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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세이난대규모공원
밤내 내린 가랑비가 츠야도를 떠나는 아침에도 계속되고 있는 6시 30분 경.
아침의 다리 통증이 포기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게 할 만큼 더욱 심해가며 비에 젖어
있기 때문에 주저앉을 수도 없는 길로 나섬으로서 오늘도 3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침나절에는 다리의 통증과 싸우고 저녁무렵과 산속에서는 모기와 전쟁을 하다 보면
정작 메인게임인 걷기는 힘들 겨를이 없으며 아무 일도 아니다.
고마웠던 타카하마 민숙을 지나 아리이강(有井川橋)을 건넌 후 카미카와구치(上川口/
어항) 입구, 칸온지에서 2km쯤에 휴게소가 있다 해서 얼마나 다행이라 생각되었는지.
예약 없이 누구나 무료숙박할 수 있는(とび込み/土佐東寺庵) 츠야도?
그러나, 안내판만 있을 뿐 실체는 보이지 않아 실망했지만 민숙 집단지를 지나서 바로
있는 코야(大方)에서 다리를 충분히 달랠 수 있었다.
비가 그치고 다리도 웬만큼 진정되어 토사만 해변을 걷는 재미가 일기 시작했다.
바다거북(海龜)의 산란지인 모래해변(砂浜)과 고래(鯨)의 서식지로 이름난 아름다운
해안이라는 우키부치(浮鞭).
이른 아침부터 파도를 타고 있는 우키쓰해수욕장(浮津).
이쿠미해안의 서핑 비치에서 보고 왔는데 벌써 10일 전의 일이므로 한기가 심하련만.
가을 바다에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저러고 있다면 못말릴 마니아들일 것이다.
곧, 토사세이난(土佐西南)대규모공원(大方)이다.
명승 이리노마쓰바라(入り野松原)를 중심으로 해안선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고치현 서남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縣)최대의 도시공원으로 1972년(昭和47년)에
건설계획이 확정되었고 11년 만인1983년에 개원되어 현재에 이른 공원이란다.
공원은 시만토((四万十), 쿠로시오(黑潮/大方), 이미 지나온 사가(佐賀) 등 3지역으로
분산되어 있는데 여기는 오가타(쿠로시오) 지역이다.
당초의 계획은 보다 더 대규모였으나 오일 쇼크와 버블(bubble) 붕괴 등 사회 상황의
변화뿐 아니라 인구의 도시 집중,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도래, 환경 보호 의식의 고양
등 국민의 가치관의 다양화에 따라 공원 건설을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변했단다.
축소와 변경이 불가피했음을 의미한다.
헨로미치는 56번국도를 떠나서 오가타 공원으로 들어간다.
곧 공원을 거쳐 토사만으로 흘러드는 미나토강(湊川/千鳥ヶ浜橋)을 건넌다.
강둑 길 따라 얼마쯤 가서 다른 줄기의 그 강을 다시 건너면(松原大橋) 공원의 이리노
마쓰바라 캠프장이다.
이 일대는 헷갈리기 십상인 헨로미치다.
대규모공원 경내에 너른 농지(田)기 있는데다 안내표지도 부실하기 때문이다.
지도마저도 몇갈래로 나뉘어 있어 종잡을 수 없는 지역이다.
호텔-식당인 네스트 웨스트 가든토사(Nest West Garden土佐)에 들어가 안내받았다.
실내외에서 공사가 진행중이라 어수선한데도 시야가 트인 언덕으로 올라가서 지도와
일일이 대조하며 안내하는 젊은 여직원의 친절.
아무리 무심한 한국의 늙은 나그네라 한들 감동 먹지 않을 수 있는가.
가족 단위인 듯 몇몇씩 모여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구획정리가 잘 된 밭들.
아마, 고치현의 주산물인 생강과 파 종류를 파종중이겠거니 하고 물었더니 이 지역(大
方)의 특산물인 락교(ラッキョウ/辣韮/염교)를 심는 중이란다.
락교는 횟집에서 회에 수반되는 찬이다.
마늘과 흡사하여 가공된 마늘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종류라니.
늙은이의 무지는 회를 즐기지 않기 때문의 무관심 탓일 것이다.
간밤에 비가 알맞게 내렸고 일하기 좋도록 청명하고 온난한 날씨라 그런가 모습들이
노동이 아니고 리크리에이션 하는 듯이 편하고 즐겁게 보였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도 무수히 보며 걸었지만 단위 차가 워낙 커서 비교의 여지가
없었는데 우리와 대동하기 때문인지 정서적 동질감이 느껴졌다.
