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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마실길)에서 순례길을 그리다
이틀을 쉰 후 4월 14일 아침.
우리는 전일에 귀가한 버스길을 역순으로 하여 진관동 하나고등학교 앞에 당도했다.
은평뉴타운에 하나금융그룹이 세운 자사고(自私高/자율형사립고등학교)다.
전교생 기숙사 생활을 하며 "세계가 나를 키운다, 내가 세계를 키운다"(The World
Nurtures Me I Nurture The World)는 특이한 교훈을 가진 학교다.
건곤일척의 승부가 걸린 일은 아니지만 교현리쪽(양주시장흥면) 우이령길 입구까지
마치는 일이 순조롭기를 바라며 둘레길에 들어섰다.
마실길을 벗어나 북한산밑 깊숙이 있는 천년고찰 진관사를 다녀오는 여유를 부렸다.
고려 목종 때, 왕위 계승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8대 현종)이 삼각산 암자에서 홀로
수행중이던 진관(津寬)대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왕이 된 현종(顯宗/재위1009~1031)은 1011년 진관대사를 위해 보은의 절을 지었다.
이름하여 진관사로 고려 왕실의 총애를 받은 천년 고찰이며 이조에도 태조가 수륙재
(水陸齋)의 근본도량(道場)으로 삼았다는 명찰이다.
수륙재란
또한 현대의 진관사는 항일독립운동의 서울지역 거점사찰이었단다.
사찰내 칠성각의 해체 복원 불사 중에 태극기에 싸인채로 발견된 독립신문을 비롯해
6종의 신문 20여점이 그 증거물이라니까.
안내판에 의하면 1919년 중국과 국내의 항일독립운동에 실제 사용된 유물이라고.
진관사는 내가 불광동에 거주하던 때 늘 나의 북한산 들머리가 되었던 절이다.
소풍길 소로가 초대형 차들이 교행할 수 있는 대로로 바뀐지 오래인 진관사길.
심산유곡까지도 명찰(名刹)이 있는 곳이면 차로가 닦이고 승려들도 걷기를 기피함
으로서 가장 우월했던 승려들의 체력이 이즈음에는 빈약하기가 바닥권이다.
마실길은 소구간 중에서 가장 짧은 1.5km에 불과한 거리다.
한옥마을이 짜임새있게 자리잡힐 날이 언제일지 기약 없으며 마을을 지켜온 지신에
다름 아니라는 보호수 느티나무들도 당분간 할 일이 없겠다.
가벼운 기분으로 잠시 놀러갈 이웃이 없는데 마실길은 왜 필요한가.
그보다, 지금이 마실이나 다닐 수 밖에 없는 하릴 없는 시대인가.
마실길과 다음 구간인 내시묘역길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초기에는 사유(私有)농원때문에 진관천을 넘나들며 차로를 걸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는데 천변에 조성한 데크길을 통해 농원 안을 통과하게 되었으니까.
고맙게도 농원측이 호의를 베푸는가.
백두대간과 9정맥은 물론 지방의 여러 길에서도 개인소유라는 이유로 통과를 막기
때문에 우회하는 불편이 적지 않다.
밟고 간다 해서 그 땅이 신발에 묻어 달아나거나 땅값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우리
나라의 땅 소유자들은 자기 재산(땅) 보호의식이 지나친 것 같다.
이베리아반도의 12개 코스 수천km 순례길(Camino de Santiago)에도 광대한 목장,
농장들이 가로막기 일쑤다.
그러나 사유지라는 이유로 차단되어 우회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
가축들의 이탈을 막기 위한 출입문이 있을 뿐 활짝 열어주면서도 너절한 부탁(요망)
따위가 없고 반자동 출입문을 설치한 곳도 있다.
수동으로 열지만 자동으로 닫히는 문이다.
문단속을 하지 않고 가는 무심한 순례자로 인한 가축의 이탈을 막기 위함이다.
본 받아야 할 좋은 점 아닌가.
지금도 속국이다?
둘레길은 잠시 대로(북한산로)로 나왔다가 여기소마을길로 접어든다.
