코스
상당산성과 것대산 봉수터를 옛길을 이용해 걸어보는
것도 색다른 묘미다.
상당산성 남암문에서 빠져나와 산성고개에 설치된 출렁다리를 건너면
상봉재가 나온다.
고갯길에 설치한 출렁다리는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산행을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상봉재에서 다시 것대산으로 오르면 멀리 첩첩의
산봉우리들이 보이는 봉수터가
나온다.
산행은 1시간 거리다.
.
미호문(서문)
.
<동북암문의 명문>
동북암문은 동북에서 북상하는 능선이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만나는 지점 아래에 위치해 있다.이 암문은 1720년, 숙종 46년에 축조된 것으로
상당산성 1차 개축(1716∼1719)이 이루어진 후의 일이다.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암문 내벽에
강희경자오월(康熙庚子五月)이라는 명문이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명문에는 공사 책임자의 이름도
나타난다. 양덕부 패장 한량(梁德溥 牌將閑良)이라는 명문이 바로 그것이다. 즉 패장으로 있던
양덕부가 암문을 축조하는데 공사책임자였던것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공사 실명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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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밖에서 본 미호문의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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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문]
사적 제 212호로 지정돼 있는 상당산성에는 두 곳의 비밀문이
있는데 이를 암문이라 한다. 동북암문은 동북에서 북상하는 능선이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만나는 지점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 암문은 1720년,숙종46년에 축조된 것으로 상당산성 1차개축이 이루어진 후의 일이다.
동북 암문은 서너명이 허리를 숙이고 드나들 정도인데 안쪽으로 빗장구멍을 내어 견고히 하는 한편 유사시에는
곧바로 폐쇄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서북 암문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생명수가 흐르고...
지인들과 점심 메뉴는 꿩 육회와 만두 그리고 송이 꿩 전골로 선택을 했다. 다들 처음
먹어본 것이라고 하여 암튼 주인
사장님의 배려에 육화와 만두 배터질 정도로 미련 스럽게도 먹어댔다.
입안에서 살살녹아가는 식감은 먹어본 사람만이 알수 있다는것이다. 유랑자가 좋아도
하지만 어디아무데서나 흔하게 접할수 있는것도 아니고. 특히 육회는 더욱 그렇다. 싱싱함이 생명인
육회는 바로 잡아서 약간의 숙성을 하여 먹기 때문에 싱싱해야 한다. 감칠맛나는 육회에 대낮부터
.......ㅋ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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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버섯 꿩 전골
송이향이 가득한 전골맛은 일품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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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가슴살로만 묻힌 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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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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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꿩은 저지방 고단백질로 타육류와는 달리
섬유소가 가늘고 연하며,
근육질에는 지방이 전혀섞여 있지 않아 세포를 윤택하게 하고 피부 노화를
방지하는데 효과가 크다.
주로 중(中)을 보하고,
기력을 더하게 하며 설사 및 치질 종기에도 그
효능이 탁월하다고 합니다.
꿩고기에 함유된 오메가3은 콜레스테롤을 억제시키는 작용을 하며,
회분에는 뼈와 치아형성에 필요한 칼슘,
인,
철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어 노약자는 물론 성장기의
청소년 어린이에게도 훌륭한 식품이다.행동에 성급함을 치유하고 간의 기력을 더하여 눈을 밝게 하기 때문에
수험생이나 직장인들에게는 꼭 필요한 스태미너식이다.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1동 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