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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죽어서 별이 되고 신화가 된 이중섭.
거주지에서 공연하는'그리운 중섭의 나라'를 관람하며 오늘의 투어를 시작합니다.
이중섭은 1916년에 평남 평원군 조운면 성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사과를 주면 그림을 먼저 그린 후에 먹을만큼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오산고등보통학교와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한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했으나 1주일 만에 사직을 하게 됩니다. 그림만 그리던 이중섭에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던 거지요. 학교를 그만 두고는 닭을 기르며 닭 그림에 열중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구상의 시집의 표지그림을 그려줬는데 시의 내용이 사상이 불온하다는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문초를 당하게 됩니다. 그 당시 북한에서는 작품활동을 하는데 자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즈음에 첫 아들이 디프테리아로 사망하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는데 이중섭은 아들의 관 속에 천도복숭아 그림을 넣고 묻어줍니다. 나중에 구상 선생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도 천도복숭아를 그려다 주며 이 복숭아를 먹고 나으라고 하였다는데, 얼마나 정이 많고 순수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일화지요.
구상 선생은 장수하셨는데, 이중섭이 그려준 천도복숭아를 먹고 오래사는 것 같다고 하였답니다.
1951년 1월에 제주로 피난 온 이중섭 가족은 화순항에 도착했습니다. 서귀포를 향하여 걷는 동안 눈발이 세차게 불어 닥치면 농가의 외양간에서 눈보라를 피하며 서귀포로 왔습니다. 이때의 기억은 제주의 첫인상과 더불어 ‘피난민의 첫눈’이라는 작품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서귀포로 와서 아내와 아들 둘을 데리고 기거할 집을 구하려 다니다가, 그 당시 이장인 송태주를 만나 그의 집에 기거하게 됩니다. 이곳을 솔동산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소나무가 많이 자라는 언덕배기라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중섭 가족은 한 평이 조금 넘는 작은방에 살면서도, 마당에 나오면 섶섬이 보이는 푸른 바다와 포근한 날씨, 서귀포 사람들의 따스한 정에 서귀포에서의 생활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이남덕여사는 회상합니다.
그 당시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이었으나 특히 피난민이었던 이중섭에게는 식량문제가 가장 큰 걱정이었죠. 배급되는 쌀과 고구마로는 네 식구가 먹기에는 늘 부족했습니다.
매일 자구리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 아이들이 발가벗고 낚시를 하는 모습이나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케치를 하던 이중섭은 게를 잡아다가 식량으로 대신하게 됩니다.
자구리해안은 서귀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제게도 어릴 적 추억이 숨 쉬는 곳입니다. 해녀들이 구워주는 미역귀를 받아먹고 보말을 잡고, 여름날에는 미역을 감던 어린 날의 놀이터였죠. 이중섭의 그림에 발가벗은 아이들과 게가 어우러져 노는 모습이 나오지만, 그때만 해도 남자아이들은 웬만큼 자랄 때까지 고추를 내놓고 헤엄치고 바위 위에 드러누워 해바라기를 했었습니다. 제가 십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자구리에서 천재화가를 만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서귀포 생활은 이중섭의 작품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거기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한 유토피아를 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게에게 미안해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게를 그린다고 한 순수한 동심의 소유자 이중섭. 이남덕여사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백만엔을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줘 버리고 자신은 남에게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이중섭이었습니다. 이런 성격은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던 이중섭이 초상화를 그려준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서귀포 시절에 초상화를 네 점 그렸는데, 그 중 3점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아들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거절 못하고 증명사진을 마당에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그려 주었는데, 자손들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고마움을 보답하고자 집주인의 초상화는 마루에 앉은 모습을 직접 보면서 그려서 자신의 사인까지 남겼는데 지금은 소실되고 없습니다.