여기소(汝其沼)는 북한산성의 축조와 관련된 비련의 사연이 담겨있는 이름이란다.
북한산성은 중국의 만리장성에 비견될만한 거대성은 아니지만 작은 성도 아니다.
변변한 장비가 잔무했던 이조19대 숙종37년(1711)~40년(1714) 간에 축성했다니까
애로가 여간 아니었을 것이다.
이 때,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려고 한 기녀가 먼 시골에서 올라왔다.
아마, 지방 관아의 관원과 정분이 난 기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해 실망한 기녀는 여기 못에 몸을 던졌다는 것.
여기소(汝其沼)란 "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이라는 뜻이라나.
평해대로의 청심대(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마평리)의 비련(메뉴'옛길'68번글참조)을
연상하게 하는 유래다.
기어히, 꼭 만나야 할 연인이라면 "하룻밤에 만리장성도 쌓는다"는 고사처럼 찾으면
반드시 길이 있으련만 귀한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하다니.
여기소마을 길가에 북한산둘레길에서 평창동에 이어 관심을 끄는 집이 있다.
대간 정맥과 옛길에서는 마을단위로 살만한 곳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둘레길에서는 북한산자락이라는 공통분모 탓인지 이색적인 집이 관심을 끌고 있다.
디카에 담는 내게 마을의 중년여인들이 말을 걸어왔다.
"맘에 들면 사세요"
건축업자의 신축 주택인데 팔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단다.
이색적인 외양과 달리 실속이 없는 구조?
우리나라의 주택건축업자들은 겉 모양은 단순하나 살기 편하고 쓸모가 많은 서양의
주택들과 달리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집을 짓는다.
건축비의 대부분이 겉치장에 투입되므로 실제 생활공간은 부실할 수 밖에.
가족구성원과 직업에 따른 생활 습관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살 사람이 직접 설계해
짓거나 개조가 용이한 구조의 집이어야 한다.
의상봉과 그 뒤로 의상봉능선, 원효봉과 삼각산으로 이어지는 원효봉능선이 모두
지호지간처럼 다가오는 지점에 자리한 백화사(白華寺)도 공사중이다.
진관사가 경내에 대형 공양소(식당)를 신축하느라 어지러웠는데 여기도?
내가 시주한 것도 아닌데 아무러면 어떠랴만 빈부의 차가 확연한 두 절이다.
한쪽은 기존 식당을 헐고 새 집 짓느라 요란한데 반해 입때껏 온전한 대웅전도 없어
요사체 일부를 법당으로 사용하던 절이 모처럼 자그마한 대웅전을 짓는 중이라니까.
백화사를 지나면 내시묘역길은 의상봉 등산로와 헤어진다.
'밤나무골'로 알려진 이 일원에도 사유지가 있는가?
국유림이라는데도, 철책 사이로 나기는 했어도 여유로워 걸을 맛이 나는 길이다.
왕국(군주국)에서 세습적 개념의 사유지란 있을 수 없다.
유공(有功) 신하에 대한 임금의 하사품이었을 뿐 매매 또는 다른 방법으로 소유권이
이전되는 현대적 개념의 사유지가 아니고 여전히 임금의 소유니까.
이 지역의 일부도 왕의 하사품이었음을 비석이 말해주고 있다.
<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경천군 사패정계내 송금물침비)
"경천군에게 하사한 경계 내의 소나무를 베거나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비다.
광해군은 선왕인 선조 때 조일(朝日)화평교섭에 이바지한 경주이씨 해룡(李海龍)의
공을 인정해 경천군으로 봉하고 이 땅을 하사한 듯.
"문헌상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임업정책의 실례를 방증하는 유물",
"조선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일관되게 시행해 왔던 오늘날의 자연 환경 보존정책
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송금 정책의 일면".
"송금비로서는 전국적으로 유일한 사례이며 조선시대 임업사에서 중요한 유물" 등
가치를 인정했는지 서울시 기념물제35호로 지정(2014년 2월 20일)되었단다.