친근감이 들고 말을 나누고 싶었는데 일본땅에서 최초로 갖은 긍정적 감정이다.
락교밭과 인접한 골프장에서는 선남선녀들이 라운딩 중이다.
대규모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종 경기장은 물론 공원 역내에는 서핑을 즐길 수
있는 해변과 락교밭까지 있는 광장(廣長)한 공원이다.
공원을 걷는 헨로미치만도 4km가 넘는다.
한일 양국의 공통점은 행정구역 개편과 개명의 명수?
헨로미치는 공원에서 북쪽길과 남쪽길로 나뉜다.
남쪽길은 축구장을 끝으로 공원을 마감하고 카키세강(蛎瀬橋)을 건넌 후 42번현도가
되어 격하게 꺾이는 고갯마루의 휴게소를 지난다.
휴게소 정자 옆에는 '觀海觀波'(관해관파) 석비가 서있다.
태평양의 '명품 조망대' 라는 뜻일 텐데 이름과 달리 실망스러운 위치다.
이 길은 토사만 해안을 따르다가 타노우라(田野浦) 마을에서 다시 두 길로 나뉨으로서
3개의 헨로미치가 되는데 나는 중간 도로를 택했다.
시만토대교(四万十大橋)를 건너는 길이다.
역시 하기모리의 권고를 따른 것.
그의 조언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며 매번 도움되었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미우라소학교(三浦小學校)를 지나면 행정구역이 하타군(幡多郡 黒潮町/舊大方)에서
시만토시(四万十市)로 바뀐다.
직전 영장(37번) 이와모토지의 소재지인 타카오카군(高岡郡) 시만토초와 동명이다.
2005년의 행정구역 개편때 나카무라시(中村市)와 다른 일부 지역(幡多郡西土佐村)을
합병해 시만토시라 했다는데 단 하나의 타운(쿠로시오초) 양쪽 지명이 같은 이름이다.
말단 마을 이름이 아니고 같은 현내(縣內)의 시.군급(市郡級) 지명이라면 시비가 있을
법 한데도 유지되고(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국 늙은이가 시비할 일이 아니지만 행정구역 개편과 지명의 개명이 일본인의 특기?
1910년에 조선을 강제 병합한 그들은 1914년 조선8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고유의
지명들을 한자화의 명분으로 제멋대로 바꿔버렸다.
좋은 것은 살리고 나쁜 것은 보완하는(取長補短)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은 택하고 좋은
것은 버리는(取短棄長) 짓을 감행한 것.
수탈의 효율을 높이고 지명에 담겨 내려오는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서 그랬다.
개편, 개명은 우리나라도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
왕조가 바뀌거나 변이 일어나면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것이 지역개편과 개명이었다.
광복 후에는 일제의 잔재 제거와 복원이라는 구실로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
개명에 소극적인 민심을 끌어들이는 단골 메뉴가 일제와 전혀 관계 없는 지명들까지
그들의 소행으로 돌리는 것.
경기도 의왕시는 한자 이름 '儀旺'을 '義王'으로 바꿨다.
의왕시의 전신은 광주군 의곡면(義谷)과 왕륜면(旺倫)이다.
일제의 행정구역 통합정책으로 각 첫자를 취하여 의왕면이 될 때 '義王'이 아닌 '儀旺'
으로 했다는 것이 개명의 이유다.
의도적으로 일본(日)의 왕(王)을 뜻하는 '旺'으로 개악했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일제의 잔재를 없애고 옛 지명을 되찾았다나.
그러나 일제가 통합책을 쓴 1914년보다 오래 전(李朝)부터 의곡은'儀谷'과'義谷'으로,
왕륜은 '旺倫'으로 기록했다.
그러니까 일제의 획책이 아닌 것이 분명하며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내 집은 비록 작으나 북한산국립공원이라는 거대하고 미려한 정원을 가지고 있다.
정원이란 무시로 거닐 수 있는 집의 일부분인데 옆과 뒤에 자리한 북한산과 도봉산이
바로 내 옆 정원과 뒷 정원에 다름 아니다.
반백년 넘게 무시로 거닐며 살고 있으니까.
옆정원인 북한산의 본명은 '三角山'이며 일명 북한산이라고도 했다.
북한산(北漢山)이란 한수(漢江) 북쪽의 산이라는 의미로.
이 삼각산이 일제시대에 북한산으로 고착되었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이마니시류(今西龍)의 '북한산유적보고서'에 의해서.
그는 1925년 ~ 1932년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회원으로 한국사의 왜곡 말살을
주도했던 일본인 동양사학자지만 삼각산을 북한산으로 바꾼 것이 의도적이었을까.
