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령관 내외분께서 사과 몇 짝을 싣고 서빙고 분실에서 수고하는 직원들을 격려하러 갔어 요... 크라운 호텔을 지날 즈음 무전기에서 연락이 왔어요. 보안사령부로 전화 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차를 세우고 전화를 해보니 `전경환청와대경호계장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이 육본벙커로 들어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서빙고 분실에 도착하자 마자 보안사 상황실로 연락해 전방상황 을 체크하라고 지시, 전혀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받자 다시 청와대 경호실 로 전화를 건다.
그러나 기다리라고 한 뒤 5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고 전경 환과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이 순간 `청와대에 무슨일이 생겼다'고 중얼거리시더군요 손비서관의 증언은 계속된다.
이후 전두환은 육본 지하벙커로 곧바로 가서 군수뇌부와 앉 아있는 김재규를 본 뒤 슬쩍 빠져 나온다.
박대통령과 관계되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뒤따라 나온 변규수 육본보안 부대장에게 경호병력을 붙여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으나 지금 당장은 어렵다고 하자 `내가 이곳을 빠져 나간 사실을 비 밀로 해주시오'라고 당부하고 전속력으로 보안사령부로 돌아갔습니다" 그 시점에서 박대통령의 살해 사실은 보안사령부에 체크된다.
`김계원비서실장 이 누군가를 업고 와 국군서울지방병원의 대통령 전용병실에 눕혔다'는 위 병의 보고가 보안사 당직사령이던 리상연 감찰실장(후일 안기부장 역임)을 통해"궁정동 안가에서 박대통령이 피격됐다"는 사실이 확인 된 것이다.
이에 김재규를 의심한 전두환은 곧바로 대공수사관 7~8명을 무장시켜 김 재규와 국무위원들이 모여있는 국방부 장관실로 직행했다.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살해범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정승화육참총장은 국방장관 옆방으 로 전두환을 불러 사실을 알린 뒤 체포를 명령했고, 김재규는 79년 10월27 일 새벽 0시 20분께 국방부에서 김진기헌병감, 보안사 오일낭중령(대통령경 호처장 역임)에게 붙잡혀 무장해제됐다.
체포된 김재규는 보안사 요원들에 의해 곧바로 세종로 분실을 거쳐 서빙고 분실로 압송된다.
정치군인 전두환이 운명의 밤 10.26에 이처럼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또 어떤 알지 못할 궤적을 그렸을까. 그러나 10.26이후 대통령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을 권력의 핵심 부에 등장시킨 단초는 이미 박정희 유고전에 마련돼 있었다.
김이 체포.압송되는 순간, 국방부의 심야 비상국무회의에선 최규하국무총 리를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인준하고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육군참모총장,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에 전두환보안사령관이 임명됐다.
이어 발표된 계엄포고령 제5호는 검찰.군검찰.중앙정보부.경찰.헌병.보안사 등 국내 모든 정보수사기 관의 업무를 조정.감독하기 위해 계엄사 내에 합동수사본부를 설치.운용한다 "고 명시했다.
김재규사건 수사만을 위한 합수부라기보단 무소불위의 거대권력이 탄생한 것이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의 리더로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앉은 전두환이 수사권과 함께 보안사.정보부.경찰.헌병의 정보채널을 장악함으로써 대통령유 고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카드를 한손에 쥐게 된 순간이었다.
이처럼 보안사가 비상계엄하에서 모든 권한을 쥘 수 있게 한 것은 박정희 생전 국가 비상사태 발생시 보안사가 자동적으로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 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대통령령을 근거로 한 것이다.
육군본부의 비상사태 조치계획인 충무계획의 합수본부를 둘 수 있다는 단 한 줄의 근거에 기초한 것이었다.
79년 여름 합수부의 조직을 기안토록 법무참모(소령)에게 지시했던 전두환은 이미 10.26이전 부마항쟁이 터지자 부산에 내려가 합동수사단(단장.권정달부산보안부대장)을 설치해 실험을 해 본 터였다.
10월27일새벽 전두환은 보안사로 오석근 검찰총장, 윤익균 정보1부장, 전 재덕 2차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 수사기관장들을 불러 합동수사본부 첫회 의를 열었다.
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서거를 설명하고 살해범은 김재규라고 말한 뒤 일사천리로 후속조치를 밟아 나간다(김충식 저 `남산 의 부장들II'). 힘이 쏠린 합수부에 권력지향형 군인 전두환이 본부장을 맡으면서 80년 광주의 비극은 싹트기 시작한다.
감독관실.본부분실.기획조정실등 3실, 안전 처.정보처.총무처 등 3처, 1수사단으로 중앙조직이 구성돼 있던 합수부의 곳 곳에는 하나회와 보안사 인맥이 여기저기에 박혀 권력찬탈의 선봉에 서게 된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대령, 인사처장 허삼수대령, 수사과장 리학봉 중령등이 포진해 있었다.
여기에 비호세력으로 김진영수경사 33경비단장, 장 세동30단장 등이 합세해 10.26부터 12.12까지 권력공백기간동안 전두환의 집 권을 준비한다.
이들 친위 5인방에 힘입어 12.12로 사실상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은 광주 학살로 쿠데타를 완성하게 된다.
첫댓글 또 다시 암흑으로 가는 길.....
전두환이 정권때 군대생활 한사람으로서 참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시절에 부산대학교 사복조로 근무했읍니다. 죄송합니다..
서빙고동 육본아파트에 있었는데 그당시에 엄청 살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