비석을 세웠다는 만력42년(뒷면)은 1614년으로 광해군6년이다.
만력(萬歷)은 명(明)의 13대황제 신종(神宗/재위1572~1620)의 연호다.
명의 연호는 숭정(崇禎/16대毅宗/1627~1644)으로 끝나지면 반정으로 인조를 세운
서인세력은 청대(淸代)에도 비공식적으로는 '숭정후'(後)라는 희한한 연호를 썼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친명배금(親明排金)으로 환원했기 때문이다.
개탄할 점은 우리는 명색이 군주국이면서도 자국연호를 쓰지 못하고 타국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심지어 망한 나라의 연호까지 만들어 쓴 나라와 민족이라는 것이다.
명과 청(淸)의 속국이었음을 뜻하며 고종 때 비로소 독자연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나
일제에 먹히기 직전, 잠시였을 뿐이다.
한데,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자주독립국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여전히 어느 강대
국가의 속국에 다름 아니기를 원하다니.
전작권(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시기를 연기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민족동란을 치르고서도 여전히 위기의 분단국인 현실을 아무리 감안해도 주권국이
취할 처사가 아니지 않은가.
내시의 무덤 없는 내시 묘역길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대서문) 입구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었으나 입맛이 별로였다.
걸은 길보다 더 많이 남아 있으며 남은 길은 수월했던 오전의 길에 비해 까다로운데
아내가 참고 이겨낼지 걱정이 되어서 였을까.
북한산성계곡 양편으로 빼곡히 들어서 있던 접객,위락시설들이 말끔히 정리되었다.
식당과 편의시설 단지를 조성해 이전을 유도한(강제로) 것이다.
저항이 여간 아니었을 것이며 이해 당사자들에게는 유감스런 일이기는 해도 북한산
국립공원측이 갈채받을 만한 큰 일을 해냈다.
둘레길은 은평구(서울시) 진관동에서 덕양구(경기도 고양시) 효자동으로 바뀐다.
원효봉과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등을 바라보며 둘레교(북한천)를 건너서 전주이씨
서흥군(西興君)과 그 자손의 묘역을 지난다.
서흥군은 연산군을 몰아내고(反正) 왕위에 오른 이조11대 중종(中宗)과 홍(洪)숙의
사이에서 태어난 제2왕자 해안군(海安君)의 차남이다.
관상 조경수 농원(효자농원) 한가운데를 편안하게 걷는 둘레길은 원효봉 들머리를
지나 효자동공설묘지 앞까지 이어진 후 효자길 구간으로 바뀐다.
농원주인의 배려가 돋보이는 길인데 국내 최대라는 내시묘역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위치에 몇 기의 내시묘, 누구의 무덤이 있는지 구간 이름 '내시묘역길' 을 지을
때 확인했는가.
게다가 중국 북송의 동파 소식(東坡蘇軾)의 글이라는 '群居不倚 獨立不懼'(군거불의
독립불구)가 왜 내시묘역길에 등장하는가.
그는 대나무를 특히 좋아했단다.
"떼로 있어도 남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서있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 대나무를
예찬한 글일 터인데 궁중에서 갖은 곡예를 다하는 내시들에 빗대다니.
과연 "군신의 예를 목숨처럼 여기며 왕을 그림자처럼 보좌한" 내시들인가.
고려때의 내시(內侍)는 근시(近侍) 및 숙위(宿衛)의 일을 담당한 관원이었으나 이조
때는 거세(去勢)된 남자 중 궁중에서 임금을 시중들며 잡무를 보는 자를 일컬었다.
내시의 이미지에 먹칠한 효시(嚆矢)는 중국 후한(後漢/25~220)의 12대 영제(孝靈
皇帝 劉宏/재위168~189)때 '십상시의 난'을 일으킨(189년) 10명의 내시일 것이다.
우리나라라 해서 다를 것 있는가.
충간(忠諫)하다가 연산군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상선(尙膳) 김처선(金處善/?~
1505)이 있기는 하지만.
이조의 내시는 중국과 달리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일이 가능했다.