그들도 명분도 실익도 없는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설영 의도했다 해도 광복 후 근40년 세월에 한국 사계의 전문가들은 뭘 하고 있었기에
1983년 도봉산을 묶어서 국립공원으로 지정할 때 '북한산국립공원'이라 했는가.
반백년이 지난 후에 '일제의 잔재 청소와 본명 찾기 운동'운운하는 자들의 후안무치에
시민의 반응이 냉소적인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반일감정의 악용이다.
일제(日帝)로 부터 광복하여 고희를 맞았건만 언제까지 이같이 친일잔재 타령만 반복
하는 미숙아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인지.
행정구역 개편과 지명의 개명이 민주주의 체제라는 현대에는 이해득실의 계산에 따라
더욱 빈번해 가고 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가들에게는 사활이 걸려있기 때문일 것이지만 해당 주민이
부화뇌동하거나 강건너 불구경인 것이 더욱 한심스럽다.
이에 반해서 내가 걸은 서양의 여러 지역에서는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미국 땅이 된 아메리카대륙 스페인령들의 지명이 발음이 다를 뿐 스펠링(spelling) 한
자도 바뀌지 않았다.
오랜 세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은 나라들과 중.근세에 유럽 열강의 식민 통치를 받은
나라들의 지명 또한 온전하게 보존되어 온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알베르게는 부상자 병동에 다름 아니건만
오후 1시가 지난 때, 시만토강 직전의 편의점(スリ-エフ中村竹島店)에서 김밥을 사서
먹고 있을 때 최근에 자꾸 만나게 되는 69세남이 왔다.
어제 늦은 오후, 타코점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아침나절에
마쓰바라(松原)대교 지역에서 다리 통증과 싸우고 있을 때 쏜살같이 앞질러 갔는데.
내 일본인 담임선생이었던 쿠로타(黑田)를 닮은 이미지라 그런지 호감이 가지 않으며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일본인인데.
달아나듯 앞서가던 그가 돌연 사라졌는데 아마 공원지역에서 알바를 했던 듯.
길에 대해서는 천부의(?) 직관력을 가진 늙은이를 몰라보고 부담이 될까봐 달아나듯
한 그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발바닥이 엉망이 되어 걷지 못하겠는지 한낮인데도 남은 시간을 포기하겠단다.
그 정도는 나도 1차 과정을 이미 겪었으며 까미노에서는 수없이 반복했다.
심할 때는 붕대로 칭칭 감고 걸어야 하며 이것은 순례자의 일상인데 이 정도 때문에
포기한다?
알베르게(albergue/까미노의 숙소/refuge)는 부상자 병동에 다름 아니건만.
시만토대교(四万十川)를 건넜다.
토사만 하구에 가장 인접한 다리다.
시만토강은 고치현 서부의 강으로 시코쿠에서 최장(196km/2번째 요시노강은 194km)
의 강이며 일본의 '3대 청류'(岐阜縣 長良川, 静岡縣 柿田川 등과 함께) 중 하나란다.
파란 수면에 하얀 파문을 남기며 한가로이 다가오고 있는 유람선(?).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저 강까지도 한 순간에 잔혹한 악귀(쓰나미)로 돌변한다는 것이
전혀 믿기지 않을 만큼 잔잔한 태평양 하구를 건넜다.
기독교성서에 의하면(구약창세기)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하느님이 창조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산천초목인데 왜 선하지 못하고 악독한가.
창조된 삼라만상은 표현 그대로 오직 좋았을 것이다.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니고 문제는 그것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아마 사람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자연이 돌발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엄청난 재앙이 아닐까.
헨로미치는 전장 687m로 꽤 긴 시만토대교를 통해 강을 건넌 후 강변의 321번국도를
따라 마사키(間崎)까지 남하한다.
야쓰카(八束)소학교와 시만토 컨트리클럽을 지나서.
인도가 조성되어 있어 걷기 편한 도로를 따르다 노변의 찻집을 겸한 식당(山八) 앞의
안내문이 반가웠다.
"헨로상이어, 물 드립니다.(お遍路さんお水差し出します)"
꽤 더운 한낮이라 들어가서 시원한 얼음물로 갈증을 풀고 걷기를 이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津藏淵버스정류장 앞에서) 다른 헨로미치와 합류한다.
타노우라에서 나뉜 후 토사만 하구에서 시만토강을 도강하여 온 남쪽길이다.
완만한 오름인 321번국도는 지금껏 걸어온 헨로미치에서 가장 길며(시코쿠헨로최장)
시만토시와 토사시미즈시(土佐清水市)를 가르는 1.620m터널(新伊豆田)을 통과한다.