1951년 12월에 육지로 나오라는 친구들의 권유에, 11개월 동안 살았던 서귀포를 떠나게 됩니다. 부산으로 간 이중섭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범일동에 방 한칸을 얻어 살게됩니다. 이즈음에 부인 이남덕여사가 건강이 악화되어 걱정을 하던 차에 일본에서 장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받고는 고생하는 가족을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보내게 되죠. 그 후에 가족을 만나러 일본에 가서 2주일을 지내고 돌아와서는 다시는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구상은 이중섭의 창작열에 대해 이렇게 회상합니다. "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자집 골방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포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뭇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와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55년도에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 때 부부의 애정을 표현한 은지화가 춘화라하여 당국에 의해서 철거당하게 되자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전시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림은 팔아도 돈을 받지 못하여 어려웠고,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이중섭은 결국 병이 나게 됩니다.
이즈음에 은지화 3점이 뉴욕현대미술관에 영구 보존키로 결정되자 “내 그림이 비행기 타게 됐네.” 라고 말했답니다. 은지화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정작 자신은 가족을 만나러 가지 못하고 있으니 그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가족에 대한 깊은 그리움으로 잠시 이상증세까지 보인 이중섭은 인형을 놓고 죽어라 죽어라고 돌멩이로 내리쳤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니 ‘그리운 가족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죽어버리면 그리움도 사라질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처연한지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이중섭은 턱이 길어서 아고리
이남덕여사는 발가락이 예뻐서 아스파라가스라는 애칭을 부르며,
현해탄을 오고간 숱한 편지글은
'마음으로 부터 당신의 남덕'
'진심으로 당신의 남덕'이라 끝을 맺습니다.
그를 사랑했던, 그가 사랑했던 한 여인의 순애보를 읽으면서
우리의 눈시울이 붉어짐을 어쩌지 못합니다.
홀로 남은 이중섭의 그리움은 더욱 사무치고 병은 깊어져 40세 되던 해인 1956년 9월 6일,
이 세상을 하직하지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시체실에 3일간 안치되었다가, 뒤늦게 찾아 온 친구들이 장례를 치르고 화장된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른 일부는 일본의 부인에게 전해져 그 집 뜰에 모셔졌습니다.
'돈은 편리한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오. 중요한 건 참 인간성의 일치요.
비록 가난하더라도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부부의 사랑, 그것이오.'라고 한 이중섭의 말에서, 참의미의 행복이란 무엇인가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 5. 5일 어린이날까지 매주 일요일 이중섭거리(거주지에서)
공연시간 : 11시 13시 14시 16시 4회 공연
한 회당 약 15분
놀러나온 자라와 눈인사~
동백나무에 노란장미도 피고, 빨간나리도 피었어요~
앞 집에 사시는 분의 작품이랍니다^^
오늘도 기념 샷~
사진을 원하시는 분은 댓글에다 이메일주소 남겨주세요
꽃바람 꽃바람 마을마다 훈훈히 불어오라~ 우리 가곡 '꽃구름 속에'를 소프라노가 부릅니다.
옥구슬 구르듯한 청아한 목소리에 모두 넋을 놓고~~
아름다운 노래에 반한 노부부는 사인도 받았답니다.
오늘 작가의 산책길을 걸으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유토피아는 보이는 것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오늘 이 길을 걸으면서
작가의 삶과 그의 예술혼을 만나고
아름다운 노래에 귀기울이고
맑게 빛나는 자연속에서
행복을 느끼셨다면
그게 곧 유토피아가 아닐까요.
만나서 반가웠고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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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창작스튜디오에 들리셨던 분 정말 갔네요. 참여하고 싶다고 하시더니 기대기대^^
잘 보고 읽고 갑니다 다음 주엔 어떤 내용이
저 노부부?
아르헨티나에서 귀국한지 일 년 되셨다고 하더라구요.
이야기가 길어졌죠~
공연은 서귀포의 생활이 주내용이었지만
그걸 이야기하려다보니...^^
멋진 하루를 보내셨군요.
감동입니다. 이렇게 정성스런 글과 사진을 올려주시다니.
감사 감사합니다. ^^
읽어주고 공감해주니 저도 감사하지요~^^
사진 nayeon5162@naver.com 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보내드릴게요^^
계절이 바뀌면 이 길에서 다시 만나요~ Na Yeon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