고환을 제거했을 뿐 음경이 있으므로 성(性)생활도 가능했지만 거세로 인하여 대를
이을 수 없기 때문에 양자를 들였다.
비록 부정적인 이미지라 해도 왕의 최측근이라는 호기(好機)를 십분 활용해 부러울
것 없는 영화를 누리므로 결혼도 양자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간에 핏줄(後嗣)이 없는 내시의 사후는 생전과 달리 처연할 수 밖에 없다.
무덤도 돌볼 자손이 없거나 있다 해도 내시의 후손임을 숨기려 하기 때문에 도성 밖
(근교)에 자기네끼리 절로 집단화 되었다.
양주땅(현 도봉구 창동 산202 -1 외, 노원구 월계동 산8 -3 외) 초안산(楚安山)이다.
사적제440호로 지정된 '초안산 분묘군'(墳墓群)에 내시의 묘가 특히 많다는 것인데
진관동, 효자동 지역 둘레길에 국내 최대의 내시묘가 있다니?
둘레길에서 내가 확인한 내시의 묘는 기자촌지역(구름정원길)의 종3품 상약 신공의
비석이 유일한데 다른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자기네(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가 세운 위 묘역 안내판에도 "신공 묘역과 같은 내시
묘역은 초안산 분묘군과 은평구 이말산 일대 등에서 일부 확인되고 있다"고 했거늘.
이말산은 진관근린공원이며 그 쪽은 둘레길 역내가 아니지 않은가.
내시 묘가 전무한 내시 묘역길, 마실이 사라진지 오래인 마실길 등 황당하지 않은가.
최악의 구간이 가장 걷기 좋은 구간으로 거듭났으나
11번째 구간인 효자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효자 박태성의 정려비가 있다 해서 효자동이며 효자길로 명명한 구간인데 대부분이
북산산로(39번지방도)를 따랐던 효자길의 대부분이 산속으로 들어가버린 것.
효자리 입구(효자길 시점)에서 도로를 따라 박태성 정려비 앞으로 갔던 초기와 달리
도로를 잠시 걷다가 산으로 들어간다.
아내의 항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듯 했다.
사기막골 구간 외에는 전부 도로라고 소개했는데 전혀 딴판이므로 속는 기분이었겠
지만 실은 나도 당황스러웠다.
거리도 2.9km에서 3.3km로 늘어났다.
힘겹고 지쳐갈 때는 1리가 10리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朝鮮孝子朴公泰星旌閭之碑'(조선효자박공태성정려지비)
산으로 들어간 둘레길이 북한산로 도로변을 스쳐서 다시 산으로 들어가는데 제청말
(자연마을) 입구 도로변에 있는 오석비다.
초등학교 교과서(1990년판)에 실리기도 한 이조 후기의 효자 박태성(1679~175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종 30년(1893)에 세웠다는 비(碑)다.
그의 효행이란 시묘살이(侍墓)를 했을 뿐 아니라 고양땅에서 북한산 기슭의 부친(朴
世傑) 묘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는 것.
이에 감동먹은 인왕산 호랑이가 무악재에서 매일 아침 그를 업어 날랐고.
우의와 의리로 뭉쳐진 둘은 같이 늙어갔고 박태성 곁에 호랑이도 묻혔단다.
고양시 향토문화재제35호가 된 '박효자와 호랑이 묘' 이야기다.
한데, 정려비 옆에서 박효자를 비행기 태우는 글, 그림판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고양땅에서 제청말에 가는데 왜 무악재(毋岳峴)를 넘었는가.
무악재는 인왕산(仁王山)과 안산(鞍山) 사이로 난 험한(당시) 재다.
한양천도 이래 의주대로 상의 서울 서쪽관문으로 도성과 고양의 경계였으며 도성에
입성하기 전, 마지막 1박하는 곳이 고양군 은평면 홍제원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집이 홍제리였다 해도 무악재 북서쪽이기 때문에 넘을 일이 없다.
그의 거주지를 고양땅에서 도성으로 바꾸면 간단히 해결되지만.