38번콩고후쿠지(金剛福寺)가 아직도 31.8km나 남았음을 터널입구의 석주(今大師寺)
가 알리고 있다.
터널을 벗어나면 이치노세(土佐清水市 市野瀬) 타운이며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에서
346번 현도와 만난다.
식당(드라이브인水車)이 있고 노숙(露營)도 할 수 있는 헨로휴게소가 있다.
이 곳에서 69세남을 다시 만났다.
오늘은 더 걸을 수 없다며, 시만토대교 저쪽에서 포기한다며 숙소를 예약하던 그.
그는 투명인간인가.
긴 터널이 있는 외길이며 이 구간에서 나를 추월한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더구나 걸을 수 없다던 그가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다니.
차량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시코쿠의 최남단인 콩고후쿠지를 생략했거나 아루키(歩き)헨로상의 신분을 잠시
내려놓았을까.
이 재회가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다.
이부리어항 진베광장 유감
이치노세에 있는 신넨안(番外靈場眞念庵)은 시코쿠헨로미치에서 주목해야 할 곳이다.
여기에서 27.6km가 남은 콩고후쿠지 ~ 39번 엥코지의 헨로미치는 6개의 루트로 되어
있는데 2개의 최단 거리(50.8km와 51.6km)루트는 신넨안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갔던 길 27.6km를 되돌아 와야 한다는 뜻이다.
2.8km전방인 시모노카에(下ノ加江)까지 되돌아 와서 가는 루트는 52.8km되는 길이며
되돌이가 없는 3길은 53.1km, 62.2km와 72.5km 등의 루트다.
영장 길이 막다른 길이기 때문에 되돌아 오는 경우가 몇번 있었으나 수백m~3km미만
이었는데 하룻길을 되걷기는 유일한 구간이다.
나는 이 구간에서도 하기모리가 추천한 1번길(최단거리)을 택하기로 했다.
극구 말린 길은 산길구간이 있으며 걷는 이가 희소하여 헤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위험 부담도 있지만 왕복 중 한쪽을 대중교통편 체험의 기회로 활용하려고.
야숙(夜宿) 리스트에 의하면 여기에서 15.7km전방인 이부리어항(以布利)의 진베광장
(じんべえ廣場)을 숙소로 이용할 수 있다.
남은 시간에 걸어서 도착하려면 밤길이 불가피한 거리다.
이 구간의 복편(復便)을 걷고 왕편(往)에서 버스를 이용하면 일본의 대중교통 체험도
하고 원치 않는 밤길도 피할 수 있으므로 나는 그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밤길은 피했지만 2번 하고 싶지 않은 체험이다.
일본의 교통요금이 비싸다는 정보는 갖고 있으나 15km에 700엔(7.000원)이라니.
단순 비교를 해도(10 :1의 환율적용) 엄청 비싼데 양국의 개인GDP(Gross Domestic
Product/國內總生産)를 감안하면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어림잡아도 한국은 일본의 7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
일본의 버스요금이 정상이라면 대중교통에 관한한 한국은 지상낙원이다.
이부리어항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마을 구판장.
진베광장의 위치를 묻는 나를 위해 일본의 초로남(主人?)은 차고에서 차를 꺼내왔다.
승차를 권하는 것으로 미루어 상거가 꽤 되나 싶었는데 200m쯤에 불과한 거리다.
일본인의 오모테나시는 감동적이지만 그들의 검소한 생활과는 상반되는 차량 의존도.
한국인이 걷기를 철저하게 기피하는 것도 이웃나라 일본의 영향인가.
흉보며 닮아가는가.
진베광장은 이부리어항 지근에 있다.
고치현어협 이부리지소 앞에 있는 정방형 너른 풀밭과 긴 일자 건물.
몇개의 칸막이가 있을 뿐 풀밭쪽 면이 개방되었고 긴 탁자와 벤치들이 놓여 있다.
매월 둘째주 일요일에 갓 잡은 생선과 갓 딴 감귤 등을 파는 광장이란다.
특히 만보(マンボウ/ headfish/개복치)의 직석구이 맛은 일품이라나.
두 개의 벤치를 붙여 만든 목침대가 훌륭했으나 전기가 없는 것이 옥의 티?
전기시설이 되어 있는데도 전원을 차단했는지 모두 먹통이기 때문이다.
어둠에는 이미 익숙해 있으며 주식인 빵은 밥과 달리 칠흑 속에서도 불편없이 먹을 수
있으므로 내게 전기의 역할은 배터리(디카,휴대폰, MP3 등)의 충전인데 어찌한다?