아내에게 거짓말쟁이가 되기는 했으나 도로에서 산길로 바뀐 것은 바람직한 변화다.
정려비에서 굿집 국사당, 밤골공원지킴터 ~ 사기막골 입구 산길도 적잖이 변했다.
군부대철조망을 따라 백운대 등산로 갈림길을 지나면 창릉천이 흐른다.
한강을 목표로 삼각산 백운대에서 발원해 사기막골을 거쳐가는 한강의 지천이다.
삼각산의 동쪽이며 전면인 내 동네(우이동)와 정 반대로 서쪽이며 후면인 이곳에서
오르는 삼각봉길은 숨은벽이 좌우 교통정리를 한다.
창릉천변에서 캔버스를 요리조리 살피고 있는 앞치마 두른 남자.
숨은벽 뒤 삼각산의 뒷모습(?) 담는 작업을 마친 화가?
저 사람도 내가 걸을 때 구질구질한 세상사로부터 멀어지듯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은 혼탁한 세상사를 잊을까.
내가 걷기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오직 두 다리의 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며 세상
사를 잊는 것은 단지 부차적 효과일 뿐이지만.
둘레길은 군부대를 뒤로 하고 사기막골삼거리 도로(39번북한산로)로 내려선다.
마지막 구간 '충의길'은 도로 건너편 노고산록에 길게 자리한 서울시 각구의 예비군
훈련장들을 왼쪽에 짝하고 걷는다.
사기막골삼거리 ~ 솔고개 ~ 교현 우이령길 입구에서 마감하는 2.7km다.
많이 지쳐가던 아내는 이 설명에 자신감을 되찾는 듯 했다.
그러나 잠시였을 뿐, 아내의 낙담은 곁에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내가 설명한 충의길은 이미 아무도 걷기를 원치 않는 고약한 추억의 구간이 되었고
종전 구간의 2.5분의 1일이 넘는(1.2km가 늘어난) 100% 산길로 변했기 때문이다.
늘어나기는 하였으나 최악의 구간이 가장 걷기 좋은 구간으로 거듭났으므로 열렬히
환영하며 둘레길(북한산)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해야 할 새 길이다.
그럼에도 나는 당황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바람나게 오르내릴 길이지만 아내와 동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계점에 도달한 늙은 아내가 이 산길을 걸어주기 바라는 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아내가 새 길을 포기하고 옛길(도로)을 고집한다 해도 따를 수 밖에 없는 나.
의도적으로 속인 것이 아닐 뿐 더러 나도 몰랐던 새 길이지만 리더격인 나는 아내의
눈치만 살필 뿐 유구무언에 속수무책인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아내는 하도 기가 막혀 말을 잊어버렸나 입을 닫아버렸다.
충의길 새 이정표를 주시하던 아내가 말 없이 창릉천 다리를 건넜다.
3.9km 산길을 택했음을 의미한다.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는 긴 계단과 출렁다리들을 힘겹게 걷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충의길전망대에서는 숨은벽 뒤로 인수봉과 백운대, 염초봉이 와이드 스크린처럼 두
눈에 꽉 차게 다가오건만 여전히 말도 표정도 없는 아내.
어떤 감흥도 일지 않는가 표현할 기력이 없는가.
충의길은 '북한산굿당' 옆까지 된비알을 내려왔다가 다시 상장능선으로 오른다.
솔고개 ~ 상장봉 ~ 쇠귀고개(牛耳嶺) ~도봉산의 한북정맥 또는 상장봉 ~ 육모정 ~
영봉 ~ 백운대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 끝이다.
이 능선은 한북정맥종주자들 또는 상장봉을 고집하는 산객들이 타기는 해도 금지된
길인데 둘레길이 이 능선길 들날머리에 편승하고 있다 할까.
고양과 양주의 경계인 솔고개로 내려가서 잠시 도로(북한산로) 따라 교현 우이령길
입구로 가는 일만 남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오를 산길이 더 남았더라면 어쩌면 골인 직전에 쓰러지는 마라톤 주자처럼 막판에
포기하는 매우 유감스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