연 이틀의 전기 없는 노숙에 여분의 배터리 마저 소모되었는데.
내 애로를 들은 경내의 ' じんべえ館'((土佐清水市海洋生物硏究施設) 직원이 스위치를
찾느라 애썼으나 허사였다.
그의 헨로상에 대한 오셋타이는 이 정도인지 곧 퇴근해버렸다.
아루키 헨로상에게 숙박소로 장소는 기꺼이 제공하면서도 전기는 왜 노(no)인가?
안전과 절전을 위한 조치?
오모테나시의 다른 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어협사무실을 노크하여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배터리 충전을 도움받았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갸우뚱한 표정을 지은 직원이 대속(代贖)?
그는 내 휴대폰의 충전이 완료될 때까지 퇴근하지 못했으니까.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에 '진베'(じんべえ)라는 명칭에 대해서 물었다.
내력이 있을 듯 해서 였는데 그가 아는 것은 TV(후지?)가 방영한 한 드라마(연속극)의
타이틀이라는 정도.
다시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로
충전도, 저녁식사도 마쳤고 잠자리도 훌륭한 이부리어항의 밤.
밤이 깊어가는데도 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광장과 어항을 배회해야만 했는가.
새롭게 고개 든 헨로미치에 대한 회의(懷疑)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해 겨우 하루가 지난 밤(시코쿠둘째날/9월3일)에 이어 500km를
걸어온 지점에서 또.
포기할 뻔 했던 그 때는 식민통치라는 치욕적 피압제 세대가 순례와 무관한 대일 감정
(메뉴 '시코쿠헨로' 2, 3번글 참조)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민족적 정서 때문이었다면 이번에는 '시코쿠헨로' 라는 순례길 자체에
대한 회의와 부정적인 실체로 인하여 의욕이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다리의 통증 때문에 포기카드를 무수히 만지작거리면서도 순례의 의지만으로 버티어
왔건만.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도 이따금 대체도로(alternativo)가 있다.
다른 널리 알려진 도로들에도 천재지변 또는 개발로 인한 이설, 그밖의 사정으로 대체
또는 한시적 우회도로가 있다.
빼어난 관광로도 있고 택일하도록 자상하게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룻길이나 되는 긴 되돌이길과 무수한 복수 루트, 심지어 1구간에 6개의 기본
루트를 가진 길을 순례길(pilgrimage)이라 할 수 있는가.
순례길이 갖춰야 하는 정형화 된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례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헨로(遍路)'라는 이름의 순례길은 코보대사가 순교(巡敎)한 88개 사찰을 잇는 길인데
코보대사가 길치(癡)였는가.
그래서 6번이나(기록 없음) 순회하며 매번 딴 길을 걸었단 말인가.
어느 루트가 코보대사가 걸은 길인지 모르는 의사(擬似), 유사(類似)의 다(多) 루트는
어느 길도 코보대사의 길이 아니라는 인식에 사로잡히게 한다.
시코쿠헨로미치란 코보대사의 족적을 따라서 걷는 일본의 불교성지길을 의미하건만
이럴 수가?
한 순간에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다 할까.
까미노와의 심각한 비교, 이로 인하여 당장에 까미노로 방향을 틀고 싶은 충동이 위험
수위를 오르내리고 있는 밤.
헨로상의 신분을 버리고 뻬레그리노(peregrino/까미노 순례자)가 되고 싶은 열망에
점화된 밤이었다.
2011년 75일의 여정에서 프랑스 길을 비롯해 5개의 루트, 2.100km가 넘는 길을 걷고
올 때 1회로 족하다고 생각했건만.
고려한 적이 전혀 없던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2번째 순례 여정이 이 밤에 여기 이부리
에서 싹 텄으며 6개월 남짓 후에 결실하게 되었다.
5월4일부터 10월28일까지 6개월(178일)이라는 긴 여정이며 4.000km가 넘는 길이다.
약 830km인 노르떼 길(Camino del Norte/The Northern Way)과 1.000km의 실버 길
(Via de la Plata/The Silver Way/The South-East Way)를 비롯해 7개의 루트.
따라서 이 글도 까미노 여정을 마치고 귀국한 후 다시 이어가게 될 것이다.
비록 회의적이었을 망정, 방향을 틀라는 충동에도 88번 오쿠보지(大窪寺)까지 당초의
계획대로 일주했으니까.
까미노에 소개한(프랑스길 사아군/메뉴'카미노이야기'35번글 참조) 시코쿠헨로.
다시 까미노로 내몬 시코쿠헨로.
묘한 인연의 두 길이다. <6개월 후 계